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어업, 북한 자본주의 전초지대로 뜨다”

  •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09-07-30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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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실험, 김정운 후계자 확정, 개성공단 전면중단 가능성…. 최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제목들이다. ‘북한 이슈’가 또다시 한반도를 뒤흔들고 있다. ‘신동아’는 8월호부터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가 바라보는 북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탈북한 북한 엘리트 출신 기자로 인터넷에서 파워블로거로도 활동 중이다.‘편집자’
    “어업, 북한 자본주의   전초지대로 뜨다”

    함경북도 근해에서 밥조개, 섭조개를 양식하고 있는 김책대흥수산사업소 어부들.

    북한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어디일까. 북한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선뜻 장마당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질문에 주저 없이 수산업 분야라고 대답한다. 이 분야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개인이 회사를 차리고 고용권을 행사했으며 삯을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자’도 많다.

    북한 어업의 과거와 미래를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북한 어부 이모씨를 사례로 들어 글을 전개하기로 한다. 이씨의 생활상은 실제 북한 동해안에 살고 있는 한 어부와 90% 이상 일치한다. 필자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이씨를 잘 알고 있었고 서울에 와서도 매년 이씨의 근황을 들었다. 그의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일부 사실을 전체 맥락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도에서 바꾸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씨가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 고향인 동해안의 한 어촌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1980년대 초반. 그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한 공장 노동자로 배치됐다. 이 마을에는 수산협동조합과 협동농장이 있었다. 수산조합에는 200마력짜리 어선 두 척(배 길이가 약 20m)과 75마력짜리 어선, 그리고 작은 쪽배들이 있다. 수산조합에 다니면 노동자, 협동농장에 다니면 농장원이라고 불렸다. 1980년대에는 노동자와 농장원의 생활수준이 비슷했다.

    수산노동자로 불리는 어부들의 일에도 철이 있다. 어부들은 6월 중순경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1980년대엔 정어리가 정말 많이 잡혔다. 그런데 냉동시설이 없어 아무리 많이 잡아와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정어리잡이 배는 연일 만선이었다. 배가 돌아오면 마을 어귀에 있는 확성기에서 방송이 흘러 나왔다.

    “방금 정어리배가 도착했습니다. 정어리 1㎏에 4전입니다.”



    3~4시간쯤 지나 다시 방송이 울린다. “정어리 1㎏에 2전입니다. 빨리 가져가십시오.”

    다시 몇 시간이 흐르면 “정어리 공짜로 가져가시오”라는 방송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정어리를 사서 먹지 않았다. 먹고 싶으면 부두에 나가 아는 사람에게 그냥 달라면 됐다. 냉장고가 없어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은 정어리는 가까운 농장 밭에 버려졌다. 여름이면 늘 정어리 더미가 썩으면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마을에 퍼졌다.

    어부들은 다음날 또다시 바다에 나간다. 고기잡이는 ‘혁명과업’일 뿐만 아니라 배급과 월급을 받아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임무이기도 했다. 당시 배급 할당량은 1인당 약 600g이고 월급은 60원 안팎이었다. 계획량을 채우지 못하면 배급은 줄어들지 않으나 월급은 삭감된다. 많이 잡아오면 인센티브도 받는다. 그러니 열심히 잡아올 수밖에 없다.

    1980년대엔 정어리를 거름으로 사용

    썩고 말고는 이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정어리를 실어가기 위해 상급기관에서 어쩌다가 자동차를 보낼 때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어리가 싸구려 생선이라는 인식이 강해 그렇게 실어가 봤자 기름 값도 못해 방치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고기가 어촌에서 거름이 될 동안 양강도나 자강도 등 내륙 주민들은 생선을 구경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사회주의의 병폐다.

    7월 중순부터 나오는 오징어는 말릴 수 있어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오징어철은 10월말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한 달 정도 배 수리 기간을 거치면 12월부터 명태철이다. 명태철은 2월까지 계속되는데 이때가 수산조합이 가장 바쁜 때다. 200마력급 어선이 나가서 만선하면 약 10t을 실을 수 있다. 200마력짜리 어선 선장은 수십 년을 바다에서 보낸 사람들이며 수산조합의 핵심 기둥이다. 과장하면 바다에서 명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다. 이씨 마을에서는 명태를 많이 잡아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소위 ‘영웅선장’도 나왔다. 북한 배우들이 인민배우, 공훈배우라는 명예칭호를 받듯이 우수한 어부도 공훈어부라는 칭호를 받는다. 전국적으로 몇 명 안 되는 공훈어부가 이씨 마을에 있었다.

