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7-04-11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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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봉화로 떠난 김광화씨. 이번엔 마녀를 만나고 왔다. 지혜롭고 자유로운, 그러나 한때는 우울했던 파랑마녀는 무주에서 찾아온 농부에게 ‘내면을 성장시키는 비법’에 대해 한 수 가르쳐줬다. 옛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 한 어머니의 투쟁기 혹은 치유기.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낡은 창고 집(왼쪽)에서 살다가 새로 지은 윗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짓기는 명지네 식구들이 또 한 번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마다 겨울을 나면서 나는 정신세계의 변화를 자주 겪었다. 겨울엔 시간이 많이 남아 책을 본다거나 사색을 하면서 나를 치유하거나 정신을 살찌웠다. 그런데 이번 겨울은 조금 달랐다. ‘그놈’의 인터넷 덕분에.

    우리집에 인터넷 전용회선이 들어온 지 1년이 조금 지났다. 그전에는 전화 모뎀으로 간신히 메일이나 주고받았는데, 인터넷이 되니 세상이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는 우리도 공간을 뛰어넘어 쉽게 여기저기 ‘인터넷 마을’을 다닐 수 있다. 그렇게 마을을 가다가 정이 든 이웃 가운데 한 집이 ‘잣나무 옆집’이다.

    지혜롭고 자유롭고

    잣나무 옆집은 블로그(blog.daum.net/momo64) 이름이다. 이곳에는 장창호(張昌鎬·49), 차정원(車貞媛·44) 부부와 명지(16), 희지(9)가 산다. 명지네 식구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옮긴 것은 2000년. 충북 단양으로 내려왔다가 2003년에 지금 사는 경북 봉화로 다시 옮겼다.

    누구나 그렇듯 삶의 터전을 옮기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시행착오, 시련, 아픔을 겪는다. 명지네 식구도 갖가지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이 집 블로그를 1년 가까이 지켜보니 이 집 식구 중 가장 마음고생이 심했던 이가 정원씨 같다.



    지난 겨울부터 정원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글 속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한발 더 앞으로 내딛고자 하는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가 주로 쓴 키워드는 ‘치유와 내면의 성장’이었다.

    치유(healing). 참 어려운 주제다. 그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 사람마다 치유과정은 조금씩 다를 듯하다. 그런 설렘으로 명지네 식구를 만나고자 봉화로 갔다.

    정원씨 닉네임은 ‘파랑마녀’다. 닉네임엔 자신의 꿈이 담겨 있다. ‘마녀’란 마법을 부리는 여성. 이름 그대로라면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환상의 세계를 넘나들겠지. 그동안 파랑마녀와 인터넷으로 자주 소통했기에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이는 어떠한 이유로 마녀를 꿈꾸는 걸까.

    “예전에 ‘녹색평론’이라는 잡지에서 마녀사냥을 다룬 글을 본 적이 있어요. 흔히 마녀라면 무섭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음울하고 부정적인 존재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고대 유럽에는 강력한 모성을 가진 여성들, 자연을 이해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있었대요. 그런데 이들이 초기 기독교 세력에게 적대시되면서 제물이 됐대요. 저도 지혜롭고 자유로운 마녀가 되고 싶거든요. 그리고 파랑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 ‘블루’에서 따온 거예요. 영화에서 상징하는 자유의 색이면서 외로움과 우울함에 시달리는 제 내면을 표현하는 색깔이기도 하고요.”

    관념적인 얘기만 할 거야!

    치유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자고 하니 그이가 조금 망설이며 남편과 함께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이 남편은 마을 작목반(농산물 생산과 유통을 위해 꾸려진 협동체) 공동퇴비 작업으로 무척 바쁘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 늦은 밤에 돌아온다. 이 집에서 사흘을 머물렀는데 날마다 늦었다. 낮에 일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하며 어울리다보니 늦는 것이다. 셋이서 함께하면 더 좋았겠지만 나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엄마 차정원씨가 청소년들에게 강의를 하는 동안 막내 희지는 엄마 곁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언니 오빠들과 자유롭게 어울렸다.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들도 희지를 동생처럼 예뻐했다.

