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정의의 전쟁’ 잣대로 본 이라크 침공 4년

개전에서 종전까지, 어디에도 정당성은 없었다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치학박사 kimsphoto@hanmail.net

    입력2007-04-10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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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벌써 4년. 그러나 이라크의 혼란상은 변한 것이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근본적으로, 미국은 이라크에서 과연 정의의 전쟁을 수행했는가. 뒤늦게라도 전쟁을 정당하게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의의 전쟁’ 잣대로 본 이라크 침공 4년
    2003년 3월19일 미국이 바그다드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함으로써 이라크의 비극이 벌어진 뒤 벌써 4년이 흘렀다. 지금 이라크는 더는 나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다. 갖가지 유혈사태로 말미암아 이라크 사람은 하루 평균 100명, 한 달에 3000명쯤 희생당하고 있다. 미국이 지출하는 전쟁비용도 천문학적이다. 한 달에 100억달러 가까이 지출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와 관련, 미국 군사(軍史) 전문가인 리처드 가브리엘(다니엘 웹스터대 교수)의 지적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전쟁을 치르면서 돈이 얼마나 들었고 사상자가 몇 명인지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전쟁에 휘말린) 개개인이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선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을 기준으로 전쟁비용을 계산한다면,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흔이 가장 비싼 비용이라는 게 가브리엘의 지적이다. 적의 포화에 팔다리가 부러진 부상병보다 눈에 안 보이는 정신적 상처(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를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전투원뿐만이 아니다. 파괴력 높은 살상무기 탓에 전후방이 따로 없는 현대 전쟁의 회오리에 민간인까지 휘말려 고통을 받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정의의 전쟁(just war)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정의의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 전쟁이 정의의 전쟁 요건에 들어맞는 것이 거의 없다고 지적해왔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국제법을 패권주의 정치학으로 갈음하는 뚜렷한 일탈행위”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제2차 걸프전쟁(미국-이라크전쟁, 2003년)이 ‘테러와의 전쟁’ 성격을 지닌 아프간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부시 대통령의 세계관은 미국이 9·11테러를 당한 뒤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라크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알 카에다 요원들이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덕신학자 케네스 하임스(워싱턴 가톨릭신학대 교수)는 “이는 침략의 정당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을 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안보 전문가인 제프리 리코드는 미 육군대학 웹사이트에 발표한 글에서 “알 카에다의 위협과 이라크 사담 후세인 체제의 위협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하나로 파악하는 기본적인 전략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유엔 경제제재와 비행금지 구역 설정 등으로 사담 후세인 체제에 대한 억제가 가능했음에도 불필요한 예방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중동지역에 새로운 테러 전선이 형성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꼬집었다.

    미국은 후세인 체제의 변화(정확히는 ‘체제붕괴’)를 꾀했다. 체제변화를 위한 선제공격은 정의의 전쟁 요건에 맞는가. 미국은 이라크를 북한, 이란과 더불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북한은 이라크보다 훨씬 앞선 미사일과 핵무기 제조기술을 지녔고, 이란은 이라크보다 사정거리가 더 긴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을 쳐야 한다며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숨겨진 요인으로는 석유가 꼽힌다). 그럼에도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진영에서는 “이라크 침공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논리를 고집해왔다.

    ‘정의의 전쟁’은 이론일 뿐

    정의의 전쟁론은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맹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정의의 전쟁론자가 “전쟁은 이렇게 치러야 정의롭다”고 설파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전쟁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그쳤다.

