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벤처창업자 1965~68년생 부잣집 아들 연예산업 스타 1970~72년생”

  • 정해윤│미래문화신문 발행인 kinstinct1@naver.com│

    입력2009-07-30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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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신화에는 보편적인 줄거리가 있다. 가난한 젊은이가 불굴의 신념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콤 글래드웰의 신간 ‘아웃라이어’는 이 같은 공식을 깨는 역작이다. 그는 성공이 개인의 노력과 시대적 행운이 결합돼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폴 앨런 등 정보통신(IT)업계의 선구자들에 대해서도 ‘태어난 해(1953~1956년)’가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다고 주장한다. 정해윤 미래문화신문 발행인이 ‘아웃라이어’ 분석틀을 활용해 한국 사회의 ‘성공 공식’을 조명했다.‘편집자’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시장 권력자들의 탄생

    말콤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람 중 20%가 ‘1830년대에 태어나,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한 인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남북전쟁은 이들에게 축재(蓄財)의 기회가 됐다. 이후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최고의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이들은 그 기회를 타고 거부(巨富)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큰 전쟁을 통해 거부들이 탄생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법칙이다. 현재 일본과 독일의 산업재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흥의 물결 속에서 성장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 한국의 대표적 산업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은 구체제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게 하는 기회의 평등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당시, 50대는 재기하기에 너무 많은 나이였고 30대는 아직 젊은 나이였다. 실제로 전쟁 직후 30대 후반이던 정주영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주목받는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반면 40대의 구인회, 이병철은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 부산에서 재기에 성공한다. 특히 이들과 비교해보아야 할 대상은 전 시대 최고의 기업가였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1903년생)이다.

    진보진영의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 질서가 현재의 대한민국에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식민지시절 조선 최고의 갑부이자 반민특위 1호 구속자였던 박흥식의 행로는 이를 검증하기에 좋은 사례다. 진보진영의 역사관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선 그의 후손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록펠러 가문이 돼있어야 옳다.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도태됐다는 것이다. 반면 빈농의 아들 정주영은 거부로 성장했다. 이는 ‘해방전후사’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주류들이 태동한 배경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재의 ‘시장 권력자들’을 설명하기 위해선 ‘해방전후사’가 아닌 ‘6·25전후사(戰後史)’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6·25전쟁이 끝났을 때 박흥식은 이미 50줄에 들어서 있었다. 새롭게 재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전 시대 기업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이미지는 정치적 단죄를 짊어지게 했다. 그는 광복직후 반민특위에 한 번, 5·16군사정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다시 한 번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젊은 경쟁자들에 비해 조금씩 뒤처진 이유가 됐다.

    시장의 권력자가 탄생하는 과정은 ‘한국 사회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미신을 걷어낸다. 6·25전쟁은 김일성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의 ‘해방전쟁’이 됐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큰 기회를 제공했다.

    3김의 ‘정치독점’ 이유

    한국과 같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선배들을 제치고 나아가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현대사를 살펴보면 이를 실행한 두 그룹을 발견하게 된다.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1920년대생들과 한참 후에 등장한 386세대가 그들이다. 이들 1920년대생 정치가들은 어떻게 선배들을 제치고 오래도록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을까.

    도덕적 명분이 중요한 정치권에서 3김은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다. 이들보다 10여 년 먼저 태어난 박정희가 젊은 시절 몇 년간의 행적으로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에 비한다면, 광복 후 성년을 맞은 것은 정치인으로서 유리한 점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은 역설적으로 박정희였다. 5·16은 이전까지 첩첩이 쌓여있던 구세대의 인적 정체를 깨뜨려버렸다. 이는 야당에도 세대변화를 촉진시켰다. 박정희가 두 번에 걸쳐대선후보로 맞붙었던 윤보선은 19세기에 태어난 인물(1897년생)이었다. 야당으로서는 ‘꿩 잡는 매’의 역할을 젊은 후보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이 내세운 ‘40대 기수론’은 이런 상황을 간파한 정치적 승부수였다.

    하지만 당시 선배들이 호락호락하게 권력을 넘겨주었을 리 없다. 야당 당수 유진산은 ‘젖비린내가 난다’고 젊은 도전자들을 격하했다. 지금은 온갖 구태의 근원처럼 보이는 박정희와 3김이지만, 당시로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참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선배들을 제친 당돌한 세대가 후배들에 대해서는 정작 상반된 역할을 한 데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 후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은 자연적인 기력이 쇠한 80대가 가까운 시점에서였다.

