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현 회장에 ‘의대 교수 표’ 부탁
- 백성학 회장 측 “정운찬에 용돈 줬다”
- 수십 년간 대선 때 DJ만 찍어
- 盧정권, 정운찬의 방배동 카페 뒷조사
정 총리 후보자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프린스턴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를 마쳤다. 2002년 7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총리급’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최고의 뉴스메이커
그는 △대선 때마다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온 충청 출신이라는 점 △경제·교육 전문가라는 점 △가난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전두환 정권에 맞서 서울대 교수들의 대통령직선제 개헌 서명을 주도한 개혁성 △비교적 젊고 준수한 용모 등이 더해져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 때 그는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는 대항마로 대선 출마 직전까지 갔다 4월30일 기자회견을 열고 포기한 적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정운찬 국무총리’ 구도는 정국에 다섯 가지 중요 쟁점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중도성향 총리 임명으로 이명박 정권의 ‘중도실용-친서민’ 기조에 대한 지지가 상승할지 여부다.
9월3일 서울대 강의실에서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마지막 경제학 수업을 하고 있다.
셋째, 정 후보자가 여권의 경쟁력 있는 차기 대선주자로 자리매김할지 여부다. 현재 여권 주류인 친이(親李)계는 정 후보자가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가 될 재목인지 눈여겨보고 있다.
넷째, 이명박 정권과 정 후보자가 서로 윈-윈 하는 화학적 결합을 이뤄낼지 여부다. 정 후보자가 ‘의전 총리’에 머물면 그의 정치적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그러나 대통령과 대립각을 안 세워도 문제, 세워도 문제가 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국정의 거의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현 시스템에서 단기필마로 들어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총리상(像)을 구현해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섯째, 이런 이유로 정 후보자는 특정 정책에서 특화된 총리 역할을 찾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 그가 자신의 지론인 ‘교육 개혁’이나 ‘세종시 수정’에 총대를 메고 올인할 경우 정운찬발(發) 드라이브는 정치권과 사회의 중심 이슈로 떠오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당분간 정 후보자는 모든 오피니언 리더의 주목을 받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뉴스메이커 중 한 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권한 행사에 현실적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매우 중요한 공직이다. 그러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정운찬’에 대한 정보는 공중(公衆)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양적으로 빈약하고 내용에서도 표피적 현상만 주로 다뤄졌다.
예를 들어 ‘가슴으로 생각하라’라는 그의 자서전 외에 본인의 육성(인터뷰 등)은 적은 편이고 그의 삶을 소개하는 대다수 보도도 비슷한 에피소드의 반복이거나 정운찬 개인을 피알(PR)해주는 성격이었다.
거물로 만들어준 ‘이변’
‘신동아’는 정 후보자의 지인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정 후보자의 알려지지 않은 인생스토리’의 일단을 비교적 ‘두껍게’ 취재할 수 있었다. 사생활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포함되었는데 이 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국가 2인자인 총리가 되면 개인의 사소한 성향이나 언행, 습성이라도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통합 등 다양한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먼저 정 후보자가 서울대 총장이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알아봤다. 사실 정 후보자를 지금의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거물급으로 만들어준 것은 ‘서울대 총장 역임’ 경력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과 ‘서울대 교수 정운찬’의 차이는 크다. 서울대 총장이 된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사회적 저명성을 안겨주었고 ‘정치인 정운찬’의 상품가치를 크게 끌어올렸다.
정운찬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2002년 2월 사회과학대학 학장이 됐다. 5월8일 사외이사 겸직 등으로 논란을 빚은 이기준 당시 서울대 총장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퇴임했다. 1991년부터 전임강사 이상 교수들에 의한 총장직선제를 시행해오던 서울대는 새로운 총장 선출에 들어갔다. 비교적 젊은 56세의 정운찬 교수는 학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총장선거에 출마했다.
서울대 총장 선출은 5월28일 단과대별 교수들로 구성된 후보선정위원회에서 총장후보 8명 선정, 6월3일 후보선정위원회에서 총장후보 5명 선정, 6월20일 전체교수투표에서 다득표 순으로 최종후보 2명 선정, 교육부에 후보자 2명 보고, 국무회의에서 총장 선출 순으로 진행됐다.
