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6·25전쟁 시기 남북한의 신문(상)

  •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입력2009-10-05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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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침을 준비하던 북한은 서울에서의 신문 발행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가 발행됐다. 광복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이었다. 두 신문은 북한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동시에 적대세력을 타도하는 무기로 쓰였다. 반면 전쟁 전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1950년 6월28일 이후 3개월 동안 완전히 폐쇄되었다. 북한의 문화인들은 전쟁을 앞두고 북한이 펼친 위장평화공세에 철저히 동원됐다.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들(위) ‘조선인민보’ 7월28일자. 서울 중앙청에 걸린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와 양국의 국기. 아래 사진에는 ‘위대한 쓰딸린 대원수 만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6·25전쟁 기간에는 남북한의 신문도 싸웠다. 북한은 남침 준비 단계부터 신문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로동신문’을 비롯한 평양의 신문과 서울에서 발행한 ‘조선인민보’ ‘해방일보’를 통해서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인민의 전폭적인 협조를 요구했다. 반면에 전쟁 전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1950년 6월28일 이후 3개월 동안 완전히 폐쇄되었다. 암흑의 나날이었다.

    시민들은 북한의 선전매체였던 신문과 방송이 내보내는 일방적인 정보만 접하게 되어 정확한 정세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북한의 매체는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정확한 소식과 공정한 논평을 게재하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운명을 맞았고, 이로 인한 비극은 영원히 이어졌다.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북한 신문 발행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인 6월27일까지 급박한 전황을 보도하고 호외로도 알렸지만, 28일부터는 모든 신문이 발행을 중단하였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4일 뒤인 7월2일부터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두 신문과 평양의 ‘로동신문’(조선노동당 기관지), ‘민주조선’(북한 내각 기관지)은 획일적인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사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시민들의 염원을 해소하는 신문은 북한군이 서울에서 패퇴한 1950년 9·28 수복 직후 10월1일부터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하나씩 복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4 후퇴 이후에는 또다시 서울에서 북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 때는 우리 신문도 발행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부산, 대구, 수원으로 피난 보따리를 끌고 다니면서 신문을 발행했고, 두 번째로 수복된 서울로 와서 전쟁 상황과 국내외의 정세를 알리려 노력했다. 일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기간에 남북한의 언론도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신문이 어떤 형태로 발행되었는지, 북한군 점령 후의 신문에는 어떤 인물이 글을 쓰고 제작에 종사했는지 살펴본다.



    서울 함락 직전까지 발행된 신문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적이 서울에 접근한 6월27일까지 신문은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석간신문을 다음 날짜로 발행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신문인 6월28일자는 27일 오후에 발행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28일자 신문은 조선일보가 유일하다. 다른 신문도 27일까지 발행되었지만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발행되던 4대 신문이 전쟁 후 발행을 중단하였다가 속간되는 시기의 지면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네 신문 가운데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은 마지막 날인 28일자가 보존되지 않았고, 경향신문은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치 지면이 없다. 서울이 함락되자 언론인들은 황급히 지하에 숨거나 피난길을 떠났다. 당시 상황을 각 신문의 ‘사사(社史)’와 남아있는 지면을 토대로 다시 구성해본다.

    경향신문은 6월25일 편집국 차장 이시호(李始鎬)가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의 전화를 단서로 긴급히 군과 요로에 확인한 후 우선 소공동에 있던 신문사 앞과 명동 입구에 속보를 써붙였다. 오전 9시30분이었고, 북한의 남침을 알리는 신문사 최초의 속보였다고 경향신문 사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날 이혜복(李蕙馥)을 동두천으로 특파했고, 호외도 발행했다. 현재 남은 지면은 6월25일자(지령 1201호)가 마지막인데 28일자 지령은 1204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27일 오후 4시경 외근기자들이 모여 이미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를 준비했다. 마침 정인영(鄭仁永) 기자가 일본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문선을 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문선을 끝냈으나 조판할 공무국 직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이 손수 판을 짜서 300장가량의 호외를 수동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마지막으로 발행하고 무교동에 있는 ‘실비옥’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남은 지면은 6월27일자(지령 8308호)가 마지막이다. 28일자는 보존된 것이 없는데 지령은 8309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많은 사원이 납북되었다.

