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무당은 춤을 배우지 않아요, 몸 깊은 곳에서 우러나니까…”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7-04-10 1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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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의 작가 김형경. 오랜만에 만난 그는 참으로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도, 소설이 잘 써지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바닥을 치는 지독한 시련기를 통과하고 난 후의 행복감이 그의 얼굴에 진하게 묻어나왔다.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이미지가 한 장의 풍경화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 그림은 움직이는 그림이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살아 있는 풍경화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 풍경화의 밑그림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남이 이어지면 그 풍경화는 아주 조금씩 변화한다. 어느 날, 내가 죽을 때 그 그림은 변화하기를 멈출 것이다. 그것은 나의 혼백이 될 것이다.

    내가 간직한 소설가 김형경(金炯景·47)의 풍경화는 이렇다.

    안개가 자욱한 빈 들판에 작은 집이 하나 있다. 미풍에 안개는 조용히 움직인다. 뱀처럼 안개는 그렇게 천천히 움직인다. 그 집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온다. 키가 큰 미루나무가 서 있다. 그가 안개보다 느린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안개가 뱀처럼 그의 뒤꿈치를 문다. 놀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는 뒤돌아보면서 미소 짓는다. 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그러자 집이 움직인다. 안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달도 없다. 바람이 지나간다. 마음이 움직인다….

    오랜만에 만난 김형경은 신선한 바람을 몰고왔다. 산에 꽃이 피기 시작해서인지 그녀는 방금 꽃밭에서 걸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가깝게 다가와 내 눈동자에게 말을 건넨다.

    ‘공감은 타인에게 이르는 가장 선(善)한 길입니다.’



    그가 그림 속에서 걷던 길은 타인에게 이르는 선한 길이었다. 타인이라는 이 불안한 정체불명의 대상은 그가 가서 손을 잡는 순간 한 사람이거나 꽃이거나 나무가 된다.

    타인에게 이르는 가장 선한 길

    나는 미소 짓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안개를 지우면서 타인에게 이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대화하고 타인과 공감함으로써 아주 선하게 그들에게 다가간다. 내면에서 솟아올라 기어이 육체가 움직인다. 그는 춤을 춘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춤을 추면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기어이 공감하게 한다.

    “어떤 선배가 흥에 겨워 춤을 추는데, 너무 잘 추는 거예요. 가식이 없이 몸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춤…. 어디서 춤을 배웠냐고 물었더니 그러더군요. 무당은 춤을 배우지 않는다고.”

    아침에 마을 작은 동산에 올라간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천개의 공감’을 읽었다.

    ‘이 책은 서로서로 공감하는 수천개의 마음과 그 마음에 공감하는 저의 마음이 만나 술처럼 빚어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향기가 나는 책의 서문에서 김형경은 이 책을 ‘외도’라고 했는데,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선배, 이 책은 외도가 아닙니다’라고 메모했다. 이건 소설이에요. 좋은 소설.

    책장을 넘기면서 그가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상처를 보고 그 상처를 만지면서 공감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미소 지으면서 나의 걱정을 달래주었다. 아니 힘들지 않았어요.

    “박완서 선생의 글에서 읽은 건데요. 선생에게 많은 독자가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써달라면서 글을 보내온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자신의 인생이 아주 특별한 소설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느끼는 거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보기에는 독자의 사연이 대동소이하대요. 칠순을 넘기신 작가가 보기에 삶은 다 거기서 거기인 거지요. 이러한 삶처럼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 같고, 자신만이 제일 불행한 것 같지만 삶의 질, 감정은 일반화될 수 있어서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갑옷과 속살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이 책의 뼈대는 신문에 연재한 글인데, 3분의 2는 새로 쓴 것이다. 연재한 글은 3분의 1 정도다. 이 책은 한 인간의 내밀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이미 ‘사람풍경’에서 보여준 그녀의 여행기는 이제 외국에서 돌아와 우리네 삶과 사람을 보고 쓰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선 자기를 알고, 가족관계를 통해 나아가다가 성(性)과 사랑이라는 연못을 건너,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결국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걸어가는 여로다. 수많은 사람의 질문을 받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 이것이 문학이 아닌가. 다만 전문용어가 눈에 좀 걸리는데 그것도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쓴다. 그것이 아마도 김형경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천개의 공감’에 여러 독자가 공감하고 있다. 지금도 독자의 손에 이 책은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이기도 하다. 그는 올해 소설책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말했다. 요즘에 쓰고 있는 소설은 정말 재미있고 상쾌한 소설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소설가가 그의 속살이라면, 그에게는 페미니스트라는 갑옷이 있다. 그 갑옷에 대해서 물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요. 김훈 선생은 마초라고 알려졌는데 실은 안 그렇잖아요. 여성에게 섬세하고 다감하고 집에서는 또 얼마나 잘하셔요. 저도 그런 측면이 있지요. 제가 싫어하는 건 다만 남성 중심의 제도고, 그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겁니다.”

