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내가 원하는 건 권력이 아니라 좋은 영향력”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9-08-01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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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같이 고기 잘 먹는 여자는 처음 봤다
    • ‘파리스의 심판’과 ‘카산드라의 예언’
    • 김&장 진출 첫 여성변호사의 사명감
    • 선진화 다지려면 보수정권이 한 번 더 잡아야
    •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논평은 하지 말자
    • 혼자 있기 좋아하지만 혼자 버려지는 건 못 견뎌요
    • 오페라에 빠져보세요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 1966년 서울 출생 <br>●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대 법학석사 <br>● 1991년 사법시험 33회 합격 <br>● 1994~2002년 김&장 변호사 <br>● 한국시티은행 부행장 <br>● 現 한나라당 대변인 <br>● 저서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일요일인 7월12일 아침 6시. 창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진다. 서재에 들어선 조성식 기자는 책상에 앉아 시름에 잠겼다.

    그는 이틀 전 한나라당 대변인 조윤선 의원을 인터뷰했다. 오후에 국회 의원회관에서 2시간 동안 얘기하고 다음날 오후 30분가량 전화로 보충 인터뷰를 했는데, 녹음한 걸 풀어보니 성에 차지 않았다. 딱히 어떤 현안이나 계기가 있어서 한 인터뷰가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얘기는 많이 했는데 뭔가 딱 안 잡힌다. 한마디로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조 기자가 인터뷰 대상자로 조 의원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전투구의 한국 정치판에서 청량감을 주는 미모의 여성 정치인의 의식구조를 검증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작용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 같다.

    두 사람은 오늘 낮에 한 번 더 만나기로 약속한 터다. 조 기자는 서가 위쪽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 시집들을 일별했다. 오랫동안 손길이 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조금 겸연쩍긴 했지만. 박제천의 시집 ‘장자시(莊子詩)’를 골라 뒤적거리다 ‘오구大王의 散文 다섯’이라는 시를 찬찬히 깊게 읽는다.

    이어 ‘그리스로마신화’를 뽑아들었다. 엊그제 조 의원이 ‘파리스의 심판’과 ‘카산드라의 예언’에 대해 재미나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조 의원의 기억력이 정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건을 별개로 얘기한 걸 보면 카산드라와 파리스가 남매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잊었던 모양이다.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고등학생 시절의 조윤선 의원.

    오전 9시쯤 회사에 나온 조 기자는 컴퓨터에 박제천의 시를 옮겨 적어 인쇄했다. 이어 이틀 전의 인터뷰 녹취록을 다시 한번 읽으며 오늘 인터뷰 때 던질 질문들을 정리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그는 인터뷰를 준비할 때 질문의 배치, 즉 질문의 순서를 정하는 데에 대단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오늘은 되도록 딱딱한 얘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아가씬 줄 알았어요”

    약속장소로 차를 몰고 가면서 조 기자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 CD를 들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도 들었던,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로 불리는 ‘열정’ ‘월광’ ‘비창’이다. 그는 비 오는 날 운전을 할 때면 종종 이 CD를 반복해 듣는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거칠게 쏟아질 때 그의 혼을 빼놓는 곡은 ‘열정’. ‘열정’은 3악장으로 구성됐는데, 마지막 악장(Presto)에서 그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강렬한 전율에 휩싸이곤 했다.

    낮 12시15분. 조 기자와 조 의원은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이틀 전처럼 환한 웃음으로 무장한 조 의원은 하얀 재킷에 검은색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외모 못지않게 빼어난 미적 감각이다, 라는 감탄이 조 기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조 기자가 “조윤선 의원의 색깔이나 내면세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잠을 못 이뤘다”고 너스레를 떨자 조 의원이 하이톤의 웃음을 터뜨렸다. 유리알 같은 웃음이다. 비 오는 날 즐겨 듣는 음악이 있느냐고 묻자 ‘적우(赤雨)’ 스타일의 곡을 즐긴다고 답한다. ‘적우’는 조 의원이 요즘 좋아하는 여자가수 이름이다. 영어로 Red Rain. 허스키하고 끈적끈적한 재즈풍 목소리다. 조 의원은 엊그제 인터뷰 시작 전 사진을 찍을 때 이 가수의 CD를 틀었다.

    조 기자가 “저는 비 오는 날 운전하면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즐겨 듣는다”며 “아스팔트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와 베토벤 소나타 ‘열정’의 운율이 잘 맞는다”고 하자 조 의원이 화답한다.

    “저도 클래식 좋아해요. 일요일 아침, 늦잠 자고 일어나서 애들 아침 주고 나서… 저는 해가 많이 들어오는 걸 참 좋아해요. 커튼 다 올리고 음악 틀어놓으면 애들이 ‘엄마 오늘 기분이 좋구나’ 해요.”