    현실의 전쟁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잔혹함 속에서 전사들이 저마다 생존을 위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를 죽여야 했다. 병사들에겐 생존이, 지도자들에겐 승리가 중요했기에 정의의 전쟁론은 부차적인 것, 아니면 승리를 치장하고 살육과 파괴행위를 덮는 이론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동양에서 정의의 전쟁은 ‘의전(義戰)’이라 일컬어졌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그리고 구한말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일어선 민병대의 이름도 의병(義兵)이었다. 의병이란 문자 그대로 조국 방어라는 대의를 위해 일어선 병력이다. 정의의 전쟁 기준에서 볼 때 적의 침공을 받아 이를 물리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은 의전이다. 동양에서 의전의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의 왕권이 시들해진 뒤 맞은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서로 세력다툼을 벌여 전쟁이 그칠 새가 없었다. 맹자는 “춘추 기록 가운데는 의전(義戰)이 없다. 다만 저쪽이 이쪽보다 (상대적으로) 나을 수는 있다”고 평가했다.

    20세기 들어 일어난 여러 전쟁에서도 교전 당사국의 지식인들은 애국심을 발휘해 저마다 “우리는 정의의 전쟁을 벌인다”는 주장을 펴곤 했다. 따라서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은 정의의 전쟁론을 가리켜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론’이라는 비판을 가하곤 했다. 기독교 신학자 마크 더글러스의 지적대로 정의의 전쟁론은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이론이다.

    서구의 전쟁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의 전쟁론에 접근해왔다. 첫째 전쟁 선포의 정당성(jus ad bellum), 둘째 전쟁 행위의 정당성(jus in bello), 셋째 전쟁 종식의 정당성(jus post bellum)이다. 앞의 두 가지는 오래 전부터 논의돼온 것으로 이른바 ‘전통적인 정의의 전쟁론’이라 일컬어진다. 서양의 정의의 전쟁 연구자들은 대개 앞의 두 분야, 특히 전쟁 선포의 정당성(전쟁을 벌이는 올바른 동기)에 집중해왔다. 저질러지는 전쟁범죄나 전쟁 뒤 패전국의 재건 따위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 선포·행위·종식의 정당성

    정의의 전쟁이 요구하는 규범들을 살펴보면, 20세기와 21세기에 지구상에서 벌어진 많은 전쟁이 그 기준에 못 미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기준인 전쟁 선포의 정당성 요건을 갖췄다 해도 둘째 기준인 전쟁 행위의 정당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정의의 전쟁이라 하기 어렵다. 나아가 한 국가가 정의의 전쟁이라 할 만한 충분한 명분 아래 전쟁을 벌였고, 전쟁 수행과정에서 전쟁범죄 등 잔혹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해도 뒷마무리를 일방적으로 전승국에 유리하게 매듭짓는다면 정의의 전쟁을 벌였다고 할 수 없다. 참다운 정의의 전쟁으로 평가받으려면 세 가지 검증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런 검증을 거쳐 ‘정의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한 전쟁이 역사상 과연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정의의 전쟁 이론을 이라크에 대입하면 평가는 어떠할까.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비판가의 시각을 정의의 전쟁론 용어들로 바꿔 정리한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정의의 전쟁의 기본적인 준칙인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적절한 권위’(이라크 침공의 경우엔 유엔 안보리 결의를 뜻함), ‘마지막 수단’(전쟁은 외교를 비롯한 모든 다른 수단을 동원한 뒤에 벌여야 한다) 등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됐다. 다른 국가를 침공하겠다는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침공 계획이 없는 주권국가를 침공하는 것은 분명히 정의의 전쟁 준칙에 어긋난다.

    이라크전쟁의 1단계는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라크 내 반미 저항세력들은 후세인 정권 붕괴 4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게릴라 전술을 활발히 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라크가 시아-수니파의 갈등으로 내전에 가까운 혼란상황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런 까닭에 미국이 이라크에서 전쟁 종식의 정당성(jus post bellum) 기준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엄격히 지킬 필요성이 생겨난다.