    ‘표1’ 4대 신문 전쟁 후 발행상황
    보존지면 지령 결 호 속간과 결호 보존지면(지령)
    경향신문 6월25일 1201 26~28일(1202~1204)없음 10월1일(3호 없음) 10월4일(1208)
    동아일보 6월27일 8308 28일 지면(8309) 없음 10월4일 10월4일(8310)
    서울신문 6월27일 15715 28일 지면(15716) 없음 10월1일 10월1일(15177)
    조선일보 6월28일 8375 28일까지 지면 있음 10월20일(3호 없음) 10월23일(8379)


    서울신문은 26일 오후 2시까지 본지 발행을 비롯하여 무려 6차례나 호외를 발행했다. 27일자 지면은 호외 내용을 재수록한 것이다. 27일 오후 4시까지 다시 5차례의 호외를 더해서 호외를 11차례까지 찍어냈다. 간부들은 27일 밤 9시까지 버티다가 막 신문사를 나서려는데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28일 미명을 기해 유엔군 비행기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호외 10만장을 인쇄해달라고 요청해서 3시간이나 걸려서 12번째 호외를 찍었다. 이때가 밤 11시 반이었다. 그리고 신문사를 떠났던 사장 박종화(朴鍾和)와 주필 오종식(吳宗植)은 적 치하 3개월을 간신히 살아남았다. 사장 비서 이승로(李昇魯)는 적탄을 맞아 순직했다.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은 당시 가장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서울신문을 접수하여 조선인민보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6월27일에 발행한 마지막(지령 8375호) 지면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사장 방응모를 납북하여 신문사 가운데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언론인의 납북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다.

    평화공세에 동원된 작가와 문화인들

    김일성은 남침 준비를 완료한 시점에 평화공세를 펴면서 대남 선전을 강화하는 술책을 썼다. 6월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평화적 조국통일을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전쟁을 앞둔 위장 평화공세였다. 북한에 억류 중이던 조만식과 남한에서 체포된 남로당 간부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안하여 남한의 경계심을 풀어놓으려는 전술도 병행했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8·15 해방 5주년 기념을 명분으로 ‘증산투쟁’을 독려하여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있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조국통일방책 추진 제의’라는 구호 아래 저명한 문화인을 동원하여 집중적인 평화공세의 선전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6월부터 로동신문에 게재된 문화인들의 글은 표2와 같다(괄호 안은 로동신문에 직책이 명기된 경우이다. 작가, 또는 전문분야를 기재하지 않은 기사는 아래 명단에도 밝히지 않았다).

    한설야(2회) 이기영(2회) 이태준(2회) 김사량(1회) 김남천(1회)은 남북한에서 널리 알려진 소설가들이다. 한설야는 초기 북한 문단을 주도하면서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문화부장을 맡아 북한 정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낸 한글학자로 1948년 9월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허헌은 1921년 9월부터 동아일보 감사역과 취체역을 거쳐 1924년 4월부터 5월까지 짧은 기간 사장 직무대리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1945년), 남조선노동당 초대 위원장(1946년)으로 활약했다. 1948년에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제 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어 최고인민회의장에 올랐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직도 맡았으나 1951년 8월에 사망했다.