    잡아온 명태는 황태로 만든다. 마을 앞 백사장에 나무로 덕장을 만들고 명태를 걸어놓는데 겨울에는 장관을 이루었다. 마을 사람들은 먹고 싶으면 덕장에 가서 명태를 벗겨온다. 물론 형식상 경비원이 있지만 밤에 가서 몇 두름(1두름은 20마리)을 벗겨 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경비원도 같은 마을 사람이라 봐도 못 본 체하기 때문이다.

    명태 철에는 어부의 아낙들도 모두 동원됐다. 명태가 10t씩 가공장에 부려지면 동원된 아낙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온밤을 새워 명태 내장을 따고 명란을 선별했다. 명란과 말린 명태는 해외에 수출된다고 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산물 중에서 해외에 수출되는 것은 전복과 해삼, 말린 명태와 명란이 고작이었다.

    “어업, 북한 자본주의   전초지대로 뜨다”

    그물을 손질하는 북한 어부 모습.

    대게 50kg에 술 몇 병

    1980년대 중반 이씨 옆집에 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계열에서 활동하는 친척이 찾아왔다. 옆집은 평소에 ‘째포’네 집으로 불렸다. 째포란 ‘재일동포’의 줄임말이 변환된 말로 1960년대 북송선을 타고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이 집은 일본에 친척을 둔 덕분에 마을에서 최고 부자였다. 그때까지 돈을 부쳐주던 이 친척은 북으로 간 친척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직접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 방문길에 나선 것이었다. 그가 갖고 온 물건 중에는 ‘빤짝지’라고 불리는 양복천이 무려 20벌 분량 들어있었다.

    빤짝지는 양복천이 햇볕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1980년대 중반 북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노동자 월급이 60~70원일 때 빤짝지 한 벌 가격이 500원이었으니 양복지 20벌은 1만원, 노동자 10년치 월급 이상에 상당하는 금액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친척을 접대하기 위해 째포는 부두에 나가 대게를 50㎏ 마대 가득 얻어왔다. 이씨 마을에서 나는 대게는 남한의 영덕대게보다 크고 살도 많다.

    게들을 큰 가마솥 두 개에 가득 넣고 찌기 시작하자 일본 친척이 입을 딱 벌렸다.

    “이 게를 다 사온 거니? 얼만데.”

    “그래봤자 나중에 술 몇 병 갖다주면 돼요.”

    일본 친척은 할 말을 잃었다.

    “와보니 진짜 부자는 너희들이다. 내가 사는 도쿄에서 빤짝지 한 벌 옷감은 고작 1000엔이지만 저런 게는 한 마리에 2만엔을 한다. 그러니 이 게 한 마리 가격과 내가 갖고 온 반짝지 20벌 가격이 같다.”

    그 말은 비단 째포뿐 아니라, 온 마을을 술렁거리게 했다.

    “아니, 일본에선 이따위 게 한 마리가 빤짝지 스무 벌 가격이래. 참 이상한 동네구만. 쯧쯧.”

    그때 이씨 마을은 이렇게 살았다.

    그런데 1986년부터 이상하게 바다에서 명태와 정어리가 사라져 잡히지 않았다. 영웅선장도 허탕을 치는 일이 잦았다. 왜 그런지 누구도 몰랐다. 해류가 바뀌어서 그렇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다른 고기도 점점 씨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980년대 말 이씨 마을 해변에서 3~4㎞ 떨어진 앞바다에 멋진 상선이 나타났다. 북한 상선은 칠이 다 벗겨지고 마스트에 공화국기(인공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 상선은 희고 푸른 페인트가 깨끗하게 칠해져 멀리서도 번쩍거렸다. 공화국기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상선의 정체가 뭔지 궁금했다. 동시에 이씨 마을에 ‘8군단 외화벌이 기지’라는 명칭의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무역상선의 등장

    기지에 소속된 잠수배들은 갯바위 주변에서 성게와 해삼을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보통 잠수배는 길이가 10m 정도인 철선인데 산소공급장치를 싣고 다니면서 잠수작업을 했다. 지금까지 해삼이나 성게, 전복은 쪽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갈고리로 건져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녀지인 갯바위 부근 바닷속을 휘젓고 다니는 잠수부는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해산물을 건져 올렸다.