    전쟁 4년이 지나도록 오늘의 이라크가 혼란상을 거듭하는 것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정책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뜻한다. 부시 행정부가 2003년 초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최종 결정할 무렵, 미국은 어떻게 전쟁을 정당하게 마무리함으로써 전후 이라크를 재건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전후 재건계획을 종전 훨씬 전부터 다듬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곧 전쟁 종식의 정당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거나 매우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급조된 이라크 재건 청사진

    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전쟁 종식 정당성 기준이 잘못됐음을 지적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이라크 주둔 미군의 규모다. 미국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이라크의 혼란이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에 어긋나는 미국의 잘못된 점령정책 탓이 아니라 이라크 주둔 미군 규모가 작은 데서 비롯됐다는 믿음이다. 이 같은 믿음은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을 비판하는 군부 장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이라크 침공 한 달 전인 2003년 2월 에릭 신세키 미 육군참모총장은 의회 증언에서 “전후 이라크를 안정시키는 데는 수십만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5년 내전을 끝낸 보스니아의 안정을 위해 파병된 나토 병력 규모를 인구비례로 계산하면, 이라크엔 50만명쯤이 주둔해야 한다는 게 신세키 대장의 증언 요점이었다. 이 발언은 “10만쯤이면 충분하다”고 해온 럼스펠드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신세키 총장은 곧장 해임됐다.

    2007년 1월 들어 부시 대통령이 21만5000명의 추가병력을 투입, 이라크 치안을 안정시키겠다며 ‘새로운 전진’이란 이름의 새 이라크 전략을 발표한 것은 럼스펠드 해임 뒤의 결정이다. 혼란을 거듭하는 이라크 상황에 대한 돌파구로서 ‘이라크연구그룹(ISG)’이 제안한 단계적 철군안 대신 병력증강을 선택한 것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병력을 증강함으로써 이라크에서 전후 평화를 이루려면 군사력으로 반미(反美)저항세력을 분쇄해야 가능하다는 미국적 시각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이라크 국민의 반미감정을 다스려 평화를 이뤄야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에 맞출 수 있다는 논리와는 충돌하는 조치다.

    미국의 전후 이라크 점령정책이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2003년 8월 미 합동참모본부가 ‘이라크 자유작전의 전략적 교훈’이란 제목으로 작성한 기밀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워싱턴 타임스’ 로완 스카보로 기자가 특종보도한 이 기밀문서는 미국이 ‘포스트 사담’ 계획을 너무 서둘러 만들었기에 이라크 침공계획 수립자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후세인 정권 붕괴 뒤의 단계에서 이라크 재건을 위한 최상의 청사진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미 국방부가 작성한 이라크 침공계획은 어떻게 전쟁을 승리할 것인가 하는 군사적 측면에만 치우쳐 있을 뿐, 전후 이라크의 혼란상황을 수습하고 어떻게 안정적으로 재건할 것인가에 관한 접근이 아니었다.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이라크를 침공할 무렵 이른바 두뇌집단이라 일컬어지는 연구기관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관련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들 프로젝트의 초점은 대부분 사담 후세인이 제거된 이라크의 치안상황을 안정시키고 정권 재창출을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지,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지는 소홀히 다뤄졌다.

    이를테면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관련 프로젝트가 한 보기다. CSIS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18개월 전부터 미 육군협회(AUSA)와 공동으로 이라크전쟁 뒤 미국이 점령국으로서 어떠한 정책을 어떻게 펴 나가야 하는지에 관한 청사진을 다듬었다. 그 결과물로 CSIS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2개월 앞서 2003년 1월 내놓은 것이 ‘보다 현명한 평화, 전후 이라크 재건계획’이란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앞머리에서 “지난날 아이티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은 분쟁 뒤 국가재건이 효율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에 합당하는 권고사항(미국-이라크 전쟁과정에서 저질러진 전쟁범죄의 공정한 처리,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간인에 대한 대책)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출구전략은 없고 잔류전략만

