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등. 모두의 희망사항이다. 회사도, 국가도, 축구선수도, 중학생도 저마다 1등을 원한다. 1등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각 분야의 ‘1등 코드’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회는 한국 양궁. 20년 넘게 세계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종목이다. 한국 양궁의 산증인 서거원(53) 양궁협회 전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 양궁의 ‘1등 코드’를 분석한다.‘편집자’
그가 7월3일 기자를 만나자고 한 곳은 사무실이 아니었다. ‘현장’이었다. 그가 감독으로 있는 인천계양구청 양궁팀 훈련장에서였다.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박성수 코치와 선수들이 7월의 땡볕 아래서 뿜는 열기로 훈련장은 뜨거웠다.
▼ 한국 양궁이 전세계 양궁에서 부동의 1위라는 게 맞나요.
“한국 양궁은 선수, 지도자, 제품 등 전 분야에서 부동의 세계 1등 종목입니다. 한국은 등록선수가 일본의 10분의 1, 미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1등입니다. 또 전세계 국가대표팀 감독의 3분의 1이 한국 출신입니다. 국산 활도 세계의 표준이 됐습니다. 베이징올림픽 당시 8강에 진출한 선수의 90%가 한국 회사인 삼익스포츠가 만든 활을 들었어요. 레저양궁시장에서도 한국 활 점유율이 45%에 달합니다.”
▼ 한국산 활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점은 새롭네요.
“장비 문제는 몇 번을 이야기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양궁장비시장은 미국이 70%, 일본이 30%를 장악했어요. 한국은 ‘0’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력은 세계정상에 올라섰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장비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경우가 생겼어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장비의 국산화를 이루자고 결론을 내렸지요.”
▼ 장비 때문에 경기 결과까지 달라지나요.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당시 남자 선수는 미국제품, 여자는 일본제품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남자선수들이 최신 미국 제품을 구입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회사에 연락하면 ‘제품이 아직 없다. 제작에 들어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한국의 제품 구입을 막기 위한 견제라고 봤지요. 그 활을 구입하기 위해 1년 넘게 뛰었는데 올림픽에 나가보니 한국선수들만 구닥다리 활을 가지고 있었어요. 결국 남자단체 결승전에서 미국에 1점 차이로 무릎을 꿇고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언론에선 내막도 모르고 ‘한국이 정보에 어두웠다. 실패가 예정됐다’고 비판했지요. 그래서 양궁협회를 중심으로 장비를 개발하기로 하자 모두 미쳤다고 했어요. 장난감 수준의 활을 가지고 시합을 한다고 하자, 반발이 대단했어요. 그렇지만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밀어붙였어요. 그때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달러가치가 치솟아 외제 활 가격이 폭등해 초등학생용 풀세트가 350만원까지 했어요. 그래서 초중학교 경기는 국산 활로 하도록 규정하는 등 많은 노력 끝에 이제 10년 만에 세계 톱선수 90% 이상이 국산 활을 쓰고 있어요. 한국산은 가격도 제일 비쌉니다. 대한체육회 소속 경기단체 중 장비국산화율 100%는 양궁 종목이 유일합니다.”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서거원 전무.
“아니에요. 머리보호대 같은 장비도 전부 수입품입니다. 양궁은 영국이 종주국인데도 불구하고 국산화가 100% 이뤄졌습니다.”
한국인 체형은 양궁에 부적합
▼ 왜 한국 양궁이 1등인가요. 한국인 체형이 양궁에 유리한 건가요. 아니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양궁이란 운동에 잘 맞나요.
“사람들은 한국이 워낙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요. 동이족(東夷族)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정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출발한 양궁은 유럽인에게 맞는 운동이에요. 동양인은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길고, 팔꿈치에서 손목까지는 짧아요. 유럽인은 반대예요. 이 때문에 유럽인 체형에 맞는 활을 가지고 겨룰 때 동양인이 불리해요. 한마디로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은 운동이에요. 한국의 성공은 뚜렷한 목표의식과 치밀한 전략, 뼈를 깎는 노력 덕분입니다.”
