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앨리스와 피터팬

수수께끼 같은 아이들의 원형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09-10-07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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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는 앨리스와 피터팬이 있다. 환상의 세계를 거침없이 탐험하는 앨리스, 네버랜드의 무법자 피터팬은 어른의 규율로 길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잊고 지내온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앨리스와 피터팬

    앨리스는 빅토리아 왕조시대 소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모험의 자유’를 자신의 집 좁은 정원 안에서 만끽한다.

    아이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어른이 점점 늘어난다. 교육방송의‘아이의 사생활’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책으로 출판될 정도다. 특별한 양육 매뉴얼 없이 경험과 본능, 대가족 공동체의 협업으로 아이들을 키워도 큰 무리가 없던 기성세대와 달리, 신세대 부모들은 무한 미디어 사회에서 각종 게임과 유해 정보의 홍수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느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아 ‘소황제’라는 칭호까지 얻은 요새 아이들의 내면세계는 점점 어른들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어린이만의 문화 콘텐츠가 급증하면서 ‘아이들은 즐길 수 있지만, 어른들은 좀처럼 따라 할 수 없는’ 아이들만의 놀이문화가 범람한다. 또래집단과는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부모에게는 속내를 밝히지 않는 아이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이들과 어른들 사이의 갈등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엄마 1 : 게임이 네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니? 도대체 그 게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아이 1 : 의미요? 도움요?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엄마 2 : 얘, 넌 좀 어린애답게 굴 수는 없니? 도대체 무슨 어린애가 그렇게 말을 안 듣니?



    아이 2 : 나 어린애 아니에요. 어린이다운 게 뭔데요? 왜 어린애다워야 하는 거죠?

    엄마 3 : 여보, 쟨 왜 우릴 하나도 안 닮았을까. 우리 어릴 땐 안 그랬잖아. 도대체 내 속에서 어떻게 저런 게 나왔나 싶어.

    아이 3 : 내가 왜 엄마 아빠를 닮아야 하는 건데요?

    다소 도식적이지만,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이런 식의 패턴을 따르는 듯하다. 겉으로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일방적인 매도와 일방적인 저항이다. 그나마 아이가 저렇게 대꾸라도 해주면 다행이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아이들, 엄마 아빠와 대화하자고 앉혀놓으면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는 동안 신출귀몰한 속도로 어디론가 끊임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당혹스럽다.

    사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랑의 이름으로’ 분석하는 어른과 어떻게든 부모의 감시를 벗어나려는 아이의 용의주도한 두뇌 게임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갈등이 놓여 있다. 어른은 아이의 행동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지만, 아이는 언제나 바로 그 ‘의미’ 자체에 저항하려 한다.

    앨리스와 피터팬

    ‘영원한 어린이’ 피터팬은 어른들의 규율로 길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

    아이의 모든 행동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려 하는 어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일종의 ‘상징’으로 해석해 아이를 길들이려는 어른의 시도가 늘 실패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 어른들의 ‘우리 아이 분석 프로그램’ 혹은 ‘내 아이 해석 이론’이 A냐 B냐 C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는 어른이 자신을 ‘해석’하려 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저항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부모의 애정이 나에게 꽂혀 있다는 것이 일단 확실함을 눈치챘을 때, 우리들은 교활하게도, 부모의 애정을 귀찮게 여기며 그 관심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의 시선을 튕겨내지 않았던가.)

    어른의 ‘해석’에 저항하는 아이, 평화롭고 단정한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장난꾸러기, 어른들이 공들여 간신히 만든 세계의 퍼즐을 일단 앞뒤 따지지도 않고 엉망진창으로 흩뜨려놓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원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피터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들도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아직은 굳이 깊이 고려하고 싶지 않은 아이들, 어른들이 만든 세계의 시스템에 어떻게든 ‘틈새’를 만들어내려는 아이들의 놀이, 도대체 어떤 부분을 콕 집어 “네 잘못을 말해봐! 그럼 용서해줄게”라고 협박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아이들의 원형. 그것이 끊임없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되는 앨리스와 피터팬의 마르지 않는 상상력의 원천이 아닐까.

