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 자본주의 ‘시장’과 사회주의 ‘계획’이 충돌하고 있다. 시장에 기생해 연명하던 계획이 반격에 나섰고, 시장의 응전도 거세다. 자본주의 바람을 막아 후계체제를 안착시키는 게 북한 당국의 목표다. 경제의 창(窓)으로 2009년 8월의 북한을 들여다보았다.
북한에서 ‘150일 전투’가 벌어진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운의 후계작업과 맞물린 것이다. 150일 전투엔 ‘시장’을 제한하고 ‘계획’을 되살리겠다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담겨있다. 시장 통제와 노력 동원을 통해 경제행위를 ‘계획’에 의해 조직하겠다는 것이다. ‘속도전’은 북한식 ‘계획’의 진수(眞髓)다.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는 국가재정에 의존한다. 1990년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북한의 재정은 붕괴했다. 북한은 줄어든 재정으로 중공업, 군수공업을 관리하면서 기업, 기관, 주민에겐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요구했다. 시장을 허용한 2002년 7월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재정난을 덜겠다는 궁여지책(窮餘之策).
‘계획’은 주민을 먹이지 못했으나, ‘시장’의 힘은 위대했다. 시장화로 북한경제는 숨통을 텄다. 국가는 쌀을 못 줬지만 시장과 무역이 만든 부가가치가 주민을 먹여 살린 것이다. 값싼 중국 상품이 북한의 시장에 넘쳤다. 생필품 혁명이었다. 탈북자 A씨는 “조국 물건은 그림자도 못 봤다. 중국 상품 없으면 못 산다”고 말했다.
노동시장
북한경제를 폐쇄경제, 사회주의경제로 보는 건 잘못된 통념이다. 소비재와 생산재를 사고파는 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자본시장도 등장했다. 자본가가 나타났으며 임노동자와 소작농이 경제행위를 한다. 노동력의 상품화, 즉 노동시장의 등장은 시장화가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진행됐다는 뜻이다.
탈북자 B씨는 함경북도에서 소작농으로 땅을 부쳐 먹고살았다. 개인이 경작권을 소유한 소토지에 고용돼 일한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 지주-소작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는 “기업소엔 일감이 없었다. 밥을 먹으려면 소토지에서 일해야 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먹고살 만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재정난은 심각했다. 돈이 바닥나 국가는 기업소에 자본과 자재를 대줄 수 없었다. 국가 ‘계획’만으로는 경제를 운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국은 개인에게 돈을 받고 경작권을 나눠줬다. 국가는 주민들에게 받은 돈을 ‘계획’의 영역인 중공업과 군수공업을 유지하는 데 썼다.
제조업에선 ‘가공주’가 등장하면서 자본가-임노동자 관계가 나타났다. 가공주는 개인수공업자를 가리킨다. 가공주는 생산수단, 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하면서 임노동자에게 급여를 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노동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을 착취의 도구라면서 경멸했다.
함북 청진시 출신의 탈북자 C씨는 재봉일을 하면서 가공주에게 급여를 받았다. 기업소에 돈을 내고 출근을 면제받은 뒤 옷을 만들었다. 기업소에 납부금을 내고 개인사업을 하거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8·3노동자’라고 부른다.
시장화의 결과로 인플레이션도 거셌다. “국가에는 돈이 없지만 개인에게 국가의 2년분 예산이 깔려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A씨는 “국가에서 받는 돈은 월 1500원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는 쌀 1kg밖에 못 샀다”고 말했다. ‘계획’의 영역에서 일하면 소득이 물가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계층은 교수, 교사, 의사, 간호사처럼 ‘많이 배운’ 전문직이라고 한다.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은 “김일성대 교수가 국가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먹고살 수 없어서 부업으로 호구한다는 얘기를 평양의 지인한테 들었다”고 전했다.
가공주와 임노동자
북한에선 자본가를 ‘돈주’라고 부른다. 재산이 1만달러가 넘어야 돈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수십만달러를 가진 돈주도 적지 않다고 한다. 중국과의 무역 혹은 되넘기장사(물건을 사서 곧바로 다른 곳으로 넘겨 파는 장사)로 부를 쌓은 돈주는 중간상인을 고용하고, 가공주를 거느리기도 한다. 명목상 국가가 소유한 외화벌이 회사의 실제 주인이 돈주인 예도 많다.
