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무등산 호랑이’의 화려한 부활

김응룡 선동열 없지만…조범현 김상현 있었다

  • 김도헌│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09-10-05 17: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시즌 초반 꼴찌까지 추락했던 ‘KIA 타이거즈’는 막강한 선발 마운드의 힘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승수를 만회하며 전반기를 3위로 마감했다. 후반기 시작과 함께 무서운 힘을 냈고, 8월2일 시즌 첫 4연승을 올리며 2516일 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라섰다. 거침없는 페이스는 쭉 이어졌다. 최근 2년간 양강 체제를 형성했던 SK, 두산과의 원정 3연전을 나란히 싹쓸이하는 등 ‘찬란한 8월’을 보냈다.
    ‘무등산 호랑이’의 화려한 부활

    8월30일, KIA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서 6-1로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종료 후 KIA 선수들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2009 한국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타이거즈 광풍(狂風)’이다. 9월5일 두산-KIA전이 열린 광주구장은 1만3400개 좌석이 모두 팔려나갔다. 이날 KIA는 해태 시절을 포함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시즌 50만 관중을 돌파했다. 광주뿐만 아니다.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에도 타이거즈 팬들은 넘쳐나고 있다.

    롯데보다 앞선 관중동원 능력

    2009년 8월, KIA 타이거즈는 빼어난 성적을 거두며 프로야구 흥행의 핵으로 떠올랐다. 전반기를 3위로 마친 KIA는 7월28일 후반기 시작과 함께 부쩍 힘을 내더니 8월 들어 11연승을 내달리며 KIA 창단 후 최다연승 타이 기록을 세웠고, 한 달간 무려 20승을 거두며 프로야구 역대 월간 최다승 신기록(19승)도 새로 썼다. KIA의 승리는 타이거즈 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고, 연승은 프로야구 흥행의 주춧돌이 됐다.

    인천 문학구장을 홈으로 쓰는 SK 와이번스는 8월22~23일에 열린, 주말 KIA전에 연이틀 만원(2만7800명)을 기록했다. 문학구장 개장 이후 이틀 연속 만원은 처음이었다. 21일(금) 2만6279명을 포함, 금·토·일 주말 3연전 동안 문학구장을 찾은 사람은 8만1879명에 달했다. 이 역시 2002년 문학구장이 개장된 이후 최다관중이었다. 지난해까지 페넌트레이스에서 문학구장이 꽉 들어찬 건 세 번뿐이었는데, 이때 상대팀은 매번 KIA였다. SK 장순일 마케팅본부장은 “KIA 팬들은 서울에서도 원정 온다. 좋아하는 구단에 대한 충성도 면에서 KIA 팬들은 다른 팀에 비해 월등하다”고 말했다.

    8월28~30일, 잠실구장에선 ‘표 구하기 전쟁’이 벌어졌다. KIA와 홈팀인 두산 베어스의 3연전 동안 사흘 내내 3만500석 스탠드가 가득 들어찼다. 두산 팬 좌석인 오른쪽 외야 스탠드가 노란색 풍선 막대로 장관을 이룰 정도로 홈 팀 두산 팬보다 원정 팀인 KIA 팬이 훨씬 많았다. 30일 경기 때는 인터넷 예매분을 제외한 현장 판매분 4000여 장이 매표 시작(오후 2시) 24분 만에 다 팔리며 하루 전 세운 최단시간 매진기록을 또다시 1분 단축하기도 했다. 잠실구장에서 페넌트레이스 3연전 경기입장권이 모두 팔린 건 1995년 8월18~20일 LG-해태전 이후 처음이고 두산 홈경기로는 OB 시절을 포함해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이었다.



    문학구장이나 잠실구장 만원 행진에서 보듯 원정팀인 KIA의 관중 폭발력은 절대적이었다. 롯데가 9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룬 지난해에도 잠실과 문학구장이 이렇게까지 꽉 들어차진 않았다. 야구 하면 ‘구도(球都)’ 부산을 떠올리지만, 전국적인 관중 동원력에선 KIA가 앞선다는 게 야구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타이거즈의 막강한 관중 흡인력은 9월12~13일, 잠실 두산전에서 또 한번 확인됐다. 두산 마케팅팀 이왕돈 과장은 예전 해태 팬인 아저씨들이 다시 야구장을 찾은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야구 열기로 들썩이는 광주

    KIA 열풍의 진원지인 광주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광주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야구 얘기를 꺼내면 기사들은 하나같이 “김응룡도 없고 선동열도 없고 성적도 좋지 않은데 무슨 야구냐”고 답했지만 요즘은 확실히 달라졌다. 전문가 뺨치게 KIA의 선발 로테이션을 줄줄이 꿰는 기사가 상당수이고 감독급 수준의 기사를 만나기도 어렵지 않다.

