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스티븐 호킹

“신체적 장애 있으면 심리적 장애를 가질 여유가 없다”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07-29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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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두 살에 루게릭병 진단과 함께 2년을 넘기지 못할 거란 선고를 받은 스티븐 호킹. 그는 지금 70세를 바라보고 있다.온몸이 굳어가는 시련에도 그는 파티에서 밤새도록 전동휠체어를 빙빙 돌리며 춤출 만큼 삶을 즐긴다. 그가 타고난 것은 천재성이 아니라 천재적 성과를 가능케 한 낙천적 성격이다.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 <br>● 1942년 영국 옥스퍼드 출생<br>● 1962년 옥스퍼드 대학 물리학과 우등 졸업<br>● 1963년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진단<br>● 1965년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 제인과 결혼<br>● 1974년 ‘네이처’에 ‘호킹 복사’ 논문 발표<br>● 1979년 케임브리지 대학 루카시안 석좌교수 취임 <br>● 1985년 ‘시간의 역사’ 출간<br>● 1995년 일레인 메이슨과 재혼<br>● 2001년 ‘호두껍질 속의 우주’ 출간<br>● 2006년 영국왕립협회 코플리 메달 수상<br>● 2007년 전신마비 장애인 최초로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

    4월중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67) 박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그가 44년째 재직하고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발표에 따르면 애리조나 대학 초청으로 미국 방문길에 오른 호킹 박사의 흉부 질환이 급작스레 위중해졌다는 것이다. 급히 영국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 근처 아덴브룩스 병원으로 후송된 박사는 다행히 하루 만에 고비를 넘겼다. 호킹 박사는 1985년에도 이 병원 중환자실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당시 병명은 급성 폐렴. 이때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나, 기관지절개술을 받은 끝에 살아났다.

    사실 호킹 박사의 생존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스물한 살 때인 1963년,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으로 2년 이상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미국의 야구선수 이름을 따서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하는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전신이 서서히 마비되다 마침내 호흡기 근육이 마비되면 질식해 죽는다. 보통의 루게릭병 환자는 발병 후 5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런데 호킹 박사는 발병 후 46년 동안이나 생존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병은 여타 루게릭병 환자들에 비해 아주 느리게 진행됐고, 스물네 살에 죽을 것이라던 의사들의 예언을 뒤엎고 칠순이 다 된 지금까지 살아있다.

    호킹 박사의 위대함이 병마를 이기고 살아 있는 데만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걸출한 연구 업적을 거둔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이며 일찍이 아이작 뉴턴이 역임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시안 석좌교수’다. 또한 일반 독자를 위한 과학서적 ‘시간의 역사’ ‘호두껍질 속의 우주’ 등을 통해 대중과 과학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어찌 보면 그의 삶은 병을 진단받은 후부터 비로소 꽃피기 시작한 셈이다. 현재 67세이니, 그는 건강한 몸을 갖고 산 시간보다 2배 이상 긴 시간을 병과 장애에 갇혀 살았다.

    생각보다 심각한 장애

    호킹 박사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의 장애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1998년 즈음, 케임브리지에서 호킹과 마주친 기억이 있다. 어느 초여름날 저녁, 호킹 박사 집 근처에 주차해둔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자동차 전조등 불빛 속으로 들어온 호킹 일행과 맞닥뜨렸다. 나는 몹시 놀라 급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고, 박사 일행은 곧 불빛에서 벗어나 사라졌다.



