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 강유정│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9-10-07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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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곤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코코 샤넬의 성과물은 아직 젊지만 가진 것이 없는 여성들을 자극한다. 코코 샤넬의 비참한 무명 시절처럼, 어쩌면 에지 있는 패션 코드로 무장한 그녀들의 삶 언저리도 고단하고 쓸쓸할지 모를 일이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코코 샤넬’

    브랜드의 시대다. 사람들은 추워서 옷을 입고, 더워서 옷을 벗는 것이 아니다. 발이 편한 구두, 촉감이 좋은 옷감은 선택의 부차적 기준에 불과하다. 상품 선택의 첫 번째 고려대상은 바로 브랜드다. 모자는 헬레나 카민스키를, 트렌치코트는 버버리를, 가방은 에르메스를, 그리고 신발은 페라가모에서.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특정 브랜드로 치장한다. 어떻게 입느냐가 아니라 무슨 브랜드를 입느냐가 문제인 셈이다.

    최근 가장 ‘핫’한 유행어는 바로 ‘에지 있게’라는 말이다. 정체불명의 이 콩글리시는 ‘멋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지’라는 말의 유행은 ‘쿨’ ‘시크’라는 용어가 한창 ‘멋지다’라는 의미를 대신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에지 있게’라는 말 속에는 일종의 사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섹스 앤 더 시티’

    옷이 아닌, 브랜드를 사라

    에지는 그냥 실용적으로 멋지게 입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브랜드를 걸쳐야만 들을 수 있는 평가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에지라는 말 속에 사치스러운 명품이라는 의미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에지 있게 살기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는 네티즌들의 비판적 댓글은 이러한 뉘앙스를 반영한다. 바야흐로 계급적 격차는 이제 의상에서 확인된다.

    ‘우리 집에 TV가 있어, 백색 전화기가 있어’처럼 무엇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가 부(富)와 빈(貧)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전화기나 TV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제 보통명사로서의 상품은 생필품에 속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 코 입을 가지고 있듯 누구나 전화기 냉장고 TV 자동차는 가지고 있다. 우리 집에 전화가 두 대가 있어, 라고 수량으로 인증받던 ‘부’의 시절도 지나왔다.



    이제는 바야흐로 ‘어떤’ 냉장고,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상대적 부와 빈이 나뉜다. 실제 통장의 잔고와 상관없이 브랜드는 사람을 평가하게 만든다. 이제 패션은 단지 취향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기호적 욕망을 부추기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은 상대적 빈곤을 강화한다. 실제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도 상대적인 격차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누구나 배우 김혜수처럼 고가의 멋진 옷을 입고, 제임스 본드처럼 수억원대의 자동차를 갖고 싶다. 하지만 누구나 다 가질 수 없고 엄밀히 말해서 꼭 수억원대의 사치품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영상적 이미지는 소비를 권한다. 차가 아니라 바로 ‘그’ 차를 사야 한다고, 옷이 아니라 바로 그 ‘브랜드’를 사야 한다고 말이다. 시각적 이미지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소비를 자극하기에 꽤 유용하다. 과연 영화는 어떤 식으로 패션과 취향을 활용하고 있을까? 넘쳐나는 상품만큼, 넘쳐나는 욕망과 그것을 자극하는 영화적 이미지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상대적 빈곤을 견뎌나갈 수 있을까. 견물생심(見物生心), 볼수록 가난해지는 영화 속 소비의 풍경 속에 진짜 삶이 있기는 한 것일까?

    욕망의 심장을 겨냥하다

    드라마 ‘스타일’에 등장하는 패션잡지의 편집장 이미지는 칙릿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과 닮았다. 닮은 것은 편집장의 이미지뿐만이 아니다. 패션업계의 엄혹함을 다룬다거나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사람의 품성과 대우가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은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패션잡지 편집장의 비서가 된 앤드리아다. 앤드리아는 멋진 입성이나 브랜드가 개인의 가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패션잡지 편집장의 비서가 되자 어떻게 입고,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 자신의 능력이 평가되는 세계에 살게 된다. 옷을 그저 실용적 의미로 받아들이던 앤드리아는 이제 다이어트를 하고 샤넬, 에르메스를 입어 자신의 감각을 과시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서인 앤드리아가 여러 벌의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앤드리아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편집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이 영화가 앤드리아라는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관객은 여러 벌의 옷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갈아입고 등장하는 앤드리아를 패션쇼장의 모델처럼 관람한다. 관객은 앤드리아라는 모델을 통해 고가의 상품들을 마음껏 눈요기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실제 ‘보그’지 편집장의 비서를 맡았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영화는 샤넬, 디올, 프라다와 같은 고가의 브랜드 이름이 오가는 이미지 가운데 멋만 내는 텅 빈 여자와 자아를 추구하는 앤드리아를 배치한다. 영화는 언뜻 비판적이면서 주체적인 여성 앤드리아를 통해 소비문화의 단면을 공격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소비문화를 단죄하는 듯하면서 그것을 자극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영화 속에서 편집장이 패션을 무시하는 앤드리아에게 ‘블루’의 역사를 들려주는 장면은 앤드리아의 그 어떤 비판보다 선명하다. 앤드리아의 태도는 오히려 식자층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오만을 입증해준다. 그에 비해 편집장의 패션에 대한 태도는 숭고하고 또 겸허하기까지 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마돈나의 노래 ‘보그’를 배경으로 캣워크 방식으로 걸어가는 앤드리아인 까닭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SBS 드라마 ‘스타일’