돈주에 고용된 중간상인은 일용직노동자인 삯바리, 뻘뻘이를 고용해서 물건을 운반해 소매상에 넘긴다. 고용-재고용 관계도 나타난 것이다. 중간상인들은 중국 상품의 가격과 동향을 점검해 재화의 수요, 공급에 따라 시장가격을 정한다. 국가가 가격을 정하는 경제시스템은 더 이상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식당 목욕탕 노래방 같은 서비스업도 운영권이 개인에게 넘어갔다. 하도급과 분업도 이뤄진다. 큰 가공주가 작은 가공주에게 일감을 나눠주는 것이다.
돈주와 간부의 유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자력갱생을 선서한 사람이 버글대는 곳. 국가가 관료에게 돈을 주며 일을 시키지 않고, 돈을 독립적으로 벌어서 살고, 정해진 돈을 국가와 상부에 입금해야 하는 곳. 그래서 영웅이 되고 이런저런 훈장을 받는 곳이 평양이다.
북한 경제는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개인이 운영하는 운수업도 등장했다. 시장화로 물류 유통이 활발해진 덕분이다. E씨는 북한에서 ‘서비차’ 운전수로 일했다. 서비차는 영리 목적으로 개인이 운영하는 자동차를 가리킨다. 돈주들은 자동차를 구입한 뒤 공장, 기업소 명의로 등록한다. 시·군 보안서에 수익의 일부를 바치면서 운수업체를 운영하는 것이다. E씨는 “서비차 장사를 1년만 하면 투자금을 뽑는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버스보다 요금이 싸서 손님이 많기 때문이다. 서비차는 지저분하고 화물과 뒤섞여 움직여야 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버스나 기차를 더 선호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계획경제는 시장이 형성한 부(富)를 세금 등의 형태로 흡수하면서 근근이 버텨왔다. 상점은 자본주의 국가의 소득세 격인 국가납부금을 낸다. 주민들은 부동산사용료, 토지사용료를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와 민간이 인도적으로 지원한 식량과 생필품을 주민한테 팔아서 재정을 충당하기도 했다.
자본시장
북한의 조선중앙은행은 중앙은행이면서 상업은행이다. 계획경제가 만신창이가 되기 전 국가가 노동자에게 준 돈은 국영상점의 물품 판매를 거쳐 중앙은행을 통해 회수됐다. 북한의 화폐는 국영상점에서만 쓰이는 수동적 화폐였다. 조선중앙은행은 기업소에 자금을 빌려주고 주민의 예금을 받는 상업은행 구실도 했다.
“은행에 돈을 마지막으로 맡긴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십수년 전에 은행에 갔더니 예금한 돈을 인출해주지 않더라. 내줄 돈이 없다는 거였다. 그 뒤로 누구도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았다.”(탈북자 F씨)
국가→개인→국가의 화폐순환 구조가 붕괴한 것이다. 1세대 돈주 격인 G씨는 1992년 화폐개혁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수수료를 주고 사람을 사서 신권으로 최대한 바꾼 뒤 남은 돈은 벽돌처럼 묶어서 대동강물에 내다버렸다.”
북한 당국은 통화를 회수하고자 화폐개혁을 하면서 신구화폐를 1대 1로 교환하되 주민보유 현금은 일정 한도까지만 교환을 허용하고, 나머지는 은행에 예금한 후 나중에 지급하도록 했다. 당시만 해도 돈 가진 걸 죄악시하던 때라 G씨는 돈을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다. 1세대 자본가의 상당수가 1993~94년 숙청당했다고 한다.
2세대 자본가들은 ‘달러’나 ‘위안’으로 부를 축적한다. 관료와의 유착, 애국헌금, 국채매입을 통해 보험도 들어놓는다. 국가한테 받은 표창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방패 구실을 한다.
조선중앙은행이 상업은행 기능을 하지 못 하다보니 기업소나 개인은 돈주에게 이자를 주고 자금을 공급받는다. 외화를 축적한 돈주가 자본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 수산업 등 1차산업으로도 돈주의 자금이 흘러들어간다.
2002년 이후 ‘원화 경제’가 ‘달러화 경제’‘위안화 경제’로 개편되면서 ‘외환시장’(외화 암거래 시장)도 확장하고 있다. 외환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는 북한의 돈주와 화교(華僑)다. 외화를 ‘계획’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당국이 암거래를 단속하고 있으나 시장의 외화 수요가 커 외화거래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은 유로화를 공식 외화로 삼고 있다. 북한의 ‘원’은 유로에 환율이 고정돼 움직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로’가 아닌 ‘달러’와 ‘위안’으로 경제행위가 이뤄지고 있다.