    위대한 과학자에게는 다소 미안한 표현이지만 예기치 못했던 그 만남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불빛에 놀란 상처 입은 짐승’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몸은 열두 살 정도의 아이처럼 작았고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상반신과 목이 한쪽으로 심하게 틀어진 채 기울어져 있었다. 별로 차갑지 않은 날씨인데도 호킹의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의 전동 휠체어를 두 사람의 간호사가 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1995년에 재혼한 아내 일레인이 분명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일레인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만약 호킹 박사가 자동차 사고 등으로 인해 몸이 마비된 장애인이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을지 모른다. 팔이나 목, 아니 최소한 목 윗부분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도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면서 전신이 완전히 마비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손가락 두 개뿐이다. 웃음소리는 낼 수 있지만 말은 못한다. 1985년 기관지절개술을 받을 때 성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컴퓨터음성합성기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기관지절개술을 받기 전에도 거의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학회나 세미나 연설 때는 늘 통역을 대동해야 했다. 그는 컴퓨터 화면에 빠르게 지나가는 단어들을 보고, 원하는 단어를 손끝으로 눌러 선택해서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이 문장 내용을 컴퓨터가 음성으로 합성해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1분에 10단어 정도 ‘말할’ 수 있다. 강연을 할 때는 미리 원고를 만들어 정상적인 속도로 진행하지만, 강연 후 질문을 받을 때는 한 질문에 대답하는 데 10분씩 걸리기도 한다.

    스티븐 호킹

    딸 루시와 함께 쓴 어린이 과학책과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시간의 역사’.

    호킹 박사의 장애와 그가 이룬 연구 업적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대중은 휠체어에 갇힌 나약한 육신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이 남자를 불치병 환자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물리학자로 만든 것일까. 의지? 천재성? 물론 호킹 박사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인 동시에 드문 천재성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재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삶에 대한 낙천적인 자세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 학생이나 연구원들은 파티에서 전동휠체어를 밤새도록 빙빙 돌리며 노는 호킹 교수의 모습에 익숙하다.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몸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내 아이들과 몸으로 부딪치는 놀이를 할 수 없을 때”라고 대답했다. 장애를 비관한 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은 심리적인 장애를 가질 여유가 없다”고 위트 있게 말했다.

    한마디로 호킹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뛰어난 과학자답게 그에게는 삶을 단순하게 보고,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 그에게는 또한 장애인 남편을 기꺼이 뒷바라지하는 사랑이 있었다. 호킹 박사는 1990년대에 자신의 베스트셀러인 ‘시간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스토리야말로 그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영화 그 자체다.

    스티븐 호킹의 사생활

    호킹 박사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없는 그의 처지에서는 언론과 인터뷰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언론도 ‘감히’ 삶의 궤적에 대해 자세히 묻지 못한다. 그는 지금까지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첫 부인 제인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소설가가 된 둘째 루시와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책 ‘조지의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를 공동집필하기도 했다. 장남인 로버트는 아버지처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미국에 정착했다. 영국, 그중에서도 케임브리지에서 ‘호킹의 아들’이라는 타이틀로 살아가기가 너무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물두 살에 루게릭병을 진단받은 호킹이 어떻게 결혼하고, 세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이혼한 걸까? 1962년 말, 세인트올번스에 있는 프랭크 호킹 박사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열대질병 전문 의학자인 프랭크 호킹 박사는 네 명의 자녀를 뒀다. 아버지처럼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 박사과정에 진학한 큰아들 스티븐도 연말 휴가를 맞아 집에 돌아와 있었다. 스티븐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장학생이었고, 우등생으로 졸업한 터라 아버지의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스티븐은 작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전형적인 수재형 청년이었는데, 직관과 판단력이 워낙 예리한 탓에 그의 어투는 가끔 건방지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옥스퍼드 시절에 스티븐은 머리는 확실히 좋지만 공부는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 때는 물리학과 전체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정작 졸업시험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우등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본인의 회고대로라면 대학 시절 내내 하루 한 시간씩밖에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스티븐은 영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유망주임이 분명했다. 이날 파티에 참석한 손님 중에는 호킹 일가의 이웃인 와일드 가족도 있었다. 고교 졸업반인 와일드 부부의 딸 제인은 이날 스티븐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금방 서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형수보다는 나은 처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스티븐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말을 더듬는가 하면, 포도주를 따르다 병을 떨어뜨려 술을 엎지르기도 했다. 그해 여름, 스티븐은 중동 지방을 여행했다. 프랭크 호킹은 아들이 중동의 풍토병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 케임브리지로 돌아가려는 아들을 붙잡아 병원에 데리고 갔다. 스티븐은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받았다.

