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장애인은 전체 장애인 중 43%나 되지만 임용비율은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국가직 7·9급 공채시험에서 선발예정 인원의 5% 이상을 장애인에게 할당해 매년 선발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경증장애인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고용 여건이 더욱 나쁜 중증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특별채용시험을 실시한다.”
평균 39.3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지난해 12월에 최종합격한 사람은 총 18명(7급 5명, 9급 9명, 연구사 1명, 기능직 3명)으로 연령별로는 40대 3명, 30대 9명 20대 6명이다. 서류와 면접전형만으로 선발돼 교육기간과 수습기간을 거쳐 이제 막 발령받은 이들을 만났다.
서울 계동 현대사옥 10층에 있는 보건복지부 장애인권익지원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동휠체어에 앉아 한창 전화상담 중인 뇌성마비 장애인 장수호(39)씨가 보인다. 상담이 끝난 뒤 직원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흔들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부정확한 발음이었지만 열성적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1시간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 그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대학 국문과에 들어갔어요. 집 안에 있을 때가 많아서 책 읽기를 좋아했거든요. 그러다 동아리에서 장애인 권익 운동을 하게 됐고 졸업하고도 그렇게 했지요.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어요. 단념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당시에는 사회 환경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많았어요. 장애인 스스로 노력해 열악한 사회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시 소아마비 장애인은 의대에 갈 수 없었어요. 입학규정 중에 비커를 들고 몇 미터를 어떤 기구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어떻게 소아마비 장애인이 통과할 수 있었겠어요. 저만 해도 대입시험을 모 중학교 교실 맨 앞자리에서 봤는데, 책상 다리 사이로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아 아주 불편한 자세로 시험을 봤습니다.”
그는 졸업 후 장애인 권익 보호 운동을 계속했다. 1999년에는 장애우권익연구소 부산지부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장애우고용촉진법을 만드는 데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중증장애인 특채 공고를 보게 돼 7급 공무원이 된 장씨는 현재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사업자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회가 이런 곳인가
“영세업자들에게까지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태료를 내라고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법을 유연하게 해석하긴 합니다. 그래도 설득하고 설득하죠. 민간에서 정책을 비판할 때와 달리 여기에 있으니 여러 사안이 함께 보입니다. 예산이나 부처 간의 조율 문제가 있더라고요.”
장애인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한 사람은 비단 장씨뿐만이 아니다. 여성부 운영지원과에서 장애인복지를 담당하는 작은 체구의 김은경(42)씨도 ‘역사기행’을 담당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았다. 여섯살 때 방앗간 사고로 오른팔이 절단된 그녀는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학습지 방문교사가 되고자 했지만 “교사 이미지에 좋지 않다”는 고용주의 말을 듣고는 “사회가 이런 곳인가” 싶어 취업의 날개를 접었다.
그렇게 5년간 지내다 ‘사회복지사’의 꿈이 생겼다.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직업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운동회를 앞두고 연습하던 친구들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한 저 같은 장애인도 보듬어주고 싶었고요.”
뒤늦게 석사 학위를 받아 사회복지사가 된 그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장애인 재활상담을 하고 장애인복지관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 6년간 틈틈이 공부해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르몬 치료 부작용으로 일을 쉬게 됐고 때마침 중증장애인 채용 공고를 봤다.
“나이제한에 걸려 공무원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마침 그해부터 나이제한이 없어졌더라고요. 막상 이력서를 내고 서류 전형 등을 통과해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공무원이 되니 꿈만 같았어요.”
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에서 민원업무를 담당하는 서정웅(31)씨도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공무원이 된 경우다. 뇌성마비 지체2급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뒤 바로 종합복지관에 취업해 노인 재가(在家)복지를 담당했고, 그 뒤 3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며 공무원시험 준비를 병행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면 나랏돈을 받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공무원은 아니어서 불안했죠. 그래서 안정적인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려고 졸업 후 세 번이나 시험을 봤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다 보니 잘 안 됐어요. 그러다 이번에 합격했는데 좋죠. 하고 싶었으니까요.”
보건복지가족부 국립재활원에서 서무업무를 보는 안춘목(42)씨도 마찬가지다. 하반신마비로 하지장애1급인 그는 다치기 전에는 전기공학을 전공하다 다친 후에는 사회복지를 공부해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했다.
일반 기업 출신도 여럿 보였다. 1기생 18명 중 10명을 인터뷰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전산 업무 경험이 있었다. 노동부 진주지청에서 국비장학생 관련 업무를 하는 김동완(33)씨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한 뒤 줄곧 병원 전산실에서 일하다 공무원이 됐다. 이제 막 아빠가 된 그는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자 직장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