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한국을 이끄는 일류 공학자 4인 인터뷰

“1년 중 15일 실험결과 좋으면 성공 350일은 시멘트 바닥에 머리 찧는 고통 겪어”

  • 공종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ong@donga.com│

    입력2009-10-08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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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로 대거 몰리던 시절이 있었다. ‘공업입국’을 기치로 내걸었던 1970년대가 그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 추세가 대체로 유지됐다. 그러나 이제 이공계 기피현상이 고착화된 지 오래다. 역설은 ‘2009년 현재’도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가장 기여도가 큰 직군은 우수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의사나 법률가 집단이 아니고, 공학도란 점이다. 각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공학자 4명을 만나 성공비결을 들어봤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지난 10년간 피인용 상위 0.1% 논문 5권으로 국내 최고 기록


    피인용 상위 0.1%는 학계에서 ‘꿈의 논문’으로 꼽히는 숫자다. 전세계 동료 학자들의 인용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논문을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12월 한국과학재단은 한국 과학자 논문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저널에 발표된 논문 중 피인용 ‘상위 1%’에 해당하는 한국 연구자 논문은 1194편. 피인용 ‘상위 0.1%’에 해당하는 한국 연구자 논문은 10년 동안 103건에 불과했다. 현택환(45) 서울대 교수는 이 중 5편을 발표해 상위 0.1% 논문 1위에 올랐다.

    현 교수의 최근 연구 분야는 나노기술이다. 연구실에서 만난 그에게 우선 나노기술에 대해 물어봤다.



    “나노기술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는 10년도 안 된다. 태동기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노기술은 자체가 산업을 일으키기보다는 도우미 기술이다. 정보기술(IT), 에너지나 환경, 바이오기술(BT) 등이 한계상황에 도달하면 병목을 터주는 구실을 한다. 나노에서 가장 중요한 게 나노입자인데 균일한 나노입자를 대량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노입자는 의료진단, 태양전지, 데이터 저장 등에 많이 쓰인다. 나노입자는 현재 1g 가격이 2000달러로 다이아몬드보다 비싸다.”

    ▼ 논문 인용에서 사실상 국내 최고 수준인데 이유는 뭔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1년에 발표한 나노기술 관련 논문이다. 600번 가까이 인용됐다. 보통 노벨상을 바라보는 논문이 최소 1000번 정도 인용되는 점을 감안하면 인용 횟수가 정말 많은 편이다. 2004년에 발표한 논문은 2005년에 재료공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으로 꼽혔다. 지금까지 내 논문 인용건수는 8500번 정도 된다. 연구하는 분야인 나노가 새로운 분야인 데다가 나노입자를 만드는 데 있어 그동안의 난제를 해결한 점이 인정받은 것 같다.”

    ▼ 공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나.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미쳐야 한다.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해야 한다. 미국 대학에서 테뉴어(종신교수)를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새로운 분야를 하다보면 실패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1997년 서울대 교수로 오면서 새로운 것을 하자고 결심했고 나노에서 연구주제를 찾았다. 지난해 포항공대 교수로 임용된 이진우 박사가 당시 석사 과정이었는데 1년 동안에 프로젝트가 6차례나 바뀔 정도였다. 그만큼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게 어렵다. 도전의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결과물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논문 읽을 때 가장 행복

    ▼ 새로운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읽을 때다. 어제도 하루 종일 논문 30편을 읽었다. 그런데 논문을 공격적으로 읽어야 한다. 남의 논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연구와 접목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시각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 아이디어 노트가 있다고 들었는데.

    “내게는 보물이다. 논문을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메모해놓는다. 다른 일을 하다가, 때로는 잠을 자다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잊지 않고 메모해놓는다. 끊임없이 연구만 생각해야 한다.”

    ▼ 실패하는 연구도 많은가.

    “맞다. 실험을 해서 1년에 15일 정도 좋은 데이터를 얻으면 성공적인 공학자로 봐야 한다. 이를 제외한 다른 날은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찧는 것 같은 고통이 있다고 보면 된다.”

    ▼ 연구의 성공률은 어느 정도 되나.

