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일본 최초 정권교체’ 하토야마 내각 출범

하토야마 측근 “한일 관계 더 좋아진다” 귀띔

  • 윤종구│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입력2009-10-07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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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국민은 54년 장기집권의 자민당을 마침내 버렸다. 하토야마 정권은 주변국들에 이전의 일본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일 관계, 북핵 문제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관심사다.
    ‘일본 최초 정권교체’ 하토야마 내각 출범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현 총리)가 8월23일 도쿄에서 총선 유세를 하고 있다.

    8월31일 저녁 도쿄의 번화가 아카사카(赤坂). 퇴근 후 한잔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대던 거리가 이날따라 한산했다. 술집 주인이 유일한 손님인 기자 일행을 배웅하면서 투덜댔다. “밖을 보시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정부가 장사를 망쳐놨어요.”

    이날 저녁부터 태풍이 불어닥칠 예정이니 국민은 서둘러 귀가하라는 정부의 권고방송을 야속해하는 말이었다. 정부가 귀가를 독려한 것도 좀 우습지만, 그렇다고 술꾼들마저 얌전하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천하의 아카사카가 휑하게 빈 것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게 일본이다. 장담컨대, 선진국 중 가장 고분고분한 국민성을 가진 나라가 일본일 것이다.

    고분고분하던 국민의 반란

    바로 하루 전. 그 일본 국민이 일을 냈다. 민주국가에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민당의 54년 장기집권을 표로 종식시켰다. 반세기 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과 분노는 거침이 없었다. ‘이번에는 갈아보자’는 ‘바꿔 열풍’이 일본 열도 전체를 휩쓸면서 국민들도 한껏 달아올랐다. 유세현장에 모인 청중은 교통정리를 위해 저지선을 치는 경찰을 밀치고 차도로 내려서기 일쑤였고, 끼리끼리 길거리 정치논쟁을 벌이며 정부를 비난하는 광경도 드물지 않았다. 적어도 8·30 총선에 임한 일본 국민의 모습은 태풍이 오니 일찍 귀가하라는 정부의 권고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순한 양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날 조간신문에는 일제히 ‘신형 인플루엔자 비상’이 1면 주요기사로 보도됐지만,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유세장을 찾았다. 최근 며칠 새 4명이 잇따라 신종 플루에 감염돼 숨졌다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유세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건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일본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날은 ‘9월말~10월초 피크 기간에 하루 60만명씩 감염될 것’이라는 당국의 경고성 전망도 있었다. 이쯤 되면 일본 사람들은 사람 많은 곳에는 얼씬도 않는 게 보통이다. 독감의 ‘독’자만 나와도 거의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나라다. 올봄 신종 플루가 처음 유행하자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마다 장사진을 치고, 마스크 품귀현상이 벌어져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지경까지 갔다. 이들이 정권교체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 자발적으로 수천 명씩 무리를 지은 것이다.

    투표 하루 전인 8월29일 저녁 도쿄의 부도심지 이케부쿠로(池袋)의 풍경은 일본과 일본 국민이 정권교체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잘 보여준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 겸 자민당 총재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의 마지막 유세대결이 이케부쿠로 역을 사이에 두고 7시30분에 동시에 벌어졌다.

    이케부쿠로 역 동쪽 출구 세부(西武)백화점 앞에 진을 친 자민당 지지자 수천 명은 아소 총리가 나타나자 일제히 작은 일장기를 흔들며 “니폰” “간바레(힘내)”를 외쳤다. 아소 총리는 이렇게 호소했다. “민주당에 나라를 맡기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일본을 더욱 성장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자민당 정권뿐입니다. 일본을 지키는 것은 자유민주당, 여러분의 생활을 지키는 것도 자유민주당!” 지지자들은 일장기를 흔들고 박수를 치며 “니폰! 니폰!”으로 화답했다.