    정치권의 세대교체 문제를 보면 한국사회의 세대 간 대립이 어떤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3김 시대에 도전하는 이들이 부딪혔던 공고한 벽은 ‘후계자는 스스로 자란다’는 논리였다. 한마디로 세대 간에 ‘맞짱’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그런 논리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역과 성별 등의 문제에 대해 평등을 주장했던 이들이 빠진 큰 오류는 ‘세대’ 또한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투표대결을 하고, 남성과 여성이 승진경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는 부당성을 지적하면서도, 세대에 관한 한은 철저히 진화론적 시각으로 접근했다.

    시대를 잘 타고난 이명박 대통령

    3김의 시대를 지나고 386이 떠오르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뚜렷한 인물군을 찾기 어렵다. 이기택과 김상현은 평생 2인자 노릇만 하다가 잊혀갔고, 한때 기세등등하던 김우중도 한여름 밤의 꿈이 됐다. 물론 4·19세대와 6·3세대가 있지만, 그 존재감에서 앞 세대와 비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은 불행한 세대인가. 만일 그들이 대권이나 재벌을 꿈꾸었다면 불행한 세대다. 하지만 ‘1930~50년대 세대’는 소시민으로 살기에는 비교적 행복한 시기였다. 이들 세대에서 개발연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그런데 출생시점을 1945년 광복을 기준으로 ‘전기 세대’와 ‘후기 세대’로 구분하면, 이들 사이에 또 기회의 불평등이 발견된다. 전기 세대는 스스로 오너가 되는 기회는 놓쳤지만, 한평생 월급쟁이로 살기에는 행복한 시기를 맞았다. 박정희 정권 출범 후 본격적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근대적 면모를 갖춘 기업이 등장한다. 이 시기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은 회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세대의 상징적 인물로는 역시 이명박 대통령을 들 수 있다. 그는 1941년생이지만 군대를 갖다 오지 않아 1938년생과 사회동기였다. 그가 입사한 1965년 당시의 현대건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월급쟁이의 운세는 이렇게 욱일승천하는 사운(社運)에 묻어갈 때 꽃필 수 있다. 그는 현대그룹이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면서 스타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현재의 시각으로 기업가 이명박은 구시대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그가 기업을 떠난 것은 근 2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전문경영인의 상징과도 같았던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1944년생으로 그와 불과 세살 차이다. 이명박이 현대건설의 사장으로 승진한 때가 1977년임을 감안하면 이들 세대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문경영인으로 남아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현재처럼 꽉 짜인 조직에서라면 이명박 신화가 재현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식 종신고용제를 모방하던 시기에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두둑한 퇴직금을 받고 은퇴할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평생직장의 개념이 온전히 지켜진 시기는 아마도 이들 세대가 유일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찾아왔던 또 하나의 기회는 부동산이다. 1970~80년대에는 재테크란 말이 없었지만, 조금 일찍 부동산에 눈을 뜬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렸다. 강남이 개발된 이후 그곳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살펴본다면 아마도 이들 세대가 가장 큰 수혜자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천정부지로 오른 부동산은 그만큼 세대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엇갈린 역할을 했다.

    그런데 광복 이후 출생한 후기 세대에겐 선배들만큼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 마치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된다. 앞에는 선배들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는 386이라는 드센 후배들의 추격을 받아야 했다. ‘새 시대의 맏형을 원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노무현(1946년생)의 자조는 이 세대 사람들의 숙명을 상징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이들은 치열한 내부경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은 향후 운명에 대한 예고였다. 게다가 청년기에 찾아온 월남전은 이들에게 상반된 역할을 요구했다. 한국은 1964년에서 1973년까지 근 10년간 이 전쟁에 참여하는데, 당시 징집 대상은 1940년대 중반에서 195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었다. 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전쟁특수를 잡기에는 너무 어렸다.

    이 세대에게는 안락한 노후도 허락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에게 외환위기는 다른 게임의 룰을 요구했다. 젊은 시절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회사는 이들을 외면했다. 그런데 익명처럼 남은 20, 30년간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밑천 잡을 기회를 가졌던 전기 세대와 빈털터리가 돼버린 후기 세대는 그들의 행운과 불행을 자식 세대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새로운 성공 공식의 등장