    그이가 남편과 함께 이야기하자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나는 혼자 이야기를 해서 자칫 부부 사이에 오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인터뷰를 계기로 부부 사이에 대화를 더 깊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면 그이는 지금 남편과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집 부부와 함께하기가 쉽지 않으니 우선 한 사람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부부가 시간이 되는 만큼 함께하기로 했다. 그이는 치유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제 내면은 치유할 게 참 많아요. 산골에서 친구도 없이 살자니 누가 치유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치료 상담을 받았는데 몇 달을 했대요. 나야 그럴 형편도 못 되고, 의사와 상담을 한다고 해서 치료효과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요.

    이곳 봉화로 옮기고 2005년 한 해 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원래 네 가정이 ‘계획 공동체’를 하려고 봉화에 땅을 사고 이사를 했는데, 우리 가족만 오고 다른 가족은 오지 않았어요. 공동체 생활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단지 상황과 조건이 조금 달라졌을 뿐 여전히 공동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제가 볼 때는 분명한 실패인데 말이죠.

    봉화에 온 애초의 목적이 사라지자, 저는 계속 여기서 살 이유를 찾기 어려웠어요. 농사를 짓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남편이 공동체를 원하니 따라왔거든요. 더구나 당시 5학년이던 큰애가 이곳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평소 학교교육에 대해 비판적인 남편은 아이가 학교 그만두는 걸 찬성했어요. 저는 불안해서 아이를 설득했지만 아이가 꼼짝도 안 했어요.

    정말 고민스러웠어요. 남편은 항상 바쁘고 아이 교육이 모두 내 몫이 되니 더 그랬지요.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냥 놔두래요. ‘생명은 저절로 자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식의 관념적인 이야기나 하고.

    남편은 ‘걱정할 게 하나 없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고 해요. 기가 막혔어요. 저 나름대로 이런저런 학습을 시도하다가, 야단을 치다가, 속상해서 울다가….

    얘들 교육도 그렇지만, 농사로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고,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서도 부딪치고 자주 싸웠어요. 어느 날은 밭에서 일하다 말고 하루 종일 싸우기도 하고, 차 타고 가다가도 또 싸우고, 다툼은 시시때때로 터지는 거지요. 그러다가 탁!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봉화로 이사 와서도 남편은 단양에서 하던 영농조합일 때문에 1년 동안 일주일의 반은 집을 떠나 있었어요. 산속의 창고 집에서 남편 없이 아이들하고 지내야 했는데 무섭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여기를 떠나려고 했죠. 교사 경험이 있으니까 대안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은 아주 관계가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남편은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데에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어요. 내가 여기를 나가면 자기는 사라질 거래요. 자기 혼자서는 여기서 살 이유가 없대요.

    다시 가만히 생각하니, 남편 없이 7년 동안 혼자 살아온 것도 부족해서 내가 또 혼자 살려고 나가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구속, 그리고 연좌제

    그이 이야기는 언뜻 남편에 대한 원망과 푸념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절망과 상처에는 그 사회와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이가 남편 없이 혼자 살아야 했던 데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희지 바지가 뜯어져 정원씨가 꿰매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바느질 모습이라 사진 찰깍.

    결혼하고 2년이 흘러(1992년) 큰애를 낳고 나흘째 되는 날,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2년형을 선고받고 1999년 2월 가석방될 때까지 6년하고도 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그이는 혼자 아이를 기르며 살아야 했다.