    낙지전골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생굴을 주문했다. 굴이 없다고 하자 그는 산낙지를 주문해준다. 같이 먹자고 하자 날것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익힌 것을 조금씩 떠먹는 동안 배가 불러오고, 나는 낙지를 꼭꼭 씹어 먹었다. 나는 날것이 좋다. 꿈틀거리는 산낙지의 생명감을 혀 끝으로 느끼면서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생각을 했다.

    그와 이야기하다보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그의 어법에 듣는 이가 약간 주눅든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풍경’과 ‘천개의 공감’에서 보여준 전문가 수준의 정신분석 상담과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한 독서 인생 때문이리라.

    김형경은 참으로 아는 것이 많다. 그의 책을 읽는 기쁨 중에 하나는 그 책에서 또 다른 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서 읽는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에 관련된 저서들은 그의 산문집만 꼼꼼히 읽는다면 따로 독서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가끔씩 예술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어쩌면 여성이 선호하는 인기 직종일 수도 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었고, 그것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겸허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가 성장한 1960~70년대 여성의 꿈은 아주 단순했다.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나 선생님, 간호사 정도였다. 거기에 소설가가 추가된다. 그 시절 ‘여류소설가’는 명사였다. 그녀 또래의 여성 중 아직도 소설가가 꿈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

    소설을 발표하고 다시 생활을 위해 직장에 다니는 친구가 몇 년 뒤에는 다시 소설을 쓸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너는 아직도 꿈이 소설가니? 이제 50이 가까워오는데….” 그러나 이루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은 생의 강렬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이런 식이라면 난 아직도 꿈이 시인일까?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이 없으니 나는 아직도 꿈이 시인이다.

    1억원 고료의 작가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김형경은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경상도 출신이다. 1983년에 ‘문예중앙’에 시가, 1985년에 ‘문학사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지금까지 소설가로서 살아왔다. 전업작가가 되기 전에는 반듯한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온다.

    지금도 늘 그를 따라다니는 이력은 역시 ‘국내 최초로 1억원 고료를 받은 작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올림픽 금메달처럼 화려한 이력이다. 수상작인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아직도 독자가 꾸준히 찾는 스테디셀러다. 이 상금으로 생활비 걱정을 조금 접고 전업작가로 하루 종일 글을 쓰는 생활을 만끽한다.

    가난한 예술가는 돈 걱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생활이 누추해질 정도로 돈이 없다면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은 묘하게도 돈을 질투한다. 돈과 명성을 같이 얻은 예술가와 지독하게 가난한 예술가 유형이 있다. 피카소가 전자라면 고흐는 후자다. 그는 예술가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나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방법이 있지요. 유산이 많거나, 배우자가 돈을 벌거나, 아니면 가난하게 혼자 사는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어요.”

    예외도 있겠지만,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결혼한 상태에서 좋은 소설을 쓰기가 남성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다. 남성인 나는 이것을 거꾸로 생각한 적이 있다. 이성은 이렇게 서로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풍경’ ‘천개의 공감’은 독자뿐 아니라 편집자도 매료시켰다. 그래서 또 다른 에세이를 기획 출판하려는 출판사의 제안이 잇따랐다. 하지만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정직한 성격의 그는 이를 조용하게 거절했다. 소설을 쓰면서 에세이를 집중적으로 쓸 수 없다고 했다. 소설을 쓸 때는 오로지 소설만을 쓰는 것이다.

