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노 대통령은 ‘세계화 이전의 세계’에 갇혀 있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7-04-11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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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방은 확대, 경제주체 자율성은 축소
    • ‘청와대發 혁신’은 가짜
    • ‘8부 능선’에선 정상에 대한 상상력이 중요
    • ‘다보스 바람’과 ‘시애틀 바람’ 통합하는 ‘서울 바람’
    • ‘11대 경제대국’ ‘수출대국’은 허상
    • 삼성을 놔줄 것인가, 붙들 것인가
    • 어부지리냐, 새우등이냐…한국의 선택은?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비슷한 것은 가짜다(求似者, 非眞也).”

    연암 박지원이 그의 저서 ‘녹천관집서’에서 한 말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敵)은 거짓이 아니라 비슷한 것들이다. 실체가 아닌 그림자, 실상이 아닌 허상을 붙들고 싸우는 사람은 실패한다. 그런 것을 붙들고 싸우는 국가도 역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김영호(金泳鎬·68) 전 산업자원부 장관(현 유한대학 학장)은 이제껏 경제학자로서, 시민사회운동가로서, 초정(楚亭) 박제가를 마음속 스승으로 모신 제자로서, 한국이 붙들고 있는 허상과 싸워왔다.

    예컨대 20년 전 그가 펴낸 ‘한국경제의 분석’을 보자. 그는 이 책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건 발상의 빈곤이자 지적 종속”이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 그는 “한국이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혀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해도 실수익은 적다”며 “양 위주의 성장보다는 부가가치의 증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진국 클럽에 가입하면 선진국이 된다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주장이 진실을 가리는 ‘사자(似者)’임을 꼬집은 것이다.

    허상을 붙든 결과는 어떠했을까.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김영삼 정부 때 OECD에 가입했으나, 양적 확대에만 힘을 낭비한 나머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1980년대 말, 그는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격차 문제(지금으로 말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서해 시대(중국 부상) 등 당시로선 문제의 기미도 보이지 않던 것들을 앞서서 고민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7년 초에는 외환위기 가능성과 그 액수까지 예측해 국제통화기금(IMF)측을 놀라게 했고, 1999년엔 벤처기업의 버블을 걱정했다. 2000년 산업자원부 장관 시절엔 박제가 선생의 통상론을 기초로 ‘개방형 통상국가론’을 제창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핵심 정책으로 채택됐다.

    진실을 가리는 사자(似者)

    2003년 7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는 “엄청난 가계 부채와 카드채,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부동산 정책,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을 잠식하는 중국의 값싼 제품 때문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지난 2월 말 한 강연장에서 우연히 만난 김 전 장관은 한국이 당면한 위기의 본질을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 귀가 솔깃했다. 한 차례 더 만나 좀더 깊이 있게 그의 견해를 듣고 싶었다.

    아무래도 첫 질문은 2003년 7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과 관련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한국 기업이 가격경쟁 구조에서 벗어나 기술경쟁 구조로 들어가야 한다”며 “2005~2006년까지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알려줬기 때문이다.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산에 오를 때 8부 능선 근처에서 가장 힘들다. 이때는 정상에 대한 상상력이 중요하다.

    ▼ 2006년쯤 뭔가 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그때를 넘기면 우리 앞에 놓인 기회의 문이 닫힌다고 하셨죠.

    “한국은 지금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위기 상황을 맞고 있어요. 2006년을 전후로 해서 한국이 중국을 앞선 시대는 끝났다고 봐요.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가 앞선 부분이 많지만, 외국에선 2005년부터 중국이 앞섰다고 봐요. 이미 중국은 한국의 실력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선생으로 보고, 한국으로부터 투자와 기술을 갈구하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어요. 샌드위치 위기가 심화하면 한국 경제는 위험합니다.”

    ▼ 당시 한국이 앞선 IT기술로 2005년까지 기술혁신을 일궈내야 한다는 지적도 하셨죠. 디지털 관련 국제표준이 그때까지 대부분 완료되기 때문이라면서.