    “외국교수를 포함해 나만큼 성공률이 높은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런데 나도 연구성공률이 10%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실패를 통해 배운다. 학생들에게도 ‘연구가 너무 잘되면 오히려 배우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연구에 실패했을 때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또 실패로부터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 학부는 공대가 아닌 서울대 자연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그렇다. 내 체질에 공대가 맞는 것 같다. 스케일이 훨씬 크다. 사이언스 쪽은 한 분야를 깊게 판다. 반면 공대는 시류에 잘 편승한다. 중요한 토픽이 있으면 바로 탄다. 나도 계속 바꿨다. 3,4년 재미있게 연구하다가 다른 분야가 나타나면 그 분야로 연구주제를 바꾼다. 공대는 5년, 길게 봐서 10년 안에 산업과 연관되는 것을 찾는다.”

    ▼ 서울대에서 대부분의 연구를 했는데, 외국 대학에 비해 연구여건이 불리한 것은 없나.

    “처음에는 장벽이 있었다. 그런데 평판이 쌓이면서 편한 부분이 있다. 이제는 주요 저널이나 잡지 편집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면 바로 답신이 온다. 얼마 전 발표한 논문에 공동저자로 노벨상 수상자도 들어가 있다. e메일을 보내 ‘당신이 연구한 결과를 응용해 새로운 논문을 쓰고 싶다’고 연락했더니 금방 답신이 왔다.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편하다. 그 단계를 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논문을 발표할 때 리뷰어가 2대1로 의견이 갈리면 무조건 거부됐는데, 요즘은 심사를 다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을 함부로 내지 못한다. 이제 부담도 많다. 선두주자를 따라가는 것은 쉽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앞에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선구자 역할을 해야 한다.”

    ▼ 성공에는 운도 많이 작용하는데….

    “그런 측면도 있다. 나노 분야가 막 시작될 무렵에 내가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연구한 학생들이 매우 잘해줬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점은 자연대 출신으로 거의 타대 출신이나 다름없는 나를 위해 공대가 정말 지원을 잘해줬다. 서울대 교수치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하고 싶은 연구를 다했다. 내가 자연대 화학과 교수 대신 공대 교수로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 학생들도 자주 접촉하는데, 어떤 특성이 엔지니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가.

    “중요한 것은 도전정신이다. 어떤 학생은 학부 성적이 탁월하게 좋은데 연구가 젬병인 경우도 있다. 반면 학부 성적은 형편없지만 연구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학생도 있다. 학부 성적과 연구는 정말 다르다.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남이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려는 자세, 때로는 엉뚱한 생각도 좀 해야 한다. 창의성이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영화에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라는 말이 있는데, 현실에는 그런 게 없다. 세렌디피티는 열심히 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는 보너스다. 게으른 자에게는 오지 않는다. 성실성이 담보돼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같은 나노라도 보는 방향이 다르고, 잘 알고 있어야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 누가 경쟁자인가.

    “매사추세츠공대(MIT), 버클리대 등 몇 개 그룹이 있다. 아직 일본에는 경쟁그룹이 없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한국이 일본을 앞서고 있다.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연구를 하다보면 2등을 할 수가 있는데, 똑같은 논문이라도 2등은 1등에 비해 인용건수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나가지 않으면 당한다.”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이사

    중학생 만능수리공, 원자현미경 세계1위 기술력 기업 만들어


    첨단 나노 계측장비인 원자현미경을 제작하는 벤처기업 파크시스템스의 박상일(51) 대표이사는 서울대 물리학과(학사, 석사), 미국 스탠퍼드대(박사)를 거쳐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경영한 경험을 가진 공학도다.

    1997년 귀국해 파크시스템스를 창업한 그는 2004년 중소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10대 신기술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한국공학한림원의 ‘젊은 공학인상’을 수상했다.

    ▼ 어릴 때부터 공학도로 적성이 있었나.

    “그랬던 것 같다. 기계에 관심이 많아서 유치원 시절부터 시계, 유성기, 녹음기 등 집에 있는 것은 다 뜯어봤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분해하고 조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물론 야단맞은 적도 있지만 대체로 그냥 두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고장을 냈지만 물건을 원상복구시키기도 했고 나중에는 고장 난 기계를 고쳤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만능 수리맨’이어서 전기제품이나 공구류가 고장이 나면 내가 다 고쳤다. 내가 유학 가 있을 때 부모님이 ‘만약 상일이가 있었다면 수리공을 부를 필요가 없었을 텐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 학부 때 전공은 공대가 아닌 물리학인데….

