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

  • 이승협│한국노동행정연구원 교수 solnamu@gmail.com│

    입력2009-07-28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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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
    이번에 소개하는 미셸 아글리에타와 로랑 베레비의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란 책은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에 쉽지 않은 책이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분량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질리게 하지만, 책의 내용 역시 만만하지 않다.

    ‘새로운 위기와 조정에 직면한 세계경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이자 조절이론이라는 독창적인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제시한 대가의 본격적인 경제분석서다. 책의 제목과 두께에 부담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을 아예 손에서 놓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해 이 책만큼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냉정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시하는 책을 여태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절이론이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사용하는 기본적인 분석틀을 알아야 한다. 조절이론은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경제적 축적체계와 정치적 조절양식이라는 두 가지 기본개념을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축적체계와 조절양식이 특정 시기와 특정 국가에서 어떠한 형태로 결합(조절이론의 용어에 따르면 접합)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언론매체에서 전후(戰後) 자본주의를 포디즘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포디즘이 바로 조절이론 주창자들이 전후 자본주의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후 자본주의는 대량생산의 경제적 축적체제와 노사 타협에 기초한 대량소비라는 정치적 조절양식이 결합된 특정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무질서의 근원, 아시아

    위에서 설명한 자본주의 경제분석의 기본틀이 이 책에도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대량생산, 노사타협, 복지국가, 대량소비라는 키워드로 요약되는 전후 자본주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위기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위기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변화하기 위한 조절의 과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무질서는 일국적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책의 제목에 도달했다. 세계적 자본주의의 무질서.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한 걸음 나아가보자. 조절이론은 경제적 축적체제의 변화로 인해 무질서가 발생하고, 이를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적합한 조절양식이 들어서야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안정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의 저자는 전후 자본주의를 실물생산에 근거한 산업자본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전후 포디즘형 자본주의의 경제적 축적체제의 어떠한 변화가 세계적 자본주의의 무질서를 발생시켰는가? 아글리에타와 베레비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무질서가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 실물생산경제에서 가상경제로 축적체제가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의 1부 무질서의 기원은 이러한 이행과정을 다양한 자료에 기초를 두고 실증적으로 제시한다.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주도권이 이전되고, 정보기술을 매개로 한 금융자본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동기화됨으로써 자본축적의 구조가 점차 새로운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축적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조절양식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달리 보면, 개별 국가는 세계적으로 동기화된 금융자본주의의 급격한 확장에 대처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97년에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가 아시아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금융자본주의로이행하는 축적체제 변화와 산업자본주의에 맞춰진 조절양식 사이의 부조화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에 경제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모두 (금융)세계화에 노출된 상품생산 국가들이었다. 반면,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은 이미 1980년대 이후 탈산업화 과정에서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조절양식을 고민해왔다.

    이 책의 저자가 세계적 자본주의의 무질서의 기원을 아시아 위기에서 찾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부조화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에 기초를 둔 금융자본주의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기본적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절 양식

    아시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신흥 발전국들의 성장체제가 변형되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금융과 산업의 관계가 주주가치를 매개로 한 금융 중심의 경제체제로 전환되었다.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주주가치의 압력으로 인해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기업들은 실물경제보다는 신용을 매개로 한 가상경제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10년 전 아시아 경제위기가 끝남과 동시에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전후 자본주의의 구조변화에 대한 분석은 개별 국가의 정치적 조절양식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현대 자본주의의 실질적 주체인 미국, 유럽, 일본과 중국은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축적체제의 변화라는 새로운 무질서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저자들은 국가 단위의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의 변화를 설명함으로써 세계적 변화가 개별 국가의 조절양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조절이론적 분석의 장점은 단일한 자본주의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절이론의 분석적 개념인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은 전체 자본주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 역시 상이한 접합 형태에 따라 상이한 자본주의 유형으로 발전한다는 다양성과 복잡성을 전제한다.

    즉 동일한 운동법칙을 따르는 단일한 세계자본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자기논리를 갖는 다양한 자본주의 유형을 허용함으로써 개별 국가의 자본운동이 갖는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상이한 유형의 자본주의는 세계적 자본주의의 구조변화를 내화하는 정도의 차이(경제적 축적체제의 차이)를 발생시키며,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경제정책으로 대응함으로써 정치적 조절양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국, 유럽, 일본, 중국은 금융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일찍부터 주주자본주의가 발전하여 경제에 대한 금융의 우위가 확고한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은 미국에 비해 여전히 상품생산과 실물경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주주자본주의로부터의 압력에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금융부문은 상대적으로 미발달상태다. 중국의 경우 정치체제적 특수성으로 인해 주주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는 저발달 상태에 머물러 있다.

    장기지속의 과정

    아글리에타와 베레비는 현재 드러난 자본주의의 무질서에 대한 개별 국가 차원의 대응을 분석함으로써 개별 국가의 금융정책이 새롭게 등장한 금융자본주의적 축적체제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조절능력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미국은 금융자본의 활동성이 극대화되어 사회적 불평등이 확대되는 불안정성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과 유럽은 효율적 성장동력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이 책이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결론은 자본주의의 무질서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조절양식인 글로벌 거버넌스다. 상이한 축적체제를 가진 개별 국가에 대한 글로벌 거버넌스가 새롭게 제도화되지 않으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금융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전후 자본주의의 기축통화 구실을 해왔던 미국 달러의 지위를 박탈하고, 국제적 복수통화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국제적 금융 불균형을 해소할 것을 제안한다.

    이 책이 분석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금융자본의 역할과 비중을 과도하게 강조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또는 저자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조절양식으로서의 글로벌 거버넌스 내지는 세계 공동체국가라는 논의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혹은 조절양식에 대한 강조를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개입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함의는 명확하다.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장기지속의 과정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자본주의의 무질서’미셸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지음/ 서익진 김태황 서환주 정세은 옮김/ 518쪽/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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