    진단 결과는 호킹 가족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신은 멀쩡하고 통증도 없지만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어 속수무책으로 죽게 된다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이 병명이었다. 의사들은 스티븐에게 남은 시간이 2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의사인 프랭크 호킹 박사는 이 병의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랭크 호킹은 아들의 지도교수인 사이애머 박사를 찾아가 2년 안에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죽기 전에 학위과정이라도 마치게 해주고 싶었다. 사이애머 박사도 그 같은 부모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지만, 케임브리지 대학 규정상 학위과정은 최소 3년이어야 했다.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제자에게 학위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든 상황의 당사자인 스티븐은 당연히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에게 닥친 시련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시간 절망에 빠져 허우적댄 것은 아니었다. 우울증 속에서 그는 연거푸 악몽을 꾸었다. 사형수가 되어 처형의 순간을 기다리는 꿈이었다. 최소한 사형수보다는 내 처지가 낫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루게릭병은 병이 진행되어도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말하자면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마비가 진행돼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비참한 병이지만 그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자신의 처지가 낫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있을 때 맞은편 침대에서 한 소년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보기에 좋은 장면은 결코 아니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최소한 나는 병 때문에 아프거나 속이 메스꺼워지지는 않았다.’(스티븐 호킹 홈페이지에서)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간호사이던 일레인과 재혼했으나 결국 이혼했다.

    새 생명의 탄생과 블랙홀

    뛰어난 과학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며 낙천적인 경우가 많다. 그 역시 그러했다. 아프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다행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몸이 성할 때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 조정 선수로 활약한 쾌활한 청년이었다. ‘시한부 생명’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타고난 낙천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호킹이 선택한 분야는 이론물리학 중 우주론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분야는 실험이 아니라 이론으로 연구하는 분야여서 몸이 조금 부자유스러워도 큰 문제가 없었다. 만약 그가 택한 분야가 천문학이나 실험물리학이었다면 그는 대학원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고 해서 그의 몸이 금방 마비된 것은 아니다. 1962년부터 10년 가까이 그는 지팡이를 짚기는 했지만 자신의 발로 실험실과 기숙사를 오갔으며 말도 비교적 자유롭게 했다. 거기다 새로운 연인도 있었다. 발병 직후 파티에서 만난 제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런던의 대학에 다니고 있던 제인은 주말마다 그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왔다. 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지만, 호킹은 특유의 낙천성으로, 제인은 굳은 신앙심으로 역경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호킹은 3년 만에 순조롭게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 칼리지 중 하나인 곤빌 앤 키즈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스물 셋의 호킹과 스물한 살의 대학생 제인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호킹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판단에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홀에서 열린 결혼식은 신랑이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것만 빼면 여느 행복한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대학원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한 호킹의 집은 주말이면 늘 친구들로 떠들썩했다. 1967년 두 사람의 첫아이인 로버트가 태어났다. 호킹은 스물다섯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새삼스레 삶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병의 진행은 기적적으로 더뎌지긴 했지만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즈음 호킹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목발을 짚어야만 했다. 집의 1층 거실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2층 침실로 올라가는 데만 15분이 걸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의 진행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온통 물리학 연구, 그중에서도 블랙홀에 쏠려 있었다.

    사람들은 호킹이 그처럼 뛰어난 과학자라면 왜 여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지 의아해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은 실험을 통해 연구 결과를 증명할 수 있는 업적에 주어진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조차 상대성이론이 아닌, 광전효과에 대한 연구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호킹이 연구한 분야는 우주물리학 중에서 우주의 기원인 빅뱅과 별의 최종적 상태인 블랙홀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관측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호킹이 노벨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케임브리지에 대한 애착