    그즈음 이스즈, 닛산 같은 일본 브랜드를 단 소형차들이 이씨 마을에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에선 보기 힘든 고급차들이었다. 이 차들은 잠수배가 건져 올린 수산물들을 실어 날랐다. 여러 곳에서 잡힌 해산물은 한 곳으로 실려와 박스에 포장된 뒤 다시 배에 실려 멋진 상선으로 옮겨졌다.

    뒤늦게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상선이 일본 무역 상선이래.”

    일본 상선의 등장은 어부들의 삶도 바꿔놓았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성게, 해삼을 잡아오면 수산조합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8군단 기지에 팔았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높은 값으로 구매해주었다.

    이제 어부들은 잘만 하면 하루에 한 달 치 월급을 벌 수 있었다. 이씨 마을 어부들도 점차 돈에 눈뜨기 시작했다. 한두 해가 지나면서 이씨 마을에는 8군단 외화벌이 기지뿐 아니라 5군단, 호위사령부 등 군 소속 외화벌이 기지들이 들어서더니 나중에는 석탄공업성, 옥류회사처럼 국가기관 소속 외화벌이 기지들까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자가용에 운전기사 둔 벼락부자 1세대 등장

    이런 기지마다 잠수배 두어 척씩 갖다 놓고 마을 앞에서 닥치는 대로 수산물을 건져 올렸다. 어부들도 점차 무엇을 잡아야 돈이 되는지 깨닫게 되었다. 제일 비싼 것은 전복, 그 다음이 해삼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많지 않았다. 대신 많이 잡아서 팔 수 있는 것이 성게와 오징어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왜 갑자기 이런 기지들이 번창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내막이 드러났다. 돈벌이에 눈뜬 몇몇 사람이 수산업에 진출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싼 해산물이 해외에서는 비싼 상황을 이용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게 한 마리가 북한 노동자 10년치 월급에 상당하는 가격에 팔린다는 것을 안 순진한 어촌 사람들은 단지 혀를 차면서 머리를 흔들기만 했지만 높은 지위에 있던 몇몇 사람은 ‘그럼 우리가 가져다 팔면 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선각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역일꾼들을 내세워 일본 바이어를 찾았고, 뒤를 봐줄 만한 배경을 찾았다. 배경으로 가장 좋은 것이 바로 군부였다. 민간은 노동당 지도를 받아야 하고 행정기관 간섭을 받아야 하고 보위부, 검찰, 보안성 등 온갖 곳의 트집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군부는 윗선만 뇌물로 삶아놓으면 간섭하는 데가 별로 없었다. 바이어를 확보한 선각자들은 군단장 등 해당 지방 군사령관을 찾아갔다.

    “저희에게 인원을 좀 대주고 명칭만 허락해주면 매달 수십만원씩 바치겠습니다.”

    “어업, 북한 자본주의   전초지대로 뜨다”

    돛이 달린 목선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북한 어부들. 멀리 중국 단둥시가 보인다.

    군부에 이건 생각지도 않은 공돈이 굴러오는 일이었다. 명칭 빌려주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고 동원할 군인들은 무진장이었다. 이를 허락하면 부대 부업을 한다는 명목하에 막대한 뇌물을 챙길 수도 있었다. 8군단 외화벌이 기지는 이렇게 생겨났다.

    외화벌이는 막대한 이윤을 낳았다. 선각자들은 졸지에 부자가 됐다. 외화벌이 기지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사실상 자가용차에 운전기사를 두고 호화판 생활을 했다. 넘쳐나는 재물을 주체 못해 예쁜 아가씨들을 끼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역의 흐름은 읽었지만 시대는 읽지 못하는 치명적인 판단착오를 범했다. 당시의 북한은 부자가 떵떵거리면서 살 만큼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간부를 다 매수할 수는 없었다. 주민들은 술렁거렸고, 민심을 의식한 질투 어린 시선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벼락부자들은 이 점을 간과했다. 1993~94년경 숙청이 시작됐다. 죄목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붙여졌다. 시대 흐름을 타고 수산업에 진출한 벼락부자 1세대가 졸지에 벼락을 맞았다. 많은 이가 총살됐고, 살아남은 자들도 10년형 이상을 받았다.