북한은 2006년 상업은행법을 제정했으나 상업은행을 아직 설립하지 못했다. 은행을 세울 자본이 없을뿐더러 돈을 떼인 경험이 있는 주민들이 은행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 모란봉에 들어선 옥수수국수공장
청진시의 수남시장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합시장이다. 수남시장에서 판매하는 공산품은 거의 모두가 중국산이다. 식량 생산량이 게걸음 치고 있는데도 기근이 잠잠해진 건 중국과의 무역 덕분이다. 지금 북한의 쌀값은 안정적이다. 5월 1kg당 북한돈 2000원 수준이던 쌀값은 7월 1kg당 18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금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로 상징되는 폐쇄된 경제체제가 결코 아니다. 수출입이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린다. 북한의 시장화는 ‘중국 의존적 시장화’다. 중국은 북한의 산업생산 영역뿐 아니라 주민의 소비생활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초반 이후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중국 비중은 25~30% 수준에 머물다가 2002년부터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2005년엔 중국 비중이 50%를 상회했으며, 2006년과 2007년엔 각각 56.7%, 67.1%를 차지했다. 중국은 2004년부터 대북(對北)투자에서도 1위에 올라섰다.
중국은 지난해 2월 북한의 기업과 개인에게 위안화 결제계좌를 터줬다. 외화를 합법적으로 반입·반출할 루트가 뚫린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위안화 경제권’ 편입이 자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2004년을 기점으로 중국과의 무역이 급증하면서 예전엔 차별당하던 화교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화교들의 위세는 웬만한 도당, 시당 간부에 버금간다. 반면 일본에서 북송된 ‘귀국자’의 처지는 곤궁해졌다고 한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중국어 교육 열풍도 불고 있다. 과외선생을 들여 자녀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북한에서 중국어 구사 능력은 곧 경쟁력이다. 간부들은 자녀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고 싶어한다. 당 간부가 되거나 전문직을 갖는 것보다 중국과 무역하는 일이 자녀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자가 북한의 가족, 친척에게 송금하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H씨는 얼마 전 북한의 가족에게 장사 밑천으로 삼으라고 1000만원을 송금했다. H씨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 북한의 가족, 친척을 부양하는 새터민이 적지 않다”면서 “오늘 중국의 브로커한테 돈을 보내면 내일 북한에서 위안화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평양 만경대기계공작공장.
밀무역이 부담스러운 개인이 중국과 합법적으로 무역하려면 당국에‘와크’(대외무역거래허가증과 쿼터를 합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를 받아야 한다. 와크를 얻으려면 노동당, 국가안전보위부, 사회보안부, 무역성 등에 뇌물을 줘야 한다. 와크는 그 자체로 돈이다. 와크를 빌려주거나 쿼터의 일부를 양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더 이상 공평한 분배는 없다. 통일교와 북한이 합작해 세운 남포의 평화자동차가 생산하는 ‘휘파람’은 값이 1만5000달러에 달하지만 북한에서 꾸준히 팔린다. 평양의 백화점에선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 TV가 팔려나간다. 이집트 오라스콤과 북한 체신성이 합작해 지난해 12월 개통한 3세대이동통신은 기기값을 제외한 가입비만 1000달러에 달하는데도 오라스콤은 수익을 낙관한다. 2만달러가 넘는 120㎡ 넓이의 아파트가 부유층에게 인기라고 한다. 단둥에선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인들이 별장을 구입해 압록강을 내려다보면서 우유목욕을 즐긴다.
탈북자 J씨는 “대학에 다닐 때 잘사는 집 애들과 못사는 집 애들이 따로 놀았다. 부모가 부쳐준 돈으로 외식하는 친구들이 솔직히 부러웠다. 대학교나 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돈이 없어 학교를 중퇴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북한경제는 나름대로 선전했다. 한국은행이 국가정보원 자료를 토대로 추정한 국내총생산(GDP)은 2007년보다 3.7% 증가했다. 같은 해 한국의 GDP 증가율(2.2%)보다 1.5%포인트 높다. 북한의 GDP 증가율이 남한을 앞지른 것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처음이다. 한국의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2210만4000원으로 북한의 1인당 GNI(117만4000원)보다 18.1배 높았다.