    호킹을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로 끌어올린 연구는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시작됐다. 그가 대학원생이던 1960년대 중반 즈음 블랙홀, 즉 안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별의 마지막 상태에 대한 이론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블랙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는 과학자는 거의 없었으며 블랙홀은 과학이론이라기보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등장하는 개념으로 치부된 정도였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 방정식에 의하면, 우주는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수축하거나 팽창한다. 호킹은 그동안 물리학자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반상대성이론과 우주를 연관시키는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의거해 블랙홀에 대한 방정식을 계산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의 연구 결과대로라면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검은 구멍’이 아니라 복사에너지를 방출하며 때로 폭발하기도 한다. ‘호킹 복사’라고 불리는 이 발견은 20세기 후반의 물리학 연구 중 가장 탁월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어 그는 블랙홀과 우주의 태초 폭발, 즉 빅뱅을 연관짓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초의 우주는 큰 폭발과 함께 풍선처럼 팽창해가고 있는 상태다. 블랙홀의 폭발은 또 하나의 미니 우주의 시작, 즉 작은 빅뱅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호킹의 연구는 우주의 시작인 빅뱅과 별의 종말인 블랙홀이 같은 현상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킹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하나로 묶어 우주의 시작에 대한 물리적 계산을 해내는, 그때까지 어떤 물리학자도 불가능하다고 본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호킹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탄 것은 이처럼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거대하고도 철학적인 연구를 휠체어에 갇힌 그가 해냈다는 아이러니 때문이기도 하다. 호킹을 ‘아인슈타인의 후예’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의거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는 이 같은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32세에 영국 왕립협회 최연소 회원이 되었으며, 37세에는 탁월한 수학자에게 주어지는 케임브리지 ‘루카시안 석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병의 진행이 점점 더 빨라져 이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게 됐지만, 병과 상관없이 그의 논문은 세계 과학자들의 탄성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세계 각지의 학회나 세미나, 대학들이 앞 다퉈 그를 초청했다. 혀와 입술이 많이 마비된 호킹은 학회에서 발표할 때마다 그의 이야기에 익숙한 조교를 대동해 통역을 부탁했다. 이즈음 호킹의 언어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영어가 아니라 ‘그저 웅얼거리는 리듬’ 정도로 들렸다.

    30대 중반에 호킹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어 미국의 어느 대학이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를 시작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호킹은 현재까지 46년째 케임브리지에 살고 있다). 문제는 호킹이 대학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두 자녀 로버트와 루시의 학비와 자신을 위한 전담간호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연봉은 미국 유수 대학에 비하면 몇 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제인은 언어학 박사학위를 끝내고 케임브리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킹 곁에서 간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만약 호킹의 병이 악화돼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제인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이 희대의 천재는 요양원에 들어가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호킹도 제인도 그런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킹은 대중적인 과학서를 쓸 생각을 한다. 때맞춰 그를 주인공으로 한 몇 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BBC 등에서 제작되면서 스티븐 호킹이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호킹은 이 유명세를 이용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의 처지에선 적절한 판단이었다. ‘대중적인 과학서’에 대해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는 1만파운드(약 2000만원)의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호킹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의 출판 에이전시와 접촉했다. 미국 출판사 밴텀은 계약금 25만달러(3억원)를 제의했고, 호킹은 이를 받아들였다.