    조 의원은 딸 둘을 뒀는데 큰애는 고1, 작은애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식당 여종업원이 음식을 갖고 들어오면서 그 얘기를 듣고는 “아유, 의원님, 아가씬 줄 알았어요” 한다. 조 의원이 까르르 웃자 “진짜 결혼하셨어요?” 하면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이, 왜 이래. 큰딸이 고1이에요. 술 한잔 드려야겠네.”

    종업원이 나간 후 조 의원이 숨넘어가는 웃음을 거두지 못하면서 말했다.

    “속없이 그런 얘기를 들으며 좋아하고. 나 진짜 너무 속이 없는 것 같아요.”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울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과 함께한 조윤선 의원. (2008년 9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말 탄 몽골처녀의 웃음

    조 의원은 이 식당에서 박희태 대표와 몇 차례 식사를 했다고 한다. 특히 지난 1월 법안상정을 둘러싸고 여야 대치상황이 지속되던 무렵 박 대표를 비롯한 당직자들과 열흘 동안 계속 저녁을 함께했는데, 술도 적잖이 마셨다고.

    박 대표는 자타가 인정하는 폭탄주의 대가. 폭탄주를 얼마나 하느냐는 질문에 조 의원은 “세면서 안 마셔봐서…” 하면서 웃는다. 마시는 사람과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고무줄 주량이라고.

    “술자리에서 얘기하는 걸 좋아해요. 생선회도 좋아하지만 육식을 워낙 좋아해요. 변호사 할 때 고깃집에서 자주 회식을 했는데, 고기 먹고 밥 시킬 때 늘 배부른 적이 없는 거예요. 친하게 지냈던 17년 선배가 ‘지금껏 살면서 너같이 고기 잘 먹는 여자는 처음 봤다’면서 ‘니가 고기 먹는 걸 보면 두 갈래로 머리 딴 몽골 처녀가 말 타고 사냥하다가 씩 웃는 게 연상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조 기자는 이쯤에서 시 얘기를 꺼냈다. 조 의원은 좋아하는 시로 김남주 시인의 ‘사랑은’을 꼽았다. 들려달라는 조 기자의 요청에 “다 외우진 못하겠고” 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부분 부분 읊는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랑은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 이 시의 전문은 이렇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 김남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다니, 뜻밖이군요.

    “9년간 옥살이하셨잖아요. 나이 들었을 때 쓴 시가 아닌가 싶어요. 젊었을 땐 굉장히 거칠고 센 시를 쓰셨지요. 그런 시들은 저와 맞지 않고. ‘사랑은’이라는 시는 그런 걸 다 겪고 나서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쓴 시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이어 조 의원은 외우고 있는 시 중 하나라며 육당 최남선의 시조(‘혼자 앉아서’)를 읊었다.

    가만히 드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조 기자가 가방에서 박제천의 시를 인쇄한 종이를 꺼내 조 의원에게 건넸다. 아침에 비가 오기에 시집을 보다가 골라봤다는 다소 낯간지러운 말과 함께. 시를 다 읽고 난 조 의원이 물었다.

    “어머, 이 시가 왜 좋으세요?”

    “저는 특히 이 부분이 좋아요. ‘우산을 들고 그대의 마음에 들어가야 비로소 비가 내린다.’ 절절한 사랑이에요.”

    “그러네요. 아주 좋네요.”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아프로디테보다 아테나

    그리스로마신화로 화제가 넘어갔다.

    ▼ 엊그제 ‘파리스의 심판’을 얘기하셨는데, 권력을 뜻하는 헤라와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 미를 상징하는 아프로디테 중 어느 인물에 동질감을 가지세요?

    “저는 아테나가 좋아요.”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누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지 가려달라는 세 여신의 요청을 받고 아프로디테를 지목한다. 아프로디테는 답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와의 사랑을 선물한다. 헬레네는 파리스를 따라 몰래 스파르타를 떠나 트로이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에 격분한 스파르타는 그리스와 연합해 트로이를 정벌하러 나섰고 10년 전쟁 끝에 트로이는 망한다.

    “파리스는 세 여신의 부탁을 받고 우쭐했을 거예요. 자신한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에. 그런데 사실은 파리스가 결정권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제우스신이 여신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떠넘긴 거죠. ‘파리스의 심판’이 주는 교훈은, 자신의 권력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휘두르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된다는 거예요.”

    조 의원이 ‘파리스의 심판’과 더불어 그리스로마신화에서 교훈으로 삼는 것은 ‘카산드라의 예언’이다. 태양의 신 아폴론은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에게 빠져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준다. 하지만 카산드라가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자 설득력을 빼앗아버렸다. 그래서 카산드라가 아무리 맞는 예언을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리스군이 쳐들어오니 대비해야 한다고 해도, 트로이 목마가 속임수라고 해도 누구도 믿지 않았다. 조 의원은 “‘카산드라의 예언’은 설득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바른말을 하는 것보다 그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고 했다.

    ▼ 카산드라가 파리스의 누나 아닌가요?