    386세대에 이르면 이전과 완전히 단절된 인물 유형이 등장한다. 다음의 인물들에게서 출생 연도 외에 또 다른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미국에서도 IT기업의 창업가들은 대부분 좋은 교육을 받은 중산층 집안의 자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벤처기업가들은 모두 중산층 출신으로, 명문대학을 나왔다. 전통적인 성공스토리는 가난한 집안의 젊은이가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86세대에 이르면 이미 자수성가의 신화가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정주영의 초등학교 졸업 신화는 고사하고 노무현의 상고 졸업 신화도 재현되지 못한다. 부모 세대가 일궈놓은 성취를 바탕으로 당대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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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복했던 이들은 학창시절, 당시로서는 귀한 물건이었던 개인용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행운을 누렸다. 6·25전쟁 이후 등장한 산업자본가들처럼 이들 역시 IT붐이 일었을 때 기회를 포착하기에 적절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이었다. 1950년대생은 이미 기성체제 속에 녹아들어갔고, 1970년대생은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에 너무 어렸다. 오직 30대였던 이들만이 기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386세대 벤처기업가들이 보여주는 성공 공식에서 시운(時運)과 노력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추가됨을 알 수 있다. 바로 능력 있는 부모의 존재다. 현대판 성공신화는 이 삼자가 결합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전까지가 ‘평등한 가난’의 시대였다면, 이 세대를 기점으로 ‘풍족한 불평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내 양대 포털인 네이버와 다음 창업자가 학창시절, 서울 강남 한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강남이라는 특구가 어떻게 부를 대물림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상식적으로 계산해볼 때 ‘크게 성공한 386세대’의 부모들은 개발연대의 전기 세대에 속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이들 중 재테크에 일찍 눈을 뜬 사람들이 강남에 몰려들고, 자식들에게 최상의 교육환경을 제공했다. 폭등한 부동산은 부모들에게 안락한 노후를, 자식들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때마침 다가온 IT붐은 첨단의 지적노동을 요구했는데, 일찍부터 준비해온 ‘강남 키즈’들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이는 향후 부의 세습 방향을 예상케 한다. 현재 대치동의 사교육시장은 386세대 학부모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호황기에 풍요로운 학창시절을 보냈고, 외환위기가 오기 전 사회에 진출해 뿌리를 내렸다. 현재의 대치동 아이들에게는 부모도 아닌, 조부모 세대의 성공 혜택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이 앞으로도 한국 사회의 특구로 남게 된다면, 그곳의 주류는 성공한 386세대의 1990년대생 자녀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들을 ‘포스트386’과 비교해보면 세대 간의 승패가 확연히 드러난다. 포스트386의 부모 세대는 앞서 살펴본 대로 부동산시장에 진출하기에는 한발 늦은 시기에 장성했다. 게다가 1997년 외환위기는 포스트386세대 부모들에게는 명예퇴직을, 자식들에게는 청년실업을 남겼다. 포스트386세대는 출발부터 선배들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 놓였다.

    그런데 이렇게 누적된 기회의 불평등은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사채 이자처럼 불어나고 있다. 아마도 현재의 질서가 이어진다면 이 불행한 세대는 향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패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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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권력까지 장악한 386

    386세대의 문제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고르게 접수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 기회독식 그룹이 특정 분야에 한정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386세대의 문제는 후배들에게 생태계를 파괴하는 포식자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정치, 경제 분야는 현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 사회의 연성권력을 이미 차지한 사실은 곧잘 은폐되곤 한다. 386세대가 어떻게 기회를 독식하고 후배들을 가로막는지는 영화계 386세대 감독들의 행태에서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끈 주역이 386세대 감독들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던 무렵은 한국에서 영화가 산업의 단계로 도약하던 시점이었다. 대기업 자본의 진출로 멀티플렉스가 보편화하고 할리우드 방식의 마케팅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IT분야의 386세대들처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런데 영화는 특성상 산업 성격이 강한 예술이다. 그래서 자본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 386세대 감독들에 대한 쏠림현상이 과도하다는 것이 문제다. 투자자금이 이들에게 몰리면서 후배들은 잠재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아예 박탈당했다.

    비단 투자자금만이 문제는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개봉될 때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논쟁거리가 생겨났다. 바로 스크린 독점이었다. 2006년 당시 전국적으로 1670여 개의 스크린 중 ‘괴물’은 620개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전체 대비 38%에 달하는 수치다. 영화제작에 가장 중요한 자본과 상영관이 이들에 의해 독점당했다. 그렇다면 후배들은 도대체 무슨 돈으로 제작하고, 어디에서 개봉하라는 것인가. 실제로 이들이 30대 때부터 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것과는 달리 현재는 주목받는 30대 감독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한국영화계는 386세대 감독들이 쇠퇴할 무렵 현재의 홍콩영화계처럼 깊은 침체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이들의 ‘독점적인 성취’는 훗날의 몫마저 가져간 대가로 얻어진 것이며, 미래의 예술가들은 기회의 고갈로 이미 시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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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산업에서 틈새시장 찾아낸 포스트386

    불행 중 다행이랄까, 386세대가 잘하지 못하는 분야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거대담론이 지배하는 시대에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놀고 즐기는 쪽으로는 발달하지 못했다. 386세대가 끝나갈 무렵 X세대가 출현하는데, 이들은 386세대의 전방위적 지배 속에서 틈새 기회를 찾아냈다.