    그러나 어업 분야에 지폈던 자본주의 불씨마저 완전히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불씨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에 빠져든 것을 기화로 삽시간에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석 달 정도 지난 10월경부터였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굶어죽는 사람이 전국 각지에서 속출했다. 국가의 배급이 점점 줄더니 이때부터 완전히 끊겼던 것이다.

    반면 바닷가는 이보다 상황이 나았다. 해외에 해산물을 팔아먹는 방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미역이라도 건져 먹을 수 있었다.

    이씨의 공장도 배급이 끊겼다. 이씨는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공장에 더 다녀봐야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배인을 찾아갔다.

    “공장엔 일거리가 없고 사람들은 배급을 못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에게 자유를 주시면 매달 1000원씩 바치겠습니다.”

    북한에서 그때 1000원이면 노동자 10개월치 월급이다. 이 돈으로 장마당에서 개인이 만든 술은 약 40병, 중국산 필터 담배는 약 20갑을 살 수 있었다. 이씨는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매주 하는 생활총화도 2주에 한 번 형식상 나가면 됐다.

    이씨는 떠오르는 신식 해산물 채취 방법인 ‘복장’을 시작했다. 복장은 고무옷을 의미한다. 제주도 해녀들이 입는 고무옷을 떠올리면 된다. 다만 해녀들은 납을 허리에 두르고 바닷속으로 잠수하지만 복장은 물 위에 뜬다. 복장은 몸에 딱 달라붙지 않게 만드는데 몸과 옷 사이에 공기를 채워 부력을 얻기 위해서다. 복장을 입은 사람은 갈고리와 그물이 끝에 달린 5m 길이의 나무장대를 들고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물속에서 성게나 해삼을 발견하면 장대로 건져 올린다. 3월경엔 문어가 많이 나는데 이때는 문어도 잡는다.

    외화벌이 선각자들이 다 숙청됐지만 이들이 길을 터놓은 북일 간 수산물 교역통로는 점점 넓어져 활발하게 작동했다. 1990년대 초반엔 특정인 몇몇이 독점적으로 무역을 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이후 외화벌이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기 때문이다.

    외화벌이 기지를 만들지 않은 공장, 기업소, 기관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통제해야 할 보위부, 검찰, 보안서는 물론 노동당 지방 기관들도 바닷가에 외화벌이 기지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외화벌이 기지들이 서로 경쟁하는 덕분에 이씨는 채취한 해산물을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그는 네 식구를 배고프지 않게 먹여 살렸고 4년 뒤에 큰 집을 새로 장만할 수 있었다. 남이 다 굶고 있을 때 이 정도면 대단히 선방한 것이었다.

    지금 북한에서 국제가격에 가장 근접한 생산물은 바로 해산물이다. 해산물은 생산자들이 해외시장에서 유통되는 가격의 20~30%는 받을 수 있다. 반면 송이, 고사리와 같이 산에서 채취한 것은 해외시장 가격의 10%도 안 되는 싼 가격에 팔린다. 농산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실례로 최근 송이가 남한에서 1㎏에 200달러 정도에 팔릴 때 북한에서 송이를 채취한 사람들은 송이 1㎏을 쌀 10㎏ 또는 기름 500㎖짜리 10병과 바꾼다. 반면 남한에서 20마리에 2만원 정도 하는 크기의 마른 오징어는 북한에서 5달러 정도에 수매된다. 이는 북한 어업 종사자들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씨의 복장 호황은 몇 년 가지 못했다. 경쟁자들이 여럿 생겨난 것. 새벽에 한 무리가 지나가면 오전 10시경 또다시 한 무리가 같은 코스를 샅샅이 뒤지며 지나갔다. 이씨는 성게철에 이동작업을 다녔다. 인적이 드문 해변을 찾아가 천막을 치고 숙식하면서 성게를 잡았던 것. 그러면 그 먼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성게를 받아오는 이른바 ‘달리기’도 공생했다. 달리기는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멀리 갈수록 성게 값은 떨어졌지만 대신 많이 잡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벌이는 나았다. 하지만 좀 지나자 이곳도 잠수배로 무장한 기업형 외화벌이가 달라붙어 성게를 고갈시켰다.

