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이주 앞둔 ‘마찌꼬방’ 기능공들의 한숨 “한때는 제조업 강국의 토대,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다”

  • 김수영│자유기고가 futhark@hanmail.net│

    입력2009-07-30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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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조업 강국의 토대였던 기능공들이 사라지고 있다. 도시 재개발로 공장이 외곽으로 밀려나고, 중국과 동남아의 값싼 제품들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 서울 왕십리, 문래동, 청계3가, 부천 원미구 등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기능공들의 삶터 ‘마찌꼬방’의 오늘.
    [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6월 중순 하왕십리의 한 ‘마찌꼬방’에서 기능공이 용접을 하고 있다.

    6월13일 토요일 오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1번 출구 앞. 작은 금형 가게들이 몰려있는 일명 ‘마찌꼬방’ 거리. 굵은 장대비가 닫힌 셔터를 연신 때려도 단 한 곳도 문을 열지 않았다. 일요일도 없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인근의 한 부동산중개업자에 따르면 “장사가 잘되지 않아 몇 년씩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도 있다”고 말했다.

    왕십리뉴타운 3구역 맞은편 대로변은 아직까지 개발의 바람이 비껴간 곳이다. 몇몇 공작소에서 선반작업을 하는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로변 뒤로 한 블록 안쪽에 ‘00 정밀’ 등의 간판을 내건 ‘마찌꼬방’들이 흩어져 있다. 그래도 문을 연 곳은 불과 서너 곳. 머리가 허옇게 센 노동자 몇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조업의 최하위 단위

    ‘마찌꼬방’(일본말 합성어로 거리의 ‘하꼬방’ 같은 가게란 뜻)이란 제조업 분야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공장을 일컫는 말이다. 3~4평짜리 좁은 공간에 선반 밀링 연마기 같은 기본적인 공작기계를 두고 사장 한 명에 직원 한두 명이 일한다. 이런 형태의 공장은 광복 이후에 등장해 한때 번성했으나 현재는 서울 청계3가, 문래동, 왕십리동, 부천 원미구 등지에 일부가 남아 있다.

    ‘마찌꼬방’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대표적인 것은 기업의 재하청(再下請)을 받아 부품 등을 만드는 일이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가 그중 한 가지를 다른 작은 공장에 맡긴다. 작은 공장은 더 작은 공장에 맡기고, 그 공장은 다시 마찌꼬방에 맡기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흔히 쓰는 공산품 제작이다. 플라스틱통 빗자루 풀 칼집 식권 액세서리 등 실생활에 쓰이는 물건들은 고급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찌꼬방에서 이러한 물건을 직접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 과정에 일부 참여하고 있다. 제품 만드는 틀을 만드는 금형, 거푸집을 만드는 주물, 금속판에다 음각을 하는 조각, 플라스틱 등의 원료를 금형에 넣어서 모양을 만들어내는 사출, 압력을 가해 모양을 만들어내는 프레스, 철판으로 만드는 판금 등 하는 일은 단순하면서도 다양하다.

    지하철 상왕십리역 대로변, 1번과 6번 출구 주변에는 옥제정밀 성진볼트 성광공업사 동진공예 등 낡고 오래된 간판들이 마주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평범한 산동네였지만 길을 사이에 두고 지대가 높은 쪽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낮은 쪽인 하왕십리동 700번지 일대는 왕십리 뉴타운 3구역으로 재개발된다. 작년 4월 관할구청인 성동구청으로부터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받아 올 7월이면 이주가 완료된다.

    왕십리 일대에 처음 마찌꼬방이 들어선 것은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에는 청계천변 가게들의 규모와 맞먹을 만큼 성장했다. 특히 왕십리 재개발 3구역에는 현재 수십여 곳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600여 업체가 성업하기도 했다.

    ‘잠시 외출합니다. 010-466-****’이라고 적힌 한 가게의 미닫이문은 새까만 기름먼지 더께로 덮여 있었다. 문을 밀자 삐걱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순간 뒤에서 누가 불렀다. 퀵서비스 회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양복바지 차림의 신사였다.

    “왜 남의 집 문을 허락도 없이 열어? 다 고철뿐이라 훔쳐갈 것도 없어.”

