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대학 개혁’ 깃발 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직설 토로

중앙대 개혁 실패하면 성공할 대학 없다

  • 안기석│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입력2009-10-08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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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3년 전통의 두산가(家) 3세대 경영의 핵심이었던 박용성 두산중공업회장이 지난해 6월 중앙대 이사장을 맡은 이후 ‘대학 개혁’의 화두를 계속 던져 화제가 되고 있다. 총장직선제 폐지, 교직원 연봉제 도입 등으로 ‘철밥통’ 상아탑에 반향을 일으킨 뒤, 또다시 학부와 학과의 구조조정에 나섰다. 박 이사장을 만나 대학 개혁의 성과와 방향, 그리고 그동안 말 못했던 두산가의 속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학 개혁’ 깃발 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직설 토로

    ● 1940년 서울 출생<BR>●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BR>●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석사(MBA)<BR>● 두산그룹 회장<BR>● 대한상공회의소 회장<BR>●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BR>● 현재 중앙대 이사장, 대한체육회장, 두산중공업회장

    지난해 6월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중앙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중앙대의 변화는 ‘대학 개혁’의 풍향계로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중앙대는 현재 19개 단과대학과 77개의 학과에서 매년 459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서울캠퍼스 외에 안성캠퍼스가 있는데 앞으로 안성캠퍼스는 닫고 하남캠퍼스를 신설할 방침이다.

    ‘민주화의 상징물’로 여겨졌던 총장직선제는 폐지되고 ‘상아탑의 철밥통’처럼 여겨졌던 호봉제 대신 연봉제가 도입되자 중앙대 변화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더구나 박 이사장은 취임 이후 “구청의 문화센터에서도 들을 수 있는 취미 과목은 대학 교육에서 폐지해야 한다”는 ‘문화센터론’, “새로운 산업에 맞는 새 학과를 만들지는 않고 간판만 바꾼다”는 ‘신장개업론’, “대학경영도 기업경영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으로 대학 안팎을 찬반논쟁으로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고질병을 도려낼 수 있는 개혁가’라는 찬사도 있었지만 ‘대학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장사꾼’이라는 비난도 잇따랐다. 이처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박 이사장을 두 차례 만났다.

    9월9일 오전 9시 서울 흑석동 중앙대 후문을 들어서자 신축 중인 기숙사 공사 현장과 최근 준공된 도서관 건물이 변화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이사장실에 들어서자 박 이사장은 “우리 집 사람이 인터뷰 사진 찍는다고 파운데이션 발라줬어요”라며 반가이 맞이했다. 주어진 시간은 정확하게 60분. 바로 질문에 들어갔다.

    중앙대와 ㈜두산 홍보실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러 명 배석했다.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인사차 들어왔다가 “이사장님 편하게 말씀하도록 다 나가자”고 하자 박 이사장은 “홍보실장만 빼고 다 나가도 좋아, 아니 모두 나가도 좋아”라며 호응했다.



    학과 구조조정해야 성공

    ▼ 도서관을 새로 지었는데 학생들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동안 50년 묵은 집을 뜯어고쳤으니까 좋아요. 그냥 새로 지었어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헌집에서 공부하다가 새집에 들어가니까 차이가 나잖아요.”

    ▼ 한번 들어가서 책을 펼쳐봤습니까.

    “개관식 때 참석하곤 아직 들어가보진 못했어요.”

    ▼ 중앙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여러 조치를 했는데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절반만의 성공이에요.”

    ▼ 왜 절반입니까.

    “제일 큰 것이 학부와 학과 구조조정하는 겁니다. 중앙대에 77개 학과가 있는데 그동안 한번도 손을 못 댔어요. 옛날에는 한 학문 단위가 수십년 수백년 갔지만 이제는 10년도 못 가는 것이 있어요. 새 시대가 요구하는 쪽으로 대학이 먼저 앞서가야 하는데 지금 뒤따라가지도 못하고 있어요. 대학의 기득권 세력 때문에 실제 학과는 그대로 두고 학과명만 바꾸는 신장개업만 했어요. 생명이니 첨단이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간판만 바꿔단단 말이에요. 그런 식의 신장개업으로는 앞서나갈 수 없으니 우리 중앙대는 백지에다 그리자고 했어요.”

    이른바 ‘백지구상론’이다. 그는 우선 32명의 계열별 교수로 구성된 학과 구조조정팀과 한 컨설팅 회사에 구조조정 방안을 그려서 11월초에 보고하도록 했다.