    오징어배 선주(船主)가 된 이씨

    이씨는 적당한 시기에 복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업종을 전환했다. 이번에는 아예 공장 명칭을 내걸고 외화벌이를 하겠다고 제의했다. 매달 내는 돈도 3000원으로 올리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승인이 떨어졌다. 이씨가 그동안 공개적으로 직장에 냈던 돈 외에도 지배인과 당 비서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한 것이 힘을 발휘했다.

    이씨는 목선을 하나 구입했다. 당시 목선 가격은 2만원으로 쌀 400㎏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이씨가 구입한 목선은 최근 남한에 자주 떠내려 오는 북한 목선과 똑같은 것이다. 길이 5~6m에 너비가 1.4m 정도 된다. 이런 목선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목선들은 한 해 벌이의 80% 이상을 7~10월에 오징어를 잡아 번다. 오징어철이면 이씨는 ‘삯발이’를 고용해 배에 태운다. 이때는 어엿한 선주가 되는 셈이다.

    삯발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일종의 일당직이다. 서해에서는 큰 배에 50~100명의 삯발이를 싣고 섬이나 가까운 모래밭에 나가 조개를 채취한 뒤 일당으로 밀가루나 돈을 주는 형태가 많다. 서해엔 일꾼이 모자라 여성 삯발이도 많다. 그러나 동해에서는 큰 어선의 식모를 제외하면 여성이 배에 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또 삯발이는 오징어잡이 때에만 한시적으로 등장한다. 삯발이 후보가 너무 많은데다 선주들을 경쟁적으로 찾아다니기 때문에 이들을 고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삯발이는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간부들에게 뇌물을 주고 시간을 배정받아 배를 탄다.

    삯발이는 잡은 오징어의 50% 이상을 선주에게 준다. 뱃삯은 어떤 배를 타느냐, 또 선주와 어떤 관계냐에 따라 결정된다. 큰 발동선을 타는 경우 삯발이는 보통 그날 잡은 오징어의 70%를 기름값 명목으로 배에 바친다. 큰 배는 불빛이 밝아 대체로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데다, 편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뱃삯이 비싸다. 배에 따라서는 80%를 내고 20%를 갖는 사람도 있다. 즉 10마리 잡으면 2마리만 자기가 갖는 것이다. 그래도 큰 배는 선원 가족이 삯발이 자리를 놓고 경쟁할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다.

    목선을 탈 경우 인심 좋은 선주를 만나면 5대 5 정도로 나눈다. 인심이 좀 나쁘면 7대 3이다. 즉 30%를 자기가 갖는 것이다.

    눈물겨운 오징어잡이 풍경

    오징어철의 바닷가는 매우 분주하다. 어부들은 오후 3시경 집을 나와 해안경비대의 승인도장을 받아야 한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고기잡이 떠나는 배들로 바다가 새까맣게 뒤덮여 장관을 이룬다. 어떤 목선들은 4~5마력짜리 기관을 달고 스스로 나가지만 어떤 목선들은 큰 배에 밧줄로 매달려 간다. 200마력쯤 되는 큰 배는 보통 40~50척의 목선을 길게 매달고 떠난다. 4시간 정도 바다로 나아가면 날이 어둡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장에 도착하면 큰 배는 목선들을 주위에 풀어놓는다. 큰 배 주위는 불이 밝아 오징어가 많이 잡힌다. 아침에는 다시 목선들을 매달고 큰 배가 들어온다. 큰 배는 스스로 오징어를 잡는 것 외에도 이런 목선들을 끌어주고 목선 하루 생산량의 30% 이상을 기름값 명목으로 받는다.

    작은 기관을 달고 단독행동을 하는 목선들은 5시간 이상씩 나가는 때가 많다. 오징어를 유인하기 위해 주로 카바이드 등잔불을 밝히는데 최근엔 자가 발전기를 싣는 목선도 늘어나고 있다. 목선에는 보통 3명이 타는데 밤새 오징어낚싯대를 흔들어야 한다. 10두름 이상 잡는 ‘대박’은 한 해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다. 2~3두름만 잡아도 ‘오늘 맞혔다’며 뿌듯해한다. 계획량은 넘겼다는 뜻이다. 반면 한 마리도 못 잡는 날도 허다하다. 어부라면 한 해 여름 마른 오징어를 100두름 이상 깔고 있어야 배포가 든든하다.