    그는 잠시 외출 중이라는 주인 K씨였고, ‘퀵서비스’라고 새겨진 빨간 조끼를 입은 남자는 그의 동료였다. 주인이 안내한 미닫이 문 안쪽은 지붕이 낮아 굴속처럼 캄캄한 데다 천장과 바닥은 검은 기름때로 반질반질해서 마치 강원도 사북이나 고한의 탄광사무실 같았다. 기계의 마찰열을 줄이기 위해서 쓰던 윤활유의 알싸한 냄새가 건물 곳곳에 배어 있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분위기였다. 밀링기계가 3대, 절삭기 1대, 그 외에도 몇 가지 기계들이 놓여 있고, 구석에는 금형틀이 몇 대 놓여 있었다.

    K사장은 29년째 왕십리 같은 자리에서 금형을 만들어왔다. 1978년, 그가 처음으로 만든 제품은 야구장에서 쓰는 작은 플라스틱 라디오의 금형이었다. 그 뒤에 가로등이나 모델하우스 등에 쓰이는 조명기구도 만들었고, 쓰레받기 금형도 만들었다. 한때 8명의 직원을 데리고 일할 때는 월매출이 2억원에 육박했다.

    “얼마 전에 잠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친구는 1980년대에 공장을 접고 아파트를 사고 다른 장사를 시작해서 지금은 10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사는 부자가 됐더군요. 저는 그때 이후 부도를 세 번이나 맞아서 집도 팔고 차압이 들어와 기계마다 빨간딱지 붙이고 그랬지요. 어렵게 사업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빈손으로 나가야 하니 화가 안 나겠어요?”

    수천만원 기계가 고철덩어리로

    마찌꼬방은 부침이 심해서 부도를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선 현금거래가 원칙이고, 어음을 받더라도 그 자리에서 할인받는 조건을 요구한다. 직원들 역시 업체가 언제 부도날지 모르다 보니 월급을 미리 당겨 받는 선불을 요구해왔다.

    “10년 전쯤 여기서 못 살겠다고 중고기계를 사서 중국으로 간 사람이 많아요. 그때는 기계 시세도 좋았지요. 고생고생하며 버텨봐야 끝이 이겁니다. 지금은 기계를 팔려고 해도 고철값밖에 못 받아요. 집에 있을 수는 없어서 문만 열어놓고 그냥 하루하루 때우는 거지요.”

    [르포] 사라지는 기능공들

    하왕십리 ‘마찌꼬방’거리를 한 상인이 지나가고 있다.

    15~16년 전에 1500만원씩 주고 산 기계는 이제 수십만원짜리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5대의 기계를 모두 팔고 마찌꼬방을 정리해도 그는 빚더미에 앉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지폐감식기 금형. ‘바다이야기’ 게임이 단속대상이 되면서 다 만들어놓은 금형값도 못 받았다. 이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일감도 없어서 한달에 80만원씩 벌써 8개월치 월세가 밀려 있다. 언제 차압이 들어올지 몰라 그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 벽 너머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옆집은 나무를 조각하는 집이다. 그러나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나무 조각은 단가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하루종일 깎아도 집세가 밀리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문을 잠가야 한다며 일어서더니 구석에서 엽총을 하나 꺼내갖고 왔다.

    “이거 예전에 내가 금형 만들 때 쓴 겁니다. 샘플로 갖고 있는 거니까 경찰서에 총기신고하지 않은 거죠. 부도를 맞아 너무 힘들 때 돈 떼먹는 놈들 가만두지 않으려고 갖고 있었습니다.”

    6월26일 금요일 오후 4시. 왕십리 3구역 대로 안쪽의 한 식당. 마찌꼬방 사장 10여 명이 삼겹살과 오징어를 구우며 왁자지껄하게 환송연을 벌이고 있었다. 식당 밖에는 검은색 대형 벤츠 한 대가 길을 꽉 막고 서 있었다. 환송연의 주인공은 이 골목에서 태어난 70줄의 사업가다. 그는 이 일대의 마찌꼬방을 비롯해서 건물을 여러 채 갖고 있는 덕분에 상당한 이주보상비를 받았다. 그가 고향을 떠나면서 그동안 함께 울고 웃었던 이웃들에게 한턱 내는 날이었다. 양복바지에 셔츠를 입은 그는 기름밥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한눈에 봐도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뒤 예닐곱 명이 남았다. 그중에는 마석의 공단에서 일을 하는 박 사장, 포천에서 주물공장을 하는 강 사장 등 외부로 떠났던 인사들도 끼여 있었다. 그날의 화제는 단연 이주보상비였다.

    “이사를 가고 싶어도 못 가. 다른 데를 알아보고는 있는데 자리가 없어. 버틸 때까지 버텨볼 거야.”

