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고개 드는 미국 내 ‘북핵 부분인정론’

“해결 전망 저물어… 보유 용인하고 비확산 주력해야”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9-10-07 11: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고개 드는 미국 내 ‘북핵 부분인정론’

    8월 중순 미국 ‘핵과학협회지’에 게재된 ‘북핵 교착에 관한 창의적 사고 (Thinking creatively about North Korean stalemate)’ 칼럼.

    ‘핵을 보유하겠다’는 북한과 ‘모든 핵을 폐기하라’는 국제사회. 북핵 문제는 이렇듯 양자택일의 게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북미 양자대화 국면 진입과 함께 최근 확인되는 워싱턴 주변의 흐름은 이 전제가 흔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핵 보유와 비보유 사이의 ‘중간지대’에 해당하는 지위를 북한에 허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칼럼이 유력 전문지에 게재되고, 핵 포기 가능성에 회의적인 오바마 행정부의 분위기를

    전하는 언론보도가 그렇다.

    먼저 살펴볼 것은 8월10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오바마 행정부 내부의 정책변화를 다룬 장문의 기사다. “오바마의 참모 가운데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보는 이는 거의 없다”고 전하는 이 기사는 “미국의 북핵 정책이 북한의 핵 기술 수출에 대한 고전적인 봉쇄 쪽으로 초점을 서서히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더불어 내년 3월로 예정된 비핵화 정상회의와 5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등의 일정을 감안하면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마냥 늦출 수만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흘러나온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강도 높은 발언기조를 이어온 백악관의 분위기가 8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사뭇 누그러진 것이나 9월 중순 북미 간 양자대화 논의가 불거진 것 또한 이 때문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들 국제회의를 통해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오바마 행정부 정책목표의 시동을 걸려면 북한 핵 문제에서도 일정부분 진전을 이뤄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북핵 정책이 비확산 혹은 핵기술 유출 봉쇄로 가닥을 잡을 경우, 이른바 ‘어정쩡한 핵 폐기’가 대안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소량의 핵무기는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고, 대신 북한의 핵 물질이나 기술이 다른 국가로 전파되는 일이나 추가생산능력을 제거하는 수준에서 북미 간의 타협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그 골자다.



    최근 들어 미국의 핵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에 핵 보유와 비보유 사이 중간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와 관련해 심상치 않은 시그널이다. 8월 중순 ‘핵과학협회지(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에 게재된 ‘북핵 교착에 관한 창의적 사고(Thinking creatively about North Korean stalemate)’ 칼럼이 대표적이다. ‘핵과학협회지’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 핵 정책 전문가들의 허브 구실을 하는 전문지로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문적인 논의를 주도해왔다. 문제의 글을 쓴 조지메이슨대의 휴 거스터슨 교수 역시 ‘포린폴리시’ 등 여러 영향력 있는 매체에 관련 칼럼을 기고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북미 간의 이러한 ‘어정쩡한 타협’은 한국의 이해와는 어긋날 수 있다. 거스터슨 교수가 칼럼에서 예시하는 것처럼 북한의 기존 핵무기를 용인하고 미사일 능력만을 제거하거나 추가 생산능력만을 해체할 경우, 미국은 안보 우려를 상당부분 덜어낼 수 있겠지만 한국은 고스란히 이미 완성된 북한 핵무기의 ‘유일한 인질’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 북핵 해결의 최종 목표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 주재 한 주요국 대사관 관계자는 “이 같은 타협안이 수면 으로 떠오를 경우 이명박 정부가 이를 수용해 미국과 보조를 맞출 것인지가 최근 외교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전했다.

    북한이 이미 완성된 핵 능력을 모호한 방식으로나마 용인받는 타협안은 과연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한국이 만일 이를 수용한다면 한반도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를 가늠하기 위해 거스터슨 교수의 ‘핵과학협회지’ 칼럼을 번역, 정리해 소개한다. 워싱턴 인사이더들 사이에서 적잖은 반향을 일으킨 그의 주장을 통해, 서울과 워싱턴의 인식에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잠정적인 핵 보유의 길

    ‘약간 혹은 조금 임신했다’는 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임신을 했거나 안 했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 따르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비슷하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북한과 벌여온 논쟁의 근원적인 이유는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느냐 비핵국가가 되느냐 사이에 중간지대란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 말은 틀렸다. 키신저의 단정은 미국의 안보분야 지식층이 교착상태를 벗어나는 창의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핵 국가가 되는 것은 임신을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북한이 ‘어느 정도 핵을 보유한 국가’가 되도록 해줄 수많은 합의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은 현재 10기 이하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합의안은 북한이 가진 소량의 핵무기 시제품을 계속 보유토록 하되, 추가 생산에 필요한 플루토늄과 우라늄 생산능력을 없애도록 하는 방식이다.(물론 이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엄격한 안전조치 규제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핵 능력은 가장 작고 초보적인 비축분만 갖게 된 상태에서 동결된다.