    택시기사만이 아니다. 회사원은 물론이고 가정주부까지 야구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광주 남구 진월동에 사는 주부 박정화(55)씨는 “WBC 때부터 야구 경기를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남편 따라 아들 따라 함께 야구장에 가는 게 큰 즐거움이 됐다. 말하긴 쑥스럽지만 아들뻘인 이용규 선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이 같은 야구 열기는 ‘관중 대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KIA는 9월5일까지 올 시즌 18번째(군산 4번 포함) 만원 관중을 기록했다. KIA의 09시즌 입장객은 5일 현재 50만5608명. 해태 시절을 포함해, 타이거즈 역대 최다 관중이었던 1996년의 46만8922명을 일찌감치 넘어선 뒤 창단 이후 첫 50만 관중이란 의미 있는 기록도 세웠다. 사직이나 잠실을 홈으로 쓰는 롯데, 두산, LG 같은 팀에게 50만 관중은 적은 수치지만 시 규모나 구장의 열악한 환경을 떠올리면 광주구장의 50만 관중은 잠실구장 100만 관중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타이거즈가 해태에서 KIA로 간판을 바꿔 달고 가장 많은 관중을 모은 해는 지난해로 36만7794명이었다. 단일 시즌에 관중 50만명을 넘긴 것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9번이나 일궜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도 없던 일이다.

    관중수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구단의 마케팅 수입도 부쩍 늘었다. 광주구장 앞에는 구단이 운영하는 ‘타이거즈 숍’이 있는데 이 타이거즈 숍의 지난해 매출 총액은 약 2억원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이미 3억5000만원(9월5일 현재)을 넘어섰다. 시즌 막판까지 고려하면 매출 100% 신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게 구단의 전망. 만원 관중이 들어차면 하루 매출은 1000만원을 웃돈다. 팬들은 2000원 하는 노란색 풍선막대부터 모자, 유니폼까지 다양한 상품을 구입하고 있다.

    ‘무등산 호랑이’의 화려한 부활

    타이거즈 돌풍을 주도하고 있는 거포 김상현.

    세대교체 이룬 팬들

    9월5일 두산-KIA전이 열린 광주구장. 게임은 오후 5시 시작이었지만 정오를 넘어서자 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경기시작 1시간10분을 앞둔 3시50분에는 1만3400석 좌석 티켓이 모두 팔려나갔다. 이 중 9000장은 일주일 전에 이미 인터넷을 통해 팔려나갔고 뒤늦게 도착해 표를 구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린 팬도 상당히 많았다.

    과거 타이거즈 팬들은 아저씨 위주였지만 지금은 성별과 연령이 모두 달라졌다. KIA 김경욱 마케팅팀장은 “예전 해태 시절 팬의 80% 이상은 남자였다. 30대 후반부터 40대 이상 팬이 주를 이뤘다”면서 “그러나 요즘은 달라졌다. 젊은 여성 팬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구단 자체 평가로는 여성관중 비율을 최대 40%로 잡고 있다”고 했다.

    광주 게임이 끝나면 KIA 선수들이 나오는 출구는 카메라를 들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젊은 여성 팬들로 북적인다. 나이 어린 고교생부터 대학생, 직장 여성까지 나이대도 다양하다. 선수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내면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무리지어 몰려드는 등 KIA 선수들은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젊은 팬, 여성 팬의 증가는 프로야구 8개 구단의 공통적 현상이지만 KIA가 유독 더 심한 것은 지역 대학과의 ‘네이밍 마케팅’ 등 연고 대학과의 연계 마케팅이 큰 힘을 발휘한 덕도 있다.

    한국시리즈에서 19년간 9번 우승했던 ‘해태 신화’는 1997년을 마지막으로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0여 년간 새로운 신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해태 타이거즈 팬이라는 자존심은 조금씩 무너졌고 챔피언에 대한 갈증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해만 갔다. 한때 이기는 데 익숙해 있던 팬들은 2001년 8월부터 타이거즈의 명맥을 이어온 KIA의 무기력함에 등을 돌렸다. 여기에는 최근 4년간 꼴찌를 두 번이나 한 성적 부진이 결정적 이유가 됐다.

    관중 폭발의 이유는?

    ‘타이거즈 광풍’은 정치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호남 사람들이 ‘승자의 입장’에서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곳은 야구장이 유일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호남 사람들은 야구장에서 ‘해태’를 외치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때론 일체감을 느꼈다. 어쩌면 당시 타이거즈는 호남인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위안거리였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잠시 잊혔던 ‘호남의 한(恨)’이 두 대통령의 퇴임, 그리고 잇따른 서거를 겪으면서 다시 찾아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해태 신화’의 재현을 보며 호남인들이 쓰린 속을 달랜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을 때, 개인 통산 500도루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던 KIA 이종범은 “큰 슬픔을 느낀다”며 “대통령 서거 추도 기간에는 기록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노 전 대통령의 추모기간이 다 끝난 6월5일에야 대기록에 도전해 그 뜻을 이뤘다. 호남인에게 ‘타이거즈’는 어쩌면 ‘야구단’이기보다 ‘잃었던 자아(아이덴티티)’인지도 모를 일이다.