    “우리 대학 입학정원이 4590명인데 우리나라 전체 대학 중에서 몇 번째 될 거예요. 그러면 새롭게 대학을 창설하는 기분으로 이 인원을 배정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학부 정원의 경우 우선 경영대와 공대에 얼마씩 배정하고, 나머지는 여기에 맞추는 겁니다. 과의 경우에도 같은 공대 안에 있는 학과라도 옛날 산업은 사라지고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니까 이에 맞출 필요가 있어요.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는 화공과가 최고였고 전자공학은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사람의 일생이 태어나 교육받고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 일하다가 늙으면 물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일자리란 말이에요.

    그런데 산업현장에서 앞으로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면 교육이 맞춰줘야지, 대학은 이렇게 교육시켰으니까 사회가 알아서 하라면 어떻게 합니까. 고객이 원하지도 않는 제품을 만들어놓고 시장에서 사가든 말든 알아서 하라면 어떻게 합니까.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이) 좋은 재료를 가지고 불량 제품을 만들어놓고는 반품도 안 해주고 애프터서비스도 안 해준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은 10년 전부터 나온 소리인데 아직도 그대로예요. 이제는 바꾸자는 겁니다.”

    ▼ 절반의 성공은 도서관 신축, 기숙사 준공 등 하드웨어 요소이고 앞으로 과제는 학과 구조조정 등 소프트웨어 개혁이라는 거죠.

    “진짜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죠. 내가 기껏 하나 끝낸 것이 교수들 평가하는 제도예요. 이제 겨우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학과 구조조정이 끝나고 실행에 들어가야 그나마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로 구성된 학문 단위가 제대로 기능을 하고 졸업생이 다른 대학 졸업생과 견주어 사회에서 경쟁력이 있고 리더가 될 수 있을 때 개혁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은 저마다 이해가 달라 굉장히 힘든 일인데 가능할까요?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죠. 그러나 이것 안 하면 우리 대학도 그저 그렇고 그런 대학으로 끝나고 말 텐데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이사장 맡았겠어요. 이런 것 한번 바꿔보자고 맡았지.”

    ▼ 복안은 있습니까.

    “없어요. 백지에서 시작할 겁니다.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교수들이 위원회를 만들어서 시작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컨설팅회사에도 부탁했어요.”

    하남캠퍼스 이전, 지자체 지원 있어야 적극 검토

    ▼ 컨설팅 회사는 교육에 대해 전문성이 있는 곳인가요.

    “교육전문성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편견 없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곳에 맡겼어요. 컨설팅 회사는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 문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에요.”

    ▼ 공대를 하남캠퍼스로 옮긴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맞아요. 이런저런 지원을 해줄 거니까 공대가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는 있었어요. 그러나 아직 결정한 것은 없어요. 공대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 정해진 것도 없어요. 어느 과가 남고 어느 과가 변할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공대가 하남으로 옮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대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앙대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거지요.”

    ▼ 하남캠퍼스에 대한 구상은 하고 있습니까.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요. 땅부터 우선 확보해야 하고 대학이 풍부한 재정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지원도 필요해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특정 지역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니까 지자체인 하남시가 우리한테 뭔가 보여줘야지요.”

    ▼ 다른 지자체에서 더 잘해주겠다면 변경할 수도 있습니까.

    “우리가 거기 꼭 가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남시가 잘할 겁니다. 군산시에는 우리 공장 끌어가려고 돈까지 주는데 대학이 가는데 우리보고 다 하라고 하면 안 되지요.”

    ▼ 안성캠퍼스 포기로 안성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데요.

    “이해하겠죠. 우리가 안성시에다가 더 좋은 활용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대화하자 해도 무조건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돈 벌지 않는 대학생 1만명과 생산시설이 있어서 근로자 1만명이 있는 경우 어느 쪽이 안성시에 더 도움이 되겠느냐 합리적으로 따져야죠. 죽어도 대학 못 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어요.”

    ▼ 학부 학과 구조조정이 끝나면 좋은 교수와 학생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고 생각합니까.

    “좋은 교수는 계속 영입하고 있어요. 이번 주에도 신임 교수 몇 분을 면접한다고 해요. 훌륭한 연구 업적과 능력을 가진 교수님은 계속 모시고 와야죠. 잘 가르치고 뛰어난 연구업적,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연구 업적 나쁘고 강의 평가 나쁜 분은 우리가 닦달해서 스스로 변화하도록 해야지요. 교수 밥통이 최고 밥통이거든요.”

    학과 구조조정은 정면돌파하겠다

    ▼ 교수들 저항이 거셉니까.

    “세긴 하지만 자기들이 그동안 안 했으니까 해야지요. 교수의 본분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건데 그것 안 하고 무얼 하겠어요.”

    ▼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교수들과 대화는 합니까.