    그는 무척 평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경제적인 여유가 다시 생긴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직장을 다니고, 1억원을 받았던 시절이 경제적으로는 훨씬 여유가 있었어요. 딴에는 뭔가를 다 이룬 것 같았는데도 그때는 마음에 안정, 평화 이런 것이 없었어요. 요즈음은 그때보다 경제적으로는 덜 편안해도 마음만은 편안해요.”

    오랜만에 만나 느낌으로 전해지는 김형경의 이미지는 안정감이었다. 마치 모범적인 선생 같은 안정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나? 아니다. 그럼 소설이 잘되나? 아니다. 그냥 행복하다. 여기까지 오기 전 그는 지독한 시련의 시기를 거친다.

    30대 후반부터 마흔까지의 삶은 그야말로 인생의 바닥을 치는 지독한 경험이었다. 그 바닥을 힘껏 쳐내고 그는 상승했다. 그것을 통과하고 난 후의 행복감이다. 그가 심리치료에 각별한 전문가가 된 것은 이러한 자신의 고통을 치유한 경험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우울증의 폭발이기도 했고, 중년의 위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살아온 방식은 유년기에 형성된 가치관이었고, 그 전환의 시점이 유독 지독하게 찾아온 것이다. 인간은 유년기에 형성된 가치관으로 마흔까지를 산다. 그래서 인간에게 마흔 살은 일종의 전환기다.

    마흔, 제2의 성장통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마흔부터의 삶은 다르다. 그런데 살아온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니 뭔가 삶의 방식이 맞지 않았다. 네모난 틀에서 둥근 원형으로 변하기 위해 그 틀을 깎아내는 절차탁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어릴 때의 목표가 성취됐거나, 혹은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내부에서 ‘이게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절망한다. 이제부터는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중년의 위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문학·인문 서적을 더 자세히 읽고, 정신분석·심리학 서적은 기본이고, 심지어 사주·명리학까지 공부하면서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의 정체를 보려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어두워서 100회 이상의 정신분석을 받았다. 이것은 그에게 전환기였고, 성장기였다. 누군가 말했다. 마흔 살은 또 다른 스무 살이라고. 나 또한 마흔 살이 되던 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식솔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주제에 글만 쓰겠다고 직장을 나온 경험이 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들기듯이 그 시점에 서서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제2의 성장기였고,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그것을 무사히 넘겼다고 했다. 말은 안 하지만 그는 어쩌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의 성자들에게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고통의 세월을 거치고 나서 뭔가를 이룬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몸으로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부활한다. 더 이상의 고통이 있을까? 십자가 위에서 이제는 다 이루었다는 말의 함의는 부활을 예고한 전언이었을까? 부처의 6년 고행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뼈를 깎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연기론(緣起論)을 깨닫는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 모든 고통에는 그 근본이 있다. 삶에 대한 무지, 착각 이런 것들을 무명(無明)이라고 하던가. 공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 결행한 것이 여행이다. 당시 그는 전 재산이라고 할 집을 팔아서 무작정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는 가끔 말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바람처럼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저의 기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됐어요. 삶의 태도가 달라진 거지요.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원하는데, 나는 그들이 원하는 내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일종의 생의 완충기가 필요했어요. 달라진 나를 체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거지요.”

    生의 깊은 속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녀는 마치 지나간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집필에 몰두한다. 직접적인 결과물인 ‘사람풍경’ 이외에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애’ ‘외출’과 같은 장편소설은 지독한 자기 시련의 시기를 극복하고 나서 쓴 작품들이다.

    독자는 책을 읽는 어느 순간에 그 소설에 공감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는 김형경의 소설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보다 지독한 자기 단련을 통해서 비로소 작가가 된 것이다.

