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일 국가정보원의 김정운 후계설 ‘확인’ 이후, 국내외 모든 언론의 북한 관련 뉴스는 사실상 김정운으로 시작해 김정운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난무하는 보도와 당국자들의 언급 속에는 과잉해석이 엿보이는 대목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7월 초순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떠돌았던 이른바 ‘왕별 청년’에 관한 소식이다.
북한의 후계자는 김정운이다.’ 2009년 여름, 이 명제는 이제 사실의 영역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북한 소식통’이나 ‘정보당국’을 인용해 김정운 후계설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줄을 이루고, 당과 군, 행정조직 곳곳에서 충성선언과 교양사업이 벌어지는 등 이를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라는 소식이 꾸준히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정부 당국의 공식발언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정부 고위당국자들 역시 사석에서는 김정운 후계론에 힘을 싣는 발언을 아끼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보도도 쏟아져 나온다. 뇌졸중 후유증, 췌장암, 환각증세까지, 다양한 소식이 전해진다. 7월8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의 15주기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수척한 모습은 결정적이었다. 지난해 8월 와병 전과 비해서는 물론 지난 봄에 촬영된 사진들과 비교해봐도 부쩍 쇠약해진 게 역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북한 전문가들은 쇠약해진 모습 자체보다 오히려 ‘이렇듯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 담긴 화면을 굳이 공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북한에서 김 위원장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위치를 감안하면 그의 건강이상은 체제 전체의 안정을 위협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누가 봐도 쇠약해 보이는 모습을 북한 주민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한 것은, 김 위원장의 일선 퇴진과 새로운 권력체계의 등장에 대해 주민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전문에 ‘김정운’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도 벌어진다. 북한과 관련된, 혹은 관련됐을지 모르는 모든 일을 김정운 후계설에 맞춰 해석하는 최근 일련의 흐름이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가 7월7일 이후 벌어진 정부기관 홈페이지 분산서비스거부(DDoS) 공격이 김정운의 진두지휘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는 보도. 한 대북 라디오방송 대표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밝힌 이 소식은 삽시간에 주요언론을 장식했다. 구체적인 증거도 없고 그렇다고 당국자가 확인한 것도 아닌, 일방적인 주장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정운’만 들어가면 뉴스가 되는 이 같은 분위기는 대형오보를 낳기도 했다. 일본 아사히TV의 김정운 사진 오보가 그 단적인 사례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결정적인 계기는 주지하다시피 6월1일 국가정보원의 ‘확인’이었다. 국정원은 북한 당국이 후계자 결정내용이 담긴 외교전문을 해외공관에 보낸 사실을 포착했다며 이를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에게 알렸다. 1월15일 ‘연합뉴스’가 “김 위원장이 1월8일경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정운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하달했다”고 보도한 이래 전문가들 사이에서 빚어졌던 모든 논란은 ‘국가최고정보기관이 국회에 보고한 내용’이라는 강력한 권위 덕분에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적잖은 시간이 지난 지금 정부 관계자들을 통해 확인되는 내용은 당혹스럽다. 일단 당시의 ‘외교전문’이 본부와 공관을 연결하는 공식 전문이 아니었고, 더욱이 ‘김정운’이라는 이름 석자가 포함된 것도 아니었다는 핵심당국자들의 설명이 그렇다. 다시 말해 후계문제 준비작업 개시를 시사하는 ‘서신’의 내용이 파악됐을 뿐, 김정운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파악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미 국정원의 국회 보고 직후에도 전문의 형식을 두고 정부 핵심당국자들 사이에서 말이 엇갈려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례적으로 나서서 정보관련 상황을 알린 국정원의 태도를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정국을 의식한 행동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을 정도. 정리하자면 당시의 정보수준은 후계구도 등 권력변화 징후를 엿볼 수 있다는 정도였을 뿐, ‘김정운 후계’를 단정지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놓고 보면, 2008년 와병 이후 김 위원장의 건강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과 권력변화 준비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인사·조직개편이 단행됐다는 것 외에는 ‘분명한 사실’의 영역에 들어서있는 팩트가 그리 많지 않다. 북한의 공식매체 어느 곳에서도 아직 김정운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고, 이를 보여주는 문건이나 내부자료가 실물로 확인된 바도 없다.
언론들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음에도 적잖은 북한 전문가들이 여전히 김정운 후계설에 대해 유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평양이 대규모 권력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는 인정할 수 있지만, 북한의 모든 행보를 김정운 후계구도 구축의 연결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 측에서 고의적으로 흘리는 역정보일 가능성도 거론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분위기는 ‘지나친 과열양상’이라는 지적이다.
