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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대운의 사나이 강희락 경찰청장

“운은 만들고, 때는 기다리는 것이다”

  • 이정훈│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대운의 사나이 강희락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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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곤 열병을 앓아야 했던 소년, 중년이 되도록 낙방을 거듭한 낭인이 치안총감을 두 번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적수공권이던 그는 ‘가요반세기’란 별명과 ‘강희락주’란 말을 만들면서 운을 더해갔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순응하며 기다림으로써 때를 만났다.
대운의 사나이 강희락 경찰청장
강희락(57) 경찰청장과는 경찰 문제 전반을 놓고 인터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면한 강 청장은 흥미로웠다. 기자 앞에서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활달한 그에겐 딱딱한 일문일답보다는 인물연구가 제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준비한 질문서는 탁 접어버리고 그의 삶을 따라가 들어보기로 했다.

6월4일 저녁 8시30분쯤 경찰 간부들이 모여든 수원의 G식당에선 도청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경기도의 신생 통신사 기자 A씨가 상사 지시로 강 청장과 경기경찰청 간부들이 회식하기로 한 방에 MP3를 설치한 게 발각된 것. 틀림없이 폭탄주가 돌 것으로 예상하고 이런 준비를 했는데 너무 엉성해 들통 나버린 것이다.

경찰과 검찰, 군대 그리고 신문사만큼 폭탄주를 많이 돌리는 데도 없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가장 센 사람들을 필두로 전설이 생겨난다. 검찰에서는 박만 전 수원지검장이 제일 셌고, 경찰에서는 강 청장이 최고라는 전설이 그것. 독한 폭탄주를 쭉 들이켜면 “크!~” 또는 “흐~”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리하여 생겨난 말이 검찰의 박‘흐’만주(酒)와 경찰의 강희락주(酒)다.

이 통신사가 기대한 것은 강희락주가 도는 순간이었다. 경기경찰청을 순시하러 온 경찰청장이 폭탄주를 돌리는 현장을 찍고 녹음해 공개하면 특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상사는 구속되고 잘못을 뉘우친 A씨는 불구속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경찰에서는 ‘강희락의 10년 대운(大運)’이 회자됐다. 그의 운은 그것만이 아니다.

강희락酒 vs 박‘흐’만酒



이에 앞서 그는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사퇴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과 오랫동안 선의의 경쟁을 벌여왔다. 김 전 청장은 용산 참사로 정상에 오르는 계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쌍용차 사태는 제2의 용산 참사로 비화할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그는 치밀한 ‘야금야금’ 전법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는 64년 경찰 역사에서 치안총감을 두 번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그는 치안총감으로 해양경찰청장이 됐다가 1년 뒤 친정인 경찰청의 총수로 돌아왔다. 그의 기록은 이것만이 아니다. 2000년 12월 경무관이 된 그는 2년 예정인 경찰청장 임기를 무사히 채운다면 10년간 ‘경찰의 별’을 단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강희락의 대운은 10년 더 남아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왜 그에게는 ‘운 좋은’이라는 관형어가 붙어 다니는 것일까.

1952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상 일찍 취직할 생각으로 대구공고에 가려고 생각하다 고교 지리교사를 하던 숙부로부터 “대학을 나와야 취직도 잘 된다”는 야단을 듣고 경북대부고에 들어갔다. 2학년 때 이과 전체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그러나 고3 여름 호된 열병을 앓는 바람에 서울대 71학번이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고려대 법대에 합격했는데 입학 동기가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승재 전 해경청장 등이다. 대학생 시절 ‘민사법학회’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4학년 때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 졸업 직전인 1976년 1월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고려대 대학원에 들어가 2차를 준비했지만 2차 시험에 계속 떨어지면서 길고 긴 ‘고시 낭인’ 생활에 들어갔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고시촌으로 유명한 대구 팔공산 인근의 도학동에 들어가 고시를 준비했으나 역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1978년 12월 육군에 입대해 양구의 2사단에서 30개월을 근무했다. 이렇게 힘들고 고독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중대한 인생 변곡점을 맞았다. 첫 휴가를 나와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지금의 부인 김정미(53)씨와 맞선을 본 것. 그는 대뜸 “나는 사시를 공부해야 하니까, 여자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입심이 좋았던 덕분인지 결국에는 인연이 맺어졌다.

1980년 6월 제대하기 전 그는 또 사시 1차에 붙었다. 그런데 제대하자마자 미래의 장인이 “직업도 없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바람에 그해 가을 서울신탁은행에 들어갔다. 은행 입사 1주일 후 그는 김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5개월 후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고려대 고시반에 적을 두고 사시 준비에 들어가 오랜 노력 끝에 1984년 26회 사시에 드디어 합격했다.

힘들었던 고시 낭인 시절, 자리를 지켜준 아내

그가 어렵게 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교사를 하던 그의 아내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16기로 들어간 그는 함께 합격한 고려대생 중 9년 후배인 81학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300여 명의 연수원생 그는 스무 번째로 나이가 많은 원로였다.

3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치는 그가 진로를 걱정하고 있을 때 그보다 2년 앞서 사시에 합격해 경찰에 들어간 고려대 법대 동기생 이승재 경정이 “나이가 많으니 경찰에 오는 게 좋겠다”라고 권했다. 그 말에 이끌려 연수원 동기 여덟 명과 함께 경정으로 경찰에 들어간 그는 첫 보직으로 충주경찰서 경비과장을 맡았다.

그 시절 대학가 운동권은 격렬한 데모를 자주 벌였는데 충주에는 건국대 분교가 있었다. 경비과장의 주요 임무는 이 학교의 데모를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충주서에는 시위진압에 투입할 전경중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치장을 지키거나 입초(보초)를 서는 전경들을 차출해 1개 소대를 만들고, 직원들까지 동원해 간신히 3개 소대를 꾸려 데모 진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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