    “비록 그 시기에는 힘들었지만, 이러한 행로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세상을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에 도움을 받은 것 같다고나 할까. 지자불언(知者不言)의 세계 같은 것 말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만족스러웠으니까. 많이 힘들어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생의 깊은 속살을 만져본 것 같기도 하고.”

    ‘새천년의 비전가’라고 ‘타임’지가 소개한 바이런 케이티는 ‘나는 10년 이상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 역시 마흔 살 이전에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런 식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어쩌면 40년 인생을 내내 그렇게 보낸 것인지도 몰라요. 자긍심을 모두 상실해서 침대에 누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닥에 누워서 자던 어느 날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내 발 위로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떴습니다. 번쩍 스쳐 지나가는 그 무엇이 있었어요. 그때까지 내가 알아왔던 그 모든 어둠과 분노와 혼란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 생각들을 믿을 때 나는 고통 받고, 내 생각들에 의문을 제기할 때 나는 고통 받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 괴로움들을 믿지 않는 순간, 나는 그 생각들의 본질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실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투명의 순간(moment of clarity)’이라고 칭합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순간을 경험합니다. 정신이 맑을 때 경험할 수 있지요. 이러한 순간에 삶과 세상이 자신의 생각을 통해 창출되며, 그러한 생각을 믿을 때 그것이 그대로 물질세계에 투영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우리의 생각들에 일단 의문을 제기하면, 우리는 천국, 즉 행복으로 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그것이 삶의 존재 이유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건강과 균형, 행복을 원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바로 김형경을 비롯한 우리네의 고백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불행을 느끼는 것은 불행한 환경보다는 습관적인 사고 패턴과 더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즉 ‘고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무조건 믿는 것’이고, 우리의 마인드는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시야를 좁히면서 첫 번째 가정, 즉 ‘인생은 불공평하다’를 뒷받침할 증거와 정황, 사고, 이야기 등을 모으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니 현실이 보일 리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허상이 있을 뿐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사람들의 허상을, 사막을 걷다 뱀을 보는 경우를 예로 들곤 합니다. 뱀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심장은 마구 뛰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다시 보니 뱀은 없고 낡은 밧줄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생각합니다. 어찌 이리도 바보 같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공포는 사라지고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인드가 어떠한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안개가 사라지면 바로 앞에 그 사람이 찾고 있던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평생을 안개 속에서 헤매다 끝내는 생도 있다.

    외증조모의 사후세계 체험

    그의 성장기가 궁금했다. 그의 마흔 이전 성격을 형성한 유년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간의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라는 여섯 살 때까지 그는 외가에서 자랐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많은 요인 중에서 이 시기를 결코 빼놓을 수는 없다. 예쁘고 어린 형경이 살던 동네는 집성촌이었고, 이웃은 모두 따뜻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사랑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 사랑을 듬뿍 받은 이는 생에 대해 당당하다. 그래서 현실감각이 떨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은 무조건 잘될 거야’라는 자의식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감소시킨다.

    외가댁에서 그를 돌보던 큰 품인 외할머니는 90세까지 장수하셨다. 이분이 김형경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외할머니는 자식이 외국에 나갔을 때 일흔 살이셨는데, 혼자서 영어공부를 하신 분이에요. 공부하시다가 누가 나타나면 부끄러우셨던지 영어책을 장롱 밑에 숨기시곤 하셨대요. 외국에 있는 손자를 보러 가겠다고 그 연세에 영어공부를 하다니 참 대단하시지요. 이타적인 분이었어요. 남에게 많이 주시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면서 부지런한 분이었지요.”

    그 시절만 해도 제사를 지내면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음식을 넉넉히 장만해서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 속에서 김형경은 성장한다. 할머니는 나눔의 문화가 몸에 밴 분이라고 했다. 누굴 흉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꼬마 김형경은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자랐다.

    외할머니가 이러한 성격을 소유하게 된 것은 또한 외증조모의 영향이라고 했다. 매우 독특한 경험을 하신 분이라고 한다.