    “한국이 디지털 기술만큼은 세계 선진국과 동시에 출발했어요. IPTV 표준화 경쟁에선 유럽에 밀리고, 차세대 DVD나 웹2.0 세계에서도 뒤처지고 있어요.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는 기회는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시대를 앞서 나가는 데 실패했다고 봐요. 한국이 앞선 분야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요. 중국과 인도는 잘하고 있고요, 한국과 대만은 뒤처지고 있어요.”

    ▼ 한국과 대만이 처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대만 경제가 좋지 않아요. 쓸만한 기업은 모두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어요. 대만에 투자한 화교자본도 중국으로 갑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죠.”

    못 배운 恨, 못사는 恨

    ▼ 현재 한국이 어디쯤 와 있다고 진단합니까.

    “정상을 바로 앞둔 8부 능선쯤 왔다고 할까요. 이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한국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는 한(恨)이 원동력이었어요. 가난의 한, 못 배운 한, 후진국이라는 한을 풀기위해 기를 쓰고 올라온 거죠. 그런데 한은 정상과 가까울수록 사라져요. 한이 풀리면서 에너지가 차츰 줄어들어요. 또 피곤하고요. 국제적인 환경도 어렵고요. 여기서부터는 산정(山頂)에 대한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 한이 원동력이 돼서 올라왔다는 얘기가 인상적입니다. 그 한을 부추긴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 아닙니까.

    “처음엔 박정희 모델로 산을 올라갔죠. 수출주도형 공업화, 이른바 코리아 모델은 아시아 각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의 한류(韓流)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른 나라들이 자립형 공업화를 실험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에 코리아 모델이 더욱 부각됐어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국 등 아시아가 이 모델을 받아들였고, 아프리카와 중남미에도 영향을 끼쳤죠.

    한국엔 산업화의 결과로 중산층이 탄생했고, 중산층이 민주화를 달성했어요. 1960년대 말 한국의 경제고문을 지낸 미국의 어마 아델만 교수가 이를 이론화했고요. 산업화의 연옥(煉獄)을 통과해야 민주화라는 천국에 이른다는 것이었죠. 싱가포르의 리콴유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가 총리 시절, 미국으로부터 인권을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늘 ‘한국모델’을 내세웠거든요.”

    ▼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막을 내린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때 성장주도 경제개발에 제동이 걸렸는데요.

    “1987년은 한국 민주화의 원년이죠. 개발독재 체제 속에서 성장한 화이트칼라, 월급쟁이, 중소득자층이 체제 밖의 민주화 세력과 연대한 것이 6월 민주항쟁이에요.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수많은 월급쟁이가 외국으로 나가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자유의 물결을 목격한 이상 독재국가에서 살 수는 없었던 겁니다. 이를 계기로 시민사회의 생각이 정부에 바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갖췄고요.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병아리가 폭풍 속으로

    6월 민주항쟁은 아시아 최초의 시민혁명이에요.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현상이죠. 그때 비로소 한국에 민주시민이라는 병아리가 탄생했는데, 그만 자기에게 알맞은 집을 짓지 못했어요. 재벌은 여전히 강하고, 정부는 여전히 외국자본과 재벌의 동맹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겁니다. 병아리가 폭풍 속으로 들어간 거죠.”

    ▼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은 냉혹한 시장의 논리에 휩쓸렸습니다. 지금 진보진영의 학자들이 신자유주의를 규탄하는 것도 이 때문일 텐데요.

    “IMF는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한국에 강요했어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누군가 ‘386모델’이라고 하더군요. 서로 충돌하는 정책이 뒤섞인 엇박자 모델이고, 정상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드러누워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사회 일각에선 박정희 모델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죠. 정상에 오르자면 새로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모델이 필요해요.”

    ▼ 신자유주의와 반(反)신자유주의의 대결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국에선 진보진영의 학자, 국회의원, 언론인이 한결같이 신자유주의 타도를 외치고 있어요. 신자유주의라는 적(敵)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흐름도 있죠. 얼마 전에 한국경제학대회가 열렸는데, 참석자 대부분이 미국식 경제학자였어요. 이들은 한결같이 시장이 억압되고 있다, 반(反)시장 정책이다, 시장 규제가 너무 심하다고 주장해요. 한국시장을 두고 양쪽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죠.”