▼ 한국인의 정신 세계와는 맞는 측면이 없나요.
“우리 선수들이 외국선수에 비해 순종적입니다. 그래서 훈련지시를 하면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돼있습니다. 이것은 외국선수에 비해 장점이지요.”
▼ 서 전무가 주도해 정착된 독특한 훈련법이 많다면서요.
“베이징올림픽 때 봤지요? 한국선수들이 활을 쏘려고 하자 관중이 호루라기를 분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슈팅 순간에 누가 ‘빽’하고 불면, 선수는 집중력을 잃게 됩니다. 해외 경기에선 모든 관중이 한국선수들의 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유럽에 가면 야유까지 퍼부어요.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다양한 훈련방법이 개발돼야 합니다. 잠실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렸을 때 구단과 협의해 거기에서 양궁을 연습하고 시합경기를 했어요. 수천명의 관중이 있는 사이클 경륜장에서도 대회를 했어요. 슈팅 순간 야유를 극복하기 위해 국방부에 부탁해 공수특전사에서 선수들이 활을 쏘는 순간 총을 쏴달라고 했어요. 흔히 군사문화, 군사문화 하는데 군사문화에 좋은 훈련방법이 많아요. 공수특전사, 해병UDT(특수전여단), 북파공작원 훈련…. 금메달과 은메달이, 혹은 4강 탈락 여부가 마지막 한 발에 의해 결정돼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최대 공포심을 느낀다는 11m 높이에서 하이다이빙을 했고, 45m 높이에서 그리고 62m 높이에서 번지점프를 했어요.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는 코린토스 운하에서 120m 번지점프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두 달 후 아테네올림픽 때 코린토스 운하에서 번지점프를 자진해서 먼저 한 선수 순서대로 메달이 나왔다는 거죠.”
훈련장에서 서거원 전무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와 23년 함께 지낸 박성수 코치 (왼쪽에서 세 번째)도 보인다.
▼ 대회가 열릴 때마다 1등이라는 부담이 크지요.
“선수들의 결단력을 키우기 위해 획기적이고 다양한 훈련방법을 개발한 뒤 아무리 보안을 유지하려고 해도 외국에서 4,5개월이면 따라 해요. 때로는 우리 훈련방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서 합니다. 2등은 쉬워요. 1등을 쫓아가면서 역전기회를 포착하면 돼요. 한국 전자산업도 일본을 따라가다 역전했듯이. 그러나 1등은 계속 혼자서 가야 해요.”
▼ 마치 해도에 없는 바닷길을 가는 것과 비슷하겠네요.
“예. 그래요. 그렇다고 연구개발(R&D)센터가 있어서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선수단 코치 감독이 함께 고민해요. 한국 양궁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진취적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에 선수 코치들이 독서도 많이 합니다.”
▼ 슈팅할 때 결정적인 순간은 몇 초가 걸리나요.
“보통 한 발 쏘는 데 30초가 걸립니다. 그런데 셋업에서 당겨서 쏘는 순간은 7초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슈팅 순간은 1,2초입니다. 인간의 뇌는 완벽한 집중을 3초 이상은 못해요. 그래서 슈팅 순간에 조준하면 3초 이내에 무조건 쏘아야 하는 게 규칙이에요. 그 3초를 위한 훈련입니다.”
▼ 서 전무가 쓴 ‘따뜻한 독종’이라는 책을 보면 눈물겨운 훈련장면이 많이 나오던데요.
“시차적응 훈련을 위해 낮과 밤을 뒤바꿔 생활하는 훈련도 했고,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속리산 문장대에서 태릉선수촌까지 그 무더위에 하루에 10시간씩 4일 동안 혼자 걸어오는 훈련도 했어요. 무박삼일 한라산 등반, 천호대교에서 63빌딩까지 걸어서 가는 훈련, 정말로 다양한 훈련을 합니다.”