    “반대하는 교수들은 밖에서 말하지, 대학 안에서는 별로 말 안 해요. 교수나 학생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에는 컨센서스가 이뤄졌어요. 그러나 ‘나만 제외하고’라는 게 있잖아요. 그러나 개혁이 되려면 나부터 건드려야지요.”

    ▼ 학생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해주는데 반대할 것 뭐가 있겠어요.”

    ▼ 소속과가 폐지되는 학생들은 반대할 것 아닙니까.

    “아직 어느 과가 폐지될지 모르니까 조용한데 만약 자기 과가 폐지되면 난리 나겠지요.”

    ▼ 그때 정면돌파할 겁니까.

    “안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정면돌파해야지요. 나는 기업에 있을 때도 그렇고 대한상공회의소에 있을 때도 그렇고 하나도 감추는 것이 없어요. 비밀이 보장되는 것이 없어요. 비밀 보장이 안 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잘못된 정보가 나가면 오해가 오해를 낳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갈 길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그리고 설득해나가는 것이 나아요.”

    ▼ 이사장 취임 이후 조치에 대해 대학생 찬반 댓글들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오는데 혹시 보고받습니까.

    “내가 직접 보지 왜 보고받아요?”

    ▼ 반대 논리도 읽어봤습니까.

    “읽어봤어요.”

    ▼ 반대 논리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과거지향적이라는 거지요.”

    ‘대학 개혁’ 깃발 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직설 토로

    광화문 광장에서 꽃을 배경으로 선 박용성 이사장. 본인 스스로 야생화 사진 찍기를 즐긴다.

    ▼ 대학을 학원으로 만든다는 ‘중앙학원론’은 읽어봤습니까. 이사장이 언급한 ‘문화센터론’에 대한 반론이지요.

    “회계학 때문에 그런 거죠? 내가 전 신입생에 가르치자는 게 회계학의 전문 영역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전에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던 상업부기 수준입니다. 돈이 생기면 차변에 쓸 건지 대변에 쓸 건지 정도는 가르치자는 겁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숫자에 대한 감각을 심어주자는 거지요. 그리고 한자 1800자 정도는 알아야 되는데 그것을 배우지 않으니까 대학생들이 한자를 그려요. 그래서 기초한자라도 제대로 배우자는 겁니다. 영어는 우리나라가 참 희한해서 토익 900점 맞은 학생이 영어로 질문하면 입이 막혀서 한마디도 대답을 못해요. 토플과 토익 기술자만 양산했는데 높은 점수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영어 프로그램으로 바꾸자는 겁니다. 이번에 외국인 교수도 더 많이 모시고 오려고 했는데 수배가 안 돼서 열네 분만 모시고 왔어요. 작은 클래스에 20명씩 넣어서 학점 못 따면 졸업하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이처럼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기초 소양을 갖추자는 거지요. 취미 분야는 나중에 배워도 되잖아요.”

    박 이사장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요즘 대학가에서는 경영학의 기초를 배우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박철 교수는 “요즘 대학에서는 비경영학과 학생들이 경영학과 과목을 먼저 신청해 정작 경영학과 학생들은 강의 신청할 기회가 없어 야단이다. 경영학과 학생들만 들을 수 있는 과목을 따로 만들어달라고 할 정도다. 이미 경영학의 기초는 교양필수인 시대가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전세계와 무역하는 마당에 우리나라 외국어 교육이 영어에만 치중하는 것 아닙니까.

    “영어가 영국인과 미국인만 사용하는 겁니까. 영어로 전세계가 통하지요. 인터넷 정보의 87%가 영어잖아요. 하나라도 제대로 사용하자.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프랑스어를 하든 독일어를 하든 러시아를 하든 하자 이겁니다. 내가 1970년대 초반에 유럽 출장 가서 택시 타면 참 힘들었어요. 영어가 안 통해서 종이에 호텔명을 쓰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콧대 높던 프랑스부터 시작해서 영어로 안 통하는 나라가 없는데 이제 영어 공부라도 제대로 시키자, 그 나라 언어 수요가 있는 것은 가르치고 그렇지 않으면 정리하자는 겁니다.”

    “총장이 앞장서 궂은일 도맡아줘”

    ▼ 중앙대 개혁과 관련해서 이사장만 보이고 총장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는데….

    “나는 중앙대에 일주일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아요. 총장님이 다 하시죠. 총장님이 앞에서 궂은일 다 하시니까 저는 뒤에서 편하게 있어요.”

    ▼ 앞으로 학문 구조조정이 끝나면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까.

    “구조조정이 5년 안에 끝날까요? 몇 년을 해도 우리 중앙대가 못하면 대한민국에서 성공할 대학이 하나도 없어요. 내 자신 있게 말해요.”