    고개 드는 미국 내 ‘북핵 부분인정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월6일 프랑스에서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연설을 경청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또 다른 방안으로는 북한이 현재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장차 핵무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 비축을 허용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실전배치가 가능한 완성품 무기를 제거하는 반면 유사시 위협이 발생할 때는 빠른 시일 안에 핵무기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 능력만을 허용하는 것이다.(이 역시 국제기구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한다.) 이를테면 북한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있는 것과 다름없는’ 잠정적인(virtual) 폭탄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혹은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도록 하되 이를 해외 목표물에 발사할 수 없도록 미사일 실험만을 포기하게 만드는 합의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핵폭탄은 가질 수 있지만 다른 국가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는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다. 더 정교한 모델의 합의도 가능하다. 핵무기의 특정 주요부분만 따로 제3자의 감시하에 보관토록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외부세계 몰래 완전히 작동하는 핵무기를 갖는 게 불가능해진다.

    북한은 다르다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북한이 핵 능력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 억제력을 개발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쏟아 부어왔음을 감안하면, 국제적 경제지원이나 외교관계 정상화, 6·25전쟁의 공식적인 종전, 안전보장 등을 대가로 핵 포기에 동의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가 최근 보도한 바와 같이 오바마 행정부 내에서 북한이 일체의 핵 시설과 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관련 전문가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을 압박해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정책적 전망은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상 핵 개발에 성공하고도 이를 포기한 국가들이 있긴 했지만, 그 상황은 북한과 사뭇 달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정권교체를 목전에 둔 백인 지도자들이 흑인들에게 핵무기를 직접 넘겨줄 수 없어 해체를 결정한 측면이 있다. 우크라이나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등은 소련 해체 이후 핵무기를 유지할 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국제사회의 유인책이 있었기 때문에 핵 포기를 결정했다.

    반면 북한은 소규모 핵 보유를 유지할 충분한 기술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는 북한의 불안정한 지도자들은 핵무기가 외부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뿐 아니라 체제를 유지해주는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때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바 있고, 지난번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서 북한에 대한 공격을 언급한 바 있으며, 많은 이가 북한의 체제 교체를 공공연히 이야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북한 지도부가 비장의 카드인 핵무기를 포기할 이유가 있을까.

    인도, 이스라엘, 일본의 사례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북한이 핵 보유와 비보유의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중간적 상태(liminal status)를 받아들이도록 유인할 창의적인 방법을 단기적 관점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상태가 특이한 것도 아니다. 1998년 핵 실험 전까지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 모호지대에 머물러 있었고,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 능력에 관해 매우 공들여 모호성을 유지해왔다. 사실상 핵무기 보유와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일본의 경우도 있다.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수개월 이내에 핵무기를 만들어낼 관련재료와 과학적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일본은 때때로 다른 국가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이용해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혹여 군축 전문가들은 이러한 ‘경계 흐리기’가 NPT 체제를 흔들 것이라고 우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NPT 체제는 이미 핵 능력을 완성한 국가도 이를 제거할 의무가 있다는 점은 무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흐릿한 핵 능력’을 인정하는 일 역시 본질적으로는 국제적 흥정이나 다름없는 NPT 체제가 계속 유지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소 간 군사력 경쟁의 맥락에서 핵무기에 관한 사고를 익힌 사람이다. 당시는 상대방을 위협하는 의식(儀式)의 차원에서 허세를 부려가며 핵실험을 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핵을 보유하는 데 여러 경로가 있고, 새롭게 부상하는 국제체제에서는 보다 은밀하고 잠정적인 형태의 핵 보유가 더 눈길을 끌수 있다. 이제 냉전시대의 낡은 이진법을 벗어나 이렇듯 핵 보유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가능성과 위험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외교관, 안보 전문가, 군축 종사자들이 필요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