    “그런가요? 신화는 잘 기억이 안 나서.”

    ▼ 트로이전쟁 얘기는 소상하게 기억하시던데요.

    “트로이가 신화에서 역사로 연결되는 변곡점이거든요. 트로이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부근을 전전하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해 세운 나라가 로마니까.”

    조 기자는 수첩에 적힌 질문 항목을 빠르게 훑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 남편이 첫사랑인가요?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만났거든요. 도서관에서 알게 됐어요.”

    ▼ 대학도 같이 다녔습니까?

    “제가 1학년 될 때 남편은 졸업해서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어요.”

    조 의원의 남편은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장 소속 변호사다. 조 의원도 정치를 하기 전 13년간 김&장 변호사로 활동했다. 사법시험 출신으로 김&장에 진출한 첫 여성변호사가 바로 조 의원이다.

    “첫 여성변호사라는 데 책임의식을 가졌어요. 내가 잘해야 앞으로도 여성변호사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에. 여성변호사의 대모처럼 행동했어요. 후배 여성변호사들이 쳐다볼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내가 잘못되면 자기네도 미래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회사에서도 저한테 그런 역할을 부여했어요. 후배들 잘 챙기라고. 김&장에서 나온 후에도 1년에 몇 번씩 만나요.”

    학생이면서도 학생이 아닌

    조 의원이 주변사람들을 챙기는 데 남다른 기질을 발휘한 것은 중학교 다닐 때부터다.

    “초등학생 때는 반장 하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내가 뭔가 결정을 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오게 한다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중학생 때 계속 반장을 맡으면서 성격이 바뀌었어요. 선생님들이 저를 신과 인간 사이의 사제로 여겼어요. 학생이면서도 학생이 아닌.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반 애들 성적이 안 좋으면 조를 짜서 방과 후에 한 시간씩 과외를 하도록 하고 시험에 나오겠다 싶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빈 수업시간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풀이해주곤 했어요. 전달력이 약한 선생님이 가르친 내용을 아이들에게 쉽게 해석해주고. 그러니까 반 전체 성적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 담임선생님이 저보고 계속 그렇게 하라고 격려해주셨죠.”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비로소 평범한 학생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잘사는 동네에 위치한 고등학교라 그런지 애들 기도 세고 학습수준도 높았지요. 주눅이 들 정도로.”

    고등학생 때 만나 결혼까지 이르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남편의 어떤 점이 그녀를 잡아끌었을까. 조 의원은 “워낙 사람이 괜찮다”라는 말로 반려자에 대한 존경심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굉장히 똑똑하고 겸손해요. 좌중에서 가장 처지는 사람을 끌어올려주고 자신은 놀림을 받으면서 분위기를 좋게 하는 코미디히어로 노릇을 마다하지 않아요. 참 사람이 됐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지금도 남편에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당신이 가장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죠.”

    예술정치 꿈꾸는 한나라당 조윤선 대변인

    가족사진. 뒷줄은 아버지, 어머니. 앞줄은 조윤선 의원 남동생, 조 의원 (오른쪽)

    ▼ 남편에 대한 사랑에 존경심이 깔려있는 것 같네요.

    “남편과 다섯 살 차이예요. 내가 한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간 탓에. 내가 결혼할 사람은 믿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어요.”

    ▼ 뜨거운 연애는 아니었나요?

    “했죠. 일가친척들이 윤선이가 성격이 어떤 앤데, 쟤가 저토록 오랫동안 좋아한 것 보면 그 남자 참 대단한 것 같다고….”

    ▼ 중간에 시련이 없었나요?

    “한 번인가. 사람은 좋은데, 굉장히 집착하고 독점력이 세서. 대학 1학년 때 운신하기가 답답하고 힘들더라고요. 한 번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너무 불쌍하게 나와서 그날로 없던 얘기가 됐어요.(웃음) 그래서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어요.”

    ▼ 홍민의 ‘고별’을 좋아하시기에 가슴 절절한 사랑의 상처가 있는가 보다 짐작했습니다.

    “(웃음) 아니에요.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라서. 음악 자체가 좋으니.”

    ▼ 결혼한 후에도 연애 시절의 사랑이나 존경심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서로 실망하고 사랑의 성격도 바뀌게 마련이죠.

    “저는 싸우는 걸 싫어해요.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싫거든요. 그래서 잔소리도 거의 안 해요. 처음 부딪친 문제가 시댁과 친정 문제였어요. 누가 어느 쪽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해가 지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더군요. 남편이 굉장한 효자예요. 제가 국회 간다니까 (시)아버님이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아들한테는 ‘너는 그냥 김&장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하고.”

    ▼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가 필요할 텐데요.