정운찬 교수는 8명 후보군, 5명 후보군에 잇따라 선정된 뒤 교수 1210명이 참여한 전체교수투표(투표율 87%)에서 667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송상현(61) 법대 교수(전직 학장)는 574표를 얻어 2위에 올랐다. 한 후보 측에서 선거운동에 불공정 행위가 있었다며 이의를 제기해 개표가 2시간 미뤄졌으나 이 후보 측이 결과 승복 의사를 밝힘에 따라 개표가 이뤄지는 소동이 있었다.(‘국민일보’ 2002년 6월21일 보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7월16일 국무회의에서 최다득표자인 정운찬 교수를 서울대 총장에 임명했다.
당시 정운찬 교수가 선거에서 1위를 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5명의 후보 가운데 최연소이며 개혁적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정 교수가 예상을 깨고 최다득표…”(‘한겨레’ 2002년 6월21일 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신동아’ 2007년 6월호). 정 교수는 학교 행정경험 부족이 선거과정에서 약점으로 지적됐었다(‘경향신문’ 2002년 6월21일 보도). 후보들의 소견 발표에서도 차이점이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국민일보’ 2002년 6월19일).
정 후보자가 이렇게 서울대 총장이 된 것과 관련해 정 후보자와 두산그룹 오너일가 간의 특별한 인연설이 나왔다. 정치권과도 교분이 깊은 재계 인사 A씨는 “정운찬 교수가 직선 서울대 총장이 된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두산그룹 오너 일가 쪽에서 정운찬 교수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A씨는 “정운찬 총리 후보자와 가까운 사이인 김종인 전 의원,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정 후보자와 두산 오너 측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했다.
서울대 총장 시절의 정운찬 총리 후보자.
서울 종로구 김종인 전 의원 사무실에서 김 전 의원을 만나 사실인지 확인했다. 김 전 의원은 인터뷰 과정에서 “박용현 두산 대표이사 회장이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총장 선거에서 1위를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김 전 의원은 19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정 총리 후보자와 교분을 쌓아왔다. 총장 선출 문제에 앞서 정 후보자와 김 전 의원이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다. 정 후보자의 한 지인에 따르면 정 후보자와 김 전 의원이 처음 만난 시점은 1986년이다. 이해 4월 정 후보자는 2명의 교수와 함께 ‘대통령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정운찬 등 이들 교수 3명을 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종인 당시 민정당 의원이 이를 막아주면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김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정운찬 교수가 주동한 서명운동에 당시 여권 반응은 어땠나요?
“엄청 흥분했죠. 다른 사람도 아닌 서울대 교수들이 그런 거니까. 그때 분위기로는 내가 막지 않았으면 바로 해고했을 거예요. 내가 보기에 그건 심한 일이었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노태우 대표를 찾아갔죠. ‘서울대 교수를 박해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정권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해고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얘기했어요. 노 대표가 이해를 하더라고요. 노 대표가 손을 쓴 것으로 압니다.”
-전에 정 교수를 본 적 있었나요?
“전혀 모르는 사이였죠. 그런데 정 교수가 정권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아 불안해 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됐어요. 내가 만나서 안심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면부지의 여당 의원이 부르면 안 나올 것 같아서 정 교수의 스승인 조순 교수에게 ‘함께 데리고 나오라’고 했죠.”
-그렇게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온 거군요.
“처음 만나서 얼마쯤 시간이 지나 조순 교수는 먼저 보냈어요. 그리고 둘이서 술을 잔뜩 마셨지. ‘앞으로도 용기 있게 살라’고 정 교수에게 얘기한 기억이 납니다.”
장충단 연설 DJ에 반해
이날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보는 사이가 됐다. 정 후보자는 김 전 의원에게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상의해왔다. 김 전 의원에 따르면 정 후보자는 “나는 1971년 대선 유세 때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반했다. 26년간 1971년, 1987년, 1992년, 1997년 네 번의 직선제 대선이 있었는데 DJ만 찍었다”고 말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격돌했다. 김대중 후보는 투표일 9일 전 100만 인파가 모인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이번에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라며 열변을 토했다. 정 후보자는 DJ 연설에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섰고 이후 1980년대에도 군사정권이 계속됐다. 정 후보자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하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벌인 건 1971년 장충단공원 유세의 로망이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정 후보자는 상식에 맞게 살아왔다. 그가 DJ만 찍었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무렵 김 전 의원에게 서울대 총장 선거 얘기를 꺼냈다.