    그이는 김영삼 정권의 운동권 복학 조치 때(1993년) 서울교대에 복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를 업고 남편을 면회 가고, 사건 관련자들과 석방운동도 하고, 민주화가족운동협의회 회원으로 집회와 시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렇게 2년 만에 교대를 졸업하고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해서 발령을 기다렸는데 또 다른 족쇄가 그이의 발목을 잡았다. 시대착오적인 연좌제였다. 남편이 지은 죄 때문에 교사 발령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이는 다시 연좌제에 맞서 법정 싸움까지 해야 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역사의 질곡이 아닌가. 그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내게 30대란 강렬한 고통과 어둠 그리고 핍박받는 자의 절규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처들이 제대로 아물지 않는 한 그이 하소연은 어쩌면 좀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이는 1998년 9월 연좌제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내자, 바로 성남 분당의 학교로 교사 발령을 받는다. 그러고는 다음해 2월 남편이 가석방됐고, 아빠 없이도 쑥쑥 커버린 큰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그이는 식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석방된 남편은 시골로 가서 자기가 손수 집도 짓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기를 원했다. 남편은 징역살이 하는 동안 교도소 안이지만 작은 텃밭을 얻어 운동시간 틈틈이 농사짓는 법을 익혔다. 오랜 징역으로 고생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남편은 석방되고 바로 다음해 충북 단양에 땅을 사서 이사했다.

    시골로 온 남편은 옥중 생활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억척스럽게 일했다. 집도 짓고, 영농조합도 만들고, 농사도 후배 한 사람과 함께 5000평이나 지었다. 그 와중에 이웃이 남편에게 집짓기를 도와달라고 하자 거절을 못하고 맡아서 했다. 게다가 그이가 둘째를 낳고도 교사생활을 계속 하니 남편이 어린 둘째를 돌보아야 했다. 남편은 철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자꾸 벌여 나가는 남편이 점점 힘들게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교사 생활도 쉽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반 아이들은 적었지만 담임업무 외에 여러 잡무로 몸이 약한 그이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그러다가 이 집 식구들은 또 한 번 터를 옮긴다. 남편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아보자고 ‘계획 공동체’를 제안한다.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 다시 남편 뜻을 따랐다. 농사로 자급하자는 남편 뜻에 따라 이번에는 교사마저 그만두고 봉화로 터전을 옮겼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면 웬만한 어려움은 삶의 자극제가 된다. 반면에 자신이 흔쾌히 선택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일이라도 어려움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이 남편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확신으로 땅에 뿌리내리는 데 거침이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면 아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철학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절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명분을 앞세워 가족을 끌어가려 했던 내 모습이 이들 가족과 겹쳐진다. 시골에 내려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아내 고민을 들어주기보다 내 식으로 가정을 끌고 가려고 했다.

    이렇게 마녀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다보니 이런 갈등을 빚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그러니까 남편들은 사회에서 꽤나 근사하고 고상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 아내들이 겪는 아픔이나 희생은 묻혀 있기 쉽다는 점이다. 밝은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까. 남편이 사회활동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가정일수록 아내가 겪는 아픔은 크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마녀네 거실에서 청소년들이 영화 ‘I am Sam’을 보고 있다. 마녀네 식구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형편껏 자신의 집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가정 안에 드리운 그림자는 누가 대신 걷어주지 못한다. 스스로 걷어내는 수밖에. 마녀도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자기만의 길을 모색한다. 당시 그이가 선택한 길은 인터넷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혼자 글을 쓰다가 우리집에도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제 글이 두서가 없어요. 일관성도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나갔거든요. 그런데도 글을 써서 올리면 댓글이 달리고, 그 댓글에 다시 제가 댓글을 달면서 제 글을 자꾸 읽게 돼요. 읽고 또 읽으니까, 제 글이 거울같이 저를 비춰줘요. 제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오만함, 인정 욕구, 열등감, 남을 쉽게 비판하고 무시하는 마음, 자신을 마구 질책하는 마음이 보였어요. ‘나는 잘못 살고 있다. 못났다. 나는 왜 이것도 못할까.’ 자신의 안 좋은 면, 못난 면에 집착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칭찬하고 북돋워주는 마음은 약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해 글을 쓰다보니 내가 잘 하는 게 조금씩 보였어요. 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게서 연관성을 찾고, 거기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북돋우고 이런 걸 무척 좋아한다, 이게 내게 맞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열등감에서 벗어났어요. 우울증도 극복하고요. 물론 다른 사람이 쓴 건강한 글도 내게 큰 힘이 되었지요.”

