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아바타’에 얽힌 국제정치의 진실

마음을 얻는 외교, 그 잔혹한 두 얼굴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02-02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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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기술의 신기원을 열어젖혔다는 ‘아바타’는, 그러나 영화 외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다. 외계종족의 형상을 ‘입고’ 현지에 뛰어들어 친밀감과 상호 이해도를 높이겠다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기본개념, 에너지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과의 협상에 임하지만 무위로 돌아가자 결국 무력분쟁에 돌입하는 일련의 과정, 아바타 프로그램을 작전정보 수집 채널로 활용하고자 하는 군부 등, 영화의 핵심갈등은 모두 미국의 대외정책 운용과 국제정치의 최근 흐름을 정통으로 꿰뚫고 있다.
    영화 ‘아바타’가 전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1월 중순, 미국의 피겨스케이팅 스타 미셸 콴이 한국을 방문했다. 같은 시기 국회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재건팀(PRT·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과 경비 병력 파병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영화와 스포츠, 정치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벌어진 이 세 가지 사안 사이에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말하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에 빛나는 미셸 콴은 방한 기간에 가평의 청심국제중학교, 광주의 중고등학생들, 연세대 대학생들을 만났다. 전통음식연구소를 방문해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번 프로그램을 주선한 곳은 미 국무부와 주한 미 대사관. 중국 등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는 콴은 2006년 미 국무부가 최초로 임명한 ‘공공외교(Public Diplo-macy) 특사’다.

    PRT사업의 경우를 보자. 미국이 2002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지역의 재건사업을 활성화기 위해 처음 도입한 이 시스템은 군과 외교관, 관련 전문가 등이 한 팀을 이뤄 불안정한 국가의 재건사업을 지원하는 조직이다. 군비지출 부담이 증가하면서 미국은 지역재건팀의 운영을 다른 국가로 이관해왔고, 한국 정부는 2009년 10월 아프가니스탄에 자체적으로 지역재건팀을 파견하고 경비 병력 350명을 파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해서, 영화와 현실의 두 사건을 잇는 하나의 키워드가 등장한다. 바로 ‘미국이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22세기의 공공외교?



    “봐,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얻어야 해. 그들처럼 보이고 말해야만 그들은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할 거야.” - 아바타 프로그램의 책임자 그레이스 어거스틴 박사의 대사.

    우리말로 공공외교 혹은 대중외교로 번역되는 ‘Public Diplomacy’는 20세기 말 이래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그 중요성이 급속도로 강조되고 있다. 문화적으로 차이가 큰 국가와 국민들에게 미국 문화를 전파하고 상대 문화를 이해하려 애씀으로써 ‘긍정적인 미국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공공외교의 기본 콘셉트다.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이 국제분쟁의 주요원인으로 떠오른 1990년대 이후, 할리우드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미국의 문화자산을 국제정치에 활용해야 한다는 ‘소프트파워’론이 그 이론적 근거로 자리매김했다. 군사력이나 경제제재 대신 상대방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부드러운 힘’이 21세기 국제정치의 화두가 될 것이라는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의 설명은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영화 속 어거스틴 박사의 말과 고스란히 포개진다.

    미 국무부는 1999년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차관직을 신설해 이 분야를 경제외교나 국제안보외교에 버금가는 주제로 확장했다. 주한 미 대사관의 경우 2002년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와 크리스토퍼 힐 대사의 부임을 계기로 적극적인 공공외교 활동에 나섰다. 대사가 젊은 네티즌과 온라인 채팅을 하고 대사관 전용 인터넷 카페가 만들어져 화제가 된 것이 모두 이 무렵. 미셸 콴의 공공외교 특사 활동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공외교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은 근래지만 그 뿌리는 매우 깊다. 영화 속 어거스틴 박사가 아바타를 입고 시도한 첫 프로젝트는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 나비족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학생들과 찍은 사진 속 박사의 모습은, 1961년 이래 20만명에 가까운 미국 젊은이를 제3세계 국가에 파견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들을 연상케 한다. 국무부 산하 해외공보처(USIA)가 각국에서 운영한 미국문화원(USIS), 세계 53개 언어로 방송되는 라디오 ‘미국의 소리(VOA)’ 등도 모두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방 속에 뛰어들어, 상대의 마음을 얻는다’는 영화 속 아바타 프로그램과 꼭 닮았다.

    언어와 문화를 전파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관을 확산시킨다는 미국의 전략은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재건사업을 통해 민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중동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영화에 영감을 얻은 미국의 공공외교 담당자들이 22세기 중엽이 되면 실제로 아바타를 입고 외교에 임하겠노라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선한 얼굴, 비정한 속살

    “아바타 프로그램은 애들 장난이지만, 기회를 만들어준 건 고마운 일이지. 진정한 해병이라면 현장에 침투해 적 기지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이봐 설리, 협조를 강요하다가 안되면 세게 갈기는 거야. 나는 네가 그들의 신뢰를 얻어 내부에서 정보를 캐내오길 원해.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필요한 사항을 내게 갖다주는 거지. 그럴 수 있겠나?” - 기지 사령관 마일즈 쿼리치 대령이 주인공 제이크 설리를 회유하는 말.

    영화가 단순히 미국의 공공외교 정책을 모사하는 데 그쳤다면, 핵심적인 갈등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공공외교가 표방하는 선하고 평화로운 얼굴의 내면에 국제정치의 차갑고 비정한 현실이 숨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판도라 행성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자원 채취를 위해 이곳에 온 다국적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황폐화된 지구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에너지원 ‘언옵태니움’의 채굴이 그들의 목표다. 다국적기업의 현지책임자는 아바타 프로그램 역시 원주민들을 이주하도록 설득하는 ‘외교적 해결방안’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해의 폭을 넓히자’는 모토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 경제적 이익을 취하겠다’는 속내를 둘러싼 껍데기에 불과하다(물론 이는 이라크전과 석유산업의 상관관계를 꼬집는 캐머런 감독의 의도적인 풍자다).

