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예기치 못한 시한부 선고 등은 상투적이면서도 매번 다른 모양새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영화 소재다. 누구나 죽을 것을 알고, 그 죽음이 자신의 예상보다 가까울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기에 그렇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안 순간의 대응방식을 저마다 다르게 그린 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버킷 리스트
이승의 삶과 저승의 삶, 죽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영화는 그 장르가 달라지기도 한다.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을 때, 죽음은 공포의 최종지점으로 여겨진다. 한편 죽음이 변하지 않는 일종의 방부처리가 된다면 로맨스에서 죽음은 때로 구원이 된다. 변하기 쉬운 사람의 마음, 사라지기 쉬운 사랑의 열정이 죽음으로 영원히 보관되기 때문이다. 만일 죽음을 인생의 종착지가 아닌 전환점으로 삼는다면, 그런 설정도 가능할까? 남겨진 자와 떠난 자, 죽음은 알 수 없는 숙제임에 분명하다.
병원에서 탈출한 두 시한부 환자의 최후를 그린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어떤 죽음이 좋을까? 태어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없는 데 반해 죽음의 방식에는 약간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 갑작스럽게 시한부 선고를 받거나 불치병임을 알았을 때 이후의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종종 이렇게 죽음이라는 극한의 지점 앞에 바투 서 있는 자들을 그려낸다. 죽음의 순간이 바로 턱 밑에서 감지될 때, 그때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가장 아름다운 로드 무비 중 하나로 기억되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최종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로맨틱한 선택을 보여준다. 마틴과 루디는 병원의 같은 방에 입원해 있는 환자다. 그런데 이 둘의 병이 심상치가 않다. 마틴은 뇌종양을, 그리고 루디는 골수암을 진단받았는데, 병과 씨름하느라 젊음이 어떻게 소모되고 있는지조차 잊고 있다. 어차피 죽게 될 거라면 이렇게 답답한 병실에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두 사람은 어느 날, 금지된 ‘음료’ 데킬라를 마시며 결심한다. ‘만일 죽음이 예정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남은 시간들을 멋지게 탕진하리라’고 말이다.
‘하나비’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래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흐르는 잿빛 바다 앞에서 그들은 천천히 생의 모래시계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살아 바다를 보았기에 죽어서 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선율이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화면은 관객에게 위안을 건넨다. 답답한 병동에서의 생활을 깨트리고 거리로 나서는 순간 그들의 남은 생은 달라진다. 환자로서 죽음을 맞을 것이냐 아니면 격렬하게 한순간이라도 생을 만끽할 것이냐를 선택하자 죽음의 입구가 달라지는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음악이 흐르면서 그들은 그렇게 바다를 통해 천국으로 간다. 만일 천국이 있다면 그들이 난생 처음 본 그 웅장한 파도 속에 있을 게 분명해 보인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을 맡은 ‘버킷 리스트’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노인판(版)이라 할 수 있다.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대학 신입생 시절 들었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본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이다. 늙은 자동차 정비사 카터에게 그 소망들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잃어버린 추억의 쓸쓸한 흔적으로 남아버린 셈이다.
한편 같은 방에 입원한 다른 노인은 거칠고 괴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바로 재벌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콜슨). 돈을 벌고 사업체를 늘리는 것 외에는 어떤 관심도 없는 수전노다. 꿈과 추억은 있지만 돈이 없는 노인과, 돈은 넘치지만 열망이 없는 또 한 명의 노인. 두 노인은 콤비가 되어 노년의 꿈을 구체화하기에 나선다. 에드워드가 카터의 꿈을 ‘산’ 것이다. 부유한 친구를 만나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는 노인. 어쩌면 영화 ‘버킷 리스트’는 복권을 사며 한 번쯤 바랐던 인생의 행운을 다른 시각으로 그려본 영화일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죽음은 인생의 최종 지점이 아니라, 여생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기회로 제공된다. 죽음에 대한 진실한 고민만으로도 시간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장렬하게 젊은 죽음을 맞이하는 마틴과 루디, 그리고 죽기 전 유쾌한 오락에 빠진 두 노인. 이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일종의 기회다. 최종 도착지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그것으로 가는 과정의 유쾌함,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질감이다.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면 필요한 건 두려움이 아니라 남은 시간의 추억일 것이다.
