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음악가 안익태의 은폐된 삶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 이승원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woogong72@empal.com

    입력2007-04-12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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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가 안익태의 은폐된 삶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이경분 지음/휴머니스트/268쪽/1만3000원

    ‘에키타이 안(Ekitai Ahn).’ 우리는 그를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했던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사람이 서재필이 아니라 미국인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이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그처럼 에키타이 안은 우리에게 몹시 낯선 이름이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안익태와 에키타이 안, 그리고 서재필과 필립 제이슨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이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안익태와 에티카이 안이라는 호명의 심연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야 했던 조선 지식인의 고뇌와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까지 안익태는 안익태일 뿐 ‘에키타이 안’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안익태라는 이름을 송덕(頌德)했다. 애국가는 그에 대한, 또한 우리를 위한 일종의 ‘송덕비’였다. 송덕이란 자신의 이름을 영구화하려는 세속적 방식이자 불멸성의 가장 확실한 형식이다. 이는 당사자의 의지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더욱이 누군가에 대한 송덕이 애국과 민족이라는 말과 결합되면 그 파급효과는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된다. 송덕의 최고 형식이 명예의 전당이나 기념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지는 골 깊은 기억이다. 그렇다면 안익태가 남긴 ‘유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어왔던가.

    봉인된 시간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지식이라곤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가이자 스페인 여성 롤리타와 결혼한 조선인,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세계적인 음악가였다는 ‘사실’이 거의 전부다. 한국인의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 속에서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한 애국자다.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은 그를 언제나 순결한 성역에 존재하는 애국자의 ‘표상’으로 기억하려고 한다.



    1938년부터 1944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으로 가열하게 뛰어들었다. 파시즘체제가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잠식할 무렵, 조선의 청년 안익태는 ‘일본의 토스카니니’라는 극찬을 받으며 나치 점령하의 유럽에서 에키타이 안으로 살았다. 지금까지 그의 전기(傳記)에서 봉인된 시간인 1938~1944년에, 에키타이 안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았을까.

    독일월드컵 열기가 아스팔트를 녹일 만큼 후끈거리던 2006년 6월 중순이었다.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의 저자 이경분은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저자는 독일팀의 월드컵 4강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경기를 보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광장으로 가려는 거대한 인파를 뚫고 60여 년 전 안익태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땀 냄새와 맥주 냄새로 뒤범벅된 길을 헤매다보면 과연 안익태에 대한 망각된 시간을 복각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애국가의 작곡가로 한정된 안익태의 이미지를 걷어 내고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그의 삶을 복원하고 싶었다.

    독일에서 활동했던 안익태의 흔적은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었고, 그 흔적의 조각들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치 퍼즐을 맞추는 심정으로 수많은 문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먼저 베를린 국립문서보관소로 발길을 옮겼다. 안익태에게 다가가기 위한 열쇠는 ‘R 64 Ⅳ’였다. 이는 일독회(日獨會)의 문서 분류 번호였다. 그리고 저자는 다시 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소, 슈트라우스 가족문서보관소,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문서보관소를 방문해 안익태가 남긴 흔적을 ‘온몸’으로 뒤졌다. 저자는 안익태에 관한 자료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기도 하고 때로는 며칠 동안 손으로 베끼기도 했다.

    ‘코리아 판타지’의 판타지

    문서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안익태가 살그머니 되살아났다.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은 안익태가 아닌 에키타이 안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독일의 문서고에 피신하고 있던 안익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키타이 안은 ‘선동가’의 표정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외치며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독회’는 일본과 독일의 문화적·사회적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골수 나치 관료와 일본 관료들이 주도한 나치체제 협력기관이다. 에키타이 안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후원이 아닌, 일독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전시 독일에서 유명한 지휘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독회뿐 아니라 만주국 관료 에하라 고이치(江原鋼一)와 안익태의 스승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磨) 또한 그의 성공을 돕는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1943년 8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안익태의 지휘로 ‘코리아 판타지’가 연주됐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키타이 안은 ‘코리아 판타지’ 대신 일본의 궁중음악을 리메이크한 ‘에텐라쿠(越天樂)’를 지휘했다. 이 시기 에키타이 안의 주요 레퍼토리는 ‘에텐라쿠’ ‘교쿠토(極東)’ 및 일본 황국 기원 2600년 기념 위촉곡인 ‘일본 축전곡’과 만주국 건립을 기념한 ‘만주국 축전곡’이었다. 안익태는 일본제국의 강요에 의해 이러한 음악을 지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성취와 지휘자로서 성공하기 위해 일독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며, 나치즘과 파시즘에 협력했다. 결국 에키타이 안은 “음악적 성공을 위해 전쟁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최대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161쪽)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성공에 대한 집념과 야심이 강했던 안익태는 일독회의 함부르크 지부 총무 베커(Becker)에게 거의 완벽한 독일어로 편지를 쓴다. “오래 전부터… 함부르크를 방문하고 멋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이루게 되다니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독일과 일본의 친선 관계를 위해, 또한 일독(日獨)의 문화적 상호 이해를 위해 힘써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면서.”(93쪽) 그는 조선이 아닌, 일본의 음악 대사(大使)를 자임했던 것이다.

    순결한 애국자 · 기억의 암살자

    에키타이 안이 일본제국에 ‘협력’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의 행적이 철저하게 은폐되고 때로는 ‘신화’로 재탄생했다는 점이다. 안익태에 대한 대표적인 전기인 김경래의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1966)는 안익태를 한 사람의 음악가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철저한 ‘민족 음악가’로 가공했다. 광복 후 안익태는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으며, 자신은 12년간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이 나치에 대한 협력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다. 안익태는 자신의 기록을 조작했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의도적인 기억의 조작에 불과했다. 그는 ‘기억의 암살자’를 자청했던 것이다.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흔적을 뒤쫓아 그것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기억의 조작보다 더 무서운 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행위다. 이는 역사를 왜곡하고 다가올 미래를 차단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안익태는 자신의 송덕과 음악적 성취를 위해 제국주의에 투신하고 말았다. 과도한 열정과 욕망은 판타지를 낳고 판타지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매몰하게 마련이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이란 한 가지를 기억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안익태의 모습에서 ‘민족주의’로 포장된 애국과 애국가만을 찾지 않았던가. 그럼으로써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우상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출발이다. 가공된 우상이라는 ‘괴물’을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괴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 괴물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누군가의 옳지 못한 행동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에키타이 안의 감춰진 진실을 폭로하여 그의 치부를 만방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웠던 식민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저자의 방법적 태도다. 이제 우리는 기억의 암살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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