    “처음에는 전자공학과가 적성에 맞아 지원하려고 했다. 당시 서울대는 계열별로 신입생을 모집해 2학년 때 학과를 정했다. 그런데 대학에서 아마추어 무선 클럽활동을 했는데 전자공학과 선배들이 학부 시절에는 물리학을 공부한 뒤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서 학부 때 물리학을 택했다. 그런데 당시 물리학과에는 대학원 때 공대로 진학하는 것을 양반 출신이 대장간 차리는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대학원도 물리학과로 진학했다. 그런데 다행히 스탠퍼드는 학풍이 실용적이다. 물리학과도 광학, 음향학, 원자현미경 등 물리학에 기반을 두면서도 엔지니어링에 가까운 분야를 많이 공부한다.”

    ▼ 물리학도로서 원자 현미경에 필이 꽂힌 배경은.

    “당시 원자현미경으로 실리콘 원자 하나하나를 측정한 결과를 담은 논문이 나왔다. 대단한 내용이었다. 당시 지도교수가 그 분야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원자현미경 개발을 하면서 상업적으로 만들어 팔면 많은 사람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 연구원 대신 벤처사업가로 나선 이유는.

    “미국은 예전부터 그런 분위기였다. 인텔, HP도 한때는 벤처기업이었다. 스탠퍼드 졸업생은 특히 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다. 뭔가 될 것 같으면, 교수건 학생이건 학교를 떠나 사업을 시작한다. 점심 때 학생들이 툭하면 사업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다른 한국 유학생들은 좀 달랐던 것 같다. 대부분은 빨리 학위를 따서 한국에서 교수가 되려 했다.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국에 왔더니 모두가 ‘학벌도 좋고 멀쩡한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느냐’며 말렸다. 당시 한국에선 사업은 궁여지책으로 여겨졌고 첨단 기술을 가지고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지도교수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공채에 지원하라며 말렸다. 이런 말을 계속 듣다보니 내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백일몽을 꾸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 돌아가서 마음을 잡았다. 지금 벤처를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교수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교수가 되면 다른 사람 일자리를 하나 채가는 게 되지만 내가 좋은 아이템으로 사업을 하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소명의식도 들었다. 나는 도전의식이 강한 편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미지의 길을 개척해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차고(車庫)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 미국에서 사업을 접고 한국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미국에서 사업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특히 1993년에는 자금난으로 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극복해 1995년에 회사를 정상화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재미원로 과학자를 여럿 만났는데 어딘가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 못살고 연구비도 부족하고 정정(政情)도 불안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좋은 자리가 있으면 한국에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당시 연봉 차이가 5배, 10배였다. 그런데 미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동료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나중에 위상이 역전된 사례가 많았다. 미국이 대단히 합리적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 타민족에 공정하지만, 그래도 아시아계로서 살기에는 불리한 점이 있는 사회다. 끝까지 미국에 남아 있으면 인생이 재미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 40세 이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너무 늦게 돌아오면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원리원칙대로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규제가 모호하고, 회색지대가 많았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직원들이 힘들어했다. 그런데 한국사회도 외환위기를 계기로 많이 달라졌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우리 인생인데 내가 옳은 일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 공학도로서 성공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능동적으로 문제를 찾고 솔루션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쉽다. 시키는 일을 하는 수동적인 엔지니어가 아니라, 군대로 말하면 사령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회사에서도 그런 엔지니어를 키우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결국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국 교육은 졸병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학교에서 누가 생뚱맞은 질문을 하면 면박을 주는 게 우리 교육 현실이다. 교사들이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 발표력도 문제다. 엔지니어들도 커뮤니케이션을 잘해야 하는데, 발표를 너무 못한다. 문과 출신은 그나마 낫지만 이공계 출신은 발표력이 많이 떨어진다. 글쓰기도 문제다. 문법도 틀리고 어휘도 적절치 못하다. e메일로 간단하게 의사전달도 못해선 성공한 공학도가 될 수 없다. 한국 교육의 치명적인 약점에는 영어도 포함된다. 한국은 전세계를 상대로 일해야 한다. 첨단 장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을 국내에서 모두 조달할 수 없다. 해외에서 어떤 교수가 더 좋은 방법을 개발했다면 그 교수와 접촉해서 이를 접목하는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엔지니어가 영어가 안 된다면 기대난망이다. 영어를 극복하지 못하면 세계무대에 나설 수 없다. 모든 지식이 인터넷에 있는데, 인터넷에 있는 대부분의 정보가 영어로 돼 있다. 중국인도, 독일인도 영어로 논문을 쓴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려면 영어가 돼야 한다. 특히 과학기술 용어는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첨단제품들은 다 영어로 돼 있어 영어를 쓰지 않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 벤처기업 경영은 단순한 엔지니어와는 또 다른 분야다. 성공한 벤처기업인이 되기 위해선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합리성을 필요로 한다. 과거에 중소기업을 하기 위해서는 뱃심도 있고 술도 잘 마시고, 이런 사람이 전형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갈수록 더 합리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에 누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어떤 분야에서 기술력을 갖고 있는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또 남이 흉내를 내기 어려운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 다음은 성격이나 스타일이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 필요하다. 열정이나 확신이 필요하지만 맹신은 곤란하다. 또 슈퍼A급 엔지니어들이 사업을 해야 한다. 남들은 흉내 낼 수 없는 핵심 경쟁력이 있다면 대기업 횡포에 맞설 수 있다. 독일의 강소기업이 이런 기업이다. ‘미투 (me too)’ 사업으론 경쟁할 수 없다. 우수한 사람이 사업을 시작해야 우수한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다.”