“김종인→백성학→박용현”
▼ 2002년 정운찬 교수가 직선 서울대 총장에 선출된 것과 관련해 의원님이 거명되고 있는데….
“그걸 어디서 들었습니까?”
▼ 백성학 회장과 두산그룹 오너 쪽 얘기도 나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운찬 교수는 처음에는 총장선거에 확신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어요. 선거 두어 달을 앞두고 내가 정 교수에게 먼저 강요했어요. ‘총장 선거에 나가라’고. ‘무조건 나가라. 틀림없이 된다’고 했죠.”
▼ 정운찬 교수는 최연소로 서울대 총장선거에 나가게 됐는데요. 그 다음 대책이 있었나요.
“출마했으니 어떻게든 1위를 해야 하잖아요. 두산그룹 오너가(家)의 박용현 현 두산 회장은 1998년 서울대병원장이 되어 2002년 서울대 총장선거 때에도 병원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거든요. 총장은 교수들의 직선투표로 선출되는데 서울대병원 교수 숫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두산그룹 오너 쪽과 인연이 깊은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에게 요청했어요. 박용현 병원장에게 얘기해서 ‘의과대 교수 표가 정 교수에게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요.”
▼ 의원님께선 백 회장과 잘 아는 사이였나요?
“1980년대부터 친분이 있었죠. 나, 백 회장, 정 교수가 서로 잘 알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 백 회장이 박용현 당시 병원장에게 부탁을 전했을까요?
“전했습니다.”
▼ 박 병원장이 실제로 정 교수를 도왔을까요? 그래서 효과가 있었을까요?
“그랬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총장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변이 나서 1위를 했잖아요.”
지난 4월30일 서울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선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창업 50주년 축하연’이 열렸다. 정치계, 재계 유력인사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참석자 B씨에 따르면 백 회장이 앉은 헤드테이블에 정 후보자, 김종인 전 의원,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간의 친분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백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옆에 앉아 있는 정 후보자를 거명하며 “내가 앞장서서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총장이 되도록 뛰었다”고 했다.
2008년 8월30일 프로야구 경기가 벌어진 잠실야구장에서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교통방송 ‘1일 해설가’로 나와 캐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 총리 후보자는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벌가 서울대병원장이 백 회장의 요청을 받아 실제로 움직였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들었다. 이에 대해 백 회장과 가까운 재계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수성가한 백 회장이 모자를 처음 수출하려 할 때 보증금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백 회장을 눈여겨보던 두산그룹 창업주인 고 박두병 회장이 선뜻 보증금을 내주었다. 이후 백 회장의 영안모자는 세계 최대 모자 회사로 성장했고 백 회장은 각계에 폭넓은 인맥을 갖게 됐다. 두산가(家)에 신세를 진 백 회장은 1998년 박용현 회장이 서울대병원장이 될 때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움을 준 것으로 들었다. 이 때문에 박 회장이 백 회장의 정운찬 선거 관련 부탁을 듣고 가만히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2002년 서울대 총장선거에서 1위인 정운찬 교수(667표)와 2위 교수(574표)와의 표 차이는 93표였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2002년 당시 서울대 총장 선거에 투표권이 있던 서울대병원 교수는 30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정운찬 교수의 선거 승리에는 기존에 알려진 대로 ‘소장파 개혁’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전 의원 등 당사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실체를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히 현존하는 ‘우리 사회 최고 파워그룹 인맥 효과’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것이 불법이나 비윤리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백 회장과 가까운 재계인사는 “백 회장 측은 정운찬 교수에게 가끔 용돈을 제공한 것으로 안다. 서울대 교수에게 어떤 대가를 바랄 것은 전혀 없었고 수십 년 전부터 알아온 정 교수를 아끼고 도우려는 마음으로 들었다”고 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정 후보자 측은 최근 백 회장 측에 “과거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만 (언론 등에) 말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고 한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 후보자는 다양한, 혹은 복합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면모를 사실에 가깝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술자리 일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초 김종인 전 의원 등 측근 그룹은 정운찬 교수에게 대선 출마를 강하게 권유하고 있었다. 정 후보자의 한 지인에 따르면 일요일 교수 연구실에 출근해 수업준비를 하는 정운찬 교수를 지인들이 술자리로 불러냈다. 정 교수는 폭탄주가 돌아 분위기가 무르익자 “대통령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묻자 김종인 전 의원은 “누구나 대통령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냐. 다르게 생각할 것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 정 후보자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카페에서 자주 술자리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맞나요?