    ▼ 똑같은 시장을 두고 왜 그럴까요.

    “외환위기 이후, 그리고 노무현 정부 이후에 대외개방의 문은 더 넓게 열렸어요. 그런데 개방의 속도에 맞춰 경제주체의 자율성이나 자율경쟁의 폭이 확대돼야 하는데, 오히려 축소됐어요. 그러니 경제주체인 기업인은 반(反)시장정책이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문이 열린 것만 보자면 개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는 좁아졌으니까. 개방의 핵심 고리가 마비되었다고 할까요. 이 부분을 세밀하게 보지 못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 없어요.”

    ▼ 노무현 정부 처지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늘 시장을 중시한다고 말해왔지 않습니까.

    “지금 전세계적으로 이노베이션(혁신)이 화두예요. 이노베이션 재팬(일본), 이노베이션 유에스에이(미국)라고 떠듭니다. 한국도 그렇고요. 그런데 시장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곳의 이노베이션은 가짜예요. 청와대 주도의 이노베이션, 정부 주도의 이노베이션은 혁신과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거짓이에요. 시장주도형만이 진짜예요. 시장과 가까울수록 부패가 없고요, 멀수록 부패가 있어요. 시장과 먼 것은 정부 관료, 교회, 절, 학교 같은 것들이죠.

    정부는 청와대 쳐다보고, 기업은 정부 쳐다보고, 시장은 기업 쳐다보는 경제는 망할 수밖에 없어요.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 청와대는 정부 쳐다보고, 정부는 기업 쳐다보고, 기업은 시장 쳐다봐야 해요. 이래야 진정한 혁신이 나옵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비슷한 것은 가짜’라고 했어요. 지금은 진짜와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해요.”

    한국은 신자유주의 국가 아니다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양적 팽창보다 부가가치 확대를 꾀하지 않으면 수출대국은 허상이다.

    ▼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가 대외개방을 하면 무조건 신자유주의로 가는 겁니까? 일본은 개방해도 일본 기업은 일본적 경영을 고수하고 있어요. 도요타는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일본적 경영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대외개방이 곧 신자유주의는 아니에요. 별개의 문제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개방, 주주자본주의, 노동의 유연성, 작은 정부를 말하는데 현재 정부만 보자면 큰 정부고요, 노동의 유연성도 미국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의 노동유연성은 사회 안전망이 깔린 상태에서 직장을 옮기는 것인데, 한국인은 한 직장을 떠나면 곧 낭떠러지죠. 이런 면에서 우린 신자유주의 나라가 아니에요. 재벌의 지배구조가 굳건하고, 정부가 시장을 주도하려 하는데 어떻게 신자유주의입니까. 한국의 진보진영은 가짜 적을 두고 전선(戰線)을 형성해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는 거예요.

    실업자 양산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데, 한국은 정보기술(IT)의 영향이 커요. IT가 ‘중간 배제’ 작용을 하거든요.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하니까 실업자가 생기는 겁니다. 이걸 전부 신자유주의적 현상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처럼 뒤죽박죽이니 노무현 정부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한 채 드러누워 있는 거죠.”

    ▼ 어쨌든 세계화는 가속화할 것이고, 그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을 피해갈 수는 없을 듯합니다.

    “모바일을 보세요. 3세대 휴대전화는 국가를 넘어 화상으로 통화하고, 결제하고, 못하는 게 없어요. 이 안에 세계가 있어요. 이걸 어떻게 막겠어요. 그러나 세계화의 물결에서 잘되는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어요.

    걱정되는 것은 과거 한국 경제의 나쁜 점, 그러니까 개발독재와 신자유주의의 나쁜 점이 결합하는 겁니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장점과 한국 경제의 장점이 결합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가령 연기금 펀드처럼 장기로 투자하는 돈이 한국의 경쟁력 있는 기업에 투자되고, 이 돈으로 기술개발에 힘써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죠.”