▼ 훈련을 할 때 서 전무도 함께 하나요.
“그럼요. 솔선수범이라는 말이 있지만 보통 지도자들이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양궁은 지도자들이 훈련과정에 100% 같이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에요. 저뿐만 아니고 모든 코치 감독이 그렇게 해요. 힘들지만 코치와 감독이 함께 훈련하면 분위기가 좋아져요. 선수들은 ‘감독님들도 저렇게 땀 흘려서 훈련을 하는데…’하면서 태도가 달라지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여자국가대표팀이 충주호에서 높이 65m 번지점프를 하는데, 여자선수 하나가 고소공포증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팀 감독이 연달아 9번이나 뛰어내렸어요. 그런데도 선수가 또 못 뛰어내리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튿날 그 선수가 소속된 실업팀 감독이 연달아 세 번 뛰어내렸어요. 그러자 뒤에서 비명소리가 났어요. 그 선수가 갑자기 뛰어내린 거예요. 아마 자살하는 심정으로 뛰어내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뒤 그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이후 고소공포증을 극복했어요.”
▼ 얼마 전 서 전무가 기업체를 상대로 한 강의를 보니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40년 양궁이 국내에 도입될 당시 국내 100대 기업 중 지금 살아남은 기업은 12개뿐이고, 88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무한경쟁시대에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대한민국 양궁은 이 같은 무한경쟁시대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양궁은 문자 그대로 무한경쟁시대예요. 환경이 수시로 바뀌어요. 즉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방식을 바꾸어요. 전세계가 ‘한국 타도’를 외치고 있어요. 한국 독주가 너무 오래간다며 양궁 발전을 저해하는 국가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렇다면 왜 한국이 오랫동안 독주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변화를 끊임없이 준비해요. 아테네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4년 뒤 베이징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 도입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경기규칙을 연구했어요. 그래서 예상가능한 변화를 설정해서 대표팀 훈련에 도입했어요. 그런데 베이징올림픽 때 새롭게 도입된 단체전 경기방식이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것이었어요. 이제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마자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양궁방식이 어떻게 바뀔지를 연구 중입니다. 예측하지 못하면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스포츠도 기업경영과 다를 게 없어요.”
금메달리스트도 천둥에 화살 놓치면 대표팀 탈락
▼ 한국 양궁이 너무 강해서 대표팀으로 선발되기가 어려워지자, 국적을 바꿔 호주나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가 나온다고 합니다. 한국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맞습니다. 이제 국제대회에서 한국지도자 간의 경쟁뿐만 아니라 국적은 다르지만 한국인끼리 경쟁하는 일이 생기고 있어요. 한국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기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올림픽 대표팀은 보통 열 달 동안 열 번 정도 경기를 치러 남자 3명, 여자 3명을 정합니다. 먼저 대표선발전에 참가할 선수 100명을 선발합니다. 선발전은 다면평가를 하는데요. 예를 들어 1차전은 체력훈련 열심히 한 사람이 합격하도록 하고, 2차전은 정신력, 3차전은 담력, 4차전은 집중력, 5차전은 승부근성, 6차전은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 7차전은 극기력, 8~10차전은 실제 현장에 투입됐을 때 국제대회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검증합니다. 때로는 기상대에 전화를 걸어 태풍이 올 가능성이 높은 날짜에 일부러 경기날짜를 잡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궁은 선발전이 끝날 때마다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합니다. 1차전에서 64명이 선발되면 2차전에서는 1차전 기록은 무시합니다. 따라서 다양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 국가대표가 될 수 없습니다. 체력은 좋은데 담력이 약한 선수는 담력을 테스트할 때 탈락합니다. 기존 성적을 누진해서 최종 평가에 반영하면 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마지막 순간에 조금만 실수하면 대표팀 탈락입니다. 실제로 아주 우수한 선수가 슈팅 순간에 천둥이 쳐서 화살을 놓치는 바람에 대표팀에서 탈락한 적도 있습니다.”