    ▼ 중앙대 개혁에 올인하겠다는 겁니까.

    “나는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요. 내가 여기 온 지 불과 1년이에요. 나는 여기 아는 사람도 없고 핵심부가 누군지도 모르고, 과거 신세진 적도 없어요. 그런 사람이 지휘해도 개혁 못하면 성공할 대학이 어디 있어요.”

    ▼ 평소 산업현장에서 볼 때 대학 교육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니고 기업이 졸업생들을 써보면 (직무교육의 필요성을) 알잖아요. 그래서 중앙대를 맡게 되자 개혁에 한번 올인을 해보려고 한 거지요.”

    ▼ 이사장직 제안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총장님이 중앙대 이대로 두면 안 되니 맡아달라고 해서 맡았어요. 우리말고도 여러 군데 다니셨어요. 총장님이 좋은 재단 주인을 찾아주려고 여러 군데 이야기했지만 조건이 안 맞아 거절당하고 우리한테 왔을 때 우리도 여기저기 조금씩 지원하는 것보다 대학 하나에 올인해서 오래된 대학이 명문대학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 5년 후에는 그런 이야기 들을 수 있을까요.

    “5년? 터널 끝에 불빛이 조금은 보이겠지요. 기업식으로 하면 5년 안에 자신 있어요. 5년 안에 못하면 부도나고 망하는 거지. 기업은 5년은커녕 2,3년 안에 개혁 못하면 망해요. 내 마음대로 하라면 2,3년 안에 할 수 있는데 대학은 요즘 소통이라나 그런 것이 화두가 돼서 구성원을 설득해서 같이 가야 하니 5년은 걸리는 거죠. 그렇지 않고 진짜 효율만 생각한다면 더 빨리 할 수도 있어요. 5년에 할 걸 1,2년 만에 개혁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방향에 맞춰 건물도 짓고 시스템도 갖춰 힘차게 매진하면 (결과물은 같고 시간은 절약하니) 더 좋지요.”

    올해 고희를 맞은 박 이사장의 세대는 ‘고독한 결단과 일방적인 지시’에 익숙한 세대다. 그런데 교수, 학생들과 소통해야 한다니 무척 낯설 것이다.

    ▼ 기업에서는 독재하듯이 할 수 있잖아요.

    “기업에서야 밀실에서 몇 사람이 모여 컨설팅 받은 것을 가지고 어느 날 발표한 뒤 밀고 나갈 수 있지만 대학에서는 그렇게 했다가는 소통이 안 된다느니 독재한다느니 하니까 공개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노력과 낭비도 있어요. 마지막 결과물은 똑같은데 말입니다. 힘들인 과정을 거쳐 나온 안이나 대학교수 몇 분과 컨설팅 전문가가 호텔에서 한 달 정도 논의해서 나온 안이나 같습니다.”

    ▼ 그런 방식으로 못하니 힘들겠습니다.

    “속 터져요. 터져.”

    ▼ 개혁이란 사람에 관한 일인데 설득 과정의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과정의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웬만한 상식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뻔한 건데, 손바닥 보듯이 보이는 건데 왜 그런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이런 절차를 밟지 않으면) 독재라 하는데 이게 독잰가요?”

    ▼ 대학은 기업과 달라 설득의 과정도 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한 1년 해보니까 ‘아니 되옵니다’ 하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적응이 됐어요. 그러나 대학은 기업과 다르다는데 경영에 관한 한 다를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다르다고 하니 나도 어느 정도 동화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아직 동화가 안 됐다고 하니 더 열심히 뛰지요.”

    ‘대학 개혁’ 깃발 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직설 토로

    중앙대 이사장실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박용성 이사장.

    교수 친구들이 혼난다며 충고

    ▼ 주변에서는 충고해주는 분이 있습니까.

    “고교 대학교 친한 동기들이 20여 명 되는데 충고를 많이들 해요. 어제도 교수직에 있는 친구와 식사를 했는데 대학은 기업과 다르니 그렇게 하면 혼난다고 해요.”

    ▼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진리를 추구하는 대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니까 경영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거죠.

    “교수들과 논쟁하는 것 중 하난데 대학은 현실적으로 이미 직업교육이 됐어요. 학문을 하려면 이제 대학원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추세인데 아직도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대학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대학경영에 대해서도 기업경영과는 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난 반대합니다. 중앙대 이사장을 맡고난 다음에 뉴욕에 간 김에 뉴욕대 총장을 잠깐 만났어요. 내가 대학 이사장 됐는데 대학경영 어떻게 하면 좋으냐 물었더니 회사에서 한 것과 똑같이 해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좋은 학교 된다는 거예요. 효율을 따져서 모든 것을 하라는 거지. 쓸데없는 명분, 쓸데없는 겉치레하지 말고. 기업에서 하듯이 낭비 줄이고 효율 따지면 된다는 겁니다.”