    ▼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자는 얘기군요.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신자유주의를 ‘다보스의 바람’이라고 했고, 이를 반대하는 것을 ‘시애틀의 바람’이라고 했어요. 한국의 진보진영은 시애틀의 바람을 타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는 길이 없다고 봅니다. 세계는 지금 매우 긴밀하게 결합돼 있어요.

    오른발엔 가죽신, 왼발엔 나막신

    그런가 하면 다보스의 바람도 양극화가 너무 심해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고요. 둘을 조화시키는 제3의 바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서울의 바람’으로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대립보다 보완, 양자택일보다 융합하는 방법을 찾아야죠.

    서울의 바람은 민주화를 일궈낸 1987년 체제와 시장경제를 중시한 1997년 체제의 통합을 시도해야 합니다. 서울 바람의 주체는 시민사회가 되어야 하고요. 시민사회는 중소기업과 연대해 새로운 국민경제를 창출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의 혁신을 통한 공급사슬(Supply Chains)의 강화가 대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 되어야죠. 마침 새 정부가 들어설 200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이 되는 해예요. 환갑의 나이에 들어섰는데, 이젠 성숙할 때가 됐죠. 2008년 체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조화시켰으면 해요.”

    ‘허상과의 전쟁’ 나선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

    베트남은 중국과 일본을 경쟁시켜 어부지리를 얻고 있다. 동남아를 움직이는 그룹은 리콴유 세력?

    ▼ 현재 상황을 1987년 체제와 1997년 체제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새롭습니다. 18세기 말, 연암 박지원 선생이 “오른발엔 가죽신, 왼발엔 나막신을 신었지만 말을 타고 달리면 오른편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고, 왼편 사람은 나막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니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북학이냐 북벌이냐를 두고 편을 갈라 싸우던 것이나 지금의 한국이 민주냐 시장이냐를 두고 대립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시민사회의 확충이냐, 시장경제의 활성화냐를 두고 서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죠. 이 대결에서 현재 시민사회가 후퇴하고 있어요. 중산층이 약화되고, 양극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어요. 한국의 지니계수(소득계층간 불평등 정도)가 OECD 국가 중 25위예요. 이를 공적이전소득에 의한 소득재분배로 계산하면 0.3이 됩니다. 그런데 0.4에 가까울수록 하층민이 불평등을 참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상태가 됩니다. 한국은 폭동지점 근처에 와 있다는 거죠. 노무현 정부가 분배를 중시했다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아요.

    시장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심한데, 둘의 관계는 보완적이기도 합니다. 경제성장을 통해 중류층을 만들고, 이들이 민주화를 일궈냅니다.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기술개발을 촉진하고, 혁신을 일구고 그래서 경제가 성장합니다. 이렇듯 둘이 어울릴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야죠. 8부 능선에선 두 개를 통합하는 상상력이 필요해요.”

    ▼ 요즘 ‘선진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런 상상력이 둘의 대립을 극복하고 한국을 정상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요.

    “선진화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이건 다른 나라를 기준으로 삼자는 주장이에요. 이미 선진국이 도달한 수준이 근사해 보이니까 따라가자는 거죠. 그럼 선진국이 나쁜 짓 하면 우리도 따라 해야 합니까?

    정상에 올라가는 것은 참으로 힘들기 때문에 흉내내는 것으로는 에너지가 나오지 않아요. 1980년대 일본은 미국과 벌이는 무역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결과 무역마찰을 극복하고 선진국이 됐어요. 2차대전에서 패배했듯 경제전쟁에서도 지면 ‘일본은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죠. 일본이 선진국으로 올라설 때 제가 일본에서 살았는데, 어디서도 선진국이 되자는 구호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어요.