    ▼ 회사가 대기업도 아닌데 우수인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나.

    “사업을 시작할 때 일의 절반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일대일로 만나서 설득했다. 당장 대기업보다는 월급이 적지만 회사 가치가 높아지면 스톡옵션을 통해 몇 억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런데 전환점은 유영국 박사의 영입이었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제의한 교수직을 마다하고 우리 회사에 입사하면서 전에는 병역특례기간이 끝나자마자 떠나던 직원들이 남기 시작했다. 유 박사 같은 사례는 미국에선 당연한 것인데 한국에선 ‘특이한 뉴스’거리로 취급돼 신문에 실렸다.”

    ▼ 원자현미경 시장에서 파크시스템스는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또 전세계 원자현미경 시장 규모는.

    “원자현미경 시장에서 우리 기술력은 전세계 1위라고 확신한다. 아직 시장점유율은 2위다. 그런데 기술력이 앞서 있어 시장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2,3년 사이에 1위에 올라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기가 좋지 않았던 지난해 하반기와 올해 상반기에도 우리 회사는 오히려 좋았다. 하반기 전망은 더욱 좋다. 전세계 전자현미경 시장은 ‘현미경’에만 그치면, 전체 시장 규모가 몇 천억원대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술은 나노기술의 길목을 지키는 기술이다. 제약 등 바이오와 의료기시장에서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원자현미경의 기술을 적용시킨 특별한 솔루션이 터지면 시장규모가 조 단위로 커질 수도 있다. 한국시장에서 한국만 보고 사업을 하면 안 된다. 전세계를 봐야 한다.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한국에서도 경쟁력이 없다.”

    신성우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초고층 빌딩의 세계적 권위자 “남과 똑같이 해선 성공 못해”


    안산에 있는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공학대 학장을 겸임하고 있는 신성우(58) 교수는 초고층 빌딩 공법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가 개발한 초고강도 콘크리트 구조는 타워팰리스,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참여한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88층)와 중동 버즈두바이(160층) 등 초고층 건축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이기도 하다.

    ▼ 유학을 떠난 시기는 국내에서는 아직 초고층이라는 개념이 부족한 시기였다. 어떤 계기로 초고층 분야를 연구하게 됐나.