    이케부쿠로 유세장 풍경

    같은 시각 이케부쿠로 역 서쪽 출구 도부(東武)백화점 쪽 도로변을 차지한 하토야마 대표는 유세차 연단에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한 표 던진다고 설마 정치가 바뀌겠느냐고 많이들 생각하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릅니다. 여러분의 한 표가 50년 이상 지속돼온 정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정권교체에 힘을 모아주십시오.”

    일본 역사상 가장 긴 40일간의 선거운동 기간에 전국을 돌며 지원유세를 하느라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승리를 확신한 듯 자신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토요일 저녁 달콤한 휴식을 반납하고 몰려든 수천 명 지지자의 반응은 뜨거웠다. “하토야마! 총리!” “정권교체!” 구호를 외치는 지지자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무시하고 도로와 인도를 무시로 넘나들었다. 결국 경찰이 도로 한쪽을 완전히 시민들에게 내주고 물러났다. 아들에게 하토야마 ‘차기 총리’의 얼굴을 직접 보게 해주려고 목말을 태운 아빠들, 사진을 찍기 위해 일제히 휴대전화를 치켜든 손…. 곳곳에 ‘정권교체’ 깃발이 넘쳤고 하토야마 대표의 사진이 나부꼈다. 압승이 예견된 선거여서 그런지 잔칫집 분위기였다.

    유세가 끝난 후에도 열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지지자들 간에 길거리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자민당을 지지하는 20대 청년 2명이 ‘아소 자민당’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민주당 유세장을 찾아와 자극한 게 발단이었다. 하토야마 대표가 자리를 뜬 지 30분가량 지난 저녁 8시20분.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청년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여성 : 아소 총리도 이제까지 최선을 다해왔겠지만, 자민당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해놓은 게 뭐냐. 우리 생활은 엄청 나빠졌다.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

    청년 :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게 누구 덕분이냐. 일본을 한꺼번에 바꾸려 해선 안 된다. 바꾸더라도 조금씩 바꿔야 한다.

    여성 : 자민당은 수십 년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고, 바꿀 능력도 없다.

    청년 : 경험도 중요하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확실히 모르겠다.

    여성 : 오늘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생각하느냐. 왜 자민당 지지도보다 민주당 지지도가 훨씬 높은지 아느냐.

    ‘일본 최초 정권교체’ 하토야마 내각 출범

    하토야마 민주당 대표가 5월14일 오자와 이치로 대표의 초상화 곁을 지나고 있다.

    논쟁은 끝없이 이어졌고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불어났다. 기자들도 카메라를 들고 몰려들면서 북새통을 이뤘다. 이런 광경은 일본에선 일찍이 볼 수 없었다. 자기 생각을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 오죽하면 혼네(本音·속내)와 다테마에(建前·겉표현)가 다른 게 일본인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하물며 모르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그것도 정치적 주제를 갖고 언쟁을 벌이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만큼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일본 사회, 일본 국민 전체가 들떠 있었다. 이런 흥분 속에서 철옹성 같았던 자민당의 ‘1955년 체제’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 정말 독하네”

    8월30일 밤 총선 개표방송을 보면서 문득 이런 말이 나왔다.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란 전망은 진작부터 모든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확실해진 사실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망치보다는 상당히 완화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한국에서 총선을 취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추론이었다.

    2004년 4·15 총선.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역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한나라당은 궤멸 직전까지 갔다.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심하게는 30석 정도로 몰락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박근혜 당시 대표의 막판 호소가 좀 먹혀들긴 했지만, 다들 ‘열린우리당 압승-한나라당 참패’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개표 결과 양당의 표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열린우리당 152석, 한나라당 121석. 막판 견제심리가 작용한 결과였다. 2008년 4·9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은 대선 압승의 여세를 몰아 170~180석을 넘볼 기세였지만 과반을 간신히 넘기는 153석을 얻었다. 한국 국민은 정에 약한 것일까. 어느 한쪽이 너무 기울면, 약자에 대한 막판 견제심리가 여지없이 발동했다.