“그런 것 같아요. 나도 같이 마시고 했어요.”
▼ 방배동이고, 카페이고요.
“그렇죠.”
▼ 실례되지만 양주도 나오고 여성 종업원들이 동석하는 덴가요?
“종업원들은 주문받아서 술이나 음식을 갖다주기만 하지 앉지는 않아요. 저녁에 술 한잔 하며 스트레스도 푸는 게 문제될 일 없어요. 만약 누군가가 총리 후보자가 다니는 술집으로 총리를 검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쓸데없는 일이에요.”
“스무고개 게임 하시기도”
2007년 초 정운찬 교수의 대선 출마 여부가 정치권에서 큰 관심사안으로 부각되던 때였다. 한 중앙언론사 C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국가 정보기관 관계자가 이상한 제의를 해왔다. “정운찬 교수가 방배동 M카페에 자주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함께 가볼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C기자는 제의에 응했다.
M카페에서 C기자와 국가 정보기관 관계자는 양주 등을 시켜놓고 종업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고 한다. 종업원들은 정운찬 교수를 잘 알고 있었다. 한 종업원은 “자주 오실 때도 있다. 점잖으시고 소탈하시다. 스무고개 게임을 하시기도 했다”고 기자와 정보기관 관계자 일행에게 말했다.
C기자는 당시 이 취재내용을 “대선 출마설이 돌고 있는 정운찬 교수는 몇 가지 술자리 일화가 있다”라는 기사의 한 줄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C기자는 “노무현 정권의 국가 정보기관이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던 정운찬 교수의 술자리를 뒷조사해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폭탄주 7잔에 70억”
정 후보자의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는 방배동 단골 카페 이야기가 나온다. 민주화 개혁운동과 방배동 카페는 잘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1980년대부터 그 곳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대통령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논의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점이 정운찬의 캐릭터를 구성한다.
“방배동 카페는 그 후 자주 찾는 곳이 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 두 선배 교수와 개헌서명을 논의하던 곳도 그 집 부근이었다.…그런데 나중에 보니, 술이라는 것도 접할수록 차츰 익숙해졌다. 지금은 나도 어느새 분위기는 웬만큼 맞출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특히 학교의 경영을 맡은 뒤에는 싫든 좋든 한두 잔씩 술을 마셔야 할 자리가 잦아지면서 주량이 몰라보게 늘었다. 언젠가 ‘하루 저녁에 폭탄주 일곱 잔을 마시고 70억원을 모금했으니 정 총장의 폭탄주 한잔은 10억원’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술도 음식이므로 아직 끊을 생각은 없다. 다만,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이 주는 잔을 덥석 받아 입에 그대로 털어 넣지 않고 양도 조금 줄일 작정이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때는 전화번호를 참 많이 암기했는데 요즘은 그 숫자가 턱없이 줄어 수첩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 후보자는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한 번 더 해명해야 할지 모른다. 총리의 ‘여성관(觀)’은 매우 중요한 검증대상이기 때문이다. 정 후보자는 서울대 총장 시절인 2002년 10월23일 한명숙 당시 여성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우 조교는 사실 조교가 아니고 조수로 1년간 계약된 경우로 계약이 해지되자 앙심을 품고 한 일” “신 교수 본인은 (성희롱)을 안 했다고 한다” “그 사건은 과장된 일로 신 교수는 억울하다” “터무니없는 소리인데 판결이 나버리면 그만” “사실 여성운동이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법원에서 성희롱 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한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사법부 부정, 여성운동 폄하, 가부장적 태도 등 논란 조짐이 보이자 그는 며칠 뒤 “여성계와 국민 여러분께…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사과문을 냈다.
