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예술교육이다. 한국의 음악교육은 세상에 나가면 필요 없는 것, 필요하면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을 배우는 것은 그것을 통해 정신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인생의 깊이를 맛보기 위해서다. 좋은 음악은 인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표피적인 교과과정을 혁신해 누구나 악보읽기에 능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요즘처럼 영어교육이 강조된 적은 없었다. 영어 제일주의 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계화를 위해 언어장벽을 해결해야 한다” “영어만 잘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문제없다” “높은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기 위해서 원서를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한정된 수업시간 때문에 다른 분야, 특히 예술 분야 수업이 터무니없이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수업이 배정되어도 아이들은 대학입시에 이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안다. 혹은 필요해도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당연히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어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철학이나 인문, 과학이나 예술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수업시간이 너무나 부족하지 않았을까?
‘참교육’ 열풍이 분 적이 있다. 나는 참교육은 한 번의 열풍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영원히 추구해야 할 가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한때 지나가는 열풍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론 사람들 사이에서 그 단어를 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참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1992년 개봉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키팅 선생. 당시만 해도 이분은 참교육의 상징이었다.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이 유행어가 되었고, 각 중·고등학교에는 키팅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한두 분 계셨다. 그분이 전근이라도 가시는 날에는 학생들은 책상 위에 올라가서 배웅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나라는 그토록 진짜 교육을 열망했던 나라였기에 영화에 대한 반응이 더욱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많은 사람이 ‘카르페 디엠’이나 ‘책상 장면’ 등 명대사 명장면을 외우고 있지만, 나도 쉽게 지나쳐버린 장면이 있었다. 나중에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발견하고야 말았다. 선생님이 책상 사이에 앉아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얘기해주는 장면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 의사와 같은 직업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좋은 수단이 된다. 하지만 시나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은 인생의 목적 그 자체다.”
위인전에 나오는 수많은 작곡가의 부모는 자식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고 법률이나 의학을 공부하도록 강권했다. 이러한 풍토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안정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고, 그것은 다시 말해 경제적인 안정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정신적인 풍요는 예술로서, 혹은 다른 분야에서 예술적 경지에 이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에 그들은 도전했다.
그렇다면 예술, 특히 음악교육의 오늘날 형편은 어떨까? “이제까지 교육에서 예술은 항상 등한시되어왔다.” 이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올바른 예술교육을 위해 몸 바쳐왔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이러한 현실은 외국이나 국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음악 혹은 예술교육의 현실과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쳐나갈지를 짚어볼 것이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더 나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교육을 떠올린다면 우선 크게 학교에서 배우는 일반 음악교육과 전문적인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전공자 교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럼 먼저 우리가 배워온 일반 음악교육 얘기를 해보자.
정규 교과과정이 전 국민을 클래식 전문가나 애호가로 만들기 위한 교육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음악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그것에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것, 그리고 훌륭한 예술가가 등장했을 때 그를 알아보고 지원하는 문화 만들기는 교과서 안에서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남의 나라에서 먼저 알아본 예술가를 뒤늦게 초청하는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선 초중고 음악 교육과정을 발전시켜야 한다.
감상이 아닌 암기 교육
현재의 수업방식은 이론과 실기, 그리고 감상이 분리되어 있다. 이론은 악기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작곡가들에 대한 개요로 이루어진 음악사이며, 악보를 이해하는 과정은 초기에 끝나고 이후부터는 노래를 부르는 수업으로 대체된다. 그런 다음 수많은 사람에게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감상수업이 진행된다.
결과는 어떠한가? 작곡가들에 대한 정보는 그들의 음악을 상상할 수 없는 개요 그 자체다.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는 작곡가라는 사실은 알아도 그의 음악의 발전과정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그 인물의 전기를 읽게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악보는 음악을 바라보는 설계도다. 하지만 음악 전공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은 기초적인 동요 수준의 악보만을 이해한다. 이것은 색깔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이용한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악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국민의 예술성은 더욱 빨리 높아질 것이다. 감상수업을 예로 들어보자. 수십 곡의 음악을 틀어주고 제목을 외운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음악을 다 들려줄 수도 없다. 앞부분이나 중요 부분만 들려주고 그 곡의 제목만 말해준다. 그것은 감상이 아니라 암기다. 예술가의 삶과 분리된 음악은 그냥 살아가면서 알아야 하는 것, 세상에 나가면 필요 없는 것, 필요하면 다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그 음악이 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교육은 그 음악선생님의 교양과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더 불행한 사실은 그 음악선생님이 받은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문화를 가르쳐주려는 선생님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고, 또 이러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여름방학을 맞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스쿨 클래식’.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교사들에게 음악적인 경험을 얻기 위한 공연과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이 감동받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능하다고 해도 심한 왜곡을 가져온다. 과거의 훌륭한 작품이 왜 요즘 학생들에게 지루한 음악이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그들의 연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중의 전달자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달자는 교육계에서는 선생님의 역할이며, 음악계에서는 연주자의 역할이다.