    2009년 8·30 일본 총선은 달랐다. 7월21일 아소 총리가 국회를 해산할 시점만 해도 여론의 최대 관심은 민주당이 단독 과반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졌다. 선거 막판에는 민주당이 전체 480석 중 3분의 2선인 320석을 넘길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개표 결과 민주당 308석, 자민당 119석이었다. 선거 직전 의석이 민주당 115석, 자민당 300석이었으니 총선을 통해 얼마나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본 사람은 한번 정을 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낀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 국민은 자민당 실세들을 처참하리만큼 응징했다.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는 49년 연속 지켜온 텃밭 아이치(愛知)현에서 민주당의 30대 후보를 맞아 개표 초반 탈락이 확정될 정도로 완패했다. 이시카와(石川)현이 지역구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는 30대 초반의 여성 신인에게 줄곧 뒤지다 막판 가까스로 역전했다. 이른바 ‘미녀 자객’이었다. 예전 같으면 지역구는 비서에게 맡기고 후배들 지원유세를 돌던 모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운동화를 신고 지역구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방영됐지만 유권자들은 동정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민당 최대 파벌 마치무라파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회장이 홋카이도 지역구에서 패하는 등 내로라하는 파벌 영수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자민당이 패전 후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는 진리 앞에 자민당도 예외는 아니었고 국민은 분노했다. 잇따른 정치부패로 이어진 정치와 돈의 커넥션, 국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 대국민 서비스 약화 등 일본 사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일본 국민은 너나없이 돌을 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작년 말 부임한 기자에게 몇몇 일본인 지인이 “우리 일본도 정권교체가 가능한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아직 일본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란 말을 자조적으로 내뱉었을까. 작년 가을 전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경제가 침체된 것도 자민당으로선 뼈아팠다. 억울한 면도 있지만 이 역시 집권당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민주당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에 국민이 염증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국민이 가려워하는 부분, 목말라 하는 대목에 정확히 주사를 놨다. ‘관료주의 타파’ ‘생활정치 복원’ ‘아동수당 확대’ 공약에 유권자가 열광한 것이다.

    ‘생활정치’‘아동수당’에 열광

    하토야마 총리는 9월16일 소집된 중·참의원 합동 특별국회에서 일본의 제93대 총리로 선출됐다. 인물로는 60명째다. 그는 운이 엄청 좋은 사람이다.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대표가 다 차려놓은 밥상을 막판에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오자와는 2006년 4월부터 3년 넘게 민주당 대표를 맡아 수권정당으로 체력을 길렀다.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선 오자와의 진두지휘하에 자민당을 꺾고 제1당으로 올라섰다. 양당제하에서 실권을 가진 중의원에선 비록 야당이었지만, 참의원에선 2년 전에 이미 여야가 역전된 것이다.

    그러나 다들 ‘차기 총리는 오자와’라고 믿었던 올 3월 초, 난데없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혹 수사에 착수했다. 불법 비자금을 만든 혐의를 받고 있던 건설업체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 민주당과 오자와는 ‘권력형 기획수사’라며 반발했지만, 오자와의 회계담당 비서가 구속되면서 오자와의 사임을 바라는 여론이 70%를 오르내렸다. 자민당과의 지지율도 역전됐다. 버티던 오자와는 ‘총리 문턱’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퇴했다. 5월16일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하토야마가 선출됐다. 그는 이후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단기간에 민주당 지지율을 회복하면서 총선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특히 하토야마 총리의 부인 미유키 여사는 일본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미유키 여사는 1943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1960년대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요리책을 펴내기도 한 부인은 총선 다음날인 8월31일 ‘마이니치신문’ 기고를 통해 ‘인간 하토야마’를 거침없이 공개했다. “보통사람이고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다. 휴일엔 함께 슈퍼마켓에 가서 즐겁게 카트도 끌어준다. 새우 센베를 좋아하는데, 내게 혼날까봐 그런지 들키지 않으려는 듯 카트 안으로 살짝 집어넣곤 한다.”