    남침이 임박한 때에 문화인들을 평화공세의 선전에 동원한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낌새를 드러내지 않는 동시에 장차 전쟁의 책임을 남한에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이처럼 평화를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먼저 침략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표2’ 1950년 6월 로동신문에 게재된 문화인의 글
    6·5 한설야(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 우리의 손에는 평화통일의 정당한 방법이 쥐여져 있다. 그 실천을 위한 길로 힘차게 매진하자!
    6·5 리극로(조선건민회 위원장) 민족적 량심 있는 인사들이라면 모두다 평화적 조국통일의 편에 가담하여 일어서라!
    6·6 리기영 평화적 조국통일을 촉진시키는 한길로 다같이 나가자!
    6·6 김남천(남조선문련) 평화적 조국통일 실현을 위한 투쟁력량을 일층 확대강화하자
    6·7 리태준 민족적 량심 있는 인사들은 모두다 평화적 조국통일을 위하여 나서라!
    6·11 허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투쟁한다
    6·11 김사량(작가) 평화적 조국통일에 나의 모든 힘을 다하겠다
    6·14 리극로 6월19일에 소집되는 남조선 국회에서 조국전선의 평화적 통일 추진제의가 상정되어야 한다
    6·18 리기영(작가) 남조선 국회의 소위 무소속 중간파 의원은 평화적 조국통일을 지지하여 투쟁하라!
    6·19 한설야(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남조선 국회 내에서도 량심 있는 자라면 애국적 행동을 인민 앞에 표시하여야만 한다
    6·21 리태준 평화적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민족반역자들의 죄상, 미제를 구세주로 모시고 반인민 반민족의 죄악을 쌓은 친일역도 김성수


    전쟁 직전에 북한 정권에서 문인들이 차지했던 서열은 홍남표(洪南杓)의 장례위원 명단을 참고로 할 수 있다. 홍남표는 일제강점기 시대일보 지방부장을 지냈던 공산주의자로 광복 후에는 극좌논조를 폈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1947. 6.19 창간)의 발행인을 맡았던 인물이다. 1946년 11월 남로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고 월북하여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6월5일자 로동신문에 실린 장의위원 26명의 서열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 김두봉 허헌 박헌영 김책 홍명희 최용건 김달현 허가이 박일우

    리승엽 홍기주 리영 류영준 허성택 김원봉 박정애 강진건 최경덕 김창준

    강량욱 리구훈 리기석 리기영 한설야 김남천

    방송국과 통신사 장악

    북한군은 서울에 진주한 후 제일 먼저 방송국을 장악했다.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 김현수(金賢洙) 대령은 6월27일 밤 12시 방송국 주요 시설을 영등포전신국에 옮겨놓은 후 28일 새벽 2시 반에 지프를 몰고 정동에 있던 방송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북한군의 탱크부대가 이미 방송국을 점령한 뒤인 오전 5시경 방송국으로 들어가려다 현관에서 총격을 받아 순직했다. 방송국 가입과 직원 이중근(李重根·36)은 그 직후 현관에 떨어진 권총을 줍는 순간 총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이중근은 7월5일 피살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국방부 정훈국이 11월9일 발표한 자료를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김현수 대령이 피살된 직후인 6월28일이 확실하다. 같은 때에 국방부 군속 이승현(李升鉉·23)도 방송국 문 앞에서 피살되었다. 그는 방송국 경비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것이다.

    북한군은 김현수의 시체를 발로 차서 방송국에서 17~18m 아래 덕수초등학교 운동장에 떨어뜨렸다. 약 1주일 뒤인 7월3일까지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덕수초등학교 교장 전경준이 교비로 시체를 처리했다. 이때 소식을 듣고 이중근의 부인과 아들이 달려와서 시체를 싣고 화장터로 가는 차를 따라가 남편의 유골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김현수 대령의 피살은 당시 신문이 국방부 발표를 기사화하였다).

    방송국은 완전히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고, 남하하지 못한 방송인들은 북한군에 협조하거나 납북되는 비운에 처했다. 기술과장서리 민병설(閔丙卨)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8월25일 오전 8시경 연희방송소 사택에 정체불명의 청년 2명이 와서 동행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 그 후 서울중앙방송국에 근무하는 어떤 사람이 평양방송국 출근부에 민병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날인한 것을 보았다고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기술요원으로 납북하여 평양방송국에서 활용한 것이다.