    “당초 유학은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떠났다. 그런데 석사 과정 지도교수가 테뉴어(종신교수)를 받지 못하게 되자, 나는 일리노이 주립대로 학교를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때 새로 만난 지도교수가 콘크리트와 관련해 미국에서 3,4번째로 유명한 교수였다. 그분은 상징화, 단순화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지도교수로부터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을 배웠다. 세상 만물은 간단한 원리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은 이후 내 생각과 인생을 바꿔놓았다.”

    ▼ 그 대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공학 분야에서 기술을 단순화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 즉 한 가지 물건에는 한 가지 단어가 있다는 뜻이다. 공학기술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핵심 원리가 있다. 실험을 할 때도 핵심 변수를 찾아 실험을 하고, 핵심 결과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분의 스타일이 그랬다. 2년 반 같이 있으면서 그 점을 배운 게 큰 자산이다.”

    ▼ 큰 성공에는 운도 작용한다고 하던데….

    “적어도 내게는 맞는 말이다. 시카고는 초고층 건물로 유명한데, 초고층 건물 재료로는 콘크리트와 철근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시멘트회사로부터 초고층건축에 필요한 초고강도 콘크리트에 대한 프로젝트를 요청받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분야를 연구하게 됐다. 더욱 운이 좋았던 것은 내가 그 분야 미국 기업에 2년 넘게 파견 나가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가 개발한 초고강도 콘크리트는 세계적인 기록이었는데, 현장 기업에서 일하면서 연구결과를 실제 건물에 적용하는 경험을 했다. 1986년 귀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권 5개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됐다. 스카이라인을 살리기 위해 고층화가 필요했고, 내가 미국에서 연구했던 결과물과 맞아떨어졌다. 삼성건설은 고강도 콘크리트 개발과 관련해 나를 5년 동안 지원했다. 이 기술은 삼성이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타워, 아랍에미리트 버즈두바이 프로젝트를 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초고층 분야에선 세계 5위권 안에 들어간다.”

    ▼ 원래부터 건축학 전공이 꿈이었나.

    “원래는 경영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내가 졸업한 경남고는 당시 서울대 진학률이 매우 높았다. 당시 경남고에서 서울대 공대에 한 해 50명 넘게 합격해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공대로 바꿨다. 그런데 공대 중에서 인문학적인 요소가 강한 분야가 건축학이어서 건축학으로 지망을 바꿨다. 그런데 서울대에 불합격하고 한양대에 합격했다.”

    신 교수는 건축학계에선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미국 콘크리트학회 구조분야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고, ‘콘크리트 세계 10인 학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국회에서 ‘올해의 과학기술인상’을 받기도 했다.

    ▼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진학에는 실패했지만 공학도로 누구 못지않게 큰 성공을 거뒀다. 그 비결은 뭔가.

    “너무나 흔한 이야기다. 하려고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핑계를 댄다. 반면 머리가 좋은 조직이나 사람은 ‘이렇게 하면 된다’고 발표를 한다. 한양대에 입학해서 첫 미팅을 이화여대와 하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한양대 건축학과는 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서울대 건축학과, 그래 한판 해보자’는 자세로 정점에 올라가려고 계속 노력해왔다. 당시 한양대 공대에는 나처럼 서울대에 떨어지고 온 학생이 많았다. 그래서 도전적이고 오기도 많다. 한양대 공대는 또 응용에 아주 강한 전통을 갖고 있다. 미국 유학을 갔다왔더니 한양대 본교 캠퍼스는 대학교수를 오랫동안 뽑지 않았다. 그래서 안산에 있는 제2캠퍼스 건축과 1호 교수로 왔다. 그런데 자꾸 분교, 분교 하더라. 그래서 ‘좋다. 어디가 본교이고 어디가 분교인지 붙어보자’ 이런 자세로 해왔다. 그쪽을 부정하거나 깔보려는 게 아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노력하면 좋은 생각도 떠오르고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제2캠퍼스 교수로 온 게 나에겐 오히려 도전을 위한 계기가 됐다.”

    신 교수는 미국 유학파이지만, 갈수록 미국 유학으로 몰리는 최근 학계 현상이나 미국 교재를 가져다 그대로 대학에서 쓰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다.