    오징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목선에서 한꺼번에 자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캄캄한 밤에 졸다가 불이 꺼지면 지나가는 큰 배에 들이받혀 죽을 수 있다.

    새벽 4시쯤 날이 훤해지기 시작할 때를 어부들은 ‘새벽물’이라고 한다. 새벽물에선 ‘홀림낚시’라는 방법으로 오징어를 잡는데 이때 수확이 괜찮아 어부들은 꼭 새벽물을 보고 5시쯤 떠난다. 부두에 도착하면 오전 10시경이 된다. 돌아가는 길엔 조타를 잡은 사람을 제외하고 다 쪽잠에 곯아떨어진다.

    부두엔 아낙네들이 새까맣게 서 있다가 배가 들어올 때마다 우르르 몰려들어 이 배 저 배 구경한다. 곧 “정희네는 얼마 잡았읍데” 하는 식의 소문이 재빠르게 퍼져나간다. 부두에 도착해서도 바로 집에 가는 것은 아니다. 부두에서 가장 먼저 배에 오르는 것은 경비대 군인들이다. 이들에게 얼마간 오징어를 주어야 다음번 나갈 때 순순히 출어 허가도장을 받을 수 있다. 보통 한 마을에 경비대 한 개 중대가 주둔하는데 중대장은 대개 쉽게 부자가 된다. 중대장도 열심히 빼앗아 자신을 그 자리에 임명해준 대대 간부들에게 뇌물을 두둑이 전해야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 또 부하들도 먹여 살려야 하므로 늘 일정한 양을 깔아두어야 한다. 군인들은 또 군인 나름대로 자기 몫을 경쟁적으로 챙긴다.

    오전 11시쯤 집에 들어간 어부들은 밥을 먹고 오후 3시경까지 3~4시간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밤에 갑자기 폭풍이 치는 때도 있다. 바다에 나간 어부가 가랑잎 같은 배 위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집에 있는 아낙들도 잠을 못 자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새까맣게 부두에 나가 가슴을 졸이며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배가 보이면 “정희네 배다”하고 소리친다. 이런 날 오후 3~4시쯤이면 “영남이네는 못 들어왔소”하는 소문이 마을에 퍼진다.

    개중엔 폭풍에 기관이 고장 나 표류하거나 또는 다른 먼 부두에 임시로 대피했다가 며칠 만에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북한에는 전화가 없어 딴 항구에 들어가도 본인이 돌아오기 전에는 이를 알지 못했다. 남편이 나타나면 마을이 떠나갈 듯 울고불고 난리다. 최근엔 전화를 놓은 가정이 하나둘 생겨난다고 한다.

    며칠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함경북도 쪽에는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반 년 뒤에 나타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 많이 잡으려 러시아 영해로 들어갔다가 체포돼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이렇게 억류되는 북한 어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만 해마다 50명 이상이라고 한다.

    오징어를 잡다가 죽으면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씨가 사는 마을에는 과부가 많다. 그래도 죽는 사람보다 해마다 이씨 마을에 새로 정착하는 사람이 더 많다. 산 아래에 새집이 점점 늘어간다. 바닷가에 가면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씨 마을에선 지금까지 탈북한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 반면 그곳에서 30리 떨어진 농장 마을에선 열 명도 넘게 탈북했다.

    한 마을에 개인 목선만 수백척

    선주가 된 이씨는 이제부터 모든 경영 을 스스로 해야 한다. 디젤유를 구입하고 배를 수리하고 기관을 손질하고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모두 그의 몫이다. 이씨 마을에만 어느 단위의 명칭을 빌렸지만, 사실상 개인 목선이 수백척에 달한다. 해변이 이런 배들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다.

    개인 목선이 있다고 오징어철에 누구나 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이씨 마을목선 선주 중 약 20%만이 가족이 한 해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고도 남는 부류고, 30% 정도는 가까스로 1년을 메우며, 나머지 50%는 빚을 내서 산다.