    “싫은 게 아니라 힘들었던 거야!”

    사람이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자신을 당당히 펼치기 위해서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쓴다. 그러나 치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쓰기는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된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토해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병이 된다. 말할 상대조차 마땅치 않을 때 글은 몹시 소중한 상대가 된다.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일기도 도움이 되지만 인터넷 글쓰기는 또 다른 힘을 갖는다.

    불특정한 여러 사람을 인터넷에서 상대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글이 아닌 절실한 자기 고백일 때는 다르다. 인터넷에서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면 어디선가 잡아주는 손길이 있다. 마녀는 그렇게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자기를 정화하고 또 힘을 얻는다.

    마녀는 이제 남편과 관계도 서서히 바꾸어간다. 남편이 가고 싶어하는 길을 막지는 않지만 예전처럼 남편에게 그냥 휘둘리지 않는다.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따질 건 따지며 자신을 찾아간다. 예전에 묻어두었던 남편에 대한 앙금마저 털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이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늦었지만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난 세월에 앙금까지 풀어내다보니 가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이들이 나눈 대화 한 토막.

    “당신이 현장 귀농학교 꾸린다고 할 때 나랑 의논했어? 제대로 안 했잖아. 나는 힘들었지. 당신이 일 벌이면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 박대할 수도 없고, 서로 눈치 보고 그런 상황이었잖아.”

    “그런 게 싫었다고?”

    “싫은 게 아니라 힘들었다고.”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군불을 지피는 파랑마녀.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어둡고 암울했던 지난날들을 치유하고 자신을 따뜻이 되살린다.

    “여기 올 때 우리가 합의하지 않았나? 농사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거.”

    “나는 이런 걸 합의한 게 아니야. 공동체로 네 집이 같이 와서 아이들도 같이 키우고 공동체를 잘 운영하기를 기대하면서 왔지.”

    “그동안 조건이 바뀐 거 아니야.”

    “자꾸 옛날이야기를 해서 그런데, 나는 농사짓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었잖아. 자기는 이미 공동체를 하겠다고 사람을 모으고 땅은 사 놨지, 아이는 어리지, 그런 상태에서 한 선택이었는데…. 교사를 할 때도 자기가 나를 배려하면서 도와줬다면 계속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교사로서의 내 삶도 나한테는 소중한 경험이고 성장의 과정이었다고. 내 일과 자기 일이 겹치면 항상 자기 일이 우선 아니었어?”

    ‘내면의 성장’

    그렇게 지난 일을 풀어내다가 이따금 침묵이 흐른다. 꼭 말만이 대화는 아닐 것이다. 침묵은 또 다른 대화인지도 모른다. 마음속 대화, 아니면 자기와의 대화가 된다. 그러나 침묵이 이어지니 괜스레 내가 미안하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그이 남편을 바라보며,

    “내가 와서 이 집에다가 분란거리를 준 거 아니에요?(웃음)”

    “아니, 아니에요. 새로운 생각을 정리할 거리가 생긴 거지요.”

    이 부부를 며칠간 지켜보니 일상적인 관계는 아주 부드럽고 이야기도 조곤조곤 나누는 편이다. 지금 이 순간은 치유와 소통이라는 주제로 무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라앉은 앙금’이 위로 떠오른 것에 불과하다. 뒤집어보자면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자체가 부부 사이 신뢰가 상당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내친 김에 몇 가지 더 찔러본다.

    “아내 혼자 아이를 키워온 과정에 대해 남편으로서 인정하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을 텐데요?”