    뭐니뭐니 해도 ‘타이거즈 광풍’을 촉발한 것은 KIA의 빼어난 성적이다. 시즌 초반 한때 꼴찌까지 추락했던 KIA는 막강한 선발 마운드의 힘을 밑바탕 삼아 차곡차곡 승수를 만회하며 전반기를 3위로 마쳤다. 7월28일, 후반기 시작과 함께 무서운 힘을 내더니 8월2일, 시즌 첫 4연승을 올리며 2516일 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라섰고 이후 거침없는 페이스가 이어졌다. 최근 2년간 양강 체제를 형성했던 SK(21~23일), 두산(28~30일)과 벌인 원정 3연전을 나란히 싹쓸이하는 등 ‘찬란한 8월’을 보냈다.

    9월 들어 KIA의 상승세는 꺾였지만 ‘연승 후유증’을 그렇게 심하게 겪지는 않았다.

    시즌 초반, 붙박이 톱타자 이용규가 불의의 부상으로 낙마하고 믿었던 마무리 투수 한기주가 연이은 불쇼를 펼치는 등 4월까지만 해도 KIA의 행보는 불안했다. 에이스인 윤석민의 보직을 어쩔 수 없이 잠시 마무리로 돌리는 등 진통도 겪었다. 그러나 구톰슨과 로페즈, 두 빼어난 용병 투수와 시즌 개막전 ‘트레이드 카드’로 거론됐던 양현종 등 선발 마운드의 막강한 힘을 원동력 삼아 차즘 힘을 냈다. 불펜에선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유동훈과 손영민이 힘을 보탰다. 조범현 감독은 풍부한 선발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불펜진을 최강 컨디션으로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기용’을 했고, 이는 한기주 부진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KIA가 긴 연패 없이 시즌을 치를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지난해 시즌 뒤, ‘은퇴 압박’에 시달렸던 베테랑 이종범의 부활 역시 큰 힘이 됐다. “단돈 1원을 받더라도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다. 잃었던 명예를 다시 찾고 싶다”고 지난 겨울 절치부심했던 이종범의 땀은 세월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덕아웃에서 후배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도 마다하지 않았다. 풀타임을 치를 수 없는 체력적 한계를 갖고 있는 김원섭은 외야 요원으로 이용규의 빈자리를 채우며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고, 서울고 출신의 신인 안치홍은 요긴할 때 한방을 쳐주며 미래 KIA를 이끌 유망주로서 충분한 가능성을 입증했다.

    한국 무대 복귀 3년째를 맞은 최희섭의 분전도 돋보였다. 지난해 극도로 부진한 성적을 보인 그는 시즌 후 동계훈련 때 하루도 빠짐없이 산을 타는 등 ‘올해 안 되면 옷을 벗겠다’는 배수진을 쳤고 결국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했다. 시즌 초반 상승세를 타다 6~7월 호된 슬럼프에 고전하기도 했지만 8월 한 달간 24게임에서 타율 0.391에 8홈런을 몰아치면서 중심타자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풀타임 시즌을 치른 건 시카고 컵스 트리플 A 아이오와 컵스 시절이던 2002년 이후 7년 만이다.

    광풍의 원인은 무엇보다 성적

    ‘KIA 타이거즈 광풍’을 몰고 온 중심인물은 역시 김상현이다. 4월 중순, LG에서 트레이드된 김상현은 2000년 신인 2차 지명 6번(전체 42번)으로 해태에 입단한 ‘원조 타이거즈 맨’이다. 2002시즌을 앞두고 LG로 이적했다 7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고, 이후 KIA의 상승세를 주도했다. 그가 가세하기 전까지 KIA는 최희섭 외에는 이렇다 하게 장타를 때릴 수 있는 거포가 없었고 최희섭 역시 상대팀 견제가 집중되면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김상현의 가세는 팀의 운명을 바꾸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무등산 호랑이’의 화려한 부활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깬 KIA 팬들.

    그동안 줄곧 ‘가능성만 있는 유망주’ 소리를 듣던 김상현은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뒤 몰라보게 달라졌다. 여기에는 황병일 타격코치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황 코치는 김상현이 타격준비 자세 때 착지된 양발의 보폭이 지나치게 크고 타격시 내디디는 왼발의 스트라이드 폭도 너무 큰 약점을 찾아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변화구나 몸쪽 공 등 예상과는 다른 궤적의 공 공략에 치명적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는 타격폼이었다. 더구나 타격시 왼쪽 어깨가 너무 빨리 열려 밸런스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김상현은 LG 시절부터 따랐던 황 코치의 말에 자세를 바꿨고, 이는 곧바로 성적으로 이어졌다.