    4인 가족의 가장이 배를 운영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한 해 350만원가량 든다고 한다. 북한돈 350만원은 시장 환율로 1000달러에 해당한다. 운영비에는 디젤유 구입비가 가장 많고, 물풍(물속에 담그는 돛) 구입비, 각종 수리비, 낚시 공구 구입비 등이 포함된다. 기관이 못쓰게 되면 300달러는 주어야 5~6마력짜리 중국산 새 기관을 살 수 있다.

    2009년 6월, 이씨는 “올해엔 북한돈 50만원만 빚졌다”고 만족해했다. 작년에는 200만원을 빚졌다고 했다. 한여름내 잡은 오징어를 말려 팔아 큰돈을 만져도 빚 갚는 데 다 들어간다. 그러면 다음해 여름까지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선 다시 빚을 얻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배가 있기에 큰돈을 빌릴 수 있는 것이다.

    이씨에게도 개인적인 아픔이 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 2명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배를 태웠다. 요즘 같은 시대엔 돈을 버는 아들이 최고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바닷가에는 졸업반인 16~17세 때부터 배를 타는 학생이 많다. 이씨는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을 뇌물을 써 군대에 안 보냈다. 당시 북한에선 대학에 가면 군대 복무가 면제됐는데, 이씨는 뇌물을 써서 아들을 지방대학에 입학시킨 뒤 여름에는 배를 태웠다. 몇 달 대학에 안 가도 교수들에게 뇌물을 좀 바치면 학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아들과 함께 잡을 때는 오징어도 많이 잡혔고 집안 살림이 좀 펴지나 싶었다.

    그랬던 외아들이 19세 때 바다에서 죽었다. 파도가 높아 오징어잡이를 나갈 수 없자 성게라도 잡겠다면서 바다에 나갔다 빠져 죽은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자라 물귀신처럼 수영을 잘했던 아들이었다. 이씨 자신도 복장을 할 때는 그 정도 파도는 파도로 여기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들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 말릴 생각도 안 했다. 역시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딸만 둘이 남았다. 이씨는 과묵해졌다.

    늘 죽음과 이웃하고 사는 그 마을에서 이씨가 겪은 불행은 흔해빠진 것이다.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아 묻어주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할까. 한 과부는 애지중지 키워온 두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고 시신도 못 찾았다. 그중 한 명은 유복자였다. 원래 형제가 같은 배에 타는 것은 피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사고가 나도 한 명은 살아야 하기 때문. 하지만 삯발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 원칙도 무너졌다.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그 과부는 약간 멍해지긴 했지만 다음해 여름 대야를 머리에 이고 다시 바닷가에 나타났다. 오징어 임가공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온 삯발이들은 자기들이 오징어 말릴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잡아온 오징어를 임가공 맡긴다. 주로 과부나 할머니들이 20마리를 말려주고 3마리를 받는데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씨 마을에는 과부도 많고 자식을 잃은 집도 수없이 많다.

    내가 북한오징어 안 먹는 이유

    필자는 북한산 오징어를 먹지 않는다. 그 오징어를 보면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론 얼마나 더러운 환경에서 가공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온 바닷가가 쉬파리 천지다. 햇볕이 좋으면 이틀 정도 빠른 시간에 말릴 수 있지만 장마라도 지면 집안에서 불을 때고 선풍기를 돌려 말리는데 한 닷새 동안 역겨운 냄새가 진동한 오징어를 보기 좋게 쫙 펴려고 시꺼먼 발로 무수히 밟는다. 모두들 “내가 먹을 것도 아닌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렇게 가공된 오징어는 대개 중국 장사꾼들에게 넘어간다.

    돈 앞에 무력한 당의 힘

    ‘돈주’라고 불리는 북한 부자들이 직접 투자해 어느 기업소 명칭의 외화벌이 기지를 만드는 것은 요즘 너무나 흔해빠진 일이다. 기업소는 명칭만 빌려주면 큰돈을 받을 수 있고 돈주는 투자를 해 사업을 할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외화벌이 기지장 또는 외화벌이 사업소 지배인이라는 감투를 쓴 돈주들은 어떤 곳에 투자할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종업원을 뽑거나 해고하는 권한도 쥐고 있다. 사실상 개인회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큰 외화벌이 사업소에는 명목상 당 비서도 있으나 북한에서 당 간부가 전혀 맥을 못추는 것이 바로 이런 곳이다. 돈 앞에선 당도 무력해진다.