    그야말로 아무도 안 볼 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아이들, 어른 말은 죽어라 안 듣는 고집불통 어린이, 우리가 ‘미운 일곱 살’이라고 하는, 모든 아이가 거치는 ‘밉상’과 ‘꼴불견’의 시절. 그것은 ‘소중한 내 아이’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예외적 병리현상이 아니라-오히려 너무 고분고분하게 이 시절을 지나는 아이가 나중에 어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될지 모른다-어린이라는 존재 자체의 너무도 정상적인 보편성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우리 모두의 고전 캐릭터, 바로 앨리스와 피터팬이다.

    앨리스 이전에 아이들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어린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은 인류 전체 역사에 비춰보면 최근의 일이다. ‘어린이’라는 개념은 19세기에 비로소 완성된 낭만적인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함과 어른의 성숙한 경험을 대비시키려는 경향은 워즈워스나 블레이크의 작품을 통해 시작됐다.

    앨리스가 탄생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는 크게 두 가지 아동문학이 성행했다. 첫 번째는 어린이를 ‘교화의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적이고 교훈적인 아동문학, 두 번째는 어린이를 징벌의 대상이 아닌 모험의 주인공으로 그리는 아동문학이었다. 앨리스는 후자에 속하면서도 단순한 모험기 이상의 철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수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헤맬 수 있는 자유

    정원을 거닐다가 우연히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만나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앨리스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앨리스의 키, 나이, 얼굴, 몸집, 가족, 언어, ‘앨리스가 인간이라는 사실’ 등등 그 어떤 것도 ‘나는 앨리스야’라는 것을 증명해주지 못하게 돼버린다. 앨리스는 자신의 최소한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모든 상황에 직면해 짜증을 내거나 칭얼거리지 않고 점점 그 무한한 우연의 가능성에 몸을 맡긴다. 앨리스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모든 가능성,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었던 그 모든 ‘가지 않은 길’을 대리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줄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있어.”

    “난 어디든 상관없어.”

    고양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길로나 가도 돼.”

    앨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든 도착만 한다면.”

    고양이가 말했다.

    “아, 넌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어 있어. 계속 걷다보면 어디든 닿게 되거든!”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지음, 손영미 옮김, 시공 주니어, 2001년, 87~88쪽)

    예절과 규율의 시대였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헤맬 수 있는 자유’란 어린 소녀에게 보장되지 않았다. 우리의 앨리스는 허클베리 핀이나 톰 소여처럼 멀리 모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정원’에서도 얼마든지 거대한 소우주를 체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의 ‘양갓집’ 소녀들은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됐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해도 안 됐다. 물론 혼자 외출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이 모든 예절과 규율의 법칙을 벗어나 마음껏 방황하고 서성인다. 앨리스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무도덕하며,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개념에 무지하다. 앨리스는 모험이 계속될수록 ‘비정상적인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난 나머지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는 행위의 결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행위의 의도를 굳이 묻지 않으며 다가오는 모든 우연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움켜쥐는 힘을 배우게 된다.

    앨리스와 피터팬

    앨리스는 끊임없이 길을 잃고 키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 모든 순간을 망각한다.

    앨리스는 평범한 정원 밑에 감춰진 지하세계에서 수많은 타자와 만나며 가족과 친척들 이외의 존재들과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앨리스는 끊임없이 길을 잃고, 키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숲을 지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각종 동물들과 거리낌 없이 우정을 맺고,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든 모든 순간을 망각한다.

    정해진 서사구조도 탐험의 절실한 이유도 없는 앨리스의 모험이 지닌 ‘무의미’의 까닭 모를 매혹은 어디서 발원할까. 앨리스의 모험은 불가해한 이미지와 비논리적 스토리가 뒤죽박죽 섞인,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간과 공간의 구별조차 사라지는, ‘꿈’의 세계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꿈의 세계에서만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도, 무엇이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 ‘의미 없는=쓸모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가.