“2008년의 경우 기상조건이 비교적 양호해 미곡의 작황이 상당히 양호했고, 대외 경제관계에서도 비록 남북한 간 정치적 관계는 정체했지만 일반 상품교역이나 위탁가공 등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중국을 비롯한 제3국과의 교역도 금액상으로는 크게 확대됐다.”(한국개발연구원)
계획의 반격
북한이라는 국가를 먹여 살린 건 ‘시장’과 ‘중국’ ‘한국의 지원’이었다. 한국의 지원은 줄었지만 시장과 중국은 북한경제의 버팀목 구실을 했다. 6월8일자 ‘뉴스위크’는 “북한 경제를 둘러싼 잘못된 통념이 있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간혹 알려진 것처럼 북한 주민이 20년간 원시적으로 산 것도 아니고 공업이 쇠퇴하지도 않았다. 중국의 도움으로 최근 수년간 인프라를 개선했으며 광산시설도 수리해 제철과 광업을 중심으로 회복에서 성장단계로 나아가는 게 목표다. 북한은 보유한 1000~2000t의 금을 런던과 취리히, 홍콩에서 거래하고 있으며,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주식도 사고판다. 외국 회사가 북한의 천연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자 직접 투자 기회를 찾으면서 대외관계가 확대되고 있으며, 지난해 북한의 무역 규모는 전년 대비 30%가량 급증했다.”
최악의 고비를 넘긴 북한경제는 일반 주민을 중심으로 시장경제 시스템이 확산되면서도 국영기업이나 기간산업 시설에 대해 배급제가 일부 회복되는 등 ‘시장’과 ‘계획’이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 사정이 다소 나아지면서 ‘계획의 영역’이 다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딜레마
북한은 150일 전투를 통해 가용 자원의 상당 부분을 ‘시장’에서 당국 통제를 받는 ‘계획’으로 옮기려고 한다. 불법 상행위 단속은 3월8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마무리된 뒤 더욱 강화됐다고 한다. ‘시장’에 기생해 버티던 ‘계획’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시장은 비사회주의의 서식장”이라는 북한 당국의 표현은 지도부가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2007년 말부터 시장을 제한하는 조처를 취한 북한 당국은 지난해 11월 “1월1일부터 종합시장을 폐지하고 농민시장으로 전환한다”고 결정했다. 날마다 열리던 시장을 매월 1일, 11일, 21일 3회만 열게끔 하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외화시장에 대한 단속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종합시장을 농민시장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주민들은 먹을 걸 주지도 못하면서 국가가 왜 장사를 막느냐고 반발했다고 한다. 시장을 닫으면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고 한다.
‘시장’을 단속하면 시장에 기생해 버텨오던 ‘계획’의 영역도 무너진다. 현재북한의 시장화는 구소련·동구의 초기수준에 도달해 있다. 20년간 현장에서 북한을 들여다본 한 경제전문가는 “150일 전투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은 경제행위를 150일 전투에 의해 조직하면서 시장처럼 계획 바깥에 있는 경제행위를 통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40세 미만 여성의 장사가 금지됐으며 비사회주의그루빠(비사회주의 검열그룹)가 ‘자본주의 사조’(황색바람)를 단속한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150일 전투라는 복고적이고도 강압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경제가 한 고비를 넘긴데다 권력세습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거꾸로 가는 북한
150일 전투는 국가정보원이 김정일 후계자라고 밝힌 김정운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1974년 후계자로 지명받은 후 ‘70일 전투’로 명명한 캠페인을 벌였다. 또 1980년 ‘100일 전투’를 지휘한 뒤 그해 10월 개최된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김정운도 150일 전투 이후 아버지와 같은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문헌은 ‘70일 전투’ ‘100일 전투’가 성과를 거뒀다고 자랑하지만, ‘경제 전투’가 자원분배를 왜곡함으로써 경제는 오히려 후퇴했다.
북한의 ‘경제 개혁’은 지도부의 제1과제인 ‘체제 유지’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체제를 유지하려면 시장을 통제해야 하고 시장을 통제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실패한 체제를 세습하고자 벌이는 ‘150일 전투’가 북한 체제에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은 그래서 나온다.
김일성 사망 15주기이던 7월8일 ‘김일성 추모대회’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그가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3남 김정운은 ‘25세의 청년’이다. 150일 전투는 경제를 망가뜨리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거꾸로 가는 2009년 8월의 북한이 위태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