    “정치인이 가장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은 가족의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무슨 TV토론회에 나갔을 때 (수입)쇠고기에 문제가 생기면 수입을 중단하면 된다고 말했어요. 국민 건강주권을 위해 불가피하기 때문에 (중단조치를 해도) 괜찮다고. 상대방 토론자가 무역분쟁이 생겨 제소를 당하면 어떡하냐고 하기에, 무역분쟁은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한국의 정치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면 설혹 계약을 위반한 점이 있더라도 미국이 꼭 제소하지는 않을 거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한일 간 수입선 다변화를 예로 들었지요. 예전에 캠코더 같은 건 일본에서 들어오지 못했다, 무역분쟁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일본제품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걸 알기에 일본은 소송을 자제했다, 그런 문제가 지금은 다 풀렸다.

    (토론회가 끝난 후) 어떤 네티즌이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걸지 않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조 대변인이 얘기했다고 아고라에 올렸어요. 제 웹사이트가 다운되고 난리가 났어요. 이년 저년 하면서. 그래서 아이들에게 내 홈피나 싸이월드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작은애가 ‘엄마, 괜찮아. 인터넷에서 그런 말 쓰는 애들, 만날 그렇게 하거든’ 하는 거예요. 한번은 제 싸이월드에 누군가 들어와 ‘조 대변인 코, 수술한 거죠?’라는 글을 남긴 적이 있어요. 그걸 보고 제 작은딸이 자기 ID로 ‘무서워서 귀도 못 뚫는 사람이 어떻게 성형수술을 했겠어요’라고 반박글을 올렸대요. 요즘 애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인터넷의 험한 환경에 대해 면역력이 있구나 싶었죠. 네이버에도 그런 글이 올라간 적이 있어요. 콧날이 올라가 있어 그런가 봐요.”

    ▼ 실제로 하진 않았죠?

    “에이, 하면 더했겠죠.”

    첫사랑 남자와 결혼했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국내 최고의 로펌인 김&장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시티은행 부행장을 지냈고 국회의원이 된 후 대변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력을 더듬어보면 그녀의 삶은 비교적 평탄했고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인생의 시련에 대해 묻자 사법시험에 몇 차례 떨어졌던 걸 꼽았다.

    84학번인 조 의원은 애초 계획한 대로 1990년 결혼을 했다. 친정어머니가 ‘힘들어 못 보겠으니 제발 시집가서 공부하라’고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안정을 찾은 조 의원은 이듬해 사시에 최종 합격했다. 대학 4학년 때 시작했으니 4년 반 만이었다.

    60억 중 28억은 시부모 재산

    조 의원은 미(美)와 권력에 부(富)까지 갖춘, ‘성공한 여성’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2009년 3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이 60억원이다. 이에 대해 조 의원은 “(남편과 함께) 변호사 하면서 꼬박꼬박 모은 돈”이라면서 “그중 28억원은 시부모님 재산”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 성공한 여성의 전형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참 운이 좋았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다”고 자세를 낮췄다.

    그녀는 “정치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즐기는 것 같다”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요. 밝고 긍정적이고 순기능을 하는 정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박정희 18년과 전두환 7년은 산업화 과정이었고 노태우에서 노무현까지는 민주화 과정이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내건 기치는 선진화예요. 문턱에서 비상을 해보자는 게 그분의 생각이에요. 선진화 과정 1기죠. 소통을 못 한다는 비판도 받지만, 지금 이 시기에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은 명확한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정권의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어느 단계로 격상될 때까지는. 선진화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 한 번 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그 다음엔 미국이나 유럽처럼 정권이 왔다갔다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봐요. 정당 간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좁아진 상태에서.”

    평소 공격적인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인 조 기자가 오늘은 좀 다르다. 인터뷰 대상자와 인터뷰 성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긴 하지만. 모든 일간지가 인용 보도해 화제가 됐던 2004년 강금실 법무부 장관 인터뷰를 두고 후배 여기자가 “비판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했을 때도 그는 그렇게 둘러댔다.

    ▼ 결론은, 지금의 보수정권이 한 번 더 잡기를 바란다는 거죠?

    “연속성 차원에서 한 번 더 잡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장관 하고 싶나요?

    “무슨 자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그저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이 잘 돌아가도록 이바지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런 기회가 오면 좋겠어요.”

    ▼ 여성 정치인의 강점과 단점이라면?

    “단점은 조직력, 강점은 포용력과 유연함이라고 생각해요. (남성 정치인에 비해) 사심이 없다는 것도. 다 그런 것 아니지만, 대체로 여성은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있지 않나 싶어요.”

    ▼ 근거가 있는 얘긴가요?

    “집에서 유일하게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몰라요. 생계에서 자유로우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봐요.”

    조 의원은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는 편이다. 대변인이라 그런 면도 있지만 정치인의 언행은 신중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말이란 건 주변사람들이 귀 기울이고 따라올 때 의미가 있지, 이슈가 있을 때마다 당이 문제다 정부가 잘못됐다고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는 의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 공격받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대변인으로서 공격 많이 받아요. 설명이 가능한 사안이면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괜찮아요. 가장 두려운 건 말을 해도 주변사람들이 듣지 않는 거예요.”