    ▼ 중앙대는 어떤 특성 중심의 대학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중앙대는 학과백화점이니 무슨 과인들 없겠어요.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지는 지금 학과 구조조정팀 교수들이 연구하고 있으니까….”

    ▼ 복안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없어요.”

    ▼ 그래도 소문이 돌잖아요.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경영학과는 기회만 되면 내가 키우려고 해요. 어느 기업의 신입사원 모집에서 그동안 비경영계열 학생들이 경영학과 학생들과 경쟁해 30~40%는 들어왔는데 이번에 확 줄었다고 해요. 왜 그런가 봤더니 경영학과 출신들이 불황이 돼서 유학 안 가고 취직하니까 인문학과 출신들이 확 줄었어요. 경영학과 학생을 늘려서 산업체에 훌륭한 인력을 내보내자는 거지요.”

    ▼ 인문학은 별 효용이 없다고 봅니까.

    “어떻게 그런 예측을 합니까. 내가 인문학과 없앤다는 소리를 한 적도 없고 인문학 없이 종합대학 간판을 달 수도 없어요. 우리 대학의 슬픈 현실인데 인문대에 들어온 학생 중에 일부는 수능성적이 안 돼서 할 수 없이 인문대 들어온 경우도 있어요. 고3 수능을 치기 전까지는 꿈에도 인문대에 들어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수능이 안 되니까 할 수없이 들어왔어요. 들어와서도 이 학문이 괜찮다고 해서 공부하면 괜찮은데 처음부터 복수전공이니 해서 자기 본과는 관심도 없는 경우가 있어요. 대학 입학제도 때문에 그런 건데 이런 학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4년 공부하면 4000만원 가까이 학교가 받는 건데 졸업 후 자기 밥 먹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을 해주겠다고 하니까 인문학과에서 날 공격하는 겁니다. ‘무식한 장사꾼이 와서 인문학을 다 멸종시킨다’고. 그래서 내가 싸우다가 ‘당신들 자식들 같으면 이렇게 해도 되느냐’하니까 아무 말도 못해요.”

    ▼ 인문학이 창의적인 사고를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도움이 되겠지. 내가 인문학 하지 말라는 소리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인문학에 관련된 교양도 없애라고 한 적도 없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에요. 국문학과 정원 40명 중에 30명은 그 과가 좋아서 왔지만 나머지 10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대책 좀 세우자. 복수 전공해서 주전공은 관심 없고 어떻게든 취업하려는데, 시스템이 잘못 돼서 들어온 학생들인데, 너는 졸업할 때까지 딴 것 못한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인문학과 없앤다고 한 적 없어

    ▼ 인문학을 하고 MBA를 하는 경우 도움이 된다는 경험담도 있습니다.

    “제대로 배우면 학부에서 인문학이나 공학 등을 하고 MBA를 하면 좋지요. 내가 뉴욕에서 MBA 할 때도 문과나 공과 출신들이 많았어요. 역사학이나 언어학 전공한 학생들이 와요. 그러나 지금 한국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주간 MBA에는 학생들이 오지 않아요.”

    ▼ 미디어영상대와 인문대가 잘 결합되면 콘텐츠나 훌륭한 기획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지적이 있어요. 전문가들이 잘 연구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서라벌예술대학을 흡수해서 예술분야가 있으니까 좋은 안을 만들어보라고 했어요. 학과나 장르 간의 벽을 허물고 왔다갔다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거죠. 이런 것이 세계적인 추세니까. 한 곳에 모아놓고 벽을 허물자. 내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야 경쟁력 있는 대학이 된다는 거예요. 이제 미술대학 혼자서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 음악대학도 혼자서 살 수 없는 겁니다. 이제 예술도 크로스오버 해서 남의 영역에서 배우고 닮아감으로써 서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니까. 언젠가 한자리에 모일 겁니다.”

    ▼ 몸만 일주일에 한번 오지, 마음은 중앙대에 늘 있는 거죠.

    “전화도 하고 e메일도 주고받으니까 7일 내내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 앞으로 사립대의 경우 등록금 유용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우리 대학, 그렇지요. 다른 대학도 이제 그런 것은 힘들어요.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다 공개하자는 주의예요.”

    ▼ 대학 등록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줄 겁니까.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투명성은 이제 생존의 전제조건입니다. 회사든 대학이든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류가 되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감시하는 눈이 많아졌어요. 사람의 눈 플러스 시스템의 눈이 있잖아요. 국세청의 컴퓨터가 다 감시하는 눈이잖아요. 대기업 공기업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투명화도 우리나라가 참 빨리 갈 것 같아요.”