    비슷한 장면은 ‘섹스 앤 더 시티’에서도 등장한다. 주인공 캐리는 결혼을 앞두고 여러 벌의 웨딩드레스를 입어본다. 오스카 드 라 렌타, 비비언 웨스트우드와 같은 수백,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의상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캐리는 웨딩드레스 모델이 되어서 관객에게 낯선 브랜드의 의상 수십 벌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렇게 고가의 브랜드를 알게 되고, 또 욕망하게 된다. 무릇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보면, 알게 되면 물건에 대한 욕심은 커지게 마련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영화들은 고가의 상품과 브랜드에 대한 소비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겉과 달리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오히려 잘 몰랐던 브랜드를 광고하고 그 고가의 브랜드야말로 가질 만한 것이라고 충동질한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윤리적 선택은 변명에 가깝다.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처럼 남성 관객이 많은 영화에 유독 고가의 자동차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유사하다. 남성 관객을 겨냥해 고가의 자동차, 오토바이가 브랜드의 옷 대신 등장한다. 소비를 자극하는 영화적 소도구가 비단 여성 관객을 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많은 브랜드를 통해 호소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훨씬 더 교묘하게 소비자를 자극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광고 문구에 둘러싸여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고가의 브랜드는 더 많아지고 또 그에 대한 욕망도 견고해질 것이다. 바야흐로 생필품이 아닌 취향과 선택에 의한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쇼퍼 홀릭’

    쇼핑에 미친 여자들

    ‘뮤리웰의 웨딩’을 만들었던 P.J 호건 감독이 연출한 ‘쇼퍼 홀릭’은 ‘쇼퍼 홀릭의 고백’이라는 원제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쇼핑에 중독된, 독한 표현으로 쇼핑에 미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레베카 블룸우드는 원예잡지의 기자다. 그녀는 100원을 벌면 1000원을 쓰는 여자다.

    이 사실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녀가 소비하는 품목이 모두 패션 아이템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종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패션잡지’라고 믿고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한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낙하산 직원에게 밀리고, 복수심에서 보낸 편지가 잘못 배달된 덕분에 투자잡지사에 취직하게 된다.

    영화 ‘쇼퍼 홀릭’은 쇼핑 중독에 빠진 한 여자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보여준다. 발랄한 영화의 문법은 쇼핑 중독자 레베카에게 “이 물건을 사, 꼭 사야 돼”라고 말을 거는 마네킹에게서 읽을 수 있다. 마네킹은 그녀가 지나가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속삭인다. “이 초록색 스카프는 네 거야, 내가 입은 옷을 사 가, 사 가”라고 말이다. 쇼핑 중독자들의 “이 옷을 사 가요, 라고 말을 거는 듯해요”라는 고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셈이다.

    쇼퍼 홀릭 레베카의 삶은 피곤하다 못해 한심하다. 월급으로 감당하지 못한 카드대금 때문에 상습 연체자로 분류돼 카드회사의 집중 관리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녀를 찾는 각종 카드회사의 연체 담당 직원에게 아버지, 어머니부터 친구까지 모두 죽은 것으로 변명을 갖다댄 지도 오래다. 그러던 그녀는 투자잡지에서 엉뚱하게 패션 코드의 사고방식으로 일관하다가 역설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투자의 의미에서 보자면 패션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일종의 알레고리이자 메타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명세를 타지만 그녀를 집요하게 뒤쫓는 카드회사 직원 때문에 그녀는 전국적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쇼퍼 홀릭을 치료하는 모임, 중독자 모임에 나가며 개선책을 찾는다. 그와 함께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 직장 상사의 사랑을 되찾고자 노력한다. 예상하다시피 로맨틱 코미디답게 이 영화는 결국 모두 다 잘된 결말을 보여준다. 레베카는 자신의 고가 의류 및 가방, 신발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그 수익으로 빚을 청산한다. 그와 함께 사랑하는 남자의 신뢰도 되찾는다. 쇼핑 중독증도 고치고 사랑도 찾는 결말은 쇼핑 중독을 코믹한 실수 정도로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서 쇼핑 중독이 이렇게 쉽게 고쳐질까? 영화는 미치도록 카드를 긁고 싶고 또 긁어댄 카드 때문에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 당신도 그 못된 버릇을 끊고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분명 이러한 작품은 크레디트 카드로 오해된 자신의 능력에 조금의 위안을 전해주기는 한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건 왜일까.

