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희대의 팜파탈 미실

150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살인미소

  • 이영철│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7-29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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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안방 드라마의 화제는 단연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이다. 타고난 외모와 교태로 1500년 전 신국 신라를 주무른 것으로 알려진 미실은 뜻밖에도 실존 여부가 불명확한 인물. 웃으면서 칼을 찌르는‘살인미소’ 여인을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본다.
    희대의 팜파탈 미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역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탈랜트 고현정.

    요즘 방영되는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이 먼저 시작한‘자명고’와 ‘천추태후’를 따돌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해 주몽, 광개토대왕, 연개소문, 대조영 등 강한 남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마초 드라마가 대세를 이뤘지만 최근 TV 드라마는 강한 여성성을 부각시키며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른 가부장사회의 쇠락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여기에 ‘선덕여왕’도 가세했다

    7월7일 방영된 14회분에서 ‘선덕여왕’은 마(摩)의 시청률로 불리는 30% 벽을 돌파했다. 사실 이처럼 가파른 고공행진은 주인공인 선덕여왕(585?~647, 재위 632~647)이 아닌 희대의 ‘팜파탈’(femme fatale·요부)인 미실(美室·547?~621?) 덕분이다. 드라마에선 아직 덕만(선덕여왕의 본명)이 어린 상황이고, 이 틈을 타서 농염한 여인으로 등장한 미실의 치명적이고 고혹적인 자태와 카리스마에 시청자들이 빨려들고 있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만 전하는 인물

    그런데 미실은 누구인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일사(逸事)인 ‘삼국유사’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성덕왕 때 진골 출신 역사가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전하는 신라 최고의 경국지색으로 신라 왕실의 혼인 인맥인 인통(姻統) 중 하나인 대원신통(大元神統)을 대표하는 색공지신(色供之臣)이다. 여왕도, 왕후도 아닌 미실이 타고난 미도(媚道·방중술)와 미소(媚笑·아양을 떨며 웃는 웃음)로 신국(神國) 신라를 주물렀다는 게 오늘날 우리에게는 쉽게 다가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선덕여왕’에서 사극(史劇)에 처음 도전해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의 변신은 시청자에게 파격적이고 신선한 감동을 준다. ‘여명의 눈동자’(1991)에서 안명지 역, ‘모래시계’(1995)에서 윤혜린 역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고현정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국정을 농단하고 화랑의 막후 실력자로서 웃으면서 칼을 찌르는 소리장도(笑裏藏刀)로 살인미소(殺人媚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화랑은 누구이고 한창 진위논쟁 중인 ‘화랑세기’는 어떤 역사서이며, 미실은 어떤 인물인가. ‘삼국사기’ 설총 열전을 펼치면 끄트머리에 김대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히 소개돼 있다.

    “김대문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 전기 약간을 지었는데,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김대문이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지금의 경기도 광주)의 지방장관인 도독(사실은 총관)이 되었다고 하니 그가 살았던 시기는 신문왕대(재위 681~692)~성덕왕대(재위 702~737)로 통일 후 전제왕권 확립기로 보인다. 김대문은 위 4권 외에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고유 왕호와 불교 수용 사실을 수록한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저술했다.

    김대문은 국가가 주도한 관찬 사서가 아닌 개인의 독자적인 의지에 따른 역사 서술을 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가로 볼 수 있다.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설총, 강수, 최치원 등 유학자의 열전은 있지만 김대문의 경우 독자적 열전이 없다. ‘바보 온달’과 여성인 ‘효녀 지은’도 삼국사기에 열전을 갖고 있는데 진골 경주 김씨인 김대문이 열전에 누락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당시 대다수 유학자가 성당문화(盛唐文化)에 심취해 있을 때 유독 김대문은 군계일학으로 신라의 한문학을 주체적으로 펼쳐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그의 캐릭터가 12세기 금(金) 압박기에 유교보수사관의 시각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여하튼 ‘고승전’은 고승의 전기를 다루었고, ‘화랑세기’는 신라사의 빛인 화랑들을 기록했으며 ‘악본’은 음악(예악)을 다루었다. ‘한산기’는 한산주의 인문지리를 기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화랑세기’(681~687년 저술)는 그 전후의 인물도 다수가 포함됐을 것이나 신라 진흥왕대로부터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까지의 화랑들을 소개했으리라 추측된다.