    “로빈슨 크루소가 대양이라는 광활한 공간을 탐험했던 것과는 달리, 앨리스는 소녀이기 때문에 정원을 탐험하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순전히 우연한 강요일 뿐이다.…무의미는 정을 단순하게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가족관계를 와해시키고, 가족이라는 굴레에 예속된 사람을 해방시키려 하기에 더욱 신랄하다. 무의미가 꿈의 나라에 위치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때로 하트의 여왕처럼 잔인한 폭군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는 하트의 왕처럼 어리석은 인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앨리스’, 장-자크 르세르클 지음, 김계영 옮김, 이룸, 2003년, 40쪽)

    앨리스는 볼기짝을 때려줘야 할 작은 괴물이 아니고, 주변의 물건들을 모조리 치워놓고서야 안심할 수 있는 장난꾸러기도 아니다. 앨리스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모험, 정돈되지 않은 무의미의 놀이, 진지함에 대한 통쾌한 비꼬기는 따분한 교훈과 작위적인 모험을 벗어난 유쾌한 일탈이다. 앨리스의 매력은 그 어떤 정돈된 해석과 우아한 이론의 분석에도 갇히지 않는 ‘창조적인 무의미’가 아닐까.

    당혹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존재

    1904년 제임스 매슈 배리의 희곡 ‘피터팬’이 처음 무대에 오르던 날, 팅커벨을 살리려면 박수를 쳐달라는 피터의 낯선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관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광적인 박수로 화답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피터팬은 우리 모두에게 잠복한 어린 시절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는 어린이만이 삶의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 교화시켜야 할 미성숙한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을 치유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어린이의 가치가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피터팬은 특유의 반항기와 장난기로 어린이와 어른들을 동시에 사로잡았고, 어른들의 규율로 길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 됐다. 어른들에게 피터팬은 이해할 수 없지만 기묘하게 그리운 것, 당혹스러우면서 사랑스러운 것, 건방지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존재로 이상화됐다.

    앨리스가 어른들로 하여금 ‘무거운 감정의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하게 해준다면, 피터팬은 웬디와 함께 하늘을 나는 터질 듯한 희열과 동시에 ‘어른이 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은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피터팬은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에게서 도망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도망친 건 아빠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야.…아빠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지 이야기하고 계셨지.”

    (‘피터팬’, 제임스 매슈 배리 지음, 이은경 옮김, 펭귄 클래식 코리아, 2008년, 73쪽)

    피터팬이 부모의 집에서 도망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기성세계에 대한 본능적 저항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피터팬의 이 반항과 슬픔이 생생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디즈니가 꿈꾸는 어린이는 ‘순수’하고 ‘유순’하며 결국 어른의 세계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얌전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피터팬은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축복을 누리지만 그 축복은 어머니의 사랑과 연인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조숙한 감수성을 지닌 웬디가 피터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끼고 그 설렘을 표현해도, 피터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이런 피터가 눈치 없고 매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어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에 대한 성숙한 호감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자 저마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갇혀버린 다른 아이들과 달리, 네버랜드의 의미를 피터만큼이나 잘 알았던 웬디는,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피터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여전히 작은 소년인 피터 앞에서 자신의 몸이 너무 커 보일까봐 몸을 최대한 작아 보이게 움츠린다. 성장에 대한 죄의식, 어른이 됨으로써 우리 안의 소중한 가능성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대한 멜랑콜리가 ‘피터팬’ 읽기의 또 다른 묘미다.