    10여 년 전에 똑같이 행동하다 총살된 1세대의 교훈을 돈주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요즘 돈주들은 총살될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엔 돈을 드러내놓고 뿌리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시절을 거치면서 온 사회가 돈맛을 알게 됐다.

    간부들부터 뇌물을 받아 당당하게 잘 산다. 대도시 좋은 아파트는 다 간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월급이 뻔한 상황이라 뇌물을 받아 잘살게 됐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단속해야 할 법 기관 간부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좋은 아파트에서 사는 실정이다. 누구 할 것 없이 이렇게 살고, 뇌물을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인 세상이 됐다. 누가 누구를 통제할 형편이 못되는 그런 사회가 된 것이다.

    주민들의 의식도 변했다. 돈 많은 사람을 증오하는 분위기도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다. 간부가 되면 당연히 잘사는 줄 안다. 뇌물을 받는 간부들이 이럴진대 자기 돈을 굴려서 사는 돈주는 그보다 훨씬 안전하다. 간부들도 자기들의 돈줄인 돈주를 보호해주려 한다. 불과 10년 만에 북한은 권력과 돈의 거미줄 같은 공생관계가 형성된 국가로 변했다.

    간부들과 돈주들만이 살맛 나는 세상이 되다보니 5년 전부터는 외화벌이 기지들이 국토관리감독국, 수산관리총국 등 바다를 총괄하는 부처에 상소문을 올리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지금 주민들이 무분별하게 해산물을 채취해서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자면 일반 주민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닷가 일정 구간을 저희 기지에 떼어주시면 우리가 이 구간에서 성게나 다시마를 양식하고 키우면서 생태계를 복원하겠습니다.”

    정작 생태계 파괴의 주범은 저들이면서도 내세우는 구실은 그랬다. 생태계 복원도 빤한 거짓말이다. 눈에 돈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생태가 복원될 때까지 기다리는 애국자가 될 리 만무하다.

    더 넓은 구간을 차지하려 간부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은 당연지사. 뇌물의 액수에 따라 어느 기지에 얼마만큼 구간을 떼어줄지 결정됐다. 이런 바다 떼먹기 경쟁은 처음에 대도시 주변 바닷가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웬만한 바닷가에도 주인들이 생겼다.

    바닷가 마을에 탯줄을 묻고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주인을 모시게 됐다. 옛날처럼 미역이나 성게를 따러 바다에 들어가려면 어디선가 호루라기를 불면서 경비원이 달려와 벌금을 받아낸다. 벌금을 피하려면 허가를 받고 들어가고 나올 땐 채취한 생산물의 절반을 바쳐야 한다.

    ‘어업회사’가 주도하는 수산업

    이씨 마을은 2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외지에서 온 돈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차지하고 사실상 선주로 군림한다. 수산조합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과거의 그 국영 조합이 아니다. 국가에서 배급하던 디젤유도, 장비도 공급되지 않는다. 수산조합도 디젤유를 장마당에서 사서 운영하고 이윤을 노동자끼리 나누어먹는 사실상의 ‘회사’로 변했다. 어부들은 그냥 수산조합에서 벌어먹는 사람과 수산조합을 그만두고 어느 회사 명의를 빌려 자기 배를 운영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어업, 북한 자본주의   전초지대로 뜨다”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김일성종합대 졸업

    북한군 예비역군관

    2002년 한국 입국

    2003년 동아일보 입사


    농장원은 삯발이로 전락했다. 북한에서 노동자는 공장을 옮길 수 있지만 농민은 절대 노동자가 될 수 없는 ‘신분의 굴레’를 쓰고 있다. 농민은 어부에게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오징어철에 삯발이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어부는 잘 산다. 그러니 자연히 마을에서 배에 힘이 들어간다. 학교에서도 점차 돈 있는 어부의 자식들이 학급 반장 등 학생간부 감투를 도맡아 차지하기 시작했다.

    불과 20년 전 오순도순 상부상조하면서 다정하게 지냈던 이씨네 마을사람은 이제 고용자와 피고용자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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