2007년 4월호

在日 민단, 보조금 삭감 놓고 정부와 파열음

“본국은 우리를 버리고 조총련을 택할 것인가”

  • 이민호 통일일보 서울지국장 doithu@chol.com

    입력2007-04-09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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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단-조총련 ‘화해 소동’ 이후 소원해진 盧 정부와 민단
    • 5·17 회담 주선한 전 단장은 취임 직후 대통령 만났는데…
    • ‘정부 비판하지 않는다’는 민단 불문율 깨질 듯
    • 민단에 줄 돈 다른 단체에 주면 ‘불법행위’
    在日 민단, 보조금 삭감 놓고 정부와 파열음

    노무현 정부와 재일 민단 사이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한 2006년 5·17 민단-조총련 화해 장면. 민단은 5·17 화해를 임의로 주도한 하병옥 단장(왼쪽)을 탄핵했는데 그 후 노무현 정부는 민단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했다. 아래 문서는 정부지원금 축소를 통보한 니가타 총영사관 공문.

    “우리가 무슨 대역죄라도 지었는가. 정부에 반기를 든 대가라면 순순히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그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다.”

    3월8일 서울에서 만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의 핵심간부 A씨는 격노했다. 대체 정부와 민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겉으로 드러난 문제의 발단은 정부가 매년 민단에 지원해온 보조금 지급 축소 결정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지난해 5월17일의 민단-조총련 화해성명 파동, 이른바 ‘5·17 소동’을 둘러싼 정부와 민단 사이의 갈등이 숨어 있다.

    갑작스러운 8억 삭감 통보

    지난 2월2일 민단의 정진(鄭進) 단장은 일본의 48개 도(都)·도(道)·부(府)·현(縣)에 있는 지방 민단장을 도쿄로 소집했다. ‘긴급 전국 단장단 회의’였다. ‘정부 보조금 감축’이라는 단일 안건이 상정됐다. 민단은 이 자리에서 참석자 120명 만장일치로 ‘올해부터 보조금 일부를 직접 집행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1월 초 주일한국대사관은 민단에 구두로 “정부가 지원하는 총보조금 가운데 올해는 20%, 2008년에는 30%를 공관이 관장한다”는 방침을 통지했다. 일본 각지에 있는 총영사관이 민단 지방조직이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심사해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 요지. 정부 당국자는 “집행처가 민단 중앙본부에서 공관으로 변경된 것일 뿐이며, 그것도 총보조금의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날 대사대리로 참석한 김영선 정무공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8월 민단에 대한 지도감사 결과 (회계처리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견됐다. 공관을 통한 직접 지원은 정부가 숙고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 이번 조치로 중앙과 지방 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하던 회의장이 달아올랐다.

    “정부의 그러한 방침은 민단을 경시한 것이다. 결코 용인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민단의 지방조직은 공관의 의향에 좌우되고 말 것이다.”(장총명 중앙민단 상임고문)

    “우리는 5·17이란 중대 문제를 해결했다. 용기와 지혜가 있는 것이다. 대사의 발언은 일방적인 명령이다. 대사관이 민단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린 것에 분통이 터진다.”(신용상 중앙민단 상임고문)

    민단이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민단 활동의 통일성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 공관이 지방민단을 직접 상대하면 중앙민단장이 모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난 60년간 민단은 중앙민단장 주도의 단일지도체제를 유지해왔다. 40만명이 넘는 단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중앙본부라는 컨트롤타워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민단측은 대사관과 정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는 더 큰 ‘폭탄’을 들고 있었다. 2월16일 민단 중앙본부로 주일한국대사관이 2장짜리 문건을 보내왔다. ‘2007년도 재일민단 정부보조금 지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문건에는 올해 보조금 액수와 신청방식, 심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중앙민단을 당황케 한 것은 ‘총액 65억원’이라는 보조금 액수였다.