    “고마워하지요. 굉장히 고마워해요.”

    “그걸 두 사람이 있을 때 말로 한 적은 없나요?”

    “나는 그런 걸 드러내는 게 참 쑥스러워요.(웃음)”

    “그게 왜 쑥스러울까요?”

    “글쎄, 그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네.”

    그러자 마녀가 곁에서 이야기를 이어받는다.

    “처음 해보니까.(웃음) 저 사람은 다정다감한 느낌이 들어도 그게 표현이 잘 안 되나봐요. 자랄 때부터 그래서인지.”

    마녀네 식구들 삶에 큰 변화는 아무래도 새집으로의 이사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창고를 개조한 집에서 살면서 남편은 농사 틈틈이 손수 집을 지었다. 밝고 넓고 따스한 새 집을. 그리고 지난 여름 낡은 창고 집을 떠나 새집으로 이사했다. 이전보다 공간도 넓어지고 생활도 편리해졌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관계에서 자유롭고자’ 농사를 선택한 장창호씨가 힘차게 도끼질을 하고 있다. 그는 땅에 뿌리내리는 데 흔들림이 없다.

    아직 집이 완성된 건 아니지만 집안 살림살이와 손님맞이에는 큰 불편함이 없다. 나도 손님으로 가서 내 집처럼 지내다 왔다. 새집으로 이사하고 나니 그이는 밭에서 일을 해도 이웃을 만나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새집을 손수 지은 남편에 대한 그이의 신뢰감도 부쩍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삶의 안정감과 여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결 내면을 살찌우는 것 같다. 치유와 함께 그이가 정리한 생각은 ‘내면의 성장’이다. 그이 말처럼 내면이 성장할 수만 있다면 밖의 유혹에 그리 흔들릴 것 같지 않다.

    집중 혹은 분산

    내면이 성장하는 비결이 뭘까. 마녀가 들려주는 마법은 ‘혼자 있는 시간’이다. 도시에서 오는 손님들은 여기 식구들에게 외롭지 않으냐고 곧잘 묻는다. 실제 외롭다. 그러나 외롭기에 자신을 더 잘 들여다보고, 자기 둘레 사람과 사물을 더 찬찬히 애정과 연민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자기 힘으로 더는 어찌할 수 없다면, 한발 물러난다. 그러면 흐름을 읽어내는 힘이 생긴다. 또 혼자 있는 시간은 자신과 더 자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다가온 깨달음을 마녀는 사람들에게 잔잔히 들려준다.

    많은 사람이 분주한 세상에서 놓여나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그렇게 복잡한 공부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음을.

    바쁘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열심히 사는 생활이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너무 많은 사람과 항상 함께 있어서 서로를 간섭하여 피곤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임을.

    무언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자신을 잃는 일임을.

    그 가치에 수단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기에.

    단순한 생활과 소박한 식사,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많은 시간, 가족과 이웃의 서로 다른 다양함이 주는 신기함과 생소함에 호기심을 잃지 않으면서 산다면 세상이 좀 더 재미있고 평화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살아남아야 했던 절박한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 지나고, 혼자 있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또 들여다볼 여유를 준다. 사실 현대 사회는 복잡하지만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은 많다. 복잡한 지하철 속에서도 실제는 혼자다. 중요한 건 그 혼자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느냐 아니면 자신이 분산되느냐일 것이다. 나를 느끼기보다 남을 느끼기가 더 쉽다면 자기 존재는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산골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유혹보다는 자기 존재감을 더 또렷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밭에서 김매는 일, 봄이 되면 산에서 산나물하기, 가을이면 버섯 따기. 또한 집에서 하는 군불 지피기도 그렇다. 아궁이 속에 장작을 밀어 넣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노라면 저절로 명상 상태에 빠져들곤 한다. ‘군불 명상’이라고 할까.