    ‘화랑은 요즘의 F4’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 37년(576) 기사를 보면 화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을 결함으로 여겨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놀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을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기로 했다. 이리하여 드디어 예쁜 여자 둘을 골랐는데 하나는 남모(南毛)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불렀다.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그를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으므로 준정은 사형을 당하고 무리에 가담한 사람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예쁘게 생긴 남자를 택해 곱게 단장을 시키고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불러서 받들었다.…(중략)…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로부터 나고 좋은 장수와 날랜 군사가 이로부터 생긴다(賢佐忠臣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실상인즉 유불선(儒佛仙) 3교를 포함하여 인간을 교화하는 것이다.…(중략)…당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귀인 자제 중에 고운 자를 택해 분을 발라 화장을 시키고 이름을 화랑이라 불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했다.”

    희대의 팜파탈 미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일부.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봤을 때 화랑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꽃 같은 여자인 화랑(花娘)보다는 오늘날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F4’와 같은 귀공자였던 것 같다.

    김대문의 저술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나 그 후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왔다. 그런데 1989년 2월 1300여 년 만에 부산에서 ‘화랑세기’ 필사본(발췌본)이 발견되고, 이어 1995년 4월에 또 다른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됐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세기(花郞世記)’라고 나오나 1989년 발췌본은 ‘화랑세기(花郞世紀)’로 표기되었고 1995년 필사본은 앞부분이 없어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면 ‘화랑세기’ 필사본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화랑세기’의 원 소장자는 일제강점기 궁내부 왕실도서관에 사무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창화(朴昌和·1889~1962)인데, 그가 일본 황실 문서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일제가 약탈해 간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필사를 했다는 것이다. 박창화는 한국 역사학계의 전설적인 기인으로 6·25전쟁 이후에는 충북 괴산중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근무했다고도 한다.

    1995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서강대 이종욱 교수(현 서강대 총장)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화랑세기’의 실체가 밝혀지고 그 신빙성을 놓고 진위논쟁이 학계에서 뜨겁게 진행됐다. 진본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잃어버린 신라사를 복원하게 됐다고 고무되었으나,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성애소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여하튼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교태, 가무, 방사 갖춘 요부

    ‘화랑세기’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부터 신문왕 원년인 681년까지 140년에 걸쳐 왕이 아닌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인데, 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 32세 풍월주 신공(信功)까지의 세보(世譜)를 밝히면서 진골정통(眞骨正統), 대원신통 또는 가야왕실 계보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화랑세기’에 20세 풍월주인 예원공(禮元公)의 아들인 오기공(吳起公)이 김대문을 낳았다고 기술한 점이다.

    ‘화랑세기’를 토대로 김대문의 가계를 정리하면 내물왕-미해-백흔공-섬신공-위화랑-이화랑-보리공-예원공-오기공-김대문으로 이어진다. 그중 위화랑이 1세 풍월주, 이화랑이 4세 풍월주, 보리공이 12세 풍월주, 예원공이 20세 풍월주, 오기공이 28세 풍월주였다. 그야말로 김대문은 풍월주 가문으로 ‘화랑세기’를 저술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은 단연 미실인데, 미실은 진흥왕 8년(547)에 옥진(玉珍·미실의 외할머니)의 딸인 묘도(妙道)와 법흥왕의 외손자인 미진부(未珍夫)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를 보면 옥진의 꿈에 칠색조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본 후 묘도가 임신해 미실을 낳았다고 한다.

    ‘화랑세기’는 미실의 아름다움에 대해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소지왕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험함으로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을 모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옥진이 ‘이 아이는 오도를 부흥시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미도와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제(帝)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미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라고 했다. 교태와 가무, 방사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미실은 왕과 왕비, 풍월주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나갔다.

    신통력도 발휘

    더구나 드라마 ‘선덕여왕’ 13회분에 나오는 기우제 장면은 미실의 신통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진평왕이 기우제를 올려도 내리지 않던 비가 미실이 기우제를 올리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실이 무슨 재주로 천기를 읽었을까. 바로 ‘사다함의 매화’라는 책력(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대국가에서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따라 천문(天文)은 하늘의 뜻을 묻는다는 의미로 정치적 안정과 천재지변의 상관관계가 매우 중요한 만큼 미실은 책력을 이용해 왕을 능가하는 신성불가침의 신통력을 보여줬다. 사실 삼국시대에는 천문학이 발달했는데 백제는 중국 남조 송(宋)의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을 수입해 활용했음이 무령왕릉 매지권(買地券·토지거래증서)에서 확인되고 있고, 미실이 백제를 통해 책력을 구입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미실이 살던 당시 신라는 유교적 금욕주의가 안착되기 전으로 성(性)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라, 마복자(摩腹子·임신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의 남자에게 사랑을 받은 후 낳은 아들), 근친혼, 형사취수제, 자매혼 등이 성행했다. 미실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 결혼했으나 일찍이 터득한 방중술로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 5세 풍월주인 사다함,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 관계를 맺었다. 또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진흥왕을 유혹하고, 진지왕을 폐위시켰으며, 열세 살 소년 진평왕의 동정을 빼앗으며 색공으로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서 주무른 ‘팜파탈’이었다.