    영원히 늙지 않는 쇼퍼, 섹스 홀릭

    ‘섹스 앤 더 시티’를 소모하고 소비하는 관객은 그녀들이 첫 시즌에 발을 내밀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30대 여성들이다. 과연 내 이름이 새겨진 크레디트 카드를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20대를 지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며, 자기 앞으로 된 적립식 펀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30대 커리어 우먼들, ‘섹스 앤 더 시티’는 그녀들의 관심을 통해 성장해온 드라마다. 6편까지 제작될 수 있었던 드라마의 힘도 실상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섹스 앤 더 시티’는 남성 중심적이며 수구·마초적이던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그것을 소비하는 여성의 시점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들은 결혼보다는 섹스가 문제이며 직업만큼이나 연애가 중요한 양식임을 설파했다. 결혼이 아닌 연애, 사랑이 아닌 섹스를 주장하는 그녀들은 새로운 인간형으로 자리 잡았다.

    유능하고 이기적인 미란다, 사랑스럽지만 유별난 공주 샬롯, 섹스 매니악 사만다, 연애 중독자 캐리 등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하는 4명의 캐릭터는 주부 혹은 예비 신부로 이분화되었던 여성을 다양화해준 셈이다. ‘섹스 앤 더 시티’는 말 그대로 30대 여성의 고민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입체화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섹스 앤 더 시티’는 내추럴 본 뉴요커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비꼬아보자면, ‘섹스 앤 더 시티’는 한국의 30대 여성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욕망을 보여준다. 부모님이 잠든 새벽 시간에 거실에 앉아 늘어진 면 티셔츠를 입고 바라보는 욕망의 드라마가 곧 ‘섹스 앤 더 시티’였던 셈이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드라마에 빠진 여성들은 그녀들이 우리의 심리를 반영한다고 박수 쳤지만 사실상 우리는 그녀들의 삶을 동경했다고 할 수 있다. 지리멸렬한 연애사에 시달리는 것을 빼고 그녀들과 우리의 공통점은 찾기 힘들다. 100만원이 훌쩍 넘는 명품 구두를 홧김에 사고,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원 나잇 스탠드’를 하는 그녀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가 아니라 너무도 그렇게 살고 싶어할 뿐이다.

    영화는 드라마의 최고 장기였다고 할 만할 소위 ‘뽐뿌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크리스찬 라크르와, 베라 왕, 비비언 웨스트우드, 오스카 드 라 렌타와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하나밖에 없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누비는 캐리는 우리의 침전된 욕망을 흔들어놓는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결혼식에 대한 환상을 캐리를 통해 대리충족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은 이 네 인물이라기보다는 네 명의 캐릭터에 쌓인 이미지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드라마에서 했던 방식 그대로 싸우다가 화해하고, 연애하며 섹스를 나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성공과 실패가 이 안에 내재한다는 사실이다.

    백일몽처럼 달콤한 거짓

    50이 다 된 네 인물은 하지만 여전히 30대 여성의 고민 언저리에 놓여 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아이를 낳아야 하느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이미 그들이 한때 고민했던 그 문제의 질감과 같다. 이것은 한편 ‘섹스 앤 더 시티’가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해 자리 잡은 30대 여성들에게 항구적으로 유효한 선택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캐리와 샬롯은 나이를 먹어 50대가 되지만 그녀들이 했던 고민은 이제 막 30대에 진입한 후배들이 이어받기 때문이다. 누구나 30대에는 그런 고민들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50줄이 된 그녀들이 30대에 끝낸 고민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이상하다. 만일 결혼과 연애, 일과 자아의 문제를 40이 넘어서까지 결론짓지 못한다면 그것은 갈등의 흔적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지다. 중요한 것은, 30대 여성의 고민과 삶을 주제로 내세우는 영화적 선택이 이 작품을 소비하는 계층을 위한 전략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30대 직장 여성들이 소비하는 ‘섹스 앤 더 시티’는 등장하는 배우나 캐릭터가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을 위해 맞춤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결혼과 함께 아주 큰 옷장을 선물하겠다는 빅의 제안은 뭇 여성의 욕망을 건드린다. 이 제안은 한도가 억 단위인 카드를 내밀며 마음대로 써도 돼, 라고 말하는 천박함을 너머 낭만적 환상까지 준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건드리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의 텅 빈 마음이다. 당신도 역시 빈 옷장을 갖고 싶지 않나요? 라고 건드리고, 이제 그 옷장을 채우기 위해 지름신과 접속해보세요, 라고 은밀히 유혹하는 셈이다.

