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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해인사 솔숲에서 겸재와 고운을 만나다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해인사 솔숲에서 겸재와 고운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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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우리의 도시 경관을 생각하면 이 땅의 산사 경관이 자연유산의 보고라는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서울의 경우 5대 궁궐은 그나마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지켜오고 있지만, 도심은 물론이고 변두리에서도 20~30년 전의 옛 경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농촌의 전통 경관마저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아스팔트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렸고, 농촌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우리의 토속적 풍광, 오래전부터 한국을 한국답게 나타내던 전통 경관이 차츰 사라져가는 실정이다. 따라서 중장년층들이 어릴 때부터 마음에 담아왔던 풍광은 이제 더는 쉽게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변 자연경관으로부터 정서적, 심리적 영향을 받으며 산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태어나고 아파트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이야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중장년층들은 고향의 옛 풍경을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적 전통에 따라 마을 앞에는 들판과 시내가 흐르고 마을 뒤에는 산들이 펼쳐진 우리의 전형적 경관을 잊지 않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런 풍광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정서적 기억(mindscape)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궁핍한 시절이었을망정 이런 정서적 기억 덕분에 그 속에서 뛰놀며 자라던 그 터전(landscape)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한 나라의 고유한 경관은 그 나라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국민성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주말이면 땀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오르는 이유도 우리 정서에 새겨진 옛 경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욕구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정서적 풍광이 점차 사라져가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전통 경관을 고스란히 지켜온 곳이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축복이다. 바로 산사의 숲이 그렇다. 일제강점기의 산림 수탈과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사의 숲은 비교적 온전하게 전통 경관을 지켜오고 있다. 국토의 개조가 밤낮으로 진행되는 오늘날, 산사의 숲은 우리 고유의 풍광을 지켜내는 귀중한 자연유산 또는 전통생명문화유산인 셈이다.

오늘날 절집 숲의 가치와 기능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동시에 확장되고 있다. 산사의 숲이 가진 재래적 기능은 성속(聖俗)을 가르는 차폐 공간, 수행과 명상과 울력의 수도 공간, 구황식량과 산나물과 버섯 등의 임산 부산물과 땔감을 제공하는 생산 공간, 전란이나 화재와 같은 유사시를 대비한 가람 축조용 목재의 비축기지 등이었다. 생태와 환경의 가치가 중시되는 21세기에는 산사의 숲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기능이 대두되고 있다.



생태 소비의 훌륭한 대상

해인사 솔숲에서 겸재와 고운을 만나다

겸재의 해인사도

먼저 산사의 숲은 우리 고유의 풍토성을 간직한 생명자원이다. 인간의 간섭이 없지는 않았지만, 절집 숲은 생태를 지향하는 불교적 특성 덕택에 지속적으로 보호되어왔고, 자연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종교적 전통 덕분에 오늘날에도 자연스러운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수백 년간 주변의 풍토에 적응해온 다양한 수종이 원래의 생육 형태를 간직한 채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곳이 절집 숲이다.

또한 절집 숲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는 우리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수도자들의 수행과 명상과 울력의 공간으로 한정되던 산사의 숲이 오늘날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가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도심의 공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절집과 그 주변 공간은 스키장이나 골프장, 놀이동산이나 자연휴양림처럼 고가의 장비나 입장료를 부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 공간과 그 아우라를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스피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이나 온갖 현란한 상업적 광고로부터도 자유로워 한적하고 조용하다. 덕분에 각자의 삶을 내밀하게 되돌아보는 기회를 안겨준다.

나아가 절집 숲은 역사성을 간직한 콘텐츠의 보고다. 절집이 관리하던 율목봉산(栗木封山)은 종묘와 향교와 공신들에게 제공할 위패를 생산하던 밤나무숲이었고, 향탄봉산(香炭封山)과 송화봉산(松花封山)은 숯과 송홧가루를 생산하던 솔숲이었다. 절집에서 운영하던 이런 봉산은 왕실에서 절집에 산림을 하사하고, 절집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임산물을 생산하는 전통적 산림 이용의 지혜가 담긴 제도다. 아울러 절집 숲은 고승대덕과 나무와 숲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절집 숲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얽힌 아름다운 판타지가 살아 있고, 전설이 전승되고 있으며, 설화가 녹아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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