▼ 능력이 있는 선수에 대한 배려는 없나요.
서거원 양궁협회 전무.
▼ 실제로 그렇게 떨어진 선수가 있나요.
“그럼요. 윤미진 선수도 태풍 속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순간 ‘어머나’ 하면서 놀라 탈락했어요. 그래서 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한 명을 구제하려면 다른 한 명이 불이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양궁에선 모든 선수가 대표선발전의 공정성을 인정합니다. 무명선수도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대표로 선발될 수 있어요. 연고주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어요.”
▼ 그렇다면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딴 박성현 선수도 출발점이 같나요.
“그럼요. 실제로 박 선수는 이번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양궁에서 ‘과거의 금메달’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의 기량’이 중요합니다. 양궁에서 새로운 스타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이런 시스템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궁 선수 중에는 스타의식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폼을 잡다간 한순간 탈락할 수 있기 때문에 목에 힘줄 수 없습니다. 남자팀에서도 박경모 선수가 16강에서 탈락했어요. 과거 남자양궁의 미국, 여자양궁의 소련은 거대한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두 국가가 양궁에서 2류,3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이유는 국가대표 선발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혹시 이 같은 기계적인 시스템에 대해 회의한 적은 없나요.
“있었습니다. 저도 인간인데. 감독으로서 누가 뛰어난 선수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선수가 대표팀에서 탈락하면 고민이 많지요. 저 선수를 데리고 가야 금메달을 확실히 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외를 두면 원칙이 무너지고 선수자원이 고갈됩니다. 그러면 양궁 전체가 무너집니다. 이처럼 국가대표 선발이 공정하기 때문에 양궁계는 파벌이 없습니다.”
▼ 이런 시스템에서도 장수한 선수가 있지요.
“남자는 박경모 장용호 선수, 여자는 박성현, 윤미진 선수가 장수했지요. 특히 김수녕 선수는 대단했습니다. 김 선수는 독특한 뭔가가 있어요. 담력과 침착성을 타고났고, 집중력이 탁월한 선수였어요. 김수녕 선수 참 독합니다. 철저한 승부사였고, 지고는 못 사는 선수였습니다. 연습에서라도 지면 아예 밤을 새웁니다.”
▼ 어떤 책을 읽어보니 스포츠나 음악계에서 성공한 지도자는 스타 출신이 아니고 성공직전까지 갔지만 실패한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양궁은 어떤가요.
“100% 공감합니다. 스타 출신 지도자들은 지도자로 성공하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배고픔을 안다고, 선수 시절 뛰어난 선수들은 많은 관심을 받고만 자라왔기 때문에 실패의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풀지를 못합니다. 리더는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무명도 아니지만, 실력도 어느 정도 있고, 항상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지도자로 성공합니다.”
▼ 서 전무는 선수시절 어땠습니까.
“선수로선 상위권이었지만 탁월하지는 못했습니다.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못해 선수들을 통해 못다 한 꿈을 이루려는 경향이 강한가 봅니다.”
▼ 한국 출신 지도자들이 전세계에 진출한 것이 한국 양궁에 위협요소가 아닌가요.
“베이징올림픽에서 박성현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을 딴 중국 장쥐안쥐안 선수는 사실 19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 4관왕이었던 양창훈 감독의 수제자였습니다. 양 감독이 중국에서 4년 동안 중국선수들을 지도했는데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중국이 너무 앞서가서 우리가 양 감독을 한국에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 감독이 키운 중국 제자에게 금메달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한국 지도자들이 외국에 나가있는 것이 기회이기도 합니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더욱 노력하지요. 좋은 쪽으로 생각합니다.”