    ‘표3’ 북한인민군을 환영했다는 당시 기사들
    김효석(金孝錫·제2대 내무부장관) 인민보 7월7일, 해방일보 7월8일 제7호
    오세창(吳世昌·독립촉성국민회의 위원장-서울신문 초대 사장) 인민보 7월13일
    안재홍(安在鴻·국회의원-한성일보 사장) 인민보 7월16일
    김규식(金奎植·민족자주연맹 주석) 해방일보 7월18일
    조소앙(趙素昻·국회의원) 인민보와 해방일보 7월29일
    김용무(金用茂·미군정 대법원장-2대 국회의원) 해방일보 8월2일


    북한군이 방송국을 장악한 후 서울중앙방송은 아침저녁 평양방송을 중계하는 지방방송으로 격하되었다.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를 내보내고 ‘자수’한 명사들의 전향 성명을 방송하도록 강요했다. 지하에 숨어 있거나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위협하는 선무공작(宣撫工作)의 일환이었다. 김규식(金奎植)은 민족자주연맹 주석 자격으로 북한군을 환영한다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조선인민보(7월3일, 제2호)가 보도했다. 저명인사가 과거를 뉘우친다거나 인민군을 환영한다는 방송을 했다고 쓴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의 기사는 ‘표3’과 같다.

    저명 정치인들이 신문에 보도된 내용 그대로 방송을 했는지, 실제로 본인이 양심에 따라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민보와 해방일보는 그들이 방송했다는 기사와 함께 국회의원들은 7월20일까지 자수하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회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 중 전쟁 후 출옥한 제헌국회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는 국회의원들에게 과거를 청산하고 자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해방일보는 전했다.

    그해 5월30일 실시된 총선거에 당선되어 전쟁이 터지기 1주일 전인 6월19일에 개원한 제2대 국회의원 210명 가운데 27명이 납북 또는 피살되었다. 1948년에 선출되어 임기가 끝난 제헌의원 200명 가운데는 50명이 납북되었다. 4명 가운데 한 사람이 끌려간 것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교수, 의사, 과학자, 문인 등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가 살해되거나 북으로 끌려갔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방송을 직접 들었던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은 당시 일기(‘역사 앞에서’, 창작과 비평)에서 이렇게 평했다.

    “모두들 원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에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다는 김효석의 그 지나치게 비굴하고 치사스러운 주책덩어리의 내용에 비기어 안재홍, 조소앙씨 등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오히려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다.… 김규식 박사의 방송은 그 어조조차 침통하였고,…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의 폭발인 것 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조선중앙통신 발행

    통신사는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의 대표라는 박덕수(朴德洙)가 나타나 을지로 입구 합동통신 사옥에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를 설치하여 통신을 발행했다. 기존의 합동통신·조선통신·공립통신 가운데 공립통신은 폐지하고 합동통신과 조선통신을 통합하여 ‘조선중앙통신 서울지사’를 조직한 것이다. 합동통신 편집국 차장이었던 설국환(薛國煥)은 외신담당 부국장을 맡았고 총무담당 부국장에는 최명소(崔命韶·조선통신), 편집담당 부국장에는 최원혁(공립통신)이 각각 임명되었다. 통신은 하루에 2편 100여 부를 발행하여 신문사, 인민위원회, 각 내무서 및 주요 기관에 배포했다. 이와는 별도로 당과 정책입안자들에게만 배포하는 ‘정책통신’도 발행했는데, 내외신을 사실 그대로 수신 취재하여 ‘정책자료’로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설국환은 좌경 기자 유 아무개에게 끌려 6월29일에 합동통신에 나와서 박덕수의 지시로 조선중앙통신(서울판) 발행에 참여했다. 그러나 같이 근무하던 기자를 제명하는 숙청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7월15일 이후부터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동신문은 8월2일자에 설국환이 ‘어떠한 허위날조선전도 진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는 방송을 했다고 크게 실었다. 세계 언론인들에게 조선의 사태를 정확하게 보도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설국환은 서울이 수복된 후 ‘조선중앙통신 주필’로 지목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혐의가 벗겨져 합동통신 취체역 총무국장, 세계일보 전무취체역(1957년), 한국일보 초대 주미특파원(1960년), 논설위원 겸 주미총국장을 역임했다.