    3구역 대로변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일흥정밀, 신흥금속 같은 크고 작은 마찌꼬방 사장들의 고민은 월세였다. 현재 이들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100만원을 내고 있다. 그런데 마찌꼬방들이 한꺼번에 이주하면서 때아닌 전세난이 일어난 것이다. 왕십리에서 갈 만한 곳은 성수동과 용두동, 조금 멀리 영등포구 문래동 일대와 서울 인근으로는 경기 부천과 시흥이 꼽힌다. 이들의 사정을 훤히 아는 집주인들은 기존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세를 올려 왕십리에서 온 마찌꼬방을 받으려고 한다. 성수동과 용두동은 1년 새 월세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왕십리와 비슷한 수준의 장소를 얻으려면 보증금 2000만원에 150만원은 내야 한다.

    성동구청에선 송파에 새로 생긴 동남권 유통단지를 추천하지만 임대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아 평범한 마찌꼬방 사장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곳은 애초 청계천 복원으로 이주해야 했던 마찌꼬방을 위해 특별분양됐지만, 임대료가 비싸 아무도 입주하지 않자 답답한 집주인들은 전매제한을 풀어달라고 농성 중이다.

    송파 유통단지는 그림의 떡

    “어떻게 된 게 일반 가정집이나 공장이나 이주비가 똑같아. 2000만~3000만원선밖에 안돼. 세금 못 낸 거 내고 월세 내고 나면 이사할 돈도 없어. 압류 풀고 나면 얼마나 남을지….”

    이주비는 공장의 크기와 기계 대수 등을 감안해 책정된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7~8대의 기계를 갖춘 마찌꼬방의 경우 3300만원 정도가 나왔다. 이 정도면 제법 규모가 큰 마찌꼬방이다. 조만간 이사를 해야 하지만 갈 곳을 정한 곳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다만 용역회사에서 벽이나 전봇대에 붙여놓은 철거와 이사 스티커가 이주를 실감하게 한다. 한때 500여 업체가 가입해 있던 왕십리금속연합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송연 자리는 끝이 났지만 뒤늦게 합석한 몇 사람 덕분에 술자리는 다시 불이 붙었다. 30년 넘게 판금을 하고 있는 송 사장은 근처 행당타운에 살고 있다. 그는 그래도 알뜰하게 재산을 모은 축에 속한다. 아파트는 한 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1년 전 8명의 직원을 데리고 마찌꼬방을 시작한 그는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의 공장장 출신이다. 그가 세 들어 있는 곳은 기역자 구조의 한옥으로 문설주며 기와, 서까래 등이 언뜻 봐도 행세깨나 하던 집이다. 성수동에서 이 정도 규모의 공장을 얻으려면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150만원으로 현재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주어야 한다. 송 사장은 공장자리를 보러 다니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

    “나 혼자서 일해도 지금 인건비가 안 나와. 몇 달째 월세 못 내는 건 둘째 치고 집에 단돈 몇십만원도 못 갖고 갔는데 어디 가서 지금 공장을 구해.”

    왕십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송 사장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그의 별명은 ‘59년 왕십리’. 애창곡이 ‘59년 왕십리’인데다 정읍에서 왕십리로 올라온 게 1959년이라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지난해 프레스에 손가락 세 개와 팔뚝 살점을 뜯겨버렸다. 30년 동안 두부공장을 하던 그는 몇 년 전 업종을 바꿔 프레스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거의 쓰지 못하는 오른손에는 거친 목장갑이 끼워져 있다. 그의 눈을 젖게 만드는 것은 짓뭉개진 손이 아니라 한순간의 실수로 금의환향하려던 평생의 꿈이 날아가버렸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화이트 칼라보다 월급 많아

    송 사장 옆에 앉은 박씨는 경남 산청군 신득면 출신으로 성북동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수첩을 만들고 있는 양지사에 다닐 때 3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다 1969년에 왕십리로 스카우트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왕십리에서 받은 첫 월급은 7만6000원. 당시 대학등록금이 3만원 정도였으므로 그가 받은 월급은 한국은행이나 다른 화이트 칼라보다 많은 파격적인 액수였다. 당시 기준으로 그가 가진 조각기술은 최첨단 기술이었고, 왕십리 일대는 벤처기업단지쯤 되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했습니다. 대신 동생 셋을 대학까지 뒷바라지하는 것으로 배움에 대한 한을 풀었지요. 총각 때 모은 돈을 불려주겠다던 이모가 돈놀이로 다 날려버렸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는 조각, 금형에 이어 지금은 사출을 하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사출이 인기를 얻자 힘든 금형일을 버리고 사출을 택했다. 그의 10평 남짓한 마찌꼬방에는 반자동 사출기 두 대가 돌아가고 있다.