서 전무는 인터뷰에서 지도자와 선수 간에는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1994년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삼익악기 양궁팀이 본사 부도로 해체되자 함께 있던 선수들을 받아줄 팀을 찾기 위해 국가대표 감독직 사표를 내고 인천계양구청 양궁팀이 창단될 때까지 16개월 동안 백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자신은 대표팀 감독 월급만 받고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팀을 구하는 데 자신을 다 걸기 위해 대표팀 감독직을 던진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박성수 코치도 23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그는 다른 팀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 세상에 영원한 1등은 없다고 합니다.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한국 양궁도 영원히 1등 한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한국 양궁은 펀더멘털이 튼튼합니다. 공정성, 변화에 대한 열정, 이런 게 바뀌지 않는 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한국 양궁은 어느 한순간에 1등이 된 게 아니고, 20년 동안 저변을 꾸준히 확대하면서 만들어진 1등 인프라 구축으로 1등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만하게 올라왔기 때문에 혹시 지더라도 완만하게 오래갈 것입니다.”
▼ 중국처럼 인구가 많은 국가가 양궁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면 한국 양궁에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지요. 현재 여자는 중국이, 남자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가 강한데 이제 남자종목에서 인도까지 라이벌로 부상했어요.”
박경모·박성현 커플. 서 전무는 이들의 연애 사실을 몰랐던 게 원통하다고 말했다.
▼ 베이징올림픽 호루라기 사건은 정말 예측하지 못했나요.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끝나고 대표팀 감독과 코치를 질타했습니다. 물론 슈팅 순간에 호루라기를 부는 행위는 비신사적 행위로 있을 수 없습니다. 유럽에선 야유를 하다가도 활을 쏘려는 순간에는 조용합니다. 그래도 이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문제입니다. 앞으로 더욱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선수 관리입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박경모 선수와 박성현 선수의 눈빛이 이상해서 대표팀 감독에게 ‘뭐가 있는 것 같다’며 추적해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둘이 사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감독과 코치가 ‘1%의 가능성도 없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올림픽 한 달 전에 ‘내가 보기엔 뭔가 이상한 것 같다’며 다시 챙겨보라고 지시했는데 같은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결국 두 선수가 올림픽이 끝난 뒤 결혼하기로 발표를 했어요. 공교롭게도 두 선수가 개인전 결승전에서 지고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저 자신에 대해 화가 나요. 좀 더 대책을 세워서 관리했다면 둘 중 한 명은 금메달을 땄을 텐데 하는 자책감 때문에 한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너무 분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난 적이 많아요.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경기를 할 때 두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좋은 쪽으로 활용할 방법이 많거든요. 일본 하면 사람들이 디테일에 강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양궁에서만큼은 일본도 ‘한국 양궁=디테일’이라고 하면서 감탄합니다. 남은 상상도 못하는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게 한국 양궁의 장점이에요. 그런데 ‘한국 양궁=디테일’이 베이징에서 무너져 한이 맺혔습니다.”
▼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양궁을 디지털로 전환해야 해요. 한국이 정보기술(IT) 강국이라고 하는데 훈련과정에 IT를 접목해서 선수들이 각자 프로그램을 앞에 놓고 자세의 장단점을 체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문제는 돈이 들어간다는 점인데. 이럴 때일수록 대기업들이 적극 후원해 한국 양궁이 더 높이 도약했으면 좋겠습니다.”
서 전무는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이날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이종휘 우리은행장이 선물로 줬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직접 ‘따뜻한 독종’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던 서 전무는 큰 대회가 없는 요즘에는 기업체 특별강사로 인기가 높다.
사실 필자가 서 전무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기업 임원으로 있던 지인이 “지금까지 들은 외부 인사 강연 중 가장 인상 깊은 강연”이라며 그의 책을 추천해줬기 때문이다.
“기업을 대상으로 강연하다 보면 양궁이 적은 인원으로 세계를 제패한 비결이 디테일하게, 치밀하게 목표를 세워서 실천했다는 데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것 같아요. 요즘 기업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양궁 이야기에 자극을 받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