악보 훈련을 강화하라
교사들을 위해 한 학기에 두세 번 교육적인 음악회를 열어, 연주자들이 겪은 살아있는 체험과 클래식음악의 정수를 경험하게 한다면 자율적인 영역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함께 노래하는 것 위주의 실기교육 대신 소수 학생이 모여 연주, 혹은 노래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실내악은 전체가 함께 하는 합주나 합창과 전혀 다른 효과를 낸다. 각자가 선율의 주인이 되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기에 훨씬 능동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학생들의 인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런 경험을 학교에서 하지 못하면 그들은 결국 노년기에 접어들어서야 이 가치 있는 예술을 취미로 가지게 된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럽게 더 자세한 악보읽기 능력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파묻혀서 노래를 부르다가 앙상블의 멤버가 되었을 때는 요구하는 악보의 체계가 훨씬 많아진다. 일반음악 교과과정은 악보에 대한 훈련의 비중을 간과하고 있다.
음악이라는 고기를 잡는 방법은 바로 악보읽기 능력이다. 찬송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만족한다면 정작 교회음악도 발전하기 어렵다. 누군가 악보를 보여주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시창하거나 악기로 연주할 수 있다면, 음악을 들으며 악보를 따라 부를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시켜야 한다.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혼자서 기타를 위한 코드표와 타브 악보를 공부해야 한다면 너무나 무책임한 교육이다. 그리고 음악을 비롯한 예술분야의 중요성을 교육부에 지속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세상을 경제논리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알려준다면 지금처럼 한쪽으로 편향된 교육은 지양할지도 모른다.
이번엔 전공자 교육을 살펴보자. 모두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이렇다.
1. 우리 아이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서 남보다 더 일찍 악기를 사주고 레슨을 받게 한다.
2. 예술중이나 예술고와 같은 음악학교에 입학시킨 후 비싼 등록금과 별도의 레슨비를 들여가며 틈나는 대로 유명 콩쿠르에 도전시킨다.
3. 이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한다. 대학에 보내기 전에 외국의 유명한 음악원이나 음대로 유학을 보내거나 국내 음악대학 입시를 위해 준비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 이번엔 아주 비싼 악기로 바꿔주는 시기가 왔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은 그런 면에선 다행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공부방에 그랜드피아노 한 대를 놓아달라고 할 것이니까.
4. 국내든 국외든 일단 음악대학에 들어가면 화성학이나 음악사 등의 커리큘럼, 그리고 소수의 교양과목을 통과해야 하지만, ‘실기’라고 하는 악기 연주나 작곡시험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5. 이제 졸업을 했다. 국내 대학 졸업자들은 이제 다시 유학을 결심하고 떠나느냐, 아니면 국내 오케스트라에 취직하거나 대학강사 자리를 얻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후자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 유학 프로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대학 졸업자 중 많은 사람이 국내에 들어와 오케스트라나 강사 자리를 놓고 고민한다. 그러나 경쟁자가 많고 안정된 수입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직업임을 잘 알고 있다.
콩쿠르에서 우승해 일찍 세상에 데뷔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이 모두 스타가 될 것 같지만, 그러한 경력이 연주자의 성공을 무조건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앞으로의 진로에 유리한 점은 있겠지만, 정작 성공에 필요한 이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마케팅과 기획은 아티스트와 계약한 기획사의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연주자는 독주나 팀을 만들어서 공연을 직업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수익조차 일정치 않기 때문에 일류 스타가 되기 전에는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치며 레슨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결국엔 아티스트가 아닌 교육자를 양성하는 교육이 되는 셈이다.
독일 프란츠 리스트 음대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자 양성이 아닌 아티스트 양성을 위한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실내악 수업을 강화해야 한다. 대학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하는 실내악 수업은 그 비중이 매우 낮다. 이 때문에 졸업 후 독립적인 아티스트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팀 단위의 교육은 그들의 연주를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든다.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대학 내의 벤처기업 열풍은 아쉽게도 음대에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연주자들도 이제 새로운 기획과 리더십을 배우며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클래식음악 시장이 점점 축소되고 있는 만큼, 이런 상황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결해나가는 노력은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연주자에게 기획사나 매니저 노릇까지 하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과 어떻게 계약하고 기획을 통제하며 논의해야 하는지는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연주자로서 살아가는 프로들을 초빙해서 레슨에 제한되지 않은 총체적인 강의를 듣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를 읽고 건강을 챙겨라’
그렇다면 전공자교육의 최종 목표인 진정한 연주자는 어떤 모습일까? 음악교육에 많은 업적을 남긴 헝가리의 작곡가 졸탄 코다이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진정한 교육에 대해 해결책을 간구해왔다. 다음은 그가 리스트 아카데미 교장으로 있을 때 한 종업식 연설문을 필자가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학생 여러분, 방학을 맞이하는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두세 달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정원사가 두 달 동안 공원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좋은 음악가일까요? 100년 전 슈만은 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이 여러 가지 번역판으로 나와 있음에도 아직까지 학생들이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책은 도서관에서 단 한 번 빌려줬을 뿐입니다. 지금의 똑똑한 학생들조차 최신 시설의 도서관이 주는 편리함을 이용하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제가 말하려고 하는 대상은 음악학자가 아니라 진실로 음악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읽을 가치가 있는 몇 권의 책입니다. 그중 하나가 슈만의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귀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종소리, 유리소리, 새소리, 자동차소리에서도 음을 찾아보십시오. ‘절대음감’이란 신화는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사실 라, 즉 A라는 음도 국제회의를 통해 결정되기 전까지는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원래의 빠르기로 연주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술 취한 듯이 비틀대며 연주합니다. 