    미국은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할 이른바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일찍이 1968년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반대하면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것이 현실주의적 선택”이라 주장한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부시 행정부가 애당초 출구전략을 세우지 않았고, 이라크 땅에 남아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석유를 장악하려는 잔류전략만 세웠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반전평화주의자인 하워드 진에겐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더 많은 군대를 보내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재판이나 다름없는 재앙으로 비쳐진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에 비춰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이 잘못됐다는 지적들이 나왔다. 2006년 12월6일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과 리 해밀턴 전 하원의원을 비롯해 미국의 공화 민주 양당 원로급 인사들로 구성된 이라크연구그룹(ISG)이 부시 행정부에 건의한 보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이 잘못됐음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2007년 들어 부시 행정부가 택한 이라크 정책은 ISG 보고서의 제안이나 반전 평화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부시는 2만명의 미군 추가 병력을 90일 가량 이라크에 배치, 저항세력을 제압하고 질서를 잡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외교적 해법과 2008년까지 단계적 철군방안을 제시한 ISG 보고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강공책이다. 사담 후세인 사형집행에 반발하는 수니파의 조직적 저항을 제압하고, 혼란 국면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다.

    그렇다면 2007년 봄의 이라크는 더욱 공세적인 전술을 택할 이라크 주둔 미군과 반미 저항세력 사이의 대치구도로 말미암아 ‘피의 땅’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비무장 민간인의 희생은 더욱 커질 것이다. 2003년 이래 줄곧 이라크의 인간 안보는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새로운 정의의 전쟁 이론은 승전국이 패전국의 전후 질서 안정과 재건에 힘쓰길 요구한다. 미국 정치학자 진 베스키 엘스테인(시카고대)은 “(일반적으로) 점령국은 (패전국의)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이라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2003년 4월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한 뒤의 혼란상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후세인 정권을 대신하는 이라크의 현실적 힘의 주체이자 점령자인 미국과 그 연합국들에 상당부분 책임이 돌아간다.

    ‘인간안보’가 중요하다

    특히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연합국이나 국제기구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책임을 직접적으로 져야 한다.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의 붕괴를 몰고 온 결정적인 물리력이 미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져야 할 책임은 전쟁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후세인 독재로부터 신음하는 이라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편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침공 명분 가운데 하나였던 만큼, 미국은 이라크 국민의 ‘인간 안보(human security)’에 도덕적 책임과 더불어 현실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일반적으로 승전국(점령국)은 패전국의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안보란 국가 안보도 포함되지만, 인간안보 개념이 더욱 중요하다. 패전국이 더는 외부의 위협에 시달리지 말아야 하고, 내부의 적들이 준동함으로써 생겨나는 정치사회적 혼란을 막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패전국의 국민이 안심하고 시민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점이 전쟁 종식 정당성(jus post bellum) 준칙의 기본이다.

    이라크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하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이라크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은 저항세력의 완강한 투쟁에 발목을 잡혀 고전하고 있다.

    미군의 침공으로 후세인 독재가 무너진 것을 반기는 이라크 사람들도 석유관리정책을 비롯해 미국의 전후 이라크 재건정책이 엉망인 데 대해서는 다들 못마땅해하고 있다. 필자가 2004년 봄 이라크 취재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유소마다 기름을 사려는 자동차가 길게 늘어서는 광경이었다. 후세인 집권 시절 석유수출 대국이던 이라크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진풍경이었다. “미국이 석유 훔쳐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여기는 반미 저항세력들이 곳곳에서 송유관을 파괴했고, 정유소들도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라크인들은 “후세인 시절이 더 나았다”는 자조 섞인 말을 입버릇처럼 주고받는다.

    전쟁을 정당하게 마무리함으로써(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을 지킴으로써) 건강한 평화, 정의로운 평화를 건설하는 작업은 장기적인 전망에서 매우 소중하다. 특히 전후 국가 재건과정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안정이 절실한 패전국의 경우 전승국이 전쟁 종식의 정당성 기준을 지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럽다. 전쟁 종식의 정당성에 따른, 전쟁의 정당하고 합리적 수습이 이뤄지는지는 그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수많은 군인과 비전투원(민간인)의 삶에 궁극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미군 탱크에 장미꽃 던지리라

    문제는 전쟁의 야수적인 성격 탓에 민간인이 더욱 고통 받는다는 점이다. 특히 원거리 무기가 발달하고 살상력이 훨씬 높아진 현대 전쟁에서는 전투원보다도 민간인의 희생이 더 크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전쟁에 휘말려 소년병으로 징집돼 고통을 겪고, 여성들은 성폭력을 하나의 전술로 사용하는 전투원들에게 희생당하는 일이 많다.