    처음에는 공관의 행정착오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요구하자 “맞다. 본부(외교부를 지칭)에서 결정한 것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12월 국회는 73억원을 의결했는데 외교부가 65억원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아무 예고도 없이 8억원이 삭감된 이유를 물었으나 대사관측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在日 민단, 보조금 삭감 놓고 정부와 파열음

    이임하는 나종일 주일대사(오른쪽)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정진 중앙민단장. 그러나 나종일 대사 시절 민단과 주일대사관 사이는 껄끄러웠다.

    정책당국이 국회를 통과한 예산을 삭감하고 집행방식을 변경한 것은 1977년 3월 민단 지원금이 제도화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때문에 민단에서는 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무기 삼아 본격적으로 민단 통제에 나섰다고 생각하는 단원이 많아졌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19일 오후 민단 최고위 간부 4명이 부랴부랴 서울로 향했다. ‘3기관장’으로 통칭하는 정진 단장과 김광승(金廣昇) 중앙위의장, 김창식(金昌植) 감찰위원장 그리고 허맹도(許孟道) 수석부단장이 총출동했다. 3기관장이 한꺼번에 서울로 오는 경우는 대통령 면담 같은 중대 일정이 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3기관장과 수석부단장은 나흘을 머물고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출국 직전 김포공항에서 만난 허 부단장은 “누구 하나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하다”고 푸념했다.

    올드커머, 뉴커머, 그리고…

    기자는 정책부처인 외교부와 집행단체인 재외동포재단에 “보조금을 삭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은 역시 “모른다”였다. 외교부는 민감한 사안이니 질의서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질의서를 보내자 2월27일 재외동포영사국 재외동포정책1과 명의로 답변서가 왔다. 답변서의 핵심 내용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할 때는 전년과 같은 수준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그후 이뤄진 민단 지도감사 결과에 따라 지원금을 감축하는 것으로 변경했다’는 것. 역시 지난해 8월의 민단 감사 결과를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2월28일 저녁 기자는 정부의 한 소식통으로부터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내막을 짐작케 하는 제보를 받았다.

    “외교부는 2월7일자로 재외동포재단과 주일한국대사관에 민단 보조금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 그 지침에는 뉴커머(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에 온 교포나 주재원 등) 단체 등 다른 재일동포단체에도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제보가 확실한 것이라면 정부는 큰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민단에 대한 보조금은 국회 외교통상위원회가 심사하고 의결한다. 예산명목은 ‘재일민단 지원’이라는 여섯 글자로 규정돼 있다. 단독심의·처리되는 예산이므로 국회를 통과한 73억원은 오로지 민단을 위해 써야 한다.

    외교부가 지휘감독·재량권을 발휘해 정책집행 부서로서 실제 집행되는 금액을 줄일 수는 있어도, 차액 8억원과 집행금을 다른 단체로 전용(轉用)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은 “민단은 65억원을 합당하게 집행한 다음 8억원을 추가로 신청하면 된다. 정부가 8억원을 다른 단체에 지원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민단말고 어떤 재일동포단체를 지원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재일동포사회의 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 국적자인 ‘재일국민’은 크게 2개 그룹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과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영주권자’ 지위를 부여받았으므로 대를 이어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일본에 살 수 있다. ‘민단계’ 또는 ‘올드커머(Old Comer)’라 불리는 46만명이 바로 이들이다. 또 다른 그룹은 한일 국교회복 후 일본에 건너간 한국 주민등록 소지자다. 뉴커머(New Comer)로 불리는 이들은 11만명 정도인데, 두 그룹은 모두 대한민국 여권을 갖고 있다.

    일본으로 국적을 바꾼 귀화자 32만명과 ‘조총련계’로 불리는 재일조선인 5만여 명은 한국 국적자는 아니지만 한민족 피가 흐르므로 ‘재일동포’의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민단 이외의 재일동포단체라면 조옥제(趙玉濟)씨가 회장인 뉴커머 단체 ‘재일본한국인연합회’와 서만술(徐萬述)씨가 의장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김정부(金政夫)씨가 의장인 ‘재일본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구 한민통의 후신)’을 꼽을 수 있다. 회원수는 민단이 43만명, 재일본한국인연합회가 3000여 명, 조총련이 5만명(일본 공안 통계 근거, 조총련은 10만명으로 주장), 한통련은 400여 명이다.