    미유키 여사는 9월1일 ‘교도통신’ 인터뷰에선 재벌가 시어머니에 대해 “시어머니와는 잘 맞지 않는다. 바지류를 즐겨 입는 나를 기모노 매장으로 데려갔다”며 솔직하게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아들 하토야마 기이치로(鳩山紀一郞·33)는 부친의 뒤를 이어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뒤 러시아 모스크바대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우애론’과 ‘관료주의’ 대결?

    하토야마 총리의 ‘우애론’은 대부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하토야마가 1996년 창당한 민주당 창당선언문을 보면 그의 정치철학을 엿볼 수 있다. “자유는 약육강식의 방종에 빠지기 쉽고 평등은 튀어나온 못을 때리는 식으로 타락할 수 있다. 양 극단을 바로잡는 것이 우애다.” 미국식 시장경제주의를 불가피한 세계적 추세로 인정하면서도, 무한경쟁을 규제하고 사회안전망 확충을 주장하는 것은 이 같은 정치철학에서 비롯됐다.

    일본의 새 선장으로 선택된 하토야마 총리는 탈 관료주의, 행정 서비스, 복지 등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공약 이행을 위해서는 ‘관료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 지금은 정권 초기라 관료들이 납작 엎드려 있지만, 조직 이기주의로 무장한 관료들이 늘 그래왔듯이 언제 조직적 반항 내지는 비협조 모드로 돌아설지, 흥미진진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 일본의 정권교체를 바라보자. 다행인 것은 민주당 정권이 한국에 우호적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한일간 최대 걸림돌인 과거사 인식에서 민주당은 자민당보다 전향적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8월11일 도쿄 당사에서 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가 되더라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갈 생각이 없다. 각료들에게도 자숙을 요청하겠다”고 다짐했다.

    한일 관계가 평소에 잘나가다가도 야스쿠니신사나 역사교과서 등 과거사 문제에 부닥쳐 주기적으로 삐걱거리는 악순환을 반복해온 점을 생각하면 하토야마 시대에는 적어도 국민감정을 격화시켜 양국 관계가 후퇴하는 일은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을 전망이다. 과거 자민당 정권의 일부 정치인들이 우익에 어필하기 위해 고의로 ‘역사 망언’을 반복해온 나쁜 버릇도 사라지길 기대할 만하다.

    재일동포의 숙원인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도 민주당 집행부는 대체로 찬성 입장이다. 민주당 내부의 일부 반대와 우익 여론의 반대 때문에 민주당이 얼마나 추진력을 발휘할지 알 수는 없지만 하토야마 총리는 일단 “빨리 진행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 때문에 재일민단은 1946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총선 선거운동에 나서 상당수 민주당 의원을 지원했다.

    오카다의 한국특파원 간담회

    무엇보다 하토야마 총리는 5월 당대표에 취임한 후 첫 외국방문지로 한국을 다녀왔다. 당시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뒤에는 공개석상에서 몇 번이나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는 말을 했다. 상대국 정부를 의식해 야당 대표를 직접 만나지 않는 외교관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면담이 성사된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으로선 적절한 투자였던 셈이다. 아소 총리 시절에도 한일 관계는 더없이 좋았지만, 앞으로 한일 관계는 더욱 밀월관계를 이어갈 것이란 장밋빛 전망이 많다.

