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인의 향기’는 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1992년 작품으로 미국 동부가 무대다.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 분)는 하버드대학 진학을 목표로 뉴햄프셔에 있는 ‘베어드’라는 사립 명문 예비학교에 다니는 모범적인 학생이다. 부유한 집안 배경을 가진 친구들과 달리 그는 오리건주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빠듯한 가운데서도 장학금을 받아가며 성실히 생활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학생 게시판에서 추수감사절 기간에 노인을 돌볼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본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다녀올 비행기 삯을 마련해야 하는 찰리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가 돌보아야 할 사람은 바로 퇴역군인 출신의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 분) 중령이었다. 조카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맹인인데다 대단히 괴팍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슬레이드 중령은 찰리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신경질적이면서 날카로운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기 가족끼리만 추수감사절 여행을 떠나기로 한 조카네는 찰리에게 슬레이드 중령이 겉으로는 거칠게 보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은 따뜻한 분이라고 안심시킨다.
그런데 학교에서 사건이 터진다. 찰리의 부잣집 망나니 친구들이 교장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다. 그들은 학교 행사에 사용할 대형 풍선에 전날 밤 흰 페인트를 잔뜩 넣어둔 뒤, 마침 재단으로부터 특별히 선사받은 재규어를 몰고 나타난 교장을 향해 터뜨린다. 수많은 학생과 교직원이 보는 가운데 교장은 일순간 차와 함께 흰 페인트로 범벅이 되고 만다. 큰 망신을 당한 교장은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된다.
찰리는 또 다른 친구 윌리스와 함께 우연히 범행 현장을 목격한 탓에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다. 교장은 범인들과 한통속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윌리스를 제외하고 찰리에게 범인 이름을 실토할 것을 재촉한다. 급기야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한편, 만일 범인의 이름을 대면 하버드대학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회유하며, 추수감사절 기간 잘 생각해보라고 한다. 순진한 찰리는 차마 친구의 이름을 고자질할 수 없어 깊은 고민에 빠진다.
치밀하게 계획된 자살 여행

영화 ‘여인의 향기’
그리고 모처럼 방문한 중령의 형 집에서는 그의 언행 때문에 조카들과 싸움을 하기도 한다. 평소에도 슬레이드 중령의 성격과 언행을 못마땅해 하던 조카들이 그가 전쟁영웅이 아니라 군대에서 술에 취해 수류탄을 잘못 가지고 놀다 맹인이 되었다고 조롱한 것이다.
맹인인 슬레이드 중령은 심지어 한적한 변두리 길에서 찰리의 간단한 도로 구조 설명만 듣고 붉은색 페라리를 몰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다 교통경찰에게 적발당하는 기행도 연출한다. 페라리는 자동차 판매상에게서 시운전을 핑계로 잠시 타고나온 것이었다. 슬레이드 중령은 평소 입버릇처럼 인생에서 여자 다음으로 페라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찰리는 마침내 슬레이드 중령의 이번 여행이 그가 생을 비관한 나머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자살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슬레이드 중령은 몰래 방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찰리의 제지로 무산되고 만다. 이 와중에 슬레이드 중령은 찰리에게 묻는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만 대보라”고. 그러자 찰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을 들 수 있다. 중령님은 누구보다 탱고를 잘 추고 페라리도 잘 몬다”고 대답한다. 이 말에 슬레이드 중령의 자살 의지는 무너진다.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추스른 다음, 찰리는 “중령님같이 멋있고 잘생긴 사람은 앞으로 꼭 다정하고 열정적인 생의 동반자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성 찬사도 곁들인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뉴햄프셔로 돌아온다. 뉴욕에서 온갖 곡절을 겪으면서 슬레이드 중령과 찰리 간에는 서로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더불어 깊은 신뢰가 생겼다. 그 와중에 찰리는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을 슬레이드 중령에게 이야기하면서,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친구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자신의 고충을 하소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