    어떤 점에서 30대 일하는 여성의 특권이라면 자기가 번 돈을 모조리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점일 테다. 그런데 ‘섹스 앤 더 시티’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또 이용한다. 영화는 우리는 언제나 30대 여성일 수 있어, 라고 말하지만, 즐겁게 보면서도 허무해지는 까닭은 그들이 건네는 위안이 백일몽처럼 달콤한 거짓이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의 상징, 코코 샤넬의 씁쓸함

    샤넬, 그것은 욕망의 상징이다. 그녀의 로고가 달린 체인백은 수백만원을 호가하지만 혼수 1순위로 회자된다.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라도 얻고 싶은 사치품, 그 이름이 바로 샤넬이다. 그런 샤넬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코코 샤넬’은 제목처럼 샤넬이라는 사람에 관한 영화다. 샤넬의 화려한 컬렉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접는 편이 나을 듯싶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코코 샤넬’

    영화는 우울한 눈빛을 한 채 고아원으로 가는 두 자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코코 샤넬과 그의 언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부랑자인 아버지는 그녀들에게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세계의 최고급 패션 상품을 만들어내고, 재클린 같은 상류계층의 여성과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유명 배우가 즐겼던 패션 코드의 창조자치고는 어딘가 남루한 유년기다. 그렇다. 사실 ‘코코 샤넬’은 샤넬 자신도 숨기고 싶어 했던 그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그려낸 작품이다. 기대나 예상과는 달리 젊은 시절의 샤넬, 가브리엘 샤넬의 삶은 초라하고 볼품없다.

    고아원에서 벗어난 샤넬은 시골의 조그만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봉제사로 일한다. 벌이도 시시하고 사람들에게서 받는 대우도 형편없다. 그런 그녀에게 탈출의 기회가 생기니 그것은 바로 돈 많은 귀족 발장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가브리엘 샤넬은 무작정 발장을 찾아 그의 집으로 간다. 발장은 그녀를 불량한 과자처럼 집 안에 숨겨 두고 야금야금 즐긴다. 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때 그녀는 숨어 있거나 가수처럼 노래를 불러야 한다. 스크린 위에 묘사되는 코코 샤넬의 젊은 시절에는 낭만도 희망도 없다. 코코가 아닌 가브리엘로 살아가던 시절 그녀는 단지 젊은 육체말고는 밑천 삼을 것이 없는 가난한 배우 지망생에 불과하다.

    더욱 씁쓸한 것은 가브리엘 샤넬이 코코 샤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발장이라는 유한 건달의 도움이었다는 것이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고는 해도 영화에 그려진 샤넬의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신체를 빌미로 성공하려는 여자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이 씁쓸함은 샤넬이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기보다는 그저 막연히 성공하려 했다는 사실과도 통한다. 그녀는 전리품처럼 발장에게서 아서 펠터에게로 ‘대여’되고 아서 펠터의 정부로 지낸다.

    ‘에지 패션’에 드리워진 거짓 욕망과 고단함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우리는 코코 샤넬의 일대기에서 그녀를 세계적 브랜드의 주인공으로 만든 숨은 열정과 노력을 보고 싶었지만 영화 속에서 좀체 발견하기 어렵다. 분명 세계적 디자이너로 성장했을 때 샤넬에게는 낭만적 사랑이 아닌 다른 노력과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샤넬은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을 거짓으로 꾸며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녀의 남루했던 시절은 최고의 사치품이 지닌 비밀을 보여주는 듯싶다. 빈곤과 허영을 채우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그녀의 성과물들은 또 다른 여성들, 아직 젊지만 가진 것이 없는 여성들을 자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코코 샤넬의 알려지지 않은 시절처럼, 어쩌면 에지 있는 패션 코드로 무장한 그녀들의 삶 언저리 역시 고단하고 쓸쓸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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