    오카다 외상은 간사장이던 7월말 한국 특파원 6명만 따로 불러 간담회를 했다. 정동영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그는 “민주당 정권이 되면 한일 관계는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정권쟁탈전이 한창인 때에 당 간사장이, 투표권도 없는 외국 특파원들을 따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고 덕담을 한 것 자체가 상당한 애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한일 관계가 금세 좋아지길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독도 문제는 언제든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영토 문제는 여야와 이념을 떠나 융통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문제다. 일본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그 외의 문제에서도 목소리 큰 우익의 눈치도 봐야 하고, 당장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를 의식한다면 괜한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일 관계는 우리 쪽에서 성급한 기대를 갖고 민주당 정권을 재촉하기보다는 저쪽이 먼저 다가오길 느긋하게 기다리는 편이 낫다. 괜히 우리가 티 나게 나서다보면 민주당 정권이 일본 국내에서 어려운 지경에 놓일 수도 있다. 특히 내년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라는 민감한 시기여서 더욱 그렇다.

    북한을 대하는 자세에서는 민주당 정권은 자민당 정권보다 유화적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외교 지론인 ‘대화와 협조’ 노선은 북한에도 적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북정책이 당장 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북핵과 탄도미사일, 납치문제는 국내 여론이 워낙 강경해 어느 당이 정권을 잡든 행동반경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북핵의 ‘핵’자에도 경기

    일본 사람들은 북핵의 ‘핵’자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세계에서 쏟아지는 북한 뉴스의 절반 이상은 일본 언론이 생산해내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북한에 대한 일본 언론의 관심은 지대하다. 김정일 후계 문제가 화제가 됐던 올 상반기, 김정운이 유학시절 살았다는 스위스 베른을 샅샅이 훑고 다닌 것도 일본 언론이고, 김정운의 친구 이야기, 김정운이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공개한 것도 일본 언론이다. 마카오에 있는 김정남을 수시로 인터뷰하는 것도 일본 언론이다. 일본 언론이 미국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북한이다. 실제로 외국 뉴스 중에서 북한 관련 뉴스의 양도 미국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일본 사람 중 북한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마디로 관심이 엄청 많지만 매우 부정적인 시각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나 정치권의 선택의 폭은 넓지 못하다. 하토야마 총리가 이달 10일 “북한은 미사일을 여러 번 발사했고 핵 개발과 핵실험을 했으며, 납치 문제도 진전되지 않은 상황이다. (북일관계 개선은) 전적으로 북한의 대응에 달렸다”고 한 것은 북일 관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표현한 말이다. 북한이 핵 포기와 6자회담 복귀 등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걸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지 않으면, 일본으로선 선제적인 대북 유화조치에 나서기 힘든 상황이다.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의 ‘아시아 중시’ 방침에 한국과 중국은 환영하는 반면 미국은 좀 떨떠름한 반응이다. ‘대등한 미일관계’를 내세우며 “할 말은 하겠다”고 공언하는 민주당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일본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 미국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잘못 건드렸다가 ‘도쿄 대공습’을 당해 잿더미로 변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격을 받아 죽다 살아난 경험이 뼛속 깊이 묻혀있다. 자민당의 54년 치세는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다. 민주당이 ‘대등한 관계’를 내세우고 국민이 여기에 표를 줬다는 것은 그러한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2차대전이 끝난 지 60년 이상 지났으니 일본인의 무의식에는 그러한 욕망이 있을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 출생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급유지원, 1960년 미일 양국 정부가 일본에 미국 핵항공모함 등의 핵 반입을 허용하기로 비밀 합의했다는 핵 밀약, 주일미군 재편 등 현안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태평양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중이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민주당은 대미외교 방침의 강한 표현을 다소 완화하는 등 ‘현실노선’으로 한 클릭 이동하긴 했지만, 아직도 자민당 정권 때보다는 미일 간 간격이 넓다. 미국 정부가 총선 직후 “선거와 정권운영은 별개다. 인도양 급유지원을 계속 해달라”며 공개적으로 견제구를 날리는 등 양국 간 탐색전도 치열하다.