    남처럼 글을 쓰기 어려운 호킹의 상태도 그렇고, 연구와 집필을 병행하는 일정 때문에 ‘시간의 역사’ 집필은 2년 이상 걸렸다. 호킹은 ‘방정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책을 사는 독자는 반으로 줄어든다’는 밴텀 측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대한 쉽고 평이하게 우주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다. 1985년 여름, 2년에 걸친 ‘시간의 역사’ 집필을 끝낸 호킹은 강연 초청을 받고 중국에 갔다. 그리고 유럽 공동 핵 연구기관인 CERN의 초청을 받아 제네바로 향했다. 이 무리한 일정이 화근이었다. 제네바에서 급작스러운 호흡 곤란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됐다. 루게릭병 환자에게 치명적인 폐렴에 걸리고 만 것이다. 영국 병원으로 후송된 호킹은 제인의 동의하에 기관지절개술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건진 대가로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전신마비에 이어 말조차 할 수 없게 된 남편을 보는 제인의 심정은 암담했다. 마침내 끝장이 왔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시간의 역사’가 그해 가을 출판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의 역사’ 판권이 세계 각국으로 신속히 팔려나갔으며 영국에서는 곧장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그로부터 5년간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시간의 역사’ 양장본은 영국에서만 60만부 이상 팔렸고 전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과학서적으로는 실로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독자 몇몇은 책 표지에 실린 호킹의 사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가까스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뒤틀린 육체에 경도돼 이 책을 집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심한 장애에 갇혀 있는 학자가 무슨 재주로 책을 썼을까 하는 호기심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호킹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호킹은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서, 러더퍼드와 아인슈타인의 연구 결과와 그들이 이루어낸 소립자 물리학,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왜 블랙홀이 검지 않으며 우주는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지, 인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등 우주물리학의 방대한 이론들을 차분하게 설명해나간다. 그리고 모든 우주 현상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통일이론’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책을 맺는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과학, 그중에서도 물리학이 존재의 근원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를 실감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교황청이 호킹이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간의 역사’ 성공으로 마침내 호킹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고,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의 명예를 얻었으며, 인세 수입을 통해 충분한 돈도 벌었다(2006년까지 그의 인세 수입은 80억원에 달했다).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호킹의 초상화가 걸렸고, 미국의 TV 드라마 ‘스타트랙’이 그에게 출연을 요청했다. 곁에는 늘 그를 보살피는 아내 제인과 아이들이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들은 호킹 부부의 막내 티모시가 1979년에 태어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호킹의 전신이 마비되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놀리곤 했다. 호킹은 이런 유머를 몹시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호킹의 스토리,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삶은 이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1990년, 호킹과 제인은 25년에 걸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새로운 배우자를 만났다. 호킹의 간호사이던 일레인 메이슨이 그의 새로운 아내가 되었다. 일레인 또한 호킹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는데, 그녀의 전 남편이 호킹에게 컴퓨터음성합성기를 만들어준 컴퓨터공학자 데이비드 메이슨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호킹은 왜 제인과의 결혼생활을 접어야 했을까? 호킹 본인은 이 첫 번째 이혼에 대해 어떤 설명이나 변명도 한 적이 없다. 다만 이혼으로 인해 세 자녀와 결별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루시는 신문 기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비난했다. 제인은 훗날 호킹과의 결혼생활에 대한 책을 출간해 결별의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두 사람의 종교 갈등(호킹은 무신론자지만 제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의 그림자로 살아야만 했던 제인은 남편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자신이 남편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천재답게 자기중심적인 호킹은 제인의 좌절감을 제대로 살펴주지 않았다.

    1995년 호킹은 자신의 간호사인 일레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한동안 행복한 생활을 했지만 이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초부터 호킹이 아내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호킹은 몇 번인가 타박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실려왔으며 목에 면도날로 그은 상처가 나기도 했다. 2004년 호킹의 전담 간호사들이 일레인을 폭행죄로 경찰에 고소했지만, 피해 당사자인 호킹이 일레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바람에 경찰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호킹 전담 간호팀에서 일하다 그만둔 한 간호사는 “일레인이 호킹 박사를 너무도 가혹하게 대해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만년의 불행

    일레인을 둘러싼 추문이 잇따라 터지면서 두 사람은 이혼 소송에 들어갔고, 2006년 이들은 법원을 통해 이혼했다. 이듬해 호킹은 재혼으로 인해 소원해졌던 세 자녀와 화해했다. 늘 삶에 대해 낙관적이고 유머를 잃지 않았던 호킹은 일레인과의 사건으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의 오랜 친구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호킹은 지금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노령에 들어선 데다 건강마저 악화된 호킹이 더 이상 연구업적을 이루거나 새로운 저서를 내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올해 안에 30년 동안 재직해온 루카시안 석좌교수 직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사실상의 ‘은퇴’인 셈이다.

    호킹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루게릭병에 걸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데, 사실 나는 이 병에 대해 그리 많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가능한 한 일반인과 똑같이 생활하려 하고 있고, 실제로 병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기억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호킹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삶의 불공평함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불공평함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낙천적인 남자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 닥쳐온 개인적 불행은 인간에게는 의지나 낙천성으로 헤쳐나갈 수 없는 숙명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불치병이라는 운명의 장난에 걸려든 호킹에게 숙명의 굴레는 너무 가혹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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