    선진국은 대부분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선진국이 됐잖아요. 우리는 그런 선진국의 방식에 대해 비판해야 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이 모두 팽창주의를 추구합니다. 이런 열강의 틈에서 경제적으로 확고한 설 자리를 만드는 지혜, 다시는 주변부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필요합니다. 남북으로 갈린 우리의 비극을 해소하고 우리의 가치를 실현하다보면 선진국이 되는 거죠. 우리의 꿈을 만들고, 그걸 실현하는 상상력이 필요하지 남 따라 하기는 사상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에요.

    2차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가 8부 능선에서 주저앉았어요. 유일하게 싱가포르가 넘었지만 도시에 불과해요. 우리가 넘는다면 최초의 국가가 돼요. 우리가 최초로 식민지를 갖지 않으면서도 선진국이 되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나라에도 이익이 되고, 우리에게도 이익이 되는, 사용자에게도 이익이 되고, 노동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아름다운 선진국’이 되는 과정을 발견해야죠.”

    남는 게 없는 ‘방앗간 경제’

    ▼ 8부 능선에서 우리가 꼭 만나야 할 것이 있다면.

    “어느 등산가의 얘기를 들어보니 8부 능선에선 갑자기 어디선지 아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힘을 준다고 해요. 우리에게도 부드러운 바람이 필요합니다. 경직된 이데올로기말고, 서로를 이해하고 지혜를 찾는 부드러운 바람이 정상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줬으면 좋겠어요.”

    ▼ 선진화든 신자유주의든, 또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든 한국은 지금 허상을 붙들고 싸우고 있다는 지적에 동감합니다.

    “한국은 총체적으로 허상에 휘둘리고 있어요. 얼마 전 노 대통령이 코스피지수가 높아졌는데 왜 경제가 나빠졌다고 하냐며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세계화 시대에는 기업 이익이 국민 경제로 흘러가지 않아요. 기업은 인도나 중국에 나가 돈 벌죠. 그럼 주가가 올라가요. 또 대기업의 이익이 중소·하도급 기업의 희생을 통해 높아지는 구조에선 대기업의 주가만 올라가죠.

    지금 세계엔 돈이 넘쳐요. 헤지펀드만 1조5000억달러나 됩니다. 하루에 2조달러의 돈이 세계를 돌아요. 이 돈이 증시에 몰리면 주가가 올라가고, 빠지면 주가가 떨어집니다. 노 대통령이 주가와 국민경제를 연결한 것은 세계화 이전의 세계에 갇힌 발상이에요.

    나는 수출주도형 경제를 ‘방앗간 경제’라고 합니다. 방아 찧으러 곡식이 많이 들어오지만 방아 찧은 뒤 곡식은 고스란히 다 밖으로 나갑니다. 방아 찧는 비용과 인건비만 남는 거죠. 외국으로 수출 많이 한다고 하지만, 값비싼 에너지를 수입하고, 부품과 설비 들여오는 비용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국민총소득(GNI) 증가율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국민총생산(GNP)과 국민총소득의 간극이 큰 국가에서 GNP는 허상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11대 경제대국’이니 ‘수출대국’이니 하는 것은 허구를 붙들고 있는 꼴입니다. 실체를 찾아야죠. 실체는 수시로 변하는 겁니다. 8부 능선에서 허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건 슬픈 일이죠.”

    ▼ 김 전 장관께선 중소기업시대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계신데, 아까 말씀하신 ‘중소기업의 희생’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죠.

    “나는 반(反)대기업 정서를 갖고 있지 않아요. 대기업이 바로 서야 한국의 진정한 경쟁력이 생긴다고 봐요. 그런데 아쉬운 것은 대기업이 주로 가격경쟁을 한다는 겁니다. 가격으로 중국 제품을 이길 수 있겠어요? 할 수 없이 한국 노동자의 임금을 적게 줄 수밖에요. 그런데 노조가 강해서 그럴 수도 없어요. 노동자 처지에선 집값도 비싸고 생활비도 많이 들어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 고민을 중소기업에 전가해요. 그게 쉬우니까. 하도급업체의 납품 가격을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중소기업이 어렵다니까 정부가 보조금도 주고 정책자금도 제공합니다. 기술개발비라는 명목으로도 주고요. 이렇게 해서 중소기업이 안 쓰러지니까 대기업이 마음대로 가격을 조절하죠. 결국 국민의 돈이 중소기업에 잠시 머물다가 대기업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구조에선 중소기업이 클 수 없어요. 전국에 고작 2000개의 중소기업을 빼면 전부 영세합니다. 손해 본 중소기업은 2차 하도급업체에 손해를 떠넘기고, 또 이들은 제일 마지막 기업에 전가하고요. 마지막 기업은 노조도 없고, 임금도 싸요. 지주제에서 소작농이 발전하기 어렵듯 이런 구조에선 중소기업의 발전은 불가능해요.