유능하고 아름다운 젊은이의 죽음을 다룬 ‘타임 투 리브’.
죽음은 순간을 절대화한다. 무한정 남아있을 것만 같던 시간이 셀 수 있는 무엇으로 압축되었을 때, 하루하루는 다른 의미로 격상된다. 사람들은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만 예고된 시간을 견디지는 못한다. 하루하루 기다리는 죽음은 그 자체로 형벌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기운에 모두가 다 관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기다림이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일본의 유명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은 어딘가 결연하고 또 장렬한 데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스타일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던지는 그의 표정과 닮아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 ‘하나비’는 기타노 다케시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인의 죽음에 대한 관념, 그 독특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형사인 니시와 호리에는 파트너를 이루어 야쿠자를 소탕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니시는 딸을 잃는다. 게다가 아내마저 시한부 진단을 받는다. 니시가 아내의 병문안을 간 사이 불의의 습격을 받은 호리에는 불구가 되어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는다. 게다가 호리에를 습격한 범인이 후배 경찰까지 죽이자 이에 분노한 니시는 범인을 죽이고 경찰직을 그만둔다. 문제는 아픈 아내를 돌볼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것. 니시는 야쿠자에게 빚을 지고, 빚 독촉에 시달린다. 어느 날 낮은 탁상에 아내와 마주앉은 니시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떠나자고 말한다. 한겨울 눈이 쌓인 홋카이도로 그들은 여행을 떠난다. 목 아래, 어떤 곳은 머리 위까지 눈이 쌓인 북해도의 도로를 지나 어느새 바닷가에 닿는다. 그리고 한 아름 폭죽을 사와서 터뜨리며 불꽃을 즐긴다.
무작정 여행을 떠난 그들의 최종 도착지, 바다에 닿아 니시는 권총을 꺼내 아내와 자신을 겨눈다. 하나비는 일본어로 불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과 꽃의 합성어, 불꽃. 어쩌면 기타노 다케시는 죽음이란 그렇게 순간에 작렬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몰하는 배처럼 조금씩 사라져가는 생의 마지노선을 바라보며 서있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죽음이다. 사쿠라, 벚꽃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미학도 바로 순간의 사멸과 닿아 있다. 분분히 떨어져 사라질 때 더 아름다운 꽃, 변색과 탈색의 과정을 생략하고 싱싱한 채로 떨어지는 꽃의 매력말이다.
패션사진작가 로맹에게 죽음은 아주 먼 일이다. 그는 젊고, 잘생기고, 매력적인데다가 유능하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말기 암이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유능한 젊은이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보장된 미래의 박탈과 다름없다. 그는 미래의 시간을 차압당한 채 낯선 죽음의 세계로 초대받았다. 공원에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새삼스레 다시 바라보게 된 로맹, 시간은 이제 그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흥미로운 것은 그의 선택이다. 아직 젊은 그는 항암치료를 거부한 채 어딘가로 길을 떠난다. 그의 인생 스케줄에 죽음이 가깝게 예고되어 있다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자신의 근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가족, 애인과 결별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할머니를 찾아 떠난다. 로맹은 그에게 남은 시간을 슬픔과 분노로 허비하기보다 고독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대면하기로 마음먹는다. 죽음은 위로로 해결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임 투 리브’는 로맹을 통해 죽음에 대한 부정 분노,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경의 변화를 밀착해 보여준다.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젊은 감독 프랑수아오종은 죽음에 대해 차분하고 섬세한 시각을 견지한다. 젊고 유능하고 아름다운 로맹은 어떤 면에서 감독의 자화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이 아름다운 페르소나를 통해 죽음이라는 타인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주관화한다.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죽음을 맞이하는, 이 슬프고도 황홀한 아이러니 앞에 선 남자는 연어처럼 천천히 자기 자신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 최후를 맞는다. 어쩌면 죽기에 적합한 시점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마련될 뿐.
