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들(위) ‘조선인민보’ 7월28일자. 서울 중앙청에 걸린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와 양국의 국기. 아래 사진에는 ‘위대한 쓰딸린 대원수 만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민들은 북한의 선전매체였던 신문과 방송이 내보내는 일방적인 정보만 접하게 되어 정확한 정세를 파악할 길이 없었다. 북한의 매체는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정확한 소식과 공정한 논평을 게재하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운명을 맞았고, 이로 인한 비극은 영원히 이어졌다.
서울 점령 4일 후부터 북한 신문 발행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인 6월27일까지 급박한 전황을 보도하고 호외로도 알렸지만, 28일부터는 모든 신문이 발행을 중단하였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4일 뒤인 7월2일부터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두 신문과 평양의 ‘로동신문’(조선노동당 기관지), ‘민주조선’(북한 내각 기관지)은 획일적인 공산주의 선전선동 매체에 지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사실을 보도하는 신문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
시민들의 염원을 해소하는 신문은 북한군이 서울에서 패퇴한 1950년 9·28 수복 직후 10월1일부터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하나씩 복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4 후퇴 이후에는 또다시 서울에서 북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 때는 우리 신문도 발행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부산, 대구, 수원으로 피난 보따리를 끌고 다니면서 신문을 발행했고, 두 번째로 수복된 서울로 와서 전쟁 상황과 국내외의 정세를 알리려 노력했다. 일선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쟁기간에 남북한의 언론도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남한과 북한의 신문이 어떤 형태로 발행되었는지, 북한군 점령 후의 신문에는 어떤 인물이 글을 쓰고 제작에 종사했는지 살펴본다.
서울 함락 직전까지 발행된 신문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적이 서울에 접근한 6월27일까지 신문은 발행되었다. 당시에는 석간신문을 다음 날짜로 발행하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신문인 6월28일자는 27일 오후에 발행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28일자 신문은 조선일보가 유일하다. 다른 신문도 27일까지 발행되었지만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발행되던 4대 신문이 전쟁 후 발행을 중단하였다가 속간되는 시기의 지면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네 신문 가운데 동아일보와 서울신문은 마지막 날인 28일자가 보존되지 않았고, 경향신문은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치 지면이 없다. 서울이 함락되자 언론인들은 황급히 지하에 숨거나 피난길을 떠났다. 당시 상황을 각 신문의 ‘사사(社史)’와 남아있는 지면을 토대로 다시 구성해본다.
경향신문은 6월25일 편집국 차장 이시호(李始鎬)가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의 전화를 단서로 긴급히 군과 요로에 확인한 후 우선 소공동에 있던 신문사 앞과 명동 입구에 속보를 써붙였다. 오전 9시30분이었고, 북한의 남침을 알리는 신문사 최초의 속보였다고 경향신문 사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날 이혜복(李蕙馥)을 동두천으로 특파했고, 호외도 발행했다. 현재 남은 지면은 6월25일자(지령 1201호)가 마지막인데 28일자 지령은 1204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27일 오후 4시경 외근기자들이 모여 이미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를 준비했다. 마침 정인영(鄭仁永) 기자가 일본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문선을 한 경험이 있어 간신히 문선을 끝냈으나 조판할 공무국 직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무국장 이언진(李彦鎭)이 손수 판을 짜서 300장가량의 호외를 수동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마지막으로 발행하고 무교동에 있는 ‘실비옥’에서 이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남은 지면은 6월27일자(지령 8308호)가 마지막이다. 28일자는 보존된 것이 없는데 지령은 8309호였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많은 사원이 납북되었다.
보존지면 | 지령 | 결 호 | 속간과 결호 | 보존지면(지령) | |
경향신문 | 6월25일 | 1201 | 26~28일(1202~1204)없음 | 10월1일(3호 없음) | 10월4일(1208) |
동아일보 | 6월27일 | 8308 | 28일 지면(8309) 없음 | 10월4일 | 10월4일(8310) |
서울신문 | 6월27일 | 15715 | 28일 지면(15716) 없음 | 10월1일 | 10월1일(15177) |
조선일보 | 6월28일 | 8375 | 28일까지 지면 있음 | 10월20일(3호 없음) | 10월23일(8379) |
서울신문은 26일 오후 2시까지 본지 발행을 비롯하여 무려 6차례나 호외를 발행했다. 27일자 지면은 호외 내용을 재수록한 것이다. 27일 오후 4시까지 다시 5차례의 호외를 더해서 호외를 11차례까지 찍어냈다. 간부들은 27일 밤 9시까지 버티다가 막 신문사를 나서려는데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李瑄根)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28일 미명을 기해 유엔군 비행기가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호외 10만장을 인쇄해달라고 요청해서 3시간이나 걸려서 12번째 호외를 찍었다. 이때가 밤 11시 반이었다. 그리고 신문사를 떠났던 사장 박종화(朴鍾和)와 주필 오종식(吳宗植)은 적 치하 3개월을 간신히 살아남았다. 사장 비서 이승로(李昇魯)는 적탄을 맞아 순직했다.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은 당시 가장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서울신문을 접수하여 조선인민보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6월27일에 발행한 마지막(지령 8375호) 지면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사장 방응모를 납북하여 신문사 가운데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언론인의 납북에 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