    “미국에 농락당했다”

    민주당의 연립 파트너인 사민당은 양국의 군사적 동맹에 관해 과거보다 좀 더 거리를 두길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이나 하토야마 총리로선, 자민당 정권과는 다른 뭔가 ‘색깔 있는 대미외교’를 선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안고 있는 반면 미일동맹이라는 현실적 무게를 외면할 수도 없는 처지다. 더구나 “냉전 후 일본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시장원리주의에 농락당했다”는 등 아슬아슬한 내용이 담긴 하토야마 기고문이 알려지면서 미국 일각에선 ‘반미주의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9월 하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하토야마 총리는 머리가 아프다. 회담이 끝난 후 “대등한 미일관계라더니 별것 아니구먼. 말만 그럴듯했지 실속은 없구먼”이라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다. 국내 여론도 잡고 미일동맹도 잡으려는 두 마리 토끼 전략이 자칫 둘 다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민주당 정권이 얼마나 오래갈지다.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눈여겨볼 대목은 분명히 있다. 민주당을 두고 자민당 출신부터 구 사회당 출신까지, 좌에서 우로 폭넓은 정치이념의 소유자들이 모인 ‘팔색조 정당’이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민주당에는 주요 8개 그룹이 모여 있다. 오자와 그룹(150명), 하토야마 그룹(45명), 노다 요시히코 그룹(35명), 간 나오토 그룹(30명), 마에하라 세이지 그룹(30명), 구 민사당 그룹(30명), 구 사회당 그룹(30명), 하타 쓰토무 그룹(20명)이다.

    특히 외교안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 결정적인 순간 대미외교 등을 놓고 내부 갈등이 커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나 노선 차이가 당을 분열시킬 만큼 크지는 않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그리고 오자와 그룹을 제외하면 그룹의 결속력이 낮다. 실제로 5월 대표선거에선 당내 소장파들이 그룹을 뛰어넘어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현 외상) 후보를 밀기도 했다. 민주당 그룹이 자민당 파벌과 다른 점이다.

    민주당 정권의 핵인 동시에 가장 약한 고리는 어디일까. 오자와다. 오자와는 민주당의 제1 대주주다. 총선 전에도 그랬고 총선 후에도 그렇다. 자타가 공인하는 ‘선거의 귀재’ 오자와는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선거담당 대표대행’을 맡아 후보영입, 공천, 자금지원, 선거운동 지도 등을 거의 도맡았다. 민주당 압승은 사실 오자와의 압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총선 후 당내 중의원 308명과 참의원 109명 등 모두 417명의 의원 가운데 오자와 그룹은 약 150명(중의원 120, 참의원 30)이다. 당내 36%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자민당 의석수보다 많다. 당내 두 번째 세력인 하토야마 그룹이 45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그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상왕정치 옥상옥 이중권력

    민주당 정권을 두고 ‘상왕정치’ ‘옥상옥’ ‘이중권력’이란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총선 후 새 정권의 인사도 절반은 오자와가 했다. 하토야마-오자와 회담에서 ‘정부는 하토야마, 당은 오자와’로 역할분담에 합의하고 당 인사권을 오자와가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선 자파 후보 지역구에 자신의 비서 20여 명을 내려 보내 선거포스터 붙이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지도했다. 총선 후에도 그는 자파 소속 초선의원들에게 “지역구를 떠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 정계는 민주당 정권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막후 정치’에 능수능란한 오자와의 이력 때문이다. 1989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에 올라 일본 정치를 쥐락펴락했던 오자와는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이후 창당과 합당, 분당을 여러 차례 주도하면서 늘 정국에 파란을 몰고 왔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뭔가를 만들어내는 스타일이다. 오자와는 자신의 책임 아래 치를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까지는 몸을 낮추겠지만, 언제 특유의 독자행보를 시작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정권 최대의 ‘힘’이 있는 곳에 ‘불안의 씨앗’이 잠재해 있는 셈이다.

    언제나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그것도 핵심부에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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