    “보조금으로 조총련 도와야”

    在日 민단, 보조금 삭감 놓고 정부와 파열음

    2월2일 정부의 보조금 축소 문제로 소집된 민단의 ‘긴급 전국 단장단 회의’. 이 회의에서는 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민단 지원금이 우리 국민이 구성원인 뉴커머 단체로 가는 데 대해선 우려하지 않는다. 민단은 정부보조금이 행여 한통련과 조총련으로 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외교부가 말하는 ‘동포 개념’대로라면 조총련과 한통련도 ‘재일동포단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민단 보조금 파문이 불거진 무렵, 국내 좌파 단체와 조총련·한통련 간의 접촉이 빈번해졌다. 김은진 최고위원과 정연욱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동당 간부들이 1월10~11일 도쿄의 조총련과 한통련 중앙본부를 찾았다. 민노당 일행은 조총련의 서만술 의장과 허종만 책임부의장, 한통련의 정동의 상임고문과 김정부 의장 등과 간담회를 가졌지만 민단 본부에는 들르지 않았다.

    주목할 부분은 민노당 일행이 조총련계 학교를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민노당의 김은진 최고위원은 도쿄조선중고급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처음 왔는데 60년 넘게 일본에서 민족을 지키고 교육을 실시해온 것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 면에서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1월15일자 보도).

    2월 말에는 조총련 간부들이 서울을 찾았다. 조총련의 서충언 국제국장과 조총련계 학교 교사·학생 등 4명이 민노당과 지구촌동포연대(KIN) 등 14개 좌파 성향의 정당·시민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토론회가 열린 2월28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11층 강당은 조총련 학교를 보호하고 한국 정부의 정책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쳐났다. 토론회 말미에 기자가 주최측에 민단 지원금에 대한 견해를 묻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론은 아니지만 민단에 대한 정책과 예산 수립 문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조총련계 학교도 민족재산인 정체성의 뿌리로 인식해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민노당 김은진 최고위원)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의 역할과 사업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부가 민단의 성과를 엄밀히 재평가해야 마땅하다. 정부가 조총련계 학교를 이대로 방치하는 건 재일동포에 대한 유기다.”(KIN 배지원 집행위원)

    이 토론회가 열리기 전인 지난해 10월 말 KIN이 주최한 ‘재외동포 NGO대회’에서는 민단의 정부보조금을 떼어내 조총련 학교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날 KIN의 배덕호 대표는 “앞으로 운동 초점을 재일조선인 인권 문제에 맞추고 싶다. 쓰러져가는 조총련계 학교를 좌시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라고 했다.

    조총련은 북한 정권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다. 국내 일부 단체의 책임자가 ‘민족학교’라고 호평한 학교는 조총련이 직접 관할하고 있다. 한통련 또한 대법원이 1978년과 1989년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그룹이다.

    ‘5·17 사건’ 이후

    반면 민단 강령 1조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준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민단은 지난해 조총련과의 ‘5·17 화해 소동’ 때 ‘수구꼴통세력’ ‘반통일단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조총련과 손잡은 하병옥 당시 단장 일파를 탄핵했다. 이때 제1의 잣대로 제시한 것이 바로 강령 제1조다.

    하병옥 당시 단장은 한통련 출신 측근을 한통련 본부에 보내 조총련과 화합을 도모했다.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민단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략한 채 추진했다. 이 때문에 2기관장조차 5월17일 조총련 중앙본부에 도착한 다음에야 ‘민단-조총련 화해성명’ 행사가 예정돼 있음을 알았다. 또한 하 단장은 북한 노동당의 혁명전사 양성기관인 조선대학교 2기 졸업생인데, 단장선거에 출마하면서 ‘호세(法政)대학 중퇴’라고 학력을 허위 기재한 사실이 드러나 물러났다.