    ▼ 장학제도도 실시하고 있습니까.

    “내가 벌써 시작했는데 정부가 따라 했어요. 재단이 중앙대에 10억원을 내서 릴레이장학금 제도를 실시했어요. 한 학기 등록금 내줄 터이니 네가 나중에 사회진출해서 좀 갚아라. 이자는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선배들한테 우리 공부 좀 시켜주십시오. 우리는 후배 공부시키겠습니다 라는 캠페인 해보라고 했는데 학생회에서 시큰둥해요.”

    ‘대학 개혁’ 깃발 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의 직설 토로

    광화문 광장을 산책하며 인터뷰 중인 박용성 이사장.

    정운찬 총리 후보자 잘 아는 경제학과 후배

    박 이사장을 두 번째로 만난 것은 9월11일 오후 3시 광화문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이었다. 평소에 걷기를 좋아한다기에 광화문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 합류했다. 박 이사장은 카메라를 들고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왔다. 경복궁을 향해 걸으면서 박 이사장은 광화문광장에 있는 꽃을 찍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마침 이날은 박 이사장이 고희를 맞은 날이었다. 축하인사를 하자 박 이사장은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었어요. 나는 70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어느새 70이 됐어요”라며 계면쩍어했다.

    ▼ 인생의 시기를 어떻게 나눌 수 있나요?

    “나는 그런 식으로 나눌 생각은 없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극적인 드라마처럼 반전이 있는 기회도 없었고….”

    박 이사장은 걸으면서 어린 시절 추억부터 질문하는 대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박두병 회장은 아주 엄격한 분으로 잘못하면 회초리를 들어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자식과 살뜰한 정은 없었던 분”이지만 돌아보면 ‘최고의 스승’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건강했던 분으로 93세에도 해외여행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난해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 이사장은 경기고 시절 방송반에 가입해서 방송기기를 조작했는데 통신공학과에 입학원서를 내고 싶었지만 적록약색으로 포기했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냈는데 성적이 좋아 경제학과에 배정됐다고 한다.

    “그냥 상과대학에 원서 냈는데 내가 성적이 괜찮았던지 경제학과에 넣었어. 나중에 보니 상학과가 경영학과로 바뀌었는데 그러면 상학과를 지망했어야 하는데 그때 그런 개념이 없었어요. 나는 원래 공대를 가려고 했기 때문에 상과대학 기계공학과를 나왔다고 농담합니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는 경제학과 후배로서 잘 아는 사이다.

    “두산 장학금도 받았다는데 나도 몰랐는데 본인이 이야기해서 알았어요. 정 후보자가 야구해설을 할 정도로 야구전문가인데 우리 두산 팬입니다. 매년 우리 야구장에 오시라고 해서 오시잖아요. 조언도 해달라고 하고….”

    학자 출신이 총리직 수행을 잘할지 묻자 박 이사장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도 총장 출신인데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지 않았느냐, 정 후보자도 1800명의 서울대 교수로부터 총장에 선출되고 임기를 잘 마친 만큼 총리직도 잘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마침내 경복궁 내에 있는 ‘고궁의 뜨락’에 도착했다. 실외 테이블에는 손님이 없어 한산했다. 박 이사장은 한 테이블의 좌석에 앉았다가 사진기자의 카메라 앵글이 파라솔 가운데 걸리는 것을 의식하고 다시 옆 자리로 옮겼다.

    ▼ 언제부터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어릴 때 좀 했다가 끊었어요. 1980년대에 동아출판사를 인수하면서 백과사전을 보니까 사진이 대부분 무단전재한 거야. 그래서 이것 바꾸자 해서 그때부터 다시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 많이 찍어주다가 1990년대 들어 98년까지 다시 손을 놓았어요. 그 당시 하도 회사에 복잡한 일이 많아서 사진기 들고 갔다가 한 장도 찍지 못하고 돌아온 날도 많아요. 99년에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뒤로 다시 시작했어요.”

    두산동아백과사 전 명예편집장으로 일해

    ▼ 두산동아백과사전 제작에 직접 참여한다는 소문도 있어요.

    “내가 요즘 유일하게 실무 챙기는 게 백과사전이에요. 명예편집장을 맡아서 하루에도 꼭 한번씩 챙겨요. 내가 잡학을 하니까 새 항목에 넣으라고 아이디어를 주고 야생화 등 사진은 직접 찍어서 보내주기도 해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청산도가 나와요. 그런데 우리 백과사전에 보니까. 청산면만 있어. 청산면 앞에 있는 섬이 청산도인데…. 그래서 내 밑에 바로 편집부장이 있는데 알려줬어요.”