    조 의원은 지난 1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여야 대치상황 해법에 대한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대치국면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비폭력과 장기전 두 가지를 제안했다. 의총이 끝날 무렵 홍준표 원내대표는 조 의원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앞으로 비폭력과 장기전으로 가겠다고 대야(對野)전략을 밝혔다. 조 의원이 의총에서 개인발언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밖에서 밥먹고 늦게 들어오세요”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영화가 있다.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일들’이라는 뜻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암 환자 두 사람의 마지막 삶의 행로를 그린 영화다. 조 의원은 평소 ‘버킷 리스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조 기자의 요청에 따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단 둘이 걸어서 여행을 하고 싶어요. 차례대로 한 사람씩.”

    ▼ 언제 외로움을 느끼죠?

    “주변에 인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요. 친정부모, 시부모, 가족 다 서로 의지하는 게 느껴질 때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 사람들이 서로 얽히는 게 버거워서 말이죠?

    “그래서 혼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 게 어느 주말에 혼자 빈집을 지킨 적이 있어요. 애들이 갑자기 학원에 가고 애 아빠는 운동하고 늦게 온다고 해서.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죠. 한 시간 반 동안 혼자 있는데 너무너무 쓸쓸한 거예요.(웃음) 그래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혼자 버려지는 건 못 참는구나 싶었죠.(웃음)”

    ▼ 진정 고독을 즐기는 자세는 아닌 것 같군요.

    “아닌 것 같아요.”

    조 의원은 로펌에서 일할 때 과로로 몸에 탈이 생겨 일주일간 휴가를 받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이 있는 송광사에 가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번 여름엔 가족과 함께 종가(宗家)를 둘러볼 작정이다.

    그녀는 엊저녁 조 기자와 전화통화를 할 때 힘없는 목소리로 워킹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문제가 많죠. 아이들이 받을 걸 제대로 못 받고 있죠. 다른 엄마들과 달리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니.”

    뭣보다도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다. 주말엔 좀 낫지만, 평일엔 애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겨우 밤에 한 시간 정도다. 아주머니 한 분이 집에서 기거하며 아이들을 챙겨준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엄마를 이해해주는 편이라고 한다. 늦을 것 같아 전화하면 애들이 ‘엄마, 밖에서 저녁 먹고 10시나 10시 반에 들어와요’ 한다는 것이다.

    조 의원은 올 2월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워킹맘의 지리산론’)에서 “아침마다 애들 등교 준비와 출근 준비는 거의 전쟁이었고, 저녁엔 집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라고 일하는 여성의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로펌 변호사 시절 5년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떠난 뒤 몇 주간 후임자를 찾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

    7월10일 오후 3시, 까만색 투피스에 파란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조윤선 의원은 인터뷰에 앞서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밖에 나가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패션모델과 같은 포즈를 지켜보면서 ‘봄날이라면 더욱 좋을 텐데’라고, 조 기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터뷰는 의원회관 8층에 있는 조윤선 의원실에서 진행됐다. 하복부까지 내려오는 긴 목걸이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실내촬영을 하는 동안 조 의원은 ‘적우’의 CD ‘잃어버린 전설 70’을 틀었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요 중 하나인 홍민의 ‘고별’이 흘러나왔다.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조 기자의 머릿속에 고등학생 시절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 인화됐다. 인생 참 덧없다.

    조 대변인은 TV화면 모습이 실물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실물은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데 화면 속 표정은 딱딱하다. 조 기자도 이날 첫 대면에서 그 얘기를 실감한다.

    “주변의 친한 선배들이 카메라기자들과 안 친하냐고 물어볼 정도예요. 그런데 대변인 논평이란 게 다 심각한 얘기잖아요. 날을 세워 얘기하다 보니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당의 대변인은 매일같이 국민에게 얼굴을 내민다는 점에서 TV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와 같다. 표 나게 웃지 않으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여성앵커를 잘 연구하면 해법이 나올 법도 싶다.

    “즉각 투입해도 되겠다”

    조 기자가 이날 준비해온 인터뷰 질의서를 보면 정치와 사회적 이슈에 관한 질문들이 앞쪽에 배치돼 있다. 조 대변인의 국회의원 임기는 지난해 5월30일 시작됐으니 갓 1년이 지났다.

    ▼ 적성에 맞나요?

    “맞는 것 같아요. 대변인을 맡다보니 처음엔 굉장히 고단함을 느꼈는데, 지금은 전혀 부담이 없어요. 일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가 없으니 이 생활이 내게 맞는가 보다 싶죠.”

    ▼ 성격과도 잘 맞나요?

    “예. 제가 워낙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요즘은 누굴 만나면 그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키 센텐스 한두 개로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어요. 그 일이 아주 즐거워요.”

    ▼ 지난해 총선 직전 대변인에 임명된 이유가 뭐라 생각하세요?