    요즘 세계적인 대기업은 경쟁력의 원천을 자체에 갖고 있지 않아요. 대기업은 조립공장에 불과해요. 핵심부품은 대부분 중소기업이 생산하니까. 결국 중소기업의 부품 공급망이 튼튼해야 대기업이 튼튼해지는 겁니다. GM과 도요타의 차이는 부품소재 모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들의 경쟁력 차이예요. 이런 점에서 한국의 공급망은 형편없이 낙후됐어요. 중소기업의 희생으로 대기업의 경쟁력이 유지되는 한 중소기업은 몰락하죠. 그렇게 되면 대기업은 차츰 부품소재를 공급할 기업을 해외에서 찾게 됩니다.”

    ▼ 이미 일부 기업은 그렇게 하고 있죠.

    “휴대전화 회사를 봅시다. 원천기술도 외국 것이고 디자인 기술도 외국 것이에요. 부품도 외국 제품이고, 생산도 외국에서 하고요. 주요 주주도 외국인이에요. 그럼 이 회사는 어느 정도로 한국 회사입니까. 생산부품조차 외국 기업의 제품을 쓰면 대기업과 한국 경제의 관계는 끊어져요.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자랑하는 대기업마저 우리 손을 떠나는 겁니다.”

    强將 밑에 强卒

    ▼ 대기업으로서는 주주들의 압력과 이익 극대화 때문에 해외에서라도 값싼 부품을 찾으려 할 것 같은데요. 그런 욕구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한 중소기업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전에는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납품하던 회사인데, 지금은 모토롤라에 납품해요. 이곳에 납품하면서부터 가격을 2배 이상 높게 받았어요. 그쪽에서 그렇게 주더랍니다. 게다가 부품을 삼성과 LG에 팔아도 좋다고 했대요. 더 많이 생산해서 이익을 많이 남기면 기술개발에 투자할 수 있고, 그러면 모토롤라에 더 좋은 제품을 제공하지 않겠냐고 했대요.

    1년 이상 납품하던 어느 날 모토롤라 본사로 초청을 하더래요. 대화내용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앞으로 3년간 모토롤라의 생산계획을 설명해주더래요. 여기에 대비하라는 거죠. 기술적 문제가 있으면 지원하겠다, 돈이 부족하다면 좋은 조건으로 빌려주겠다, 앞으로 3년 동안 안정적으로 생산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런 모토롤라 안에서 그 중소기업은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거죠.

    좋은 제품을 생산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합리적 기대감이 생기면 기술개발에 투자하겠죠. 결국 모토롤라의 서플라이 체인(공급망)은 더 강해지는 거죠. 강장(强將, 모토롤라) 밑에 강졸(强卒, 중소기업)이 있는 겁니다. 우린 강장 밑에 약졸(弱卒)이 있는 것이고요. 그럼 장기적으로는 국제 경쟁력이 떨어질 겁니다.”

    기업판 농지개혁

    ▼ 삼성전자나 LG전자도 모토롤라처럼 외국에서 경쟁력 있는 부품공급업체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야 세계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핀란드의 노키아가 삼성전자처럼 외국인 주주의 비율이 높아요. 경쟁력도 아주 높아요. 우리는 노키아를 핀란드의 자랑으로 알고 있지만, 노키아는 이미 핀란드의 자랑이기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어요. 노키아가 핀란드의 자랑이기를 거부하고 생산과 투자, 고용을 외국에서 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높아졌어요. 노키아라는 기업으로 봐서는 손해될 것 없어요. 삼성도 그렇게 가는 것 같은데, 한국 경제로 봐서는 손실이죠.