    발톱 세운 호랑이, 중심에는 김상현

    김상현의 환골탈태는 사실 구단도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막강한 투수진에 비해 공격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구단은 5월 초순까지만 해도 구톰슨과 로페즈, 두 용병 투수 중 한 명을 내주고 다른 팀에서 용병 타자를 데려올 구상을 하고 있었다. 타깃은 히어로즈 용병 타자 브룸바였다. 그러나 ‘반짝 활약’에 그칠 줄 알았던 김상현이 꾸준히 기대 이상 역할을 하자, 이 같은 구상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런데 묘하게 브룸바는 7월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고 김상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위력을 발휘했다.

    홈런·타점·장타율 등 공격 3개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김상현은 8월 한 달간 24경기에서 15홈런 38타점을 기록했다. 둘 모두 프로야구 역대 월간 최다 기록 타이. 홈런은 1999년 이승엽, 타점은 1991년 장종훈이 기록했다. 김상현은 결국 이승엽과 장종훈을 합한 활약을 펼쳤고, KIA는 8월 20승4패, 승률 0.833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역대 월간 최다승 신기록을 쓸 수 있었다. 이뿐 아니다. 김상현은 타이거즈 역대 최다 타점(기존 1999년 홍현우, 111타점), 타이거즈 토종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기존 1999년 홍현우, 34개)기록도 모두 새로 썼다.

    조범현 감독은 2003년부터 SK에서 4년간 감독을 맡다가 2007년 중반 배터리 코치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뒤 그해 시즌 막판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현역 시절 선동열처럼 빼어난 성적을 거둔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김응룡과 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더구나 대구 출신인 그는 배터리 코치로 오기 전까지 KIA, 아니 해태와의 인연도 전무했다. 그러나 조범현은 꾸준히 공부하는 ‘준비된 지도자’였고 KIA 사령탑 부임 첫해인 2008년, 6위에 머문 아쉬움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지난 5월 중순 KIA 김조호 단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올 초 구단 사장님과 함께한 자리였다. 조범현 감독이 자신의 재계약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팀의 장래를 위해 어떻게 팀을 꾸리는 게 합당한지 자신의 소신을 얘기하더라.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있나’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주목받는 조범현 리더십

    2년짜리 첫 계약의 마지막 해, 재계약을 염두에 둔 대부분의 감독은 눈앞의 성적에 욕심을 낸다. 첫해 성적이 6위에 머물렀다면 더 그렇다. 특히 주변에서 “광주 출신이 아닌 사람이 감독을 맡아서 그렇다”는 흔들기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조 감독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안위보다 팀의 장래를 먼저 생각했다. “내 재계약 여부보다도 내년, 아니 이후의 팀 모습을 생각하는 게 우선이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지난 시즌 KIA는 내야 수비의 핵이라는 유격수 자리에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 고전했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재계약을 위해선 무조건 성적을 내야 한다. 유망주를 내주더라도 당장 성적을 낼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오라”고 조언을 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 시즌 끝나고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건 아니다”라는 게 한결같은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처럼 소신을 지켰고 때론 미련해 보였던 소신 지키기는 KIA의 가파른 상승세를 이끈 밑바탕이 됐다.

    6월 이후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갈 기회가 왔을 때도 그는 “아직 때가 아니다”면서 무리하지 않았고, 그때 욕심을 내지 않은 결과는 8월 무서운 상승세의 밑바탕이 됐다. 눈앞의 이익보다 원칙을 중시하며 때를 기다렸고, 그는 이제 팬들에게서 ‘조갈량’이란 칭호를 받으며 사실상 재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욕심내지 않았지만 그 무욕(無慾)은 반대로 생애 첫 페넌트레이스 1위와 재계약 성공이란 ‘명예와 실리’를 모두 안겨다줄 분위기다.

    지난해 시즌 중반 조 감독은 “선수단 내부에 깔려있는 패배의식을 털어낸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고 토로한 일이 있다. “생각이 안 바뀌면 사람을 바꿔야 한다. 그런 상황도 고려하고 있다”고도 했고, 올 시즌 신인 안치홍을 중용한 것에도 다분히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휘봉을 잡은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KIA는 몰라보게 다른 팀이 됐다. 이제 KIA 선수들에겐 패배의식 대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다. 합리적인 성격의 조 감독은 선수의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했고, 개인보다 팀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제 KIA 선수들 중엔 팀은 졌지만 자신만 안타를 많이 때렸다고 좋아하는 선수는 없다. KIA는 과거 근성으로 똘똘 뭉쳤던 해태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고, 거기에는 조 감독의 화려하지 않으나 강한 리더십이 깔려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