    “2002년 대선 때 제가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을 100일쯤 했거든요. 그때 같이 일했던 분들이 추천해 (지난해) 다시 들어온 거예요. 나중에 모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즉각 투입해도 되겠다 싶어 추천했다고. 말하는 게 직업인 변호사를 오래 한 것도 영향을 끼쳤겠죠.”

    조 의원의 정치 입문 무대는 2002년 대선이다.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였던 한나라당 이영애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회창 대선후보의 대변인을 맡은 게 첫걸음이었다.

    그가 정치권으로 뛰어들었을 때 당은 대선홍보체제였고 대변인실은 전략기획본부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당직자들의 연배가 높았어요. 제가 어리기도 했지만. 총재 주변에 시니어가 많아 언로(言路)가 충분히 열려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굉장히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웰빙정당 의식한다”

    조 의원은 주변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대변인으로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변인들 말이 너무 거칠어 오히려 정치공세를 양산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조 의원이 대변인 되고 나서 논평의 격조가 높아졌다. 여당 대변인이 이렇게 믿음직스럽고 안정감 있게 얘기하니 당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힘들었던 때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시위 정국을 꼽았다.

    ▼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여성대변인들은 옷차림에서부터 수수한 느낌을 줘요.

    “제가 입는 옷은 거의 다 여의도에 있는 중저가 브랜드 상설할인점에서 사는 것들이에요. 변호사를 오래 해서 그런지 옷 입는 스타일이 늘 똑같아요. 프로페셔널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한나라당이 웰빙정당이니 부자정당이니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으니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죠.”

    ▼ 그런 걸 꽤 의식하시나 보죠?

    “많이 의식해요. 어쨌든 저는 안 어울리는 옷을 입는 건 못 참아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것이 솔직한 태도이고.”

    ▼ 대변인은 아무래도 덕담보다는 공격하고 비난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정신건강에는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제가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살아왔는데…. 대변인을 맡고 보니, 각 지역구에서 상대 당의 잘못을 비판해달라는 요청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더라고요. 이 말 해야 한다, 저 말 해야 한다면서. 간혹 억지로 말하는 경우도 있어요. 논평이 약하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고요. 강경론자들에게 여당이 야당처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여당답게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 성명을 발표하는 데 스스로 정한 원칙이나 기준이 있나요?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얘기는 하지 말되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평이한 말은 곤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대체로 30분 안에 논평할 문장을 작성해야 해요. 회의가 끝난 다음 곧바로 정리해 브리핑을 해야 하니. 메시지 위주로 전달하게 되지, 표현을 생각할 여력이 거의 없어요.”

    조 의원은 “정치인은 말이 참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미국에 가서 공화당,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했어요. 8일 동안 120명이 연설하는 걸 지켜봤는데, 대중연설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 점이 많았어요. 평이한 어휘로, 매우 점잖게 얘기해요.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줘요. 저도 지난 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때 지원유세를 다녔는데, 연설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유치한 내용이긴 하지만.”

    ▼ 각종 조사에서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게 나타나는 이유가 뭐라 보세요?

    “의회가 작동되는 수준이 일반 사회가 돌아가는 수준보다 낮은 탓이라고 봐요. 원칙대로 안 움직이는 게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아요.”

    ▼ 정당들이 대의보다 당리당략에 따라 싸우는 것도 큰 원인이지요?

    “그렇지요. 국회는 뜨거운 커피를 식히는 찻잔 같은 곳이에요. 갑론을박하면서 논쟁하다보면 (의견 차이가) 좁혀지게 마련이거든요. 그 점에서 18대 국회가 과도기라고 생각해요. 18대 국회에서 국회법 준수와 비폭력 두 가지 원칙이 꼭 지켜지길 바랍니다.”

    국회법 준수와 비폭력

    조 의원은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소속이다. 조 기자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의 이임사를 들먹인 건 그래서다. 안 전 위원장은 이임사에서 현 정부의 인권정책을 상당히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정권은 짧고 인권은 길다”면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부끄러운 나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까지 했다.

    “그 이유가 뭐라는 거죠?”

    조 의원이 되물어왔다. 인권위의 비대한 조직을 줄인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냐면서.

    ▼ 촛불시위 강경진압과 용산참사 등 몇 가지 논란이 된 사건이 있었잖아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등 노무현 정부 때와 비교해 전반적으로 인권지수가 낮아졌다는 평가가 있지요. 동의하실 수 없나요, 전혀?”

    “여러 면이 있다고 봐요. 먼저 인권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념적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인권은 이념이 아니라 생존권 차원에서 봐야 해요. 이 부분에 대해선 저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같고요. 다음으로, 힘없는 사람들도 법만 지키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법치가 그간 흐트러졌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것을 바로잡는 과정이고, 무너졌던 원칙을 다시 확립하고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 한나라당 인권위원회에서는 주로 어떤 문제를 논의하죠?