죽으면, 사라진다. 프랑스 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미술의 기원을 죽음에서 찾았다. 누군가 죽는다면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니까 그의 물질적 현재, 감각적 세계에서 신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지고, 냄새 맡고, 볼 수 있었던 ‘그’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감각적 세계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 레지스 드브레가 말하는, 죽음을 대신하는 미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라진 신체를 대신하는 물질, 그것이 바로 미술의 시작이다. 종교와 구분되지 않는 일종의 주술로서 미술이 비롯되었다면 분명 부재(不在)는 상징적 물질로 보충되었을 것이다. 죽은 왕을 대신하는 마스크라든지 동상은 부재를 메우는 물질로서 예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소설가 박일문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여자 친구가 자살한 뒤 살아남은 아픔을 이야기한 바 있다. 하루키 열풍의 도화선 ‘상실의 시대’ 역시 먼저 떠난 두 친구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된다. 내 곁을 떠나버린 친구, 자살로 너무나 일찍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지워진 녀석들.
살아남은 자의 대처
의외로 죽음은 남겨진 자의 몫이 된다. 떠난 사람, 죽은 사람의 가장 큰 힘은 이제 더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변하는 것, 마음을 바꾸고 배신하거나 혹은 망각하는 것은 모두 살아남은 자들의 얘기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때로는 죄스러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죄스러운 마음, 우리는 고인에 대한 그 죄책감을 애도로 표출한다. 애도는 슬퍼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애도의 본질은 바로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죽음의 일상화를 보여준다.
일본의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너를 보내는 숲’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애도의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영화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마키코라는 젊은 여성은 오갈 데 없는 노인을 돕는 일에 나선다. 그곳에서 만난 노인 시케키는 한마디로 사고뭉치다. 갑작스럽게 대열을 이탈하기도 하고 폭력적으로 돌변해 난감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는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33년 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다. 시케키는 갑작스럽게 어딘가 숲으로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고 마키코는 그 길에 동행한다. 사실 시케키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죽은 뒤 33년이 지나면 완전히 이승을 떠난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떠날 아내를 배웅하기 위해 길을 나선 셈이다.
마키코는 노인의 아내가 묻힌 곳을 찾아가며 온갖 고생을 다한다. 기억이 변변치 않은 노인을 따라 길도 없는 숲을 무작정 헤맸으니 말이다. 넘어지고 다치고 산사태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고생 끝에 마침내 시케키 아내의 무덤을 찾아낸다.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를 영원히 보내기 위해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한 여정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자신을 두고 떠난 이를 놓아준다.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의 일본어 원제는 ‘모가리 숲’이다. 모가리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소중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 반드시 그 사랑을 지울 시간이 필요하다. 부장품이라도 끌어안아야 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죽음의 치유에는 시간이라는 흐름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보내는 것, 이제는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일 테다.
죽음, 슬픔, 노동, 밥심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모습을 통해 일상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죽은 아들의 3주기인 날 하루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고 떨어져 살던 가족들은 기일을 빌미로 한자리에 모인다.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하나는 그들이 주로 나누는 대화가 먹을 것에 대한 것이고, 그들이 모여 하는 행위가 대개 먹는 것이라는 점이다. 대화의 중간 중간 죽은 아들이 좋아했던 음식이 끼어들기도 하고, 죽어 사라진 그 아이가 얼마나 영특하고 귀여운 자식이었는지에 대한 회고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죽은 아들, 동생, 형에 대한 기억은 먹고 입는 문제, 여름 방학에 2㎝ 자란 아이들 틈에서 조금씩 침전된다. 그렇게 쑥쑥 커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먹고 씻고 잠드는 일상 가운데서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실, 죽음이란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현상인 것이다.
제삿날, 기일은 죽은 이를 기리는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생의 일부로 제도화한 것이기도 하다. 곡을 하고,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하고, 손님을 치르는 가운데 타인의 죽음은 노동이 되고 거듭된 기일을 지나며 ‘일’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죽음의 날카로운 감촉은 서서히 무뎌진다. 그것이 이치이고 또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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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작가 박완서는 죽은 아들의 빈자리가 주는 부재의 고통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 고통은 극복되거나 잊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박완서는 소중한 밥의 힘, 밥심이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게 할 근본이 됨을 얘기했다. 죽음을 이야기하며 정성스레 밥을 지어 먹는 제삿날 풍경. 어쩌면 죽음을 딛고 이어지는 삶의 풍경은 이 소박한 밥상머리에 녹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의 한 조각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거대한 인생의 모자이크를 완성해갈 도리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