    전쟁 전 3개 통신에 근무하다 6월29일에 불려나온 사원은 150여 명이었는데 7월 중순경에는 50여 명으로 줄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사원들이 몸을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합동통신 정치부 기자 노석찬(盧錫瓚)과 사회부 기자 장명덕(張明德)도 7월 중순부터 이탈하여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서울 함락 후 불가피하게 소극적으로 협력했다가 이탈한 경우였다. 조선중앙통신 서울판 발행을 지휘했던 박덕수는 동아일보 목단강지국 고문(1939년 11월~1940년 8월 동아 폐간까지)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그의 후임은 남한 출신 유성찬(劉星燦)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경력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다.

    전쟁 전후의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신문을 발행할 정도로 북한은 남침을 준비하면서 신문 발행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는 광복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발행되던 신문이었다.

    해방공간에 발행된 조선인민보는 1945년 9월8일에 창간되었다. 광복 직후 인쇄시설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용지난이 극심했던 때에 나타난 여러 신문 가운데 비교적 세련된 편집으로 주목을 끌었다. 첫 발행인은 김정도(金正道)였는데 11월에는 좌익언론의 거물 홍증식(洪?植)이 사장을 맡으면서 선명한 좌익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던 1945년 말부터는 테러단이 신문사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고, 사장 홍증식이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다가 1946년 9월6일 폐간되었다.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방송국에서 피살된 김현수 대령의 최후를 보도한 동아일보. 1950.11.10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였다. 조선인민보보다 열흘쯤 늦은 1945년 9월19일에 창간되었다. 남로당의 핵심 인물 권오직(權五稷)이 사장이었다. 이 신문은 처음부터 공산당 기관지라는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선동적인 구호와 정치성 강한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해방일보는 1946년 5월18일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폐사건이 적발되면서 8개월 만에 지령 15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남로당은 뒤를 이어 5월 중순에 ‘청년해방일보’를 발행하여 1947년 9월21일자 지령 63호까지 끌고 갔으나 더 이상의 발행은 불가능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는 1950년 7월2일 동시에 창간하였다. 두 신문은 해방공간에 발행되던 제호를 사용하면서도 지령은 이어받지 않고 1호부터 시작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형식을 취했다. 조선인민보는 “인민정부 기관의 모든 정책과 노선을 올바르게 반영시킴으로써 각급 인민위원회의 정당한 운영에 이바지하고자한다”고 창간사에서 밝혀 북한의 정책 수행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두 신문을 점령지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전쟁 수행을 지원하면서 적대세력을 타도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두 신문은 미군이 노획하여 미국으로 보냈던 것을 한림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영인하여 1996년 ‘빨치산자료집’6, ‘신문편’1로 발행하였다. 조선인민보는 9월21일자까지, 해방일보는 9월23일자까지 지면이 남아 있다. 9월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몇 호 더 발행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8월15일자 해방일보.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해방일보와 평양의 로동신문도 8·15 지면은 같은 편집이다. 모든 신문에 김일성보다 스탈린의 얼굴이 오른쪽 상석에 배치된다.

    조선인민보 7월2일 창간 9월21일(1~82호)

    해방일보 7월2일 창간 9월23일(1~84호, 9월15일 이후 7호 결)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평양에서 조판한 지형(紙型)을 서울로 보내어 서울에서 인쇄 배포하였다고 북한의 언론사는 기록하고 있다. 로동신문과 해방일보는 한글전용이었으나 조선인민보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는 평양의 로동신문에 비해서 편집체제가 훨씬 세련되어 있다. 전쟁 전 서울에서 신문을 편집하던 인력이 편집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동신문은 문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리를 독려하고 이승만과 미국을 매도하는 글을 실었다. ‘표4’는 전쟁 후 로동신문에 실린 문인들의 이름이다.

    이태준은 서울을 거쳐 김천까지 종군하면서 종군기를 보냈다. 마지막 종군기는 8월5일에 쓴 것으로 말미에 적혀 있는데 40일이 지난 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되던 9월15일자 신문에 실려 있다. 전세가 기우는 상황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닌가 짐작된다.