    또한 미실은 여러 왕실과 풍월주와 관계를 맺어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수종과 난야 반야공주, 동륜태자와의 사이에서 애송공주, 세종과의 사이에서 목종과 하종,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보종, 그리고 아버지를 모르는 딸 애함 등을 낳았다. 미실의 출산은 권력을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는 방편으로 작용해 색공으로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이 자라 왕실의 패밀리가 되거나 풍월주가 되었다.

    신라를 치마폭에서 주무르다

    당시 미실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미실의 종자매인 윤궁(允宮)이 골품이 낮은 문노(文弩)를 마음에 두자 진지왕을 폐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한 문노를 아찬 이상의 진골로 승격시켰다. 이후 문노는 8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미실의 아들 11세 풍월주 하종과 동생 보종의 불화로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에게 밀리면서 미실의 힘도 약화되었고 역사의 중심이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와 가야계의 거두인 김유신으로 옮겨가는 추세였다. 그러던 중 김유신이 15세 풍월주로 있던 612년부터 미실의 막내아들인 보종공이 16세 풍월주를 마치던 621년 사이에 미실은 70세를 전후해 세상을 떠났다.

    희대의 팜파탈 미실

    소설 ‘미실’의 작가 김별아.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의 삶은 그야말로 권력과 사랑을 추구한 집념이 강한 여성이지만 드라마는 미실을 냉혹한 악녀 분위기로 몰아 선덕여왕과 선악 대립의 마니교적 이원론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5년 소설 ‘미실’(문이당)로 미실을 널리 알린 김별아씨는 최근 ‘주간동아’(691호)와 한 인터뷰에서 “나(소설)의 미실과 드라마 속의 미실이 전혀 다르다”면서 “드라마에서는 미실의 캐릭터를 악녀처럼 다룬 것 같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해석한 미실은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가 확립되기 전 삼국통합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구현한 정치적 인물이면서 사랑의 여인이다”라고 규정했다.

    김씨는 또 ‘주간동아’ 694호에서 “미실은 본질적인 여성 그 자체로 성녀이면서 요부이고, 어머니이면서 정부(情婦)다. 그동안 문학에 등장했던 여성들은 성녀 아니면 창녀로 구분됐지만, 나는 모든 여성이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다고 본다. 모성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성적 매력에 대한 갈망도 있고, 사회적 성공을 꿈꾸면서도 한 남성에게 완벽한 사랑도 받고 싶어한다. 미실의 권력욕은 역시 단지 왕후가 되기 위해 발현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화랑 사다함과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후 미실은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정치에 개입한다. 이런 모든 욕구에 충실한 여성을 그리고 싶었고, 그 여성이 바로 나의 미실”이라고 했다. ‘선덕여왕’ 드라마 작가가 귀 기울일 만한 내용이 아닐까.

    ‘선덕여왕’ 드라마의 진로

    방짜(질 좋은 합금)가 퉁짜(질 나쁜 합금)가 되지 않기 위해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 비율을 78대22로 유지해야 하듯이 ‘선덕여왕’ 같은 역사드라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효율적인 배합이 필요하다. 역사드라마는 역사가 던지는 메시지와 드라마가 주는 재미가 적절하게 혼합되었을 때 역사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또 역사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지만 드라마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는 것은 불가피하나 드라마를 핑계 삼아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임의로 복원하여 호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역사드라마인 만큼 철저한 고증이 요구된다. 얼마 전에 종영된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가 앉아 있는 황궁에 마오쩌둥의 낙관이 찍힌 병풍이 쳐져 있었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비결이 서태지만 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인 양현석과 이주노가 제 역할을 잘했기 때문이듯 ‘선덕여왕’ 드라마가 성공리에 피날레를 장식하려면 큰 뼈대를 이루는 주연급 못지않게 뼈대를 받쳐주는 조연급 배역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수반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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