    미국의 공공외교가 모두 이런 의도로 기획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공공외교정책 역시 미국의 국익에 복무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생소한 문화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어진 정보들은 고스란히 ‘다른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아바타를 입고 나비족과 친분을 쌓아가는 주인공 설리를 통해 군사작전에 필요한 내부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쿼리치 대령의 속내는, 언제든 상대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정보수집 활동으로 바뀔 수 있는 공공외교의 이면을 폭로한다.

    ‘이해’와 ‘정보전(情報戰)’의 이 아이러니한 상관관계는, 서구 사회에서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교과서로 자리매김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실은 태평양전쟁 당시 대(對)일본 심리전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당국 보고서였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CIA 한국지부에서 일하며 박정희 정부 당시의 핵개발 계획을 처음으로 워싱턴에 보고한 장본인이자, 2000년대 들어서는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으로서 한미동맹 조정의 민감한 이슈를 요리했던 리처드 롤리스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공공외교적 수단을 거쳐 탄생한 ‘한국을 잘 아는 미국 측 인사’의 전문성이 외교전쟁에서 유감없이 활용된 것이다.

    쿼리치 대령의 무력침공 작전이 임박하자, 주인공 설리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 나비족이 자신을 반역자 혹은 외부인으로 비난하게 될 것이라고 괴로워한다. 참사를 막기 위해 ‘중재자’를 자임한 그의 시도는 나비족과 사령부 모두에게서 배신으로 낙인찍힌다.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감독이 직접 쓴 오리지널 대본에는 어거스틴 박사 역시 같은 종류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이 만든 학교가 쿼리치 대령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여주인공 네이티리의 언니가 피살된 사건을 회상하면서 “여기는 우리의 세계가 아니고, 우리는 다가올 일을 막을 수 없다”고 고통스러워하는 대목이다.

    20여 년간 미 국무부의 언론문화담당관으로 일했던 존 브라운 조지타운대 겸임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 ‘아바타’ 주인공들의 괴로움에 공감을 표한다. 판도라 행성에서 설리의 처지는 냉전 종식 직후 공공외교를 수행하기 위해 동유럽에 투입됐던 자신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회고다. 겉으로는 공공외교 종사자지만 군사적으로는 심리전 요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스파이일 수밖에 없었던 자의 괴로움이다. 주재국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나는 좋은 편에 서 있다’고 위안하려 했지만, 과연 자기가 진짜로 ‘좋은 편’이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오바마의 이상주의

    “나는 정말로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숲과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에 대해. 그녀는 네트워크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너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이동한다고, 모든 에너지는 단지 빌리는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돌려줘야 한다고.” - 제이크 설리의 독백.

    판도라 행성의 동물들은 그 등에 올라타는 사람과 정신적으로 ‘연결’돼야만 땅을 달리고 하늘을 난다. 나비족은 판도라 행성의 숲과 나무에 정서적인 ‘교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과 어거스틴 박사가 아바타를 입는 과정도 ‘접합’이다. 기지 안에 누워있는 실제 육체와 기지 밖에서 활동하는 아바타의 접합이 무너지면, 아바타는 그만큼의 고깃덩어리로 전락한다.

    2시간40분을 관통하며 쏟아지는 접합과 소통에 대한 메타포는 바로 이 영화의 주제어다. 국제정치의 눈으로 보자면, 이해관계와 힘의 논리로만 접근했던 이전의 패러다임을 넘어 문화적 정서적 특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국제관계의 틀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관점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꿈을 공유할 수 있다면 무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부시 행정부 시절의 대외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국에서는 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찬반 논쟁 역시 불이 붙었을 정도다. 캐머런 감독 본인도 그간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를 과감히 인정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적 논쟁이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음을 예견한 듯 보이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상징하는 미국민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 ‘전쟁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폭발적인 상업적 가치를 품고 있는지 꿰뚫어본 셈이다. 9·11테러 직후 방영을 시작해 인기를 누렸던 폭스TV의 드라마 ‘24’가 핵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는 영웅을 그렸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소통과 합일의 공허함

    그러나 거기까지다. 존 레넌의 ‘이매진’과 히피즘을 연상케 하는 영화의 메시지는 쉽게 합일을 이야기하지만, ‘상대의 영혼을 얻어’ 국가와 국가, 종족과 종족을 넘어서는 조화로운 국제관계를 만들어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폭력과 폭력이 맞서는 국제정치의 본질이 과연 소통에 대한 의지와 공공외교의 선한 얼굴만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이상주의의 화신처럼 보였던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1년이 못 돼 아프가니스탄에 지상군 3만명을 증파하겠다고 나서는 엄혹한 현실은, 감독이 제기하는 합일의 메시지를 마냥 공허하게 만든다. 흡사 창과 화살로 중무장한 공격형 헬기와 공중강습부대를 격파하는 영화의 비현실적인 결말과도 상응하는 공허함이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이는 국제정치학이 정립된 이래 끊임없이 대립해온 두 개의 큰 흐름이다. 꿈이 먼저냐 힘이 먼저냐는 이 고전적인 주제는, 21세기 초엽 미국에서 ‘다자주의와 세계공동체 정신’을 모토로 삼은 대통령을 만나 다시 현안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그 꿈이 가진 상업적 가치가 영화 ‘아바타’의 탄생배경이라면, 오바마의 이상주의가 과연 힘으로 점철된 현실 세계를 헤쳐가는 동안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가 이 영화가 남기는 마지막 질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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