    “건축학을 가르칠 때 미국 원서를 그대로 가져다 공부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많다. 한국에 맞게 한국화한 교재를 개발해야 한다. 초고층 관련 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대학은 미국 예제와는 다른 예제를 개발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재라고 생각한다. 최고가 되기 위해선 남과 똑같은 것만을 해서는 안된다. 또 지금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학생의 70%, 80% 이상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독일과 일본 등 제조업 경쟁력이 강한 국가로 유학을 더 많이 가야 한다.”

    ▼ 초고층이 한국에 맞나.

    “한국은 건설부문이 매우 경쟁력이 있다. 왜 그런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국이 다른 국가와 차별성을 갖는 것 중의 하나는 남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젊은이가 군복무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선 가혹한 조건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군복무를 영어로 ‘military service’라고 말하지만, 나는 ‘national training academy’(국가 훈련원)이라고 말한다. 한국 건설이 강한 것은 이런 것들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막에서도 살아남았다. 건설부문의 강점을 무기로 이제는 초고층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초고층 분야에서 2015년까지 1500억달러 발주가 예정돼 있다. 한국이 이 중 20~30%를 먹어야 한다. 이제 도시는 수직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셈블리(조립)에 강하다. 원천기술에 강한 것 같지는 않다. 초고층은 기본적으로 어셈블리다.”

    백점기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조선해양 분야의 세계적 거두, “I am still hungry.”


    백점기(52)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미국 조선학회, 영국왕립조선학회 등에서 연거푸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하는 등 조선해양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인정받은 공학자다. 지난해에는 영국왕립조선학회에서 동양인 최초로 최고 과학기술상을 수상했다. 조선 분야 국제학술지인 ‘선박과 해양구조물’(Ships and Offshore Structures)을 영국에서 발간해 직접 편집장을 맡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중공업에 취직했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유학을 떠났을 때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하던데….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떠난다고 하자 모두가 미쳤다고 했다. 비전이란 남보다 한발 앞서서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혁신해야 살아남는다고 봤고, 당시 조선기술에서 세계 최고인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이다. 당시 내가 유학을 떠날 때 유일하게 반대하지 않은 분이 부모님이셨다. 198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때 편도 비행기표를 갖고 갔다. 가지고 있던 돈은 모두 10만엔이었는데, 당시 환율로 30만원 정도 됐다. 한 달 생활비였다. 그런데 열심히 하니깐 석사 박사과정을 장학금으로 마칠 수 있었고, 생활비도 나왔다. 그렇게 해서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그가 학업을 마친 오사카대학 조선공학연구실에는 ‘백구상(백점기 교수의 일본 호칭)’이 학위과정 중 밤을 새워가며 쓴 논문 편수가 전설로 남아있다.

    ▼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낸 비결은 뭔가.

    “나는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을 시험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암기가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는 세상에 암기는 유용성이 떨어진다. 창의력처럼 교과서에 없는 부분은 평가하기가 어렵다. 나는 새로운 생각을 마주하면 흥분이 된다.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은 일종의 보물찾기다. 그런데 보물은 스스로 찾아야 재미가 있다.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나는 9남매 중 막내였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자유롭다. 혁신(革新)이라는 말이 있다.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다. 가죽을 벗길 때 매우 고통스럽다. 사람들이 혁신 후에 좋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과정을 이겨내면 혁신이 된다. 나는 그걸 즐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주변에 많다. 그런데도 이들이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Think Big, Aim Big’(크게 생각하고, 원대한 목표를 세워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 해양계에서 세계를 장악하고 싶다. 주변에서는 많은 성과를 냈다고 평가하는데, 히딩크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이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을 한다. 목표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를 장악하고 싶다.”

    ▼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저널을 창간해 궤도에 올렸다. 한국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확실한 철학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 기존의 국제학술지들에는 상당히 현학적인 논문들이 실린다. 물론 그런 논문들도 중요하다. 그런데 실용성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개발한 기술, 산업체에서 바로 기술이전을 원하는 내용을 담을 국제저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와 실용 공학 간 갭이 상당한데, 이를 메울 다리 구실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뜻을 가지고 저널을 출판하려고 하자 1870년에 만들어져 유명 국제저널을 많이 발간해온 영국의 출판사 테일러 앤드 프란시스(taylor&francis)가 선뜻 나섰다. 현재 30개국의 학자들이 편집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 부산이 제2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혹시 서울에 비해 연구하는 데 불이익은 없나.