    민단-조총련 화해로 시작했다가 하 단장 퇴임으로 마무리된 5·17 소동을 계기로 민단과 정부 사이에 거리감이 생겨났다고 민단계 동포들은 지적한다. 민단계 동포들은 정부가 통보한 보조금 삭감과 지급방식 변경이 이 사건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 민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진 단장이 당선된 지난해 9월21일 이후 주일한국대사관과 민단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 아닌 한 두 기관 사이의 의사소통은 문서로만 이뤄지고, 부득이한 대화 자리에서도 언행을 조심한다. 민단의 핵심간부인 B씨가 증언한 나종일 전 주일대사와 정진 민단 단장의 대화는 시사하는 바 크다. 올 1월 말에 있었던 대화다.

    민단의 ‘본국 짝사랑’

    서갑호 회장 이래 교포들 기증 경쟁


    在日 민단, 보조금 삭감 놓고 정부와 파열음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게 주일한국대사관 부지 매입 헌금을 증정하는 서갑호 회장.

    민단계 재일동포들이 본국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공업화에 착수하던 1960년대 초다. 1965년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자 재일동포들은 산업공단의 효시인 서울 구로공단의 건설과 1970년대 역점사업인 새마을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 오사카 사카모토(坂本)그룹의 서갑호(徐甲虎) 회장이다. 오사카부(府) 납세 1위, 일본 내 백만장자 톱5에 드는 거부였던 그는 1963년 외환은행을 통해 100만달러를 투자해 한국에 방림(邦林)방적을 세우고 이어 대구에 윤성(潤成)방적을 세웠다. 그가 본국에 지은 두 회사에 투자한 돈은 당시 화폐로 280억엔이 넘는 거액이었다. 재일동포 가운데는 서 회장의 호쾌한 투자에 자극받아 본국 투자를 결심했다고 증언하는 이가 적지 않다.

    서 회장의 본국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도쿄 미나토구의 미나미아자부의 토지 3086평을 수십억엔을 주고 매입해 정부에 기증했다. 지금은 주일한국대사관이 들어서 있는 이 땅의 현 시세는 1조원(1234억엔)을 상회한다. 땅값 비싼 도쿄에서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노른자위 땅이다. 서 회장은 오사카 총영사관을 지을 때도 2000만엔을 선뜻 기부했다.

    하지만 서 회장은 재일동포 역사에서 비운(悲運)의 인물로 기록돼 있다. 윤성방적 화재와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 등으로 1974년 사카모토그룹이 도산한 것. 그후 한국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1976년 급사하고 말았다. 서 회장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본국 정부에 도움을 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쇼크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한다.

    재일동포들의 본국 투자와 기증은 활발하게 이뤄져왔다.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에 따르면 1995년 10월 기준으로 사업 투자액만 5조941억원에 달한다. 개인별로 고향에 학교와 다리, 정미소를 세우거나 전기 연결, 나무 심기를 한 경우도 많고, 본국이 수해를 당했을 때 내놓은 돈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기증은 대부분 기록을 남기지 않아 그 규모가 추산되지 않는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민단은 6년간 캠페인을 벌여 모금한 540억원 등 지금까지 650억원 이상을 본국에 기부했다. 이때 민단 산하단체인 부인회는 돼지저금통에 ‘1일 10엔 이상 저금하기 운동’으로만 18억원을 모았다. 1997년 말 본국이 외환위기를 당하자 민단계 동포는 신한은행 등을 통해 870억엔을 본국에 보냈다.

    공짜로 받았다 돈 받고 되팔아

    도쿄에 사는 한 재일동포는 1982년 본국에 신한은행을 설립할 때 “나는 여행용 가방에 1억엔을 담아 갖고 갔다. 헌 양복 위에 100만엔짜리 다발을 한 줄로 깔고 그 위에 덧대기를 했더니 꼭 1억엔이 차더라. 어떤 이는 회사 직원을 모두 동원해 1인당 소지 한도금까지 엔화를 갖고 한국에 가게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은 신한은행을 ‘포켓머니 은행’으로 부른다”고 말했다.