    “다민족, 다문화가족, 이주여성 자녀들의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탈북자 인권 문제도 다루고.”

    조 의원은 “대변인이라 사실 인권위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 못한다”고 했다.

    ▼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와 안장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그런데 저는 국민에게 많이 놀라고 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국민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아, 이제는 진실이 전달되는 시간이 이렇게 짧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촛불시위 때와는 다르다는 거죠.”

    ▼ 어떤 진실이 빨리 전달됐다는 거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봐요. 그런데 거기에 대한 국민의 호응이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어요.”

    ▼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광범위한 추모현상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과 실망, 다시 말해 이 정권의 인기 없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던데요.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거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중간표가 이명박 대통령 쪽으로 쏠렸기 때문인데, 그 표가 2002년엔 노무현 대통령 것이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겹칠 수 있죠. 그러니까 그 얘기는 당연한 것 같아요.”

    ▼ 당연하다는 건 지금 이 정권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저는 현 정부가 제대로 길을 찾아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거센 저항을 받더라도 정권 초기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하다보니 인기가 없는 거죠. 여론조사에 나타난 지지도가 낮다고 해서 이 정부가 못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임기 초반에 할 일과 중반에 집중할 일이 있어요. 이제 서민을 위한 중도실용정책을 편다는 건 규제완화라는 굵직한 경제문제를 어느 정도 풀었기에 가능한 일이거든요.”

    조 의원과 조 기자는 이 대목에서 노무현 정부 때 제정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 완화를 두고 잠시 논쟁을 벌였다. 조 의원은 부동산을 세금으로 규제하려는 것은 경제논리와 세무원칙에 맞지 않는 잘못된 정책이라고 주장했고, 조 기자는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는 데 현실적으로 종부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했다. 조 기자는 종부세수입이 총 조세수입의 1% 남짓 되고 납세 대상자가 국민의 상위 2%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논쟁적인 질문을 더 던지려다 인터뷰 성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다.

    2002년 대선 패배 후 ‘친정’인 김&장으로 돌아갔던 조 의원은 시티은행 부행장(2007년)을 거쳐 2008년 3월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되돌아왔다.

    “언젠가 공직을 맡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어요. 공직에서 봉사하는 걸 마지막 경력으로 삼겠다고.”

    ▼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권력의지가 발동한 건 아닌가요?

    “저와 친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조 대변인은 권력욕이 없어 보인다는 거예요. 정치인은 권력욕이 있어야 대성한다며. 제가 원하는 건 권력이 아니라 좋은 영향력이에요. 어떤 좋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따라주길 바라고 그들을 내가 끌어주고 싶은 거예요. 구체적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일을 원하는 거죠. 지금은 대변인 하느라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고 있는데, 올해 말이나 내년 초부터는 다른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을 검증해보려 해요.”

    ▼ 외교학과에 들어갈 때 정치에 대한 포부가 있었나요?

    “아니요. 어릴 때부터 외교관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그쪽으로 진출한 선배들이 자기 위치나 일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는 걸 보고 머릿속에서 그리는 외교관과 현실의 외교관이 다른 것 같아 실망했죠.”

    조 의원은 법학과 강의를 들으면서 적성과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법학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학구형이라기보다는 실무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법학이 이론과 실무 두 가지가 병행되는 실용적 학문이라는 데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4학년 때부터 사시 공부를 시작했다.

    시저와 대처

    조 의원이 판·검사를 아예 생각지 않았던 건 아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검사시보를 하면서 검사직에 잠시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유산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젊은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검사 생각을 접었다.

    “로펌 변호사는 꼭 해보고 싶었어요. 판사는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고요. 김&장에서 13년간 일하면서 전문가로서 갖춰야 할 모든 걸 배웠어요.”

    ▼ 84학번이신데, 386세대의 특성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86세대의 특성이 뭐죠?”

    ▼ 이념지향적이고, 좋게 얘기해서 정의감이 있고. 현실참여적인 면이 강하죠. 학교 다닐 때 데모 좀 했고.

    “386 전체의 (현실)참여지수를 0부터 10까지 죽 늘어놓는다면 저는 중간보다 조금 덜 참여하는 쪽이었어요. 서울대에서 가장 참여를 많이 하는 쪽이 사회학과였고 가장 안 하는 데가 경제학과와 우리 과(외교학과)였던 것 같아요. 신문학과도 좀 그랬고. 정치학과는 우리 과보다는 참여하는 쪽이었어요. 4학년 1학기 때 분신사건이 발생했는데 너무 착잡했어요. 교내에서 동료는 몸을 던지는데 나는 이렇게 강의를 듣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런 생각으로 너무 괴로웠어요. 그때 정치학과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나라를 나 혼자 지켜야 한다는, 지나치게 큰 책임감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자신을 다치게 한다.’ 그 말이 저희한테 큰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 대학 다닐 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나요?

    “아니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는데 대학 들어가 확 풀어졌어요. 공부도 많이 안 했어요.”