    “IMF체제 때는 오히려 장사가 잘됐어요. 그런데 점점 상황이 안 좋아져서는 올해 상반기에 겨우 1200만원 벌었습니다. 석유 값이 오르니 플라스틱 원자재 값이 뛰고, 전기요금도 오르고….”

    이들은 스스로 3D업종에 종사하는 천한 기술자들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외부인의 시선을 대신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다.

    “마찌꼬방의 위력이 대기업 못지않았습니다. 600집에 한 집당 3명씩만 고용해도 1800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한때는 보통 3~4명, 많게는 10명까지 거느린 집도 많았지요. 더욱이 지금은 주물의 경우 우리나라랑 중국이랑 가격이 비슷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만 기술을 배우려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한 10년 뒤면 이 시장도 다 없어질 겁니다. 마찌꼬방을 지키는 사람들이 대부분 50대가 넘었거든요.”

    지금까지 왕십리에서 버텼던 마찌꼬방들은 어떻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공장 문을 열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여간한 일이 아니다. 약은 사람들은 마찌꼬방이 아무리 잘되어도 규모를 키우려 하지 않았다. 규모가 작으면 망하더라도 금방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마찌꼬방의 금형공들은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 때 정부에서 양성한 기능공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좋은 때는 70년대 후반이었다. 그러다 80년대초 정부 차원에서 금형 부문이 발전해야 한다고 지원책을 펴자 공급과잉이 일어났다. 5~6년 기술자로 일하면서 한두 가지 간단한 기술을 익히면 저마다 창업 대열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제조업 강국의 토대

    그러나 고급 기술을 배울 기회나 경영이나 영업, 세무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창업부터 하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약점을 이용해 사기가 극성을 부렸다. 1980년대 초반 3~4년 기술을 익힌 기술자의 월급이 150만원선으로, 기술이 좋다는 기술자들은 몇 달씩 선불로 당겨썼다. 하루가 다르게 창업하다 보니 공장 월세와 기술자들의 월급이 점점 올라가 마찌꼬방의 수익구조는 더욱 열악해졌다.

    그들이 가장 ‘날리던’ 시기에 한국의 생산성은 미국 생산성의 15% 안팎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미국 생산성의 30%를 웃도는 남미와 달리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저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미국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빈곤층을 위한 저가상품시장과 물건값에 관계없이 일정 수준의 질이 보장되는 중간계급 소비자를 위한 시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수출은 저가시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쳐도 우리나라는 정부의 임금억제 정책으로 저임금에 기초한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냉전시대에도 미국은 한국의 중요한 시장이었다.

    그러나 1989년 미국은 한국에 부여하던 최혜국 대우를 철회했다. 한국은 미국에서 누리던 관세혜택이 없어지자 중국 등 동남아와 가격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수출을 주로 하던 회사에 줄을 대던 마찌꼬방이 줄줄이 무너지고, 눈치 빠른 업체들은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국내에는 내수 위주의 회사에 줄을 대던 마찌꼬방들만 살아남았다. 워낙 규모가 작아서 위기를 맞아도 부초처럼 어딘가에 가서 붙으면 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저가의 동남아 물건들이 밀려들면서 국내의 마찌꼬방도 이제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정부에서 중소기업을 육성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마찌꼬방의 경우 자본축적이나 기술축적이 안 되다 보니 내부적인 자생력이 형편없어요. 우리나라를 아직도 제조업이 부양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마찌꼬방의 기능공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0명, 100명씩 데리고 있는 중견 사업장이 하나 생기면 지역민이나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그런 공장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도시가 재개발되면서 공장을 밀어내고, 대규모 공장들이 경쟁력 없는 작은 공장들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 지원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내부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것까지는 지원하기가 힘드니까요.”(송정희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장)

    제조업의 맨 아랫 단계인 마찌꼬방은 한때 제조업 강국 한국의 하부구조를 떠받치는 튼튼한 토대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정보화니, 녹색성장이니 하는 구호 속에 제조업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2009년 7월 왕십리 마찌꼬방의 우울한 미래를 암시라도 하듯 처량하게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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