본받지 마십시오. 기본적인 법칙들을 공부해서 화성학이나 대위법 같은 학구적인 용어들이 나올 때 긴장하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음악을 평범하게 연주하는 것보다 쉬운 음악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음악은 손가락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기 없이도 속으로 음악을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피아노를 2년 동안 공부해온 한 어린 소녀가 3주 가까이 모차르트를 연습해왔습니다. 레슨시간에 늦게 도착한 이 아이는 “선생님이 지금 치고 있는 곡이 뭐예요?”라고 물었고 선생은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네가 오늘 레슨 받기 위해 연습해 온 곡이잖니?” 왜 아이는 그 곡을 몰랐을까요? 그 이유는 선생님이 전혀 틀리지 않고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곡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음악교육의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날마다 음악을 공부하면서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중지해야 합니다. 맑고 신선한 느낌 없이 공부하는 것보다는 쉬는 편이 낫습니다. 쉬면서 시를 읽으십시오. 브람스는 “잘 연주하려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음악은 위험한 직업입니다. 수많은 연주가가 건강상태를 조절하는 것을 소홀히 여겨왔습니다. 클라라 슈만은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가장 큰 교육이 바로 건강유지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유행하는 것만 연주하지 마십시오. 유행하는 것은 곧 유행에 뒤처지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설탕이나 초콜릿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대가들은 풍부한 음악적 영양분을 제공해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먹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음악은 퍼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전에 당신은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연주가 훨씬 유연해지고 탄력이 생겨서 생동감 있게 될 것입니다.
악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악기가 최고라는 자만심은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최고의 음악은 앙상블입니다. 모든 사람이 제1바이올린만 고집한다면 어떻게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겠습니까?
자, 그러면 누가 좋은 음악가일까요? 만약 당신이 특별히 어떤 곡에 자신이 없다거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 속에 빠져있을 수 없다면 좋은 음악가가 아닙니다. 우연히 악보가 두 장 넘어갔을 때 연주를 멈춘다면 그 사람도 좋은 음악가가 아닙니다. 좋은 음악가는 처음 보는 악보를 접했을 때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있고, 아는 악보를 보고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음악이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에 있는 사람이 좋은 음악가입니다.
머리와 마음에 음악을 간직해야
귀로 음악을 듣고 빠르게 해석할 수 있는 재능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타고난 재능은 훈련을 통해서만 발전합니다. 산속에 숨어 지내며 연습해서는 결코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케스트라나 앙상블, 합창단과 가까이 하면 훌륭한 음악적 경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음악을 좋아할지 쉽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이해되는 음악이 많습니다. 음악적 창조력과 영감을 가지고 있다면, 망상에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기록하고 정리하십시오. 그래야 형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우아한 음악적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른 예술분야와 과학, 인생의 모든 분야를 깊이 공부하십시오. 삶이 없이는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술 없이도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도덕이나 예술은 그 법칙이 같습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음악가의 최고 경지는 아무리 복잡한 악보를 보더라도, 듣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고 상상해내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귀를 발전시킵니다. 어른들은 빨리빨리 발전하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보다 슈만의 충고가 더 필요합니다.
잘 훈련된 귀, 잘 훈련된 마음, 잘 훈련된 지식, 잘 훈련된 손,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뒤처지거나 앞서간다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마지막 것, 잘 훈련된 손에만 집중해왔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을 뒤처지게 만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지식은 어느 학교의 음악커리큘럼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의 약점은 모두 그곳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에겐 합창단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 명곡들을 연주하는 경험을 이제야 얻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현악사중주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탁월한 음악을 듣는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소수의 학생만이 슈베르트 사중주를 순례했을 뿐입니다.
자, 그럼 이런 길고 지루한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명성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최고수준까지 갈고 닦는 것이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는 그가 사람들에게, 또 자기 민족, 나라를 위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그것을 이루는 강렬한 힘 중 하나이며,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갚아주는 사람이 인류에 대한 예술가의 의무를 다하는 자입니다.
완벽한 음악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완벽을 목표로 계속 노력하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고, 적어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슈만의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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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래 음악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한 것이다. 음악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교육만 제대로 정립되어도 올바른 세상이 될 것이다.
교육의 목표는 배우는 자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하게 할 것인지에 있다. 수단만 있고 목적이 없는 교육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 목적은 각자가 정하고 스스로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하고 야만적인 사회다. 인격이 완성되기 전의 아이들은 무엇을 왜 배우고,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도 교육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