    이게 한국이 당면한 문제이고, 국내 진보진영 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숙제입니다. 이들은 시장을 사회적으로 컨트롤하는 체제를 만들자고 하는데 삼성으로선 손해죠. 삼성이 한국에 잡혀 있는 게 좋으냐,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어떤 게 더 좋은지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진보진영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깁니다.”

    ▼ 삼성에도 도움이 되고 중소기업에도 도움이 되는, 그래서 한국경제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길은 없겠습니까.

    “명확한 것은, 그런 대기업 놓치고 대기업과 연관되는 중소기업 놓치면 일자리 만들기는 허망하다는 얘깁니다. 대기업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건 한계가 있고요. 정부는 생산성 없는 일자리만 만들고 있어요. 임시변통이죠. 취업자도 만족하지 못하고, 국가 경쟁력에도 도움이 안 돼요. 그보다는 대기업을 붙들고 설득해야죠. 대기업의 공급망을 탄탄하게 하고 거기서 고용을 창출해야죠. 그래야 대학도 발전하고요.

    한국인에게 반기업 정서는 없어요. 그렇지만 반기업인 정서는 있죠. 기업인이 자세를 바꾸면 이런 정서는 해소됩니다. 시민사회가 기업을 사랑하고 존경하면 이것이 기업의 경쟁력이 됩니다. 기업이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기업이 되면 존경받아요.”

    ▼ 대기업도 중소기업을 위해 노력하고,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령 기업이 고아원에 돈을 갖다준다, 가끔 시골에 돈을 갖다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요컨대 지주제를 바꾸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래요. 기업이 혁신형 지주이길 바라는 거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아리랑에 담긴 비법

    ▼ 기업판 농지개혁쯤 되겠네요.

    “모 국회의원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에서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고 했는데, 나는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고 생각해요. 대기업에 피해를 본 중소기업주에게 나와서 증언하라고 하면 전부 도망갑니다. 이 부분을 취재하는 기자도 없고, 실어주는 언론도 없습니다. 피해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정부도 없어요. 농지개혁이라고 해서 어려울 건 없습니다. 삼성의 올해 이익이 10% 났다면, 하도급업체의 이익도 10%쯤은 돼야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직접 이런 비례관계가 되는지 확인하면 되잖아요.”

    ▼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하셨는데, 일본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대기업은 하도급기업에서 독점적으로 납품받던 관행을 없앴어요. 어디든 팔라고 했죠. 대기업도 세계 어디서든 최고의 부품을 사겠다고 했어요. 이런 조치를 통해 일본의 중소기업이 세계적인 부품업체로 컸고, 대기업도 글로벌 컴퍼니로 성장했습니다. 가격경쟁이 아니라 품질경쟁으로 가야죠.”

    ▼ 중소기업의 처지를 대변하는 정부기관이 없다고 하셨는데, 중소기업청, 공정거래위원회, 중소기업중앙회, 중소기업특별위원회가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아쉬운 점도 있어요. 예컨대 대기업과 하도급기업의 불공정 관행에 대해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공정위에만 줄 게 아니라 중기청이나 중소기업중앙회에도 줬으면 해요. 또 중소기업의 처지를 대통령이 직접 들을 수 있는 통로도 마련해야 하고요. 중기청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산자부 장관이 회의에 들어가지만, 중소기업 문제의 1차 책임은 중기청에 있어요. 중소기업특별위원회가 있으나,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어요. 나는 줄곧 산자부를 중소기업부로 만들 것을 요구했어요.”

    ▼ 이런 방안이 여러 차례 제시됐는데도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위기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도요타나 삼성은 위기경영으로 유명해요. 그런데 정부는 위기의식을 늘 패배의식과 혼동해요. 위기라고 얘기하면 마치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쯤으로 알아들어요. 절박감이 있어야 바뀌는데, 이게 없는 거죠. 진실을 똑바로 볼 용기가 필요해요.

