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결과에 불복해 반정부 투쟁을 선언한 미르 후세인 무사비 후보(가운데 두 팔 벌린 인물)가 집회에서 지지자들의 열띤 성원에 답하고 있다.
의외의 결과와 부정선거 의혹
6월12일 투표가 시작되면서 기록적인 참여율을 보이자 ‘녹색혁명’을 낙관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3900만명이 참여해 투표율이 85%에 달했다. 하지만 투표가 종료되면서 무사비 후보의 승리 전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경찰과 바시즈 민병대가 테헤란 전역에 배치됐고 개표가 진행 중이던 내무부 청사는 봉쇄됐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도 불통됐다. 투표 완료 3시간이 채 못 돼 내무부는 아마디네자드 후보가 62.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무사비 후보는 33.75%를 얻는 데 그쳤다. 이어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아마디네자드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선거를 지켜본 많은 사람은 즉각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3900만 표가 수작업으로 개표됐다는 것에 의문을 보였다. 개표 전에 내무부 관리들에 의해 투표함이 옮겨졌다는 보고도 있었다. 파장이 커지자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혁명수호위가 의혹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라면서 법적 통로를 통해 불만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수호위는 650여 건의 부정 사례를 접수했다. 무사비 후보 측은 △야당 개표 참관인의 활동 방해 △시라즈, 타브리즈 등에서의 투표용지 무배포 논란 △아마디네자드 후보에 대한 TV 선거광고 추가 허용 △언론의 편파적 선거보도 △아마디네자드 선거운동 진영에 바시즈 민병대 개입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6월20일 헌법수호위는 낙선한 대선후보들을 불러 선거 결과와 부정 의혹에 대해 논의했고, 22일 부분 재검표 결과를 발표했다. 헌법수호위는 “최소 50개 지역에서 유권자 수보다 많은 표가 나오는 등 일부 부정사례가 있었지만 대선 결과를 번복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헌법수호의의 조사가 선거과정의 적법성을 검토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시간벌기였다고 분석했다. 무사비 후보 측은 선거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독립적인 국제 선거감시단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광범위한 선거부정이 있었다는 관측이 많다. 이란 정권이 선거 결과에 개입할 만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전 선거에 불참했던 유권자들을 개혁파가 성공적으로 동원하면서 이란 정부가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 결과를 놓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박빙의 승부를 피하기 위해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아마디네자드 후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핵 프로그램의 추진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태도 등 이란의 정책방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미국 등에 보낸 것일 수도 있다. 하메네이가 국민 여론을 잘못 읽었거나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이란 정권을 교체하려 한다는 편집증적인 의심 때문에 하메네이가 악수를 뒀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현실적이며 유효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대대적인 선거부정은 저지르기도 어렵고 은폐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란에서 젊은 층과 개혁 성향 유권자가 상대적으로 적고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농촌과 도시 서민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반부패 메시지, 국가안보 이슈에서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은 이란인 다수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관측도 많다. 박빙 승부를 예측했던 여론조사도 도시 중산층이 과다 대표돼 믿을 수 없다는 분석도 있다. 이제는 실제 선거결과와 관계없이 이란 정권과 무사비 지지세력 사이의 교착상태가 어떻게 해결될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6월12일 대선 결과는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전례 없는 수준의 대중시위를 촉발시켰다. 결과가 나오자 무사비 지지자들은 테헤란 등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선거 결과가 발표된 직후 이란 내부무는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집회를 금지했지만 시위는 테헤란은 물론 마시하드, 타브리즈, 시라즈, 이스파한 등 주요 도시에서 계속됐다. 외국 언론인 입국 제한과 통신수단의 통제로 정확한 시위 참가 규모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테헤란에서 벌어진 시위 참가자는 수십만 명 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지지하는 맞불시위도 전개됐지만 시위 규모는 대개 1만명 이하에 불과했다.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도 무사비의 도전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아야톨라 유수프 사네이 등 고위 성직자들도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게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라고 압박했다. 국제사회는 이제 현재의 교착상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될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 상황을 30년 전 이란 이슬람 혁명 또는 20년 전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유혈사태와 비교하기도 한다.
제2의 이란 혁명?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이란 정부는 강하게 대응했다. 6월14일 100명 이상의 개혁파 인사가 체포됐다. 무사비 전 총리도 가택연금됐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는 15일 테헤란 혁명광장 시위현장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시위를 독려했다. 이날 시위는 평화롭게 시작됐지만 시위 이후 일부 시위대와 바시즈 민병대원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바시즈 민병대가 발포하면서 최소 7명이 숨지는 유혈참사가 발생했다. 15일 테헤란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돌과 벽돌을 경찰에게 던지고 차량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최루가스 등으로 응사했고 야간에는 두 차례 대학 기숙사를 급습했다. 16일 밤이 되자 테헤란 가가호호의 지붕에서 ‘알라 우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의 시위방식이 30년 만에 재현된 것이다. 18일에는 시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다른 개혁파 지도자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하타미 전 대통령이 이끄는 온건 성직자 그룹인 ‘전투적 성직자 연합(ACC)’은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란 정치체제의 공화주의적 측면이 무너질 수 있으며 정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타미 전 대통령은 또 “국민들의 표를 지켜내지 못했다”며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