    ▼ 뉴욕 유학 생활은 힘들지 않았습니까.

    “집사람과 같이 갔어요. 최고의 생활을 했지요”

    ▼ 살아오면서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정말 없었어요. 남들이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내 인생에서 어려웠던 것이 1991년 페놀사건이 났을 때, 97년 구조조정할 때였어요. 2005년에 우리 집안에 분란이 났을 때 조금 어려웠지요.”

    ▼ 인생이 별 굴곡이 없었으니까 생활이 어려운 친구나 실패한 친구들은 이해하기 힘들었겠습니다. 게을러서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핑계 없는 무덤은 없지요. 물론 내 주변에도 사업하다가 망한 친구도 있는데 왜 그런 어려움을 모르겠어요.”

    ▼ 손을 벌린 친구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친구와 돈거래하면 친구도 잃고 돈도 잃으니까 그 면에서는 철저했어요.”

    ▼ 매정하다는 친구도 있었겠군요.

    “그렇겠지요. 짜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산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박 이사장이 일에는 엄격하지만 인간관계는 격식이 없어 편하다”고 한다. “두산가 형제들은 승용차에 오르거나 내릴 때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인사할 필요는 없다”는 것. 업무보고는 모두 e메일로 하고 일을 맡기면 위임하되 잘못된 것이 없으면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 보고하지 않은 일은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박 이사장은 “일을 하다가 여건상 실패해 수백억원을 날린 경우는 용서하지만 몰래 부정하는 경우는 금액의 과소를 막론하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자신의 약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질이 급한 거지요. 급한 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돼요. 비사교적인 것도 단점 중에 하나예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사람들이 그래요.”

    ▼ 바른 소리, 쓴소리를 잘 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옳은 소리를 하는 건데. 나와 사귀는 게 쉽지 않다고 그래요. 성질이 급하니까 둘러가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니까….”

    형제 분란은 지우개로 지우고 싶다

    ▼ 형제 간에도 직설적으로 얘기합니까.

    “그 사건이 생기기 전까지는 형제 간에 큰소리 한번 난 적이 없어요. 사이가 좋았어요.”

    그 사건이란 2005년 두산그룹의 분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 간의 분란을 뜻한다. 그동안 심경을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질문했다.

    ▼ 당시 고통이 어땠습니까.

    “그래요. 형제경영이 어렵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지우개가 있으면 정말 지우고 싶은 일이에요. 2년 동안을 딱 지워버리고 싶은데 세상일이란 게…. 이때 담배 한 대를 피워야 사진이 그럴듯할 텐데….”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속은 담배연기처럼 타는 것일까. 박 이사장은 “12년 전부터 담배를 끊었다”며 “두산이나 집안 이야기는 묻지 말고 중앙대 이야기만 물어보라”고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두산가는 113년의 전통을 가진 기업인 집안이다. 두산가 1세대인 박승직 조부가 1886년 서울 종로4가 베오개에서 면직포를 거래하는 ‘박승직상점’을 세운 후 2세대인 박두병 회장을 거쳐 3세대에서 박용곤 명예회장(장남)▼ 용오 전 두산그룹회장(차남)-용성 두산중공업 회장(3남)-용현 ㈜두산회장(4남) 순으로 형제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5남인 박용만 두산회장은 박용현 회장을 돕고 있다.

    ▼ 한때 박 이사장이 두산 경영에 복귀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언론에서 한 말이고…. 나는 사건 나고 이미 마음을 정리했어요. 내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인데 최선을 다해서 해보고 잘되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구나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그 후에 우리가 더 투명해졌고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됐다고 봐야죠.”

    ▼ 그 와중에 누가 큰 힘이 됐습니까.

    “우리 큰형님이 중심을 잡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으니 정리가 됐지. 큰형님이 아니었다면 사분오열되어 다 헤어졌을 거예요.”

    ▼ 형제 간에 계열사를 분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요.

    “우리 아버지가 같이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같이 해오다가 우리 둘째형님이 주변의 꼬임에 빠져서 분리하자고 한 것이 화근이 된 거지. 둘째형님도 참 좋은 분이에요.”

    ▼ 두산가 4세들도 거의 대부분 두산 계열사에 진출했는데….

    “DNA가 그런 모양이에요. 다섯째 동생의 아들은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 상도 받았어요.”

