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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2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죽여라” “살려라”… 장안을 달군 시골아낙 재판 소동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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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경성복심법원. 1928년 서소문 신축청사(현 서울시립박물관)로 이전한 이후에는 종로경찰서로 사용되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인파를 제지하느라 공판은 예정보다 1시간20분이나 지연된 10시50분에야 개정됐다. 입장이 허가된 60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000여 명은 공판이 시작된 이후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고 법원 주위를 배회했다. 차도까지 뒤덮은 인파로 인해 종로거리는 하루 종일 극심한 교통 체증을 빚었다. 인파에 막혀 법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김정필 공판’을 제외한 모든 민형사 재판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연출됐다. 시내 각 신문사는 장문의 보도기사를 싣는 것으로도 모자라 앞 다투어 방청객 수기를 게재했다.

‘김정필 공판’이 이처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일보’에 실린 방청객의 수기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명천 태생으로 본부(本夫)를 독살했다는 김정필은 뜻밖에 온 도시의 인기를 끌었나니 절세미인이란 방자(芳姿·꽃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접하려고 몰려드는 군중은 그야말로 천으로 헤아리고 만으로 헤아렸으되 방청석이 좁은 까닭으로 헛되이 뒤통수를 치며 돌아선 이가 많았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을 목도한 것을 기회 삼아 글로나마 그녀의 모양을 그리는 것도 헛일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바이다.

간수에 끌려 그녀는 가만가만히 들어온다. 끓는 듯한 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건만 원수 같은 용수 때문에 그녀의 화용(花容)을 알아볼 수 없다. 그녀는 키가 헌칠했다. 나는 눈을 밑으로 향해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모든 미(美)를 다 담은 듯 어여쁘고 맵시 있는 발이었다. 포동포동하게 살진 발등은 생글생글 웃는 듯했다.

이 발로 말미암아 얼마만큼 황홀했을 적에 피고인석에 앉은 그녀는 용수를 벗었다. 첫째의 경이(驚異)는 살결이 흰 것이었다. 참으로 희다. 희다 못해서 금강석같이 눈부시다. 감옥에서 햇빛을 못 본 탓으로 음기의 작용이 없지 않았을 것이로되 대관절 이 세상을 뛰어넘은 흰빛이다. 천국의 백색이 아니면 분명히 지옥의 백색이다.



이렇듯이 흰 바탕으로 된 그녀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얼굴형이 조금 길고 이마가 조금 좁은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맞게 오뚝한 코는 참으로 귀골이고 이지적이었다. 비록 여위고 말랐을망정 귀밑에서 턱으로 보드랍게 가냘프게 스친 곡선! 입신(入神)의 화필로도 이 선만은 긋지 못하리라. 그렇다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림같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은 아니다. 어딘지 날카롭다. 그중에도 큼직한 그 눈! 어쩌면 저렇듯 청결 무구하랴. 어쩌면 저렇듯 복잡다단하랴. 어찌 보면 단순한 빛이요. 어찌 보면 오색이 영롱하다. (‘김정필의 초상’, ‘시대일보’ 1924년 10월13일자)


함경도 두메마을에서 발생한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 종로의 교통을 마비시킬 만큼 장안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여인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얼마나 미인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호기심 반, 미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동정심 반으로 사람들은 재판이 열리는 종로로 꾸역꾸역 몰려든 것이었다.

요절한 신랑

김정필은 1905년 함경북도 명천군 궁벽한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 김경열의 오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 여자는 공부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습까지 남아 있어 보통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일본어는 물론 한글조차 읽고 쓸 수 없는 평범한 구여성이었다.

1924년 김정필이 스무 살이 되자 부친은 혼기가 꽉 찬 맏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신랑감을 물색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김정필은 소문난 미인이어서 신랑감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김경열은 오촌당숙이 중매해준 김호철에게 맏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람도 똑똑하고 집안에 재산도 있다 하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1924년 4월27일, 김정필은 세 살 연하의 김호철과 혼례를 치렀다. 구식혼례다 보니 신부 김정필은 물론 장인 김경열조차 혼인식 당일에야 신랑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호철의 첫인상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핼쑥한 것이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혼례를 치른 김정필은 친정에서 80리 떨어진 김호철의 집으로 가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 직후 김정필은 10여 일 동안 시댁 일가 친척집을 돌며 혼인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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