    “우리 풍습은 삼일장을 치르잖아요. 삼일 동안 시신을 보존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죽자마자 냉동시킨다고 해요. 그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만일 그때 그분을 그리했다면 이 이야기도 있을 수 없어요.”

    독특한 경험이란 사후(死後) 세계를 체험한 것이었다.

    “당신이 서른 살 무렵, 의료시설이 미비한 시절에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삼일장을 치르고 발인하는 날 관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나 사람들이 놀란 거예요.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그분 말씀이 아주 먼 곳에 갔는데 누군가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당신을 탁 밀쳐서 물에 풍덩 빠지는 순간 다시 눈을 떴다는 거예요.”

    그러곤 놀란 가족들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목이 무척 마르기도 하셨을 것이다.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동안에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그 생명수를 드시고 역시 장수하셨다. 사람이 사후세계를 체험하고 나면 인생이 변화한다. 김형경의 시련기 역시 외증조모의 사후세계와 같은 경험일 수도 있다. 죽어야 산다. 그러한 경험을 하신 외증조할머니의 삶은 너그러웠고, 외할머니는 바로 그분의 손에 자란 분이다. 자신은 이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김형경은 말했다.

    ‘적응 무의식’을 바꾸는 방법

    초등학교 시절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과학교사이던 아버지는 김형경에게 과학적 논리적 세계관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과학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장남감은 아버지의 과학 실험 도구들이었다. 현미경, 물량을 재는 비커, 실험용 알코올 유리버너의 불꽃들. 이것들은 김형경이 마음의 연금술사로 성장하는 직접적인 단초일 수도 있다.

    유년 시절 넓고 깊은 하늘과 바다의 세계를 망원경을 통해서 보았다면,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현미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별은 거대한 우주의 별 중에 극히 일부다. 밤하늘에 보이지 않는 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수하다. 어쩌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처럼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비율이 그러한지도 모를 일이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에 따르면 우리가 1초에 받아들이는 정보는 1100만개라고 한다. 이 가운데 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40여 개다. 나머지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즉 무의식이 처리한다. 그것을 ‘적응 무의식’이라는 전문용어로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의식은 정신이라는 빙산의 일부분’이라고 했다. 윌슨은 한술 더 뜬다. ‘의식은 그 빙산의 꼭대기에 쌓인 눈덩이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응 무의식이 중요하다. 이것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꿀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행동을 바꾸면 된다고 한다.

    현미경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쳤다. 김형경은 자신의 마음에 현미경을 조준하고 본다. 지독하게. 이른바 ‘자아 찾기’는 김형경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녀의 자아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긍정적, 낙천적 성격은 세상에 대한 담대함을, 아버지의 과학적 논리적 사고 패턴은 그에게 더 많은 책을 접하게 한 지름길이다.

    “아버지는 제게 손가락이나 뼘의 길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물건의 길이를 잴 때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난 아직도 내 손바닥의 길이가 몇 센티미터인지 모른다. 그냥 한 뼘 두 뼘 재서 대충 짐작할 뿐이다. 그게 내 성격이다. 김형경이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것 같다고 느끼고, 차라리 철학이나 종교인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성장기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물론 아니라고 했다. 그는 소설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쓰는 좋은 작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이른바 문학소녀 시절에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소설을 읽고 시를 읽었지만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청소년기는 문자 그대로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문학은 대학에 가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그에게는 또 하나의 끈이 있었다. 인생을 놓아버리지 않는 끈은 일기였다. 그의 글 밑그림인 일기는 그의 다른 세상이었다. 일기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문학이다. 철학자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과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역시 일기로 모든 것을 적었다.

    그의 일기 쓰기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의 습관이다. 초등학교 시절 교대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담임선생님은 그가 쓴 일기를 보고 꼬박꼬박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일기의 내용은 부모와 선생님에 대한 욕이 70~80%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글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썼다.

    “대나무밭에선 쑥도 곧게 자란다”

    “내가 소설가가 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시다면 그때의 담임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만약 그때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에 대해, 일기 쓴 방식에 대해 한마디라도 야단을 치셨다면 소심하고 위축돼 있던 그 시절의 나는 단 한 줄의 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쏟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반항된 행동이나 폭력으로 그 억압들을 분출했을지도 모른다.”