그런데 같은 날 발행된 한 주간지 보도에 따르면 그는 “해명하는 것을 싫어하고 해명할 것도 없지만 비서들이 오늘 안 하면 여성계 쪽에서 들고 일어나 오래갈 것 같다고 해 기자간담회를 가졌다”고 발언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상대 여성(우 조교)의 고통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신 교수에 비해 고통은 별로 많이 겪지 못했다”며 종래 입장을 고수하는 발언도 했다.
2007년 4월30일 서울 중구 세실레스토랑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있다.
‘신정아 스캔들’의 주인공인 신정아씨와 정 후보자는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신정아씨는 2007년 여러 차례 “2년 전 동국대 교수 임용 무렵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으로부터 개관을 앞둔 서울대미술관의 초대 관장 자리 제의를 받았으나 교수직과 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겸임이 가능한 동국대를 택했다. 대신 C교수를 추천했다”고 주장했다.
2007년 9월9일 신씨는 “난 동국대에서 2005년 9월1일 임명장을 받고 (학교 교수들이) 언짢은 얘기를 한다기에 바로 다음날로 사표를 냈던 사람이다. 외압이 있었으면 서울대 안 가고 동국대 갔겠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 후보자 측은 2007년 당시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정운찬 총장은 서울대미술관 관장감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미술계 몇몇 인사가 신씨에게도 물어보라고 해서 신씨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신씨는 모 교수를 추천했고 정 총장은 감사의 뜻으로 신씨를 저녁식사에 한 차례 초대했을 뿐인데 신씨가 부풀리고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의 발언 내용을 종합하면 정 후보자와 신씨가 저녁식사 자리를 포함해 두 차례 만난 건 사실이다. 다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내용에서 말이 엇갈리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난 시점은 신정아씨의 예일대 박사 학위가 가짜라는 사실이 들통 나기 전으로 신씨가 미술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또한 두 번의 만남 모두 정운찬 당시 총장이 먼저 신씨에게 만나자고 했고 저녁식사 등 면담 시간도 꽤 길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정운찬 총장이 신씨에게 관장직을 제안도 하고 신씨로부터 추천도 받았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신정아씨가 정 후보자와 관련해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입장을 고수한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정 후보자의 최대 경쟁력은 ‘경제·교육 전문가 이미지’일 것이다. 이 부분을 무너뜨리기 위해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20년간 논문 한 편 안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폭로는 엉터리로 판명났다. 이후 일부 언론사들의 자체 검증취재에 의하면 정 총리 후보자는 여러 번 논문을 중복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내가 본 한국경제’(한국행정학회)↔1998년 ‘IMF와 한국경제’(경제논집) : 내용 절반이상 중복게재.
△2000년 ‘우리나라 은행산업의 효율성’(경제학연구)↔2001년 같은 제목의 영문논문(한국경제저널) : 영어로 번역해 중복게재.
△2002년 ‘한국경제 위기를 넘어서’ 영어논문(국제학술대회)↔2001년 ‘내가 본 한국경제’(한국행정학회 학술대회) : 영어로 번역해 중복게재.
△2002년 ‘한국경제 위기’ 영어논문(리서치 인 아시아 이코노믹 스타디즈)↔2001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영어논문(금융연구) : 내용 대부분 중복게재.
독특한 ‘청문회 윤리기준’
정 후보자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민주당 부대변인은 “서울대 총장 시절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논문 이중게재를 연구부적절 행위로 규정했던 정 후보자가 본인의 논문 이중게재에 대해서는 관행을 내세우는 것은 아전인수 격 강변”이라고 공격했다.