    “생각의 차이다. 21세기에 지방은 없다. 불이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핑계를 찾는 것이다. e메일 시대에 무슨 소리인가. 더욱이 한국 조선은 이미 설계생산에서 세계 1위 국가다. 물론 기초원천기술에선 영국 등 유럽이 여전히 우세인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 로이드선급이라는 조직이 있다. 1760년에 출범했으며, 내년에 250주년을 맞는다. 선박과 해양플랜트 인증을 해주는 기구다. 로이드선급으로부터 200만파운드(약 20억원)를 유치해 부산대에 국제공동연구소를 출범하게 된다. 혁신구조설비를 선박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는 학부 취업률이 100%다.”

    ▼ 어떤 사람이 엔지니어로 성공하나.

    “머리는 평균적이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열정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이다. 교과서에 없는 답을 찾아가는 사람, 창의성과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노벨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노벨상은 실패가 반복돼 누적된 결과다. 장기적인 시각으로 멀리 봐야 한다.

    ▼ 1등이 되기 위한 전략을 뭐라고 생각하나.

    “개인이나 산업, 혹은 국가가 세계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프라, 기술, 인재, 그리고 전략과 비전이다. 김연아 선수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김연아 선수가 세계1등을 하려면 자신에게 맞는 스케이트, 아이스링크 등 훌륭한 인프라의 구축과 확보가 필요하다. 점프기술만이 아니라 회전기술, 예술적 기술 등 다양한 기술을 연구 개발해 몸에 익혀야 한다. 인재 측면에서는 김연아 선수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코치를 비롯한 주변 스태프가 훌륭해야 한다. 전략과 비전의 경우 훈련전략, 실전전략을 어떻게 세워서 실행에 옮길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한다. 다음 시즌을 007 음악시리즈로 가야 할 것인지, 실수가 잦고 감점 위험이 많은 3회전 방식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성공이 확실한 연속 2회전 방식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 이공계 기피현상이 오래됐다.

    “부모와 아이들이 몰라서 그렇다. 의대에 합격할 만한 인재라면 여기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성공을 할 수 있다. 물론 의대에도 우수한 인재가 가야 한다. 제로섬 게임은 안 된다. 공대에서는 실험이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지만, 의사는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분야다. 그런데 중고생들이 이공계가 의대에 못지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성공하고 부유해지는 공학자들이 자꾸 생겨야 학생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공학자들은 안 된다.”

    대표 공학자 키운 건 ‘성적’보다 ‘땀’

    ‘신동아’가 이번에 인터뷰한 공학자 4인은 서울대 한국인적자원연구센터 오헌석 교수(교육학) 연구팀이 분석한 국내 대표 공학자 101명에서 뽑았다.

    연구팀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적인 성과를 낸 공학자에게 수여되는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 한국공학상 등 수상자를 대상으로 101명을 뽑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표 공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오헌석 교수는 같은 이과계열이지만 과학자와 공학자 간에도 미묘한 차이가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 연구팀은 이에 앞서 한국의 대표 과학자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한 바 있다.

    오 교수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서울대 학부 출신 비중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이 분류한 대표 과학자 76명의 70%가 학부를 서울대에서 마치는 등 서울대 쏠림현상이 심했다.

    반면 공학자는 그 비율이 43%에 그쳤다. 구체적으로는 서울대 43명(43%), 한양대 10명(10%), 인하대 5명(5%), 고려대 4명(4%), KAIST 4명(4%), 부산대 동아대 영남대 중앙대가 각각 2명이었고, 이화여대 성신여대 아주대 원광대 등 14개 대학이 각 1명씩이었다. 수상자 중에서는 고졸 출신도 2명이었다.

    이에 대해 오 교수는 “상대적으로 초·중 ·고교 시절 탁월한 성적을 내지 못했더라도 공학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면 공학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대표 공학자 중 상당수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만져보고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는 등 오감(五感)에 의한 성장을 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40대 중반~50대 초반인 이들 중 상당수는 어릴 때 아톰과 로봇 태권브이 등 공상과학만화영화를 보면서 공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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