    ▼ 많이 놀았나요?

    “많이 놀았다기보다는 많이 쉬었어요. 영화 보고 공연 보고 책도 읽고 여행 많이 다니고 등산도 하고.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같은 과 여학생 3명과 두 달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첫 한 달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서머스쿨에 등록했는데,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온 대학생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세상이 참 넓구나, 할 것이 많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 한국의 대학 현실이 답답했겠네요.

    “외국 애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깊이 있는 논쟁을 하게 돼요. 대학의 경쟁력이라는 것이 단기간에 생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조 의원이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존경하는 인물은 줄리어스 시저와 마거릿 대처다. 둘 다 강력한 이미지를 가진 불굴의 정치인이다.

    ▼ 강한 자를 지향하시나요?

    “그 사람들의 외면을 지향하는 건 아니고요. 그들이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노력과 결단력이 배울 점이라는 거지요.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제게는 특별한 롤 모델이 없어요. 누군가를 보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 비슷한 역경을 헤치고 정상에 오른 역사적 인물이 많은데, 왜 유독 시저와 대처입니까?

    “두 사람 다 균형감각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강하고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인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업적을 남긴 분들이죠. 다른 분들에 대해선 제가 많이 모르고요.”

    조 의원은 성격과 식성이 부친을 쏙 빼닮았다. 대인관계에서 무심하고 무신경한 편이다. 부친이 술을 잘해서 그런지, 그녀는 주로 술안주로 그만인 음식을 즐긴다. 삼합, 육회무침, 곱창 ….

    경남 의령 출신인 조 의원의 부친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한국농약에 입사해 부사장까지 지냈다. 퇴임한 후에는 일본에서 농약을 수입해 골프장 제초 서비스를 하는 회사를 차렸다. 모친은 이화여대 약대를 나와 제약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나서 약국을 경영했다. 결혼은 제약회사에 근무할 때 했다. 두 사람은 딸 아들 하나씩을 뒀다. 조 의원이 장녀다.

    희망을 주는 정치

    조 의원의 학습열은 내림이다. 조 의원은 200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법학석사를 땄는데, 졸업기념으로 부모와 함께 2주간 미 서부를 여행했다. 여행 중 딸의 영어실력에 감탄한 부친은 “영어 잘하면 여행하는 데 참 편리하구나” 하면서 그길로 UCLA 영어연수 과정에 등록했다. 한식만 먹던 사람이 홈스테이를 하면서 아침은 시리얼, 점심은 햄버거, 저녁은 스파게티를 먹으며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66세 때 일이다. 그러고 나선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사학에도 관심이 많아 회사 일로 일본에 출장 갈 때마다 문화유적지를 찾아다니며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조 의원의 모친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약국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한의학과 주역을 공부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초등 6학년 딸과 고1 딸을 둔 조 의원은 당연히 교육정책에 관심이 많다. “교육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선행학습 제도와 특목고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며 “하루빨리 학교교육이 정상화되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조 기자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상투적인 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가.

    “저는 정치가 거창한 게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생활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희망을 주고 상식적인 정치를 하고 싶어요.”

    아마도 여기서 인터뷰 기사가 끝났다면 조 의원이 섭섭했을지 모른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오페라 얘기가 쏙 빠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2007년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책을 펴냈을 정도로 오페라 애호가다. 오페라의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며 관련된 장면이 담긴 명화를 소개하는 이 책은 현재 6쇄를 찍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조 의원은 이 책에 나오는 그림들을 직접 선정했다. 그림 보는 걸 좋아해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미술관에 들르거나 전시회를 관람하고 화집을 사들인 게 도움이 됐다. 지금도 해외출장을 떠나면 미술관 갈 생각에 가슴이 뛴다고 한다.

    그녀가 오페라에 빠져든 것은 미국에서 연수를 하던 2000년 뉴욕에서다. 맨해튼에서 살았는데, 메트로폴리탄오페라라는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9월말부터 이듬해 4월말까지 쉬지 않고 오페라를 공연했다. 거기서 조 의원은 오페라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오페라의 매력은 일단 기가 막힌 창작물이라는 거예요. 어떤 완성품이 있는 게 아니라 공연이 이뤄질 때마다 재창작돼요. 성악적으로는 육상선수가 기록을 갱신하듯 상당한 기교가 필요해요.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장르라고 봐요. 오페라에는 음악도 있고 문학도 있고 연기도 있고 미술도 있어요. 그중 어느 하나를 좋아해 들어가다보면 전체를 즐기게 되는 종합예술이에요.”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조 의원은 조 기자에게 자신의 저서를 선물했다. ‘언제나 예술의 열정과 여유가 함께 하시기를…’이라고 쓰고 사인을 했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상식적이고 따뜻하고 감동과 희망을 주는 정치는 예술정치다. 조 기자는 조 의원이 꿈꾸는 예술정치에 공감했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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