자기가 써놓은 논문을 다른 잡지에 다시 게재하는 것은 연구 실적 부풀리기 등 부적절한 행위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논문을 표절하는 것보다는 비난의 정도가 훨씬 덜하다. 정 후보자의 논문 이중게재 논란이 BK21사업, 승진 등 금전적 이익과 연결된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려대 한 교수는 이를 옹호하기도 했다. “인용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 부분은 지적받겠지만 자기 논문을 외국인들도 볼 수 있게 영어로 다른 잡지에 게재하는 건 오히려 ‘번역하느라 애썼다’고 칭찬받을 일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최근 10여 년 동안 정 후보자의 논문 중 SSCI(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급 해외저널에 등재된 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정 후보자의 ‘경제·교육 전문가 이미지’를 수용해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 후보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학문적 공헌이 없었다면 동료 교수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학장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자 정운찬’이 우리 사회에 미친 학문적 기여도는 어느 정도인가. 여기엔 정답이 없어 보인다.
총리를 학력 순으로 뽑는 건 아니다. 정 후보자의 학력이나 학교경력 정도면 역대 총리의 평균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논문 실적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지만, ‘총리 정운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거 논문이 아니라 현실의 국정운영에 필요한 책임 있는 언행과 리더십이다.
정 총리 후보자에게는 △부인의 위장전입 의혹 △군대 면제 문제 △종합소득세 신고시 임대수입 고문료 누락 의혹도 제기됐다. 위장전입의 경우 정 후보자의 부인 최모씨가 1988년 2월5일부터 4월1일까지 2개월여 동안 실제 거주지인 서울 방배동이 아닌 경기 포천시 마명리로 주민등록상 주소만 옮겨놓은 건이다. 포천의 땅을 매입한 기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정 후보자 측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으로 청문회 때 밝히겠다”고만 했다.
우리의 독특한 ‘청문회 윤리 기준’에 따르면 ‘거액의 부동산 차익을 본 위장전입’은 상당히 무겁게, ‘자녀교육 목적의 위장전입’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공직 후보자에게 도덕성 책임을 묻는 경향이다. 정 후보자의 건은 이 두 가지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케이스(부동산 사려고 위장전입했다 그만둔 경우?)가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런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도덕성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우리의 독특한 청문회 윤리기준이 곧 답을 내려줄 것이다.
민주당과 연애 안 했다
정 후보자는 총리 내정 발표가 있던 날 정치적 파장을 부를 ‘세종시 수정’ 발언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정 후보자는 한 지인에게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세종시 수정 발언은 미리 의도한 말이 아니었다. 전략적으로 한 말도 아니다. 이 대통령과 세종시를 놓고 의논한 적도 없다”는 얘기였다.
청문회까지 염두에 뒀다면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의 독기(毒氣)를 최고조로 북돋워 고난의 여정을 자초하는 발언은 자제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민주당에서는 정 후보자를 향한 전투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2의 천성관(박지원 정책위의장)”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정 후보자는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정치권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나의 과거사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는 이러한 포괄적인 호소 대신 터무니없이 왜곡되었다는 자신의 구체적인 과거사들을 설득력 있게 입증해나가야 한다.
김종인 전 의원이 ‘정운찬의 왜곡된 과거사’의 한 사례를 들었다. 김 전 의원은 “민주당은 ‘연애는 민주당과 해놓고…’라고 말했는데 정운찬은 민주당과 연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정운찬과 거의 만나지도 않았고, 그나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정운찬의 용도는 끝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친이계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총리후보 리스트가 나돌던 수개월 전 사석에서 “정운찬 총장은 중도진보인가요? 중도보수인가요”라고 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은 “중도보수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렇죠? 중도보수죠?”라고 했다. 이명박 정권 쪽에서도 그랬겠지만, 대선 때 DJ만 찍어온 정 후보자도 이명박 정권에 참여하기까지 여러 가지 맞춰봐야 할 게 많았다. 앞으로도 맞춰나가야 할 일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빌헬름 레프케의 잠언
정 후보자는 사회경제학자 빌헬름 레프케의 잠언을 지인들 앞에서 자주 인용해왔다. “나라의 장래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세 부류의 사람, 즉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법을 수호하는 법관,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이상 희망은 있다.” 정 후보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정권을 위해 일하는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직분에 맞는 사회적 책임을 위해 일하는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