    한국의 역사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잘 설명하는 게 아리랑이라고 생각해요. 아리랑의 열두 고개 중 한국은 아홉 번째 고개를 넘었는데, 그럼 마지막은 어떻게 넘어야 할까요? 그 비결이 아리랑 속에 담겨 있어요.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고 하잖아요. 함께 가자는 겁니다. 소비자를 무시한 생산자, 중소기업을 버린 대기업은 멀리 못 가요.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가야 지속가능해요. ‘레츠고(Let’s go) 정신’인데. 이것이 바로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고, 이것을 코드화한 것이 ISO 26000(사회적 책임표준)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 유엔의 글로벌 콤팩트(지구 약속)예요. 지속가능한 기업, ISO 26000 지수가 높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자는, 이른바 ‘눈뜬 돈’이 사회적 책임 투자죠. 이 분야의 투자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요.”

    희생의 교대

    ▼ ‘발병 난다’는 지적이 뜨끔합니다.

    “세계적으로 시장이 연결되는 때에 앞서야 하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에요. 시장정보가 관료를 거치면 지연되고 왜곡됩니다. 정부는 조용히 뒤에서 기업을 밀어줘야 하고요. 기업가가 혁신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한국에서 그걸 죽이고 개방만 하니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단, 기업가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일궈내야 합니다. 이해관계자와 함께 가는 정신이 필요해요.

    마지막 정상에 올라가려면 희생의 교대가 필요합니다. 지금껏 노동자와 중소기업, 빈곤층이 희생했는데, 이제는 가진 측에서 희생해야 해요. 그러면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한국은 5년 안에 반드시 산정에 도달할 수 있어요. 그곳에 가면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넓은 시야가 확 트이지 않겠어요?”

    ▼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틈에서 생존의 길을 찾는 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은 지금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회와 위기는 공존합니다. 샌드위치의 기회를 우리말로 바꾸면 ‘어부지리(漁父之利)’예요. 샌드위치의 위기를 다른 말로 바꾸면 고래 싸움의 ‘새우등’이에요. 우리가 열강 사이에서 어부지리 구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초정 박제가 선생의 말로 대신하면 들 가운데 버려진 폐정(廢井)이 아니고, 갈증 난 목을 축이는 우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동남아는 어부지리 구조를 만들고 있어요. 동남아 시장을 두고 중국과 일본이 경쟁하도록 해요. 일본은 베트남을 통해 중국으로 수출하고, 중국은 베트남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갑니다. 세금을 줄여주니까 일본과 중국이 베트남으로 몰리죠. 동남아는 여기에 유럽연합(EU)과 호주, 인도, 파키스탄을 연결해요. 중국에서 보니 동남아를 통해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거예요. 시장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들어와요. 동남아엔 세계정세를 꿰뚫어보는 전략가 그룹이 있는 것 같아요. 증거는 없지만 리콴유 그룹이라고 생각해요.”

    정상에 서면…

    ▼ 한국은 말로만 중심국가이지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구한말엔 승패가 명확했잖아요. 일본과 미국은 강했고, 중국과 러시아는 약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4강이 모두 강해요. 한국은 그 한복판에 있고요. 이런 때 중국에 붙어서 미국을 배척한다면 그건 초등학생이나 하는 짓이죠. 네 나라가 한국을 두고 서로 좋은 조건을 가져오도록 경쟁시켜야죠.

    그러자면 세계의 고급인력이 한국에 오도록 해야 합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사무국은 동남아에 빼앗겼으니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나 동아시아 본부를 서울로 유치했으면 좋겠어요. 하루아침에 안 돼요. 오랫동안 집요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본부가 와야 샌드위치 기회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경제는 어차피 국제 분업권에 들어가요. 그렇다면 노동집약적 분업공정 말고, 지식집약적 분업공정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상품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데, 가격경쟁보다는 품질경쟁을 해야죠. 온리원 제품을 생산해야 하고요. 그런 분업권에 들어가면 한국 경제의 전망은 정말 툭 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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