    언제나 엄마가 창문을 열어놓고 자신들을 기다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웬디에게 피터는 말한다. “옛날엔 나도 우리 엄마가 날 위해 언제나 창문을 열어둘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난 밖에서 오래오래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어. 엄마가 날 까마득히 잊어버린 거야. 게다가 내 침대엔 다른 남자애가 자고 있었어.”(‘피터팬’, 179쪽)

    영원한 아이가 잃어버린 것

    피터팬은 태어나자마자 “우리 아인 이렇게 키울 거야”라고 결심하는 엄마 아빠의 이기심에 실망해 부모를 떠난다. 어른들이 원하는 어른이 되기 싫어 영원히 어린이로 남았지만 피터는 어린이로 남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을 그리워한다. 피터는 웬디를 통해 안겨보지 못한 엄마의 품, 들어보지 못한 엄마의 옛이야기를 경험하려 한다. 피터팬에 대한 어른들의 죄의식은 어린 시절의 무구한 동심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의무와 욕망으로 점철된 기계적인 어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지만, 문명이 발전해갈수록 어린이에게 충분히 호의적이지 못한, 어린이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키우지 못하는 어른들의 집단적 죄의식이기도 하다(피터팬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 또한 ‘어른들이 부주의로 잃어버린 아이들’이라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아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이야기의 세계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계산에 정확하고 이해타산에 빠삭한 어린이로 키우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꿈과 모순된 일상을 살아가는 문명인에게 피터팬은 영원회귀하는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유토피아를 반복하게 한다. 피터팬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순수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어린이를 벗어날 수밖에 없는 어른도 어린 시절을 상실하지만, 영원히 어린아이인 피터팬도 그토록 많은 것을 상실한 존재였던 것이다.

    피터팬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죄의식도 공포도 느끼지 않지만 잠들어 있는 동안 흐느끼는 버릇이 있다. 그의 꿈속에서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흐느껴 울고, 헤매고, 두려워하는 자아가 살아 있다. 웬디가 부모에게 돌아가는 순간,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느낀 피터의 모습은 단지 웬디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 ‘어머니의 사랑’이 그의 영원한 결핍으로 남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말로 품에 들어온 것이다. 침대를 빠져나와 달려온 웬디, 존, 마이클이 정말로 부인의 품에 안긴 것이다.…세상에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문을 통해 방안을 지켜본 작은 소년 외에는. 피터는 그동안 다른 소년들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황홀한 기쁨들을 많이 느껴봤다. 그러나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그 행복한 광경은 피터 자신은 영원히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피터팬’, 244쪽)

    길들지 않아 더욱 무한한 에너지

    앨리스와 피터팬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그래서 사실 ‘권태’로웠던 일상에 전대미문의 야단법석을 일으키는 혼란의 창조자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 안의 어린아이는 단지 ‘순수한 동심’으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요정의 미소와 후크의 살인이라는 양극단의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아직 정형화하지 않은 자아의 모든 가능성이다.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으면 창공을 자유로이 날 수 있는 것이 어린아이인가 하면, 꿈속에서는 어른들에 대한 증오로 살인을 서슴지 않는 것도 어린아이인 것이다.

    어린이는 우리의 경험이 ‘우리다운 정체성’을 규정하기 이전의 그 모든 가능성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존재다. 경험이 없었기에 억압도 없었고 정체성이 없었기에 구속도 없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린이들을 적당히 외면하면서도 그들에게서 완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애들이나 보는 거지, 뭐’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하지만, 남몰래 키덜트적 취미 한두 개쯤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다운 무엇으로 패턴화하기 이전의 나, 나의 환경과 경험이 나의 욕망과 성격을 결정하기 이전의 나에 대한 어렴풋한 향수와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우리는 어른들의 동화, 어른들의 만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피터팬과 앨리스의 모험은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성격, 우리의 개성과 우리의 인생행로가 결정되기 이전,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아름다운 내면 여행이다. 우리가 피터팬의 시건방짐과 앨리스의 새침함을 기꺼이 눈감아주며 그들을 영원한 마음속의 아이돌로 동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유년기의 진정한 의미는 단지 잃어버린 순수, 길들기 쉬운 유순함이 아니다. 길들지 않을수록 더욱 무한하게 펼쳐지는 잠재된 영혼의 에너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어버린 어른들의 정체성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야말로 다시-어린이-되기의 영원한 유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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