    전쟁연구자 루스 시바드는 1900년부터 1995년 사이에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1억970만명이며, 이들 희생자 가운데 비전투원(민간인)이 6200만명으로 전투원보다 더 많았다고 분석했다. 현대 전쟁이 국력을 기울여 싸우는 총력전(all-out war·전면전) 성격을 띠면서 전투원과 비전투원 구분이 희미해진 탓도 있지만, 민간인 희생자의 상당수는 무차별 공습에 따른 것이었다. 댄 스미스(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 연구원)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전반기의 전쟁 희생자 550만명 가운데 75%가량이 비전투원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민간인, 특히 패전국의 민간인은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다.

    전쟁이 끝난 지 5년(아프가니스탄), 3년(이라크)이 넘도록 혼란 상황이 거듭되는 현실은 전쟁 종식 정당성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구체적인 이라크 재건 청사진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채 “이라크 사람들이 미군 탱크에 장미꽃을 던지리라”는 안이한 낙관주의 아래 이뤄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많은 이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서 인간 안보의 개념이 중요해진다. 전쟁이나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권리와 안전, 생명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가치행위의 으뜸이다. 인간 안보가 지켜지지 않는 한 평화, 더군다나 정의로운 평화는 없다.

    특히 전쟁 마무리 단계에선 다른 무엇보다 인간 안보가 중요하다. 새로운 정의의 전쟁론은 전쟁 뒤에 더욱 안정된 시민사회를 확립하길 요구한다. 국가나 조직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평화가 바로 정의로운 평화다.

    인간 안보는 영토적 안보만을 다루지 않고 굶주림(식량)과 실업(일자리), 환경재앙 등으로부터 인간이 보호돼야 한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인간개발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꾸준히 인간 안보를 향상시켜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이다.

    정의로운 평화를

    정의의 전쟁론 제3 기준인 전쟁 종식의 정당성은 승전국이 패전국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도와 패전국이 안정을 이루기를 요구한다. 승전국은 패전국 국민을 집단적으로 징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쪽으로 노력해야 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뒤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민주화와 경제번영을 이끌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을 이라크에서 되살려야 한다.

    미국은 후세인 독재에 신음하는 이라크 국민을 위한 인권 차원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이라크 침공 명분의 하나로 꼽았다. 그렇다면 전쟁 뒤 이라크 상황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돼 이라크 국민이 (지난날 후세인 독재시절에 비해) 더 큰 행복과 안정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라크 상황은 결코 후세인 독재시절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덕신학자 케네스 하임스는 전쟁이란 정의의 전쟁론이 요구하는 뉘우침(repentance)의 준칙에 비춰볼 때 이겼다고 기뻐할 일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정의롭게 무력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나 무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의의 전쟁이든 불의의 전쟁이든 전쟁은 인간에게 고통과 희생을 강요한다. 하임스는 시민사회의 수립을 새로운 정의의 전쟁 준칙으로 꼽았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치안과 사법제도 확립은 물론 시민자유와 인권보호를 통해 국내 평화를 확보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를 확립하려면 기본적인 기반시설을 복구해야 한다. 하임스는 그 기반시설에 도로나 전기 통신시설뿐 아니라, 평화로운 시민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인간 기반시설’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임스의 이 같은 제안은 이 글의 주제어인 ‘인간 안보’와 ‘정의로운 평화’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지구촌의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참된 의미의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정의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n)’는 정복자 로마 사람들의 평화였다. 로마에 복속당한 약소민족들에게는 ‘노예의 평화’였을 뿐이다. 강자만을 위한 평화, 약자의 인간안보가 위협당하는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다. 21세기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도 마찬가지다. 이라크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는 미국의 평화보다는 ‘이라크의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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