    서갑호 회장이 주일한국대사관 부지를 기부하자 재력 있는 재일동포 기업가 사이에서는 “돈도 많으면서 당신은 왜 기부하지 않느냐”는 식의 경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로 인해 무려 9개 공관 부지를 민단 기업가들의 기부로 매입했다. 1995년 말 민단이 추계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사들인 공관의 총 시가는 1614억엔이다. 이민자들이 조국을 위해 이처럼 많은 공관을 기증한 것은 세계 이민사에서도 찾기 힘든 사례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1970년대 초 지방 민단 조직이 박종 당시 부관페리 사장 주도로 4800만엔을 모금해 시모노세키(下關) 영사관을 지었다. 그런데 1996년 11월 정부는 시모노세키 영사관을 히로시마(廣島)로 옮기면서 시모노세키를 포함하고 있는 민단 야마구치(山口) 본부측에 시모노세키 영사관을 도로 사줄 것을 부탁해 야마구치 본부는 당시 시가로 3억엔인 이 건물과 부지를 5000만엔에 매입해줬다. 정부가 민단으로부터 기증받은 건물과 부지를 민단에 되판 것이다.

    그러나 요즘들어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 있다. 민단은 조국을 짝사랑했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하고 30년이 지나면 세대가 바뀐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민단 지원금의 역사는 3월10일로 꼭 30년을 맞았다.


    정 단장 : “(하병옥 직전 단장인) 김재숙이 사람 하나는 좋았어요. 일도 열심이었죠. 학생 때부터 재일동포 권익운동을 했고, 민단에서도 헌신적이었죠. 금전에 관해서도 구설에 오른 적이 없잖아요.”

    나 대사 :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게 깨끗한 사람이 1년에 120번이나 한국으로 출장 갑니까?”

    B씨는 나 대사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한다. 1년에 120번 출장이면 김재숙 단장은 거의 1년 내내 한국에 있었다는 셈이다. 나 대사는 민단이 과다한 출장 등으로 정부보조금을 낭비했음을 지적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 대사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닌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도쿄의 ‘통일일보’ 취재진이 포착한 것이 있다. 5·17 소동 보름 정도 뒤에 주일한국대사관이 민단 지바(千葉)지부로 두 통의 전화를 걸어왔다.

    하나는 현재 니가타(新瀉) 총영사인 김충경 총영사가 한 것인데, 김 총영사는 “지방이 중앙에 퇴진을 강요할 권한이 있냐”고 물었다. 현재 오사카(大阪) 부총영사인 이수존 영사과장은 “작금의 사태에 대해 본국 정부도 우려하고 있다. (본국 정부가) 민단에 지원하는 것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 무렵 김 총영사는 중앙민단의 정몽주 사무총장(현 기획조정실장)을 불러 “하병옥 단장을 밀고 싶다. 당신도 지방에 설득 전화 좀 넣어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취임 6개월째 대통령 못 만나

    9월21일 정진 단장이 당선되던 자리에 주일한국대사관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시 민단은 정 단장 취임으로 문제가 수습됐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올해 엉뚱하게도 정부로부터 ‘보조금 삭감과 지급방식 변경’이라는 뒤통수를 맞았다. 이는 창단 이래 처음 겪는 일이라 민단은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민단 내부에서는 ‘정부에 대해 강도 높게 항의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병옥 전 단장은 취임 47일 만에 청와대를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지만, 정진 현 단장은 취임 6개월이 지났는데도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민단에는 몇 가지 독특한 전통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어떤 경우에도 본국 정부에는 항의하지 않는다’이다. 창단 이후 61년간 이어져온 불문율이기에 다른 동포사회나 본국인이 “민단은 왜 그렇게 조용한가? 수도승 단체인가?”라고 비웃어도 “민단의 전통이 그렇다”라며 지내왔다.

    이러한 전통이 조만간 깨질 듯한 조짐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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