주목할 만한 인물이지만
최근 언론과 당국자들, 학계에서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이른바 ‘왕별 청년’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좀 더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건강이상으로 은거했던 김정일 위원장이 가을 들어 다시 현지 시찰에 나선 이래, ‘왕별 하나’(소장·한국의 준장) 계급장을 단 젊은 군인이 김 위원장의 시찰에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이 남자의 신분에 대해 전문가들은 물론 관계당국에서도 확인하지 못해 미스터리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
7월8일 ‘조선일보’는 “(이 청년은) 후계자로 거론되는 김정운일 수도 있고 다른 고위인사의 자제일 수도 있다”며 “화상 크기가 작고 해상도가 낮아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젊은 경호원이 장군 계급장을 달았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정보당국자 발언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러면서 김 위원장의 처조카인 이한영씨의 책을 인용해 “‘왕별’은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후계를 의미한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연합뉴스’도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지도에 따라다닌다는 30대 젊은 장성’을 거론하며 “김정운이 김정일 위원장의 각종 공개활동에 동행하고 있고 평소 장성 군복도 즐겨 입는다는 얘기도 들려 김정운이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2008년 12월2일 공개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평양 동물원 현지지도
사진②와 올해 1월31일 황해북도 예성강청년1호발전소 현지지도
사진③. 이들 사진에 등장하는 ‘젊은 장성’(원 안)은, 6월14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스위스 유학시절의 김정운’이라며 보도한 사진① 속 인물과 언뜻 닮아 보이지만 20대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 인물은 2007년 11월10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인민군 제 627군부대 지휘부를 시찰할 때도 동행했다(사진④) .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는 이 젊은 장성의 첫 번째 사진은 지난해 12월2일 공개된 김 위원장의 평양 동물원 현지지도 사진이다. 통통하고 비교적 젊어 보이는 얼굴의 이 장성은 언뜻 최근 보도된 김정운의 사진과 닮아 보이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이후 공개된 ‘조선중앙통신’의 김 위원장 현지지도 사진을 분석해보면 이 장성은 올해 2월까지 최소한 여덟 차례 현지시찰에 동행했다.
회색 점퍼 옷깃 사이로 소장 계급장이 분명하게 보인다. 젊은 얼굴에 비하면 이례적으로 빠른 승진. 평양과 황해남도, 자강도와 함경북도 등 여러 지역의 현지지도에 동행한 것으로 보아 현지 관계자가 아니라 김 위원장의 일행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또한 그가 입고 있는 회색 점퍼가 김 위원장도 즐겨 입는 중앙 간부용이라는 점에서 그의 소속이 국방위원회나 당 중앙군사위원회 등 중앙기관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젊은 장성 = 후계구도 준비?
그러나 거의 모든 사진에서 일행 뒤로 물러나 있는 그의 위치나 단체사진에서의 경직된 자세는 ‘후계자’의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항상 검정색 수첩을 손에 쥐고 바짝 군기가 든 사진 속의 태도는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최고권력자의 아들, 그것도 후계구도 승계가 확정된 인물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하다. 더욱이 사진 속 인물은 아무리 젊게 보더라도 김정운의 나이인 20대 중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북한 당국자들의 특징을 감안해도 30~40대에 가까워 보이는 인상. 김 위원장의 현지시찰 사진을 모두 살펴봐도 20대로 보이는 다른 장성급 수행원을 찾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사진을 확인한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운 본인이라기보다는 북한 군부가 키우고 있는 차세대 주자이거나 혹은 로열패밀리의 일원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김 위원장의 이복형제 아들이거나 여동생 김경희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의 수양아들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북한 체제의 특성상 30~40대 젊은 군인의 소장 승진은 로열패밀리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또 하나 대담한 가설은 이 장성이 후계자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현지시찰에 후계자가 동행했기 때문에 그 비서실장도 동행했지만, 후계자의 얼굴은 아직 공개하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비서실장만 조선중앙통신의 현지시찰 사진에 남은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두 가설을 조합해 로열패밀리의 일원이 사촌인 김정운의 후계승계작업을 돕는 핵심요원으로 발탁된 것 아니냐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 인물을 둘러싸고 이렇듯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것은, 이렇게 젊은 인물이 김 위원장의 현지시찰에 고정적으로 동행한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운이라는 젊은 후계자의 등장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젊은 권력측근의 등장을 후계구도 구축작업과 연결해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조선중앙통신’이 그간 공개한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적극적인 해석에는 분명 거품이 존재한다. 문제의 젊은 장성이 처음 현지시찰에 동행한 것이 지난해 12월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인물은 와병 전인 2008년 8월11일 공개된 인민군 제826부대 산하 군부대 시찰 사진에서도 보이고, 그 한 해 전인 2007년 11월10일 공개된 627군부대 지휘부 시찰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장성은 2007년 사진에서도 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다. 평양의 후계구도가 이미 2007년에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이 장성의 빠른 승진이나 현지시찰 동행을 후계구도와 관련짓기란 어렵다. 최근 관계당국이나 북한 전문가들이 이 장성을 특별히 주목하는 것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선입관의 위험성
최근 평양에서 권력구도와 관계된 중대사안이 진행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후계자가 결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게 김정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과 관계당국 사이에 나도는 갖가지 추측과 가설은 상당부분 ‘김정운 후계’를 이미 답으로 놓고 맞춰 해석한 대목이 적지 않다. 민감한 시기인 만큼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 동향을 파악하는 작업은 필수겠지만, 그럴수록 선입관이나 짜맞추기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냉정한 분석이 더욱 긴요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7월8일 공개된 김 위원장의 노쇠한 모습은 ‘진실이 확인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조만간 평양의 권력구도가 극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섣부른 기정사실화나 과잉 해석이 야기할 수 있는 정책판단의 오류를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북한 뉴스가 ‘김정운’으로 시작해 같은 말로 끝나는 최근 상황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