    경희대에 입학한다. 그의 동기들 중엔 유명한 문사가 많다. 박덕규, 안재찬을 비롯한 많은 경희대 문사와 한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한 황순원, 조병화 선생에게 강의를 들었다.

    “문학은 대학에서 시작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런데 경희대는 문예장학생들이 이미 캠퍼스를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안재찬, 박덕규 같은 문예장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들 사이에서는 스타였고. 솔직히 기가 죽었지요. 그들은 이미 소설가이고 시인인데 난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그런 거 말이지요.”

    그녀는 대학에서 체계적인 문학 공부를 했다. 책 한 권을 읽어도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는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문학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시절을 돌이키면서 그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 시절에 아름다운 풍경들이 갑자기 그에게 달려든 것일까.

    “이런 말이 있어요. 대나무밭에서는 쑥도 곧게 자란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은 경희대라는 대나무밭에서 자란 쑥이라고 했다.

    대학 때는 시와 소설을 함께 썼다. 한 권의 노트에 한쪽엔 시를, 한쪽엔 소설을 쓰는 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시는 다소 산문적이고, 소설은 다소 시적이다. 4학년 때 황순원 선생의 소설 강의를 들었는데 존경하는 스승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참으로 소설을 열심히 썼다고 한다.

    성욕은 남녀관계의 본질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드문드문 성 묘사 장면이 나온다. 나는 왠지 다른 작가의 야한 소설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김형경 소설의 성 묘사는 좀 불편했다. 한번은 그의 장편소설 ‘성애’을 읽고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카섹스를 하는 장면과 그 장면을 바라보는 주인공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런 걸 썼느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그녀는 웃으면서 “나는 왜, 그런 거 쓰면 안 되냐”고 했다.

    왜 그럴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김형경의 눈동자 속에서 성처녀와 같은 순결함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조금 오래 눈을 마주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성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순결한 그 무엇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럴까 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속으로 놀랐다. 심리분석 전문가인데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어떡하나, 내 무의식 속의 어떤 콤플렉스를 이야기할까봐 서둘러 “인간의 성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성이죠?” 하고 물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그는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성욕과 공격성이 인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인이다. 성욕은 남녀관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인생에서 소종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다. 적게는 다섯 가지 정도, 많게는 열 가지가 된다고 한다. 그중에는 돈과 사랑, 권력, 명예 같은 것들이 있다. 김형경은 그중에서 무엇을 제일 소중하게 여길까.

    그는 공부하고 탐구하는 것을 즐겨 하는 타입이라고 자신을 이야기한다.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시간이 없고, 그런 시간들은 아까운 것이다. 세상에는 여행할 곳이 몹시 많은데 여비가 부족하다, 공부하고 싶은 게 많은데 게을러서 걱정이라고 한다. 시간이 아깝다는 것은 그녀의 생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비밀스러운 색감

    릴케는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쓸쓸한 고독의 흔적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나의 문제이겠지요. 그러나 당신과 이야기하면 깊은 심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천재와 천재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천개의 공감’에서 독자가 김형경과 공감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 정말 아프다면, 그것이 꾀병이 아니라면 누구나 시인이고, 그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공감’으로 타인에 다가가는 사람 김형경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김형경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혼자서 정발산을 걸었다. 나의 내면에 그려진 김형경의 그림이 변화하는 체험을 했다. 희미한 안개, 벌판, 작은 집, 고통스러움의 이미지에서 밝고 환한 동산에서 그가 자유롭게 산책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무채색에서 화려한 꽃의 비밀스러운 색감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한다. 작가는 그래서 신비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서 작가를 만나지만, 작품은 이미 예전의 그다. 어디로 걸어갈지,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드문드문 꽃들이 최선을 다해서 피어난다. 그가 서양의 격언 하나를 영어로 읽어주었다.

    “You don’t know what can you do before you try(직접 시도하기 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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