    ▼ 기업경영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현재 두산중공업 부근에서 1970년대 말에 가물막이 공사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두산건설에 있을 때 공사현장에 가보니까 어마어마한 공장을 짓고 있더라고요. 공장 한 개가 2만평이니까 우리 공장 전체 면적과 같았거든요. 저런 공장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생각지도 않게 20여 년 만에 내 손안으로 들어왔어요. 그야말로 꿈이 이뤄진 거요. 두산중공업 인수하고 그 가물막이 공사했던 곳에 가보니까 그대로 있더라고요.”

    꿈조차 못 꿔본 두산중공업 인수

    ▼ 두산중공업 인수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먹었던 겁니까.

    “생각도 안 했어요. 매켄지사와 컨설팅해서 이런저런 훈수 듣고 실행해서 딱 하나 건진 것이 두산중공업이었어요. 매켄지가 ‘이제 소비재 그만하고 산업재로 바꿔야 한다. 전세계를 돌아봐도 두산처럼 오래된 기업이 계속 소비재사업 하기는 참 힘들다. 소비재는 나이 어린 회사가 하기에 알맞으니 소비재보다 산업재가 낫겠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두산중공업을 불하한다고 나왔더라고요. 매켄지의 권유로 두산중공업을 인수한 것이 대변신의 계기가 된 거죠.”

    ▼ 평소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기 좋아하는 편은 아니죠.

    “잘 안 들어요. 내 눈도 작고 귀도 작아서 사람들이 나보고 남의 말을 잘 안 들을 거라고 그래요.”

    ▼ 매켄지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까.

    “잘했다고 생각해요. 회사도 더 커졌고….”

    ▼ 어떤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효율이지요. 경영의 기본이 최소의 자원을 투입해 최대 결과물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 기업경영에서 누구를 모범으로 삼았습니까.

    “내가 쓴 책에도 밝혔지만 우리 아버지가 멘토였어요. 내 일생에 제일 큰 스승이지요.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가 30세였는데 아버지가 4년 후에 돌아가셨으니 한 4년 동안 배운 거지요. 물론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배운 것은 더 많을 것이고….”

    ▼ 모델로 삼는 세계적인 기업가가 있습니까.

    “삼성의 이병철 회장님이나 현대의 정주영 회장님 등 우리나라도 많은데 멀리서 찾을 것도 없어요.”

    ▼ 박 이사장은 정주영 회장 스타일을 더 닮았죠.

    “정주영 회장의 과감함과 이병철 회장의 꼼꼼함을 다 갖춰야지….”

    ▼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분이 경제정책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박정희 대통령밖에 더 있어요? 박 대통령이 세운 기초 위에서 우리가 지금도 살고 있는 거지요.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도 지금 보면 별것 아니지만 그때 미리 내다보고 했으니까 지금 이렇게라도 먹고사는 거지요.”

    양희은 노래 좋아하는 ‘보수반동꼴통’

    ▼ 서울대 대학생일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나는 그때부터 보수반동꼴통이었으니까….”

    이 대목에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마도 중앙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 이사장을 공격하는 측에서 사용한 용어라는 느낌이 들었다.

    ▼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할 때 출입기자들과 노래방도 함께 간 것으로 아는데 18번은 무언가요?

    “예전 이야기고 이제 일흔 먹은 영감이 노래방에 가면 장사 안 된다고 내쫓겨요.”

    ▼ 좋아하는 가수는 누굽니까.

    “양희은이지. 내 젊었을 때 노래 잘 부른 가수지요.”

    ‘보수반동꼴통’이 ‘아침이슬’을 부른 가수를 좋아한다니 대학생들과 ‘소통의 연결고리’는 확보한 셈이다.

    ▼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돈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쥐고 싶다고 해서 손에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돈을 생각하면 사업 못해요. 내 주식이 얼마고 이런 것 생각하면 사업 못해요. 나는 우리 회사 주가가 얼만지 몰라요. 미국 CEO야 주가 못 올리면 잘리지만 주가 안 오른다고 나를 자를 사람은 없잖아요. 주가만 생각하면 2,3년 적자날 사업은 못하지요. 그게 오너 중심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와의 큰 차이입니다.”

    ▼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히 지켜야죠.”

    ▼ 이사장님은 어떻게 할 겁니까.

    “지키려고 노력해요.”

    ▼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무슨 계획…. 내 나름대로 우리 사회가 날 이만큼 키워줬으니까 의무를 다하려는 거지요.”

    ▼ 재산기증은 안 하실 겁니까.

    “그건 아들과 상의해서 할 거야.”

    오후 5시가 가까워오자 박 이사장은 갈 곳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에 계열사 사장과 중앙대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 간소하게 고희연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온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둘레길 행에도 갖고 갈 카메라를 들고 떠나는 박 이사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희를 맞은 ‘노경영인’의 회고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 새 출발하는 ‘젊은 경영인’과 인터뷰를 했다는 느낌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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