    과거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다. 지금 안고 있는 문제도 곰곰이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안으로 소화한다. 이럴 때 불은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되살아난 교육자의 꿈

    한 개인의 치유과정은 사회 치유와도 맞물려 있을 것이다. 막히지 않고 흐르는 게 치유라고 본다면 막힘이 있을 때는 고이거나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큰딸과의 관계도 그 사이 부쩍 달라졌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지식 교육은 한발 처지더라도 아이가 부쩍 건강해지고 몸과 마음이 자라니 마녀도 덩달아 힘이 솟는다.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뭔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감과 걱정을 버리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한다.

    “아이랑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아이를 풍부하게 이해하게 돼요.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도 같이 보며 수다를 떨고, 차츰 아이랑 관계도 편안하게 바뀌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아이는 나랑 다르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아이가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니 부모 된 기쁨이랄까, 그런 것도 느끼게 돼요. 좋은 부모가 되는 요체는 자기 삶을 열심히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고 봐요. 그러다보면 아이가 곁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곤 해요”

    그이 남편도 이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을 줄이고 농사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또 마을에 귀농하는 가족이 많아지면서 애초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생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이가 오랫동안 외롭게 내면의 치유에 집중한 그 힘이 조금씩 이웃에게 스며든다.

    내가 마녀를 만나러 봉화에 간 날은 마침 학교 안 다니는 청소년들이 마을에서 ‘토론 캠프’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토론 캠프는 청소년이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했다.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은 이 집 딸 명지까지 모두 열두 명이었다.

    마녀는 아이들과 함께 시장을 봐오고, 토론을 위한 기초 강의도 하고, 아이들이 영화를 볼 수 있게 자기네 집 거실도 내주었다. 또 마을회관을 아이들이 토론장과 숙소로 쓸 수 있게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주기도 했다.

    농사에서 김매는 일과 달리 이런 일이라면 마녀는 신바람이 나게 한다. 캠프 첫날 아이들 앞에서 강의하는 두 시간 내내 그이는 행복해 보였다. 공교육 교사일 때 자주 고민했던 참교육자의 꿈이 학교를 나온 아이들과 만나니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면서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사람은 안다. 가슴으로 아이를 만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제 마녀는 마을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나 둘 찾아 꾸려간다. 마을 도서관을 제안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남편이 맡은 마을 작목반 총무 일도 거든다. 농촌 마을의 소득증대를 위한 정부 지원 사업인 ‘녹색 체험 마을’을 유치하고자 마을 집집을 다니고, 관계기관을 오고가며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 한다. 이런 일은 그이가 이전처럼 남편에게 휘둘리거나 뒤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 주도하면서 필요에 따라 남편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 된다. 이렇게 함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부부간 이해와 애정도 더 돈독해지리라고 그이는 믿는다.

    쑥스러운 포옹이지만…

    봄이 되면서 새싹이 움트듯 마을에 또 다른 변화가 있다. 도시 살던 두 가정이 새로이 이 마을로 이사왔다. 파랑마녀의 둘째딸 희지와 새로 이사 온 가족의 두 아이가 함께 어울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래저래 활기가 넘친다.

    “산골 홀로 지키며 나는 ‘파랑마녀’가 된다”
    김광화

    1957년 경북 상주 출생

    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서울을 떠나 1998년부터 전북 무주에서 자급자족 농사

    정농회 회원

    저서 : ‘아이들은 자연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로 가는 길이 아무리 사통팔달 발달해도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뜻이 없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길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어느 길을 어떻게 가느냐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절망으로 빠져드는 길이 있고, 절망에서조차 자기 치유를 거치면서 자신감과 자기 존중감을 높이는 길도 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집을 나와 마녀랑 헤어지려는데 요즘 유행하는 프리허그(free hugs·자유롭게 안아주기) 운동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려 마녀와 처음 해본 쑥스러운 포옹. 치유와 내면의 성장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마녀와 함께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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