    1970년대 초입에 태어난 이들은 성장기에 컬러TV시대와 프로스포츠의 출범을 맞았다.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한국사회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돼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성장기를 보내면서 이 세대에 이르면 한국인들의 하드웨어가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전역에 한류가 불면서 이들은 아시아의 스타로 도약할 기회를 맞는다.

    이들이 선배 연예인들과 달랐던 점은 단순히 대중의 선택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를 벗어났다는 데 있다. 자신의 지명도를 이용해 각종 기획사의 대표나 대주주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것은 다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프로그램 기획과 배역선정 등에 간여하는 위치로 거듭나게 된다. 일명 ‘딴따라’라고 불리던 선배 세대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물론, 후배들의 추격을 저만치 따돌리면서 또 한 분야의 장기집권그룹을 예상케 한다.

    그러나 이들을 보통의 동년배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음울한 미래를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평범한 X세대에게 청년실업이라는 상처를 남겼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로 성장했어야 할 X세대는 연예계를 제외하고는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없다. 이들보다 조금 앞선 386 선배들이 각 분야에서 지배적 위치에 도달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극단적으로 엇갈린 이 세대의 운명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보여준다. 위대한 소수와 패배한 다수만이 남은 세상. 이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신의 출생 연도가 성공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들 세대를 들여다보면 이전과는 다른 존재들이 눈에 띈다. 바로 여성의 부상이다.

    X세대 여성연예인들은 선배들에 비해 활동기간이 대폭 연장됐다. 이른 나이에 데뷔해서 불혹에 가까운 지금도 ‘섹시퀸’ ‘CF퀸’ 따위의 수식어가 붙으며,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떠나 소위 ‘골드미스’라는 새로운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세대에서 여성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올라간 데는 우선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산아제한정책은 X세대에 이르러 딸도 귀한 자식으로 대접받는 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무렵인 1990년대에는 삼성의 신경영 선언을 필두로 기업이 여성인재에 대해 전향적인 시각을 갖게 된 시기였다. 게다가 동시대에 여성할당제와 같은 정책이 실시되면서 최초의 수혜자가 됐다.

    그런데 이런 행운은 일회성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여성공채 1기, 여성할당제 1기 기수들에게 끊임없는 기회가 제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석학은 미래가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필자는 X세대에서 이미 한국 여성의 삶이 고점을 찍었다고 단언한다. 물론 언론은 전문직 진출 여성의 비율 증가를 두고 ‘여풍’이니 ‘알파걸’이니 호들갑을 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여성 내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증거일 뿐, 개인의 삶의 질과는 상관이 없다.

    도전받는 코리안 드림

    이제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할지에 대해 고민할 차례다. 한국에서도 청년실업이 문제가 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런데 10여 년 만에 다시 다가온 경제위기에 대해 이 사회는 신입사원의 급여를 감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들이 언젠가는 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떠맡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점은 항상 간과된다. 과연 사회의 변방을 떠돌던 세대가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면 듬직한 기둥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미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몇몇 현상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겪을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사교육의 극성과 전문직으로 인재가 몰리는 현상은 그들의 미래에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국은 건국 후 200년간 아메리칸 드림을 지속시켜왔다. 그런데 우리는 그 폭발적인 성장세만큼이나 조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시 코리안 드림의 종말은 앞선 세대가 기회라는 자원을 고갈시킨 결과는 아닐까. 그들이 자랑하는 눈부신 업적도 미래의 몫을 앞당겨 쓴 결과는 아닐까.

    한 세기 전 우리 조상들의 모습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모두 실의에 빠진 민중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주에서 만난 조선인들은 한결같이 의욕이 넘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횡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민중은 곧 삶의 의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수많은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그가 많은 국민에게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다수의 젊은 세대가 386세대들의 비난에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젊은 세대를 줄세우기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이념을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말고, 정치소비자로서 젊은 세대의 존재를 정당하게 인정해야 한다.

    유독 갈등해결에 무능한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의 갈등이 잘 해결될 리 없다.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세대 간의 갈등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사회, 흥하는 국가는 세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소외받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그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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