    ‘표4’ 이승만과 미국을 매도하는 글을 쓴 문인들
    6·27 리태준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전국 문화인들은 총궐기하자! (작가)
    7·8 리기영 트루맨은 조선인민의 도살자이다.
    7·10 리태준 인민군대와 함께 정의의 전쟁에서 ―울진 해방지구에서
    7·11 리태준 미국식 자비심과 리승만식 애족사상 ―울진 해방지구에서
    7·14 한설야 히틀러 후계자 미제 강도들은 우리 농촌과 도시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있다.
    7·20 리기영 피는 피로써 갚자!
    7·8 한설야 트루그베·리-는 우리 조국에 대한 미제의 무장침범의 공모자이다
    7·25 김사량 종군일기 서울서 수원으로(7월4일, 5일, 6일)
    7·27 리태준 서울에서(7월18일)
    8·18~23 김사량 우리는 이렇게 이겼다―대전공략전 금강 라인에서(6회)
    8·19 림화 원쑤와의 싸움에 더욱 용감하라! (시)
    8·19 리기영 침략자는 누구냐!
    9·5 리태준 전선으로
    9·6 림화 전진이다! 진격이다! (시)
    9·6~7 리태준 전선은 대구를 향하여(상, 하)
    9·11 백남운 조선인민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9·12~13 김사량 락동강반 전호 속에서 (상, 하)
    9·5 리태준 전선으로-김천에서(8월5일 김천에서)
    9·19~20 한설야 미국 식인종의 말로
    7·8 림 화 ‘전선에로! 전선에로! 인민의용군은 나아간다’ (해방일보)
    7·20 리용악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 (조선인민보)
    7·21 리태준 ‘해방서울에서’ (해방일보)
    7·24 림 화 ‘서울’ (해방일보)
    7·24 리태준 ‘증오하자! 구축하자! 원쑤를 미워할 줄 알아야 나라를 사랑할 줄 안다’ (조선인민보)
    7·30~8·1 남궁만 ‘도하작전―대전전선에서’ (조선인민보, 상 하)
    8·2 리태준 ‘진격의 밤’ (해방일보)
    8·5~10 박팔양 ‘종군기’ 4회 연재 (조선인민보, 종군작가)
    9·3~4 박웅걸 ‘루포루타쥬, 락동강 적전 도하기’ (해방일보, 종군기자)
    9·5~13 김남천 ‘종군수첩에서’라는 제목 아래 부제를 달리하여 6회 연재 (해방일보)
    9·13 한설야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 ‘미공군의 범죄적 행동을 평화옹호자들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조선인민보)
    9·15 리기영 ‘안보를 악용하여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미군의 범죄적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조선인민보, 문화인)


    김사량은 전쟁이 일어나자 “김일성의 6월26일 방송연설을 심장으로 받아 안고 그날 즉시로 종군하였던” 것으로 북한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낙동강까지 내려갔고, 9월17일 마산 진중에서 ‘바다가 보인다’를 썼다. 북한군의 퇴각으로 후퇴의 길에 올라 강원도 원주를 20여 리 앞둔 남한강 나루에 도달한 것은 11월이었는데 고질이던 심장병이 도져 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생을 마쳤다. 김사량은 5월29일과 30일자 로동신문에 ‘지리산 유격지대를 지나며’를 실었다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지리산까지 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바다가 보인다’는 1951년 5월호 북한의 ‘문학예술’에 게재되었다.

    북한의 작가, 시인, 문화인의 전쟁 동원
    정진석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박사 (언론학)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 원장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외 다수한하운의 시가 발표된 시기와 내용 신천지(1949.4.25) 한하운 시초(1949.5.30) 한하운 시초(1953.6.30) 비 고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에는 임화, 이용악, 이태준, 김남천, 한설야, 이기영, 박팔양, 남궁만의 글이 실렸다.

    남궁만(南宮滿)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선전부장, 북조선연극인동맹 서기장 등을 역임한 북한의 극작가로 전쟁에 종군한 인물이다.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귀순한 이수근(李穗根)은 7월28일 로동신문에 ‘수뢰정대의 위훈―주문진 해전에서’라는 기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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