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남한보다 힘든 경쟁 뚫어야… 고급 아파트에 일제 승용차, 노루고기도 지급”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1-01-20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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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현역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인민방송원으로 알려진 리춘희 아나운서. 1974년 데뷔해 정년을 한참 넘긴 현재도 주요 사건이 벌어지면 뉴스를 맡는다. 사진은 2008년 신년공동사설 발표 때의 모습이다(왼쪽). 2006년 10월 핵실험 강행방침을 담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읽고 있는 차수일 방송원. 평양연극영화대학 방송학부를 졸업한 정통파다.

    거부감이 들 정도로 힘이 들어간 목소리와 표정, 단호함을 한껏 과시하는 말투. 주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조선중앙TV의 ‘9시 보도’에 등장해 보도문을 읽어 내려가는 북한의 아나운서들은 남쪽의 시청자에게도 더 이상 낯선 얼굴이 아니다. 핵실험 등 주요 소식이 있을 때마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등장하는 후덕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그렇고, 최근 들어 부쩍 출연이 잦은 비교적 젊은 여자 아나운서도 그렇다. 시를 읊듯 높은 톤으로 몸을 떨어가며 원고를 읽는 남성 아나운서도 기억에 남기는 마찬가지. 체제선전의 최전방에서 체제를 상징하는 얼굴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은 과연 어떻게 뽑히고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을까.

    북한에는 조선중앙TV 외에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수대텔레비전과 대남방송인 조선교육문화텔레비전이 있지만, 일반 주민이 시청할 수 있는 전국 규모의 텔레비전 방송은 조선중앙TV뿐이다. 이외에도 조선중앙방송라디오와 지역별 라디오방송, 군 방송에도 아나운서들이 활약하고 있으나 조선중앙TV의 주요 방송을 담당하는 대표 아나운서들은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 방송의 간판급 아나운서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일종의 ‘스타’인 셈. 다만 아나운서의 이름을 방송에서 공개하지 않는 북한 방송의 특성 때문에,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상당부분 백지로 남아 있다.

    조선중앙TV에서 기자와 작가로 17년간 일하다 1996년 서울에 온 장해성(66)씨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다. 북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천복이와 만길이’를 집필했던 장씨는 귀순 이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통일정책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새해가 시작된 1월3일, 자택 근처에서 만난 장씨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바로 북한 아나운서들의 이름과 신상이었다.

    ▼ 북한의 아나운서들은 가끔 한국 방송을 통해 접하는 남측의 시청자에게도 낯이 익을 만큼 숫자가 제한적인 것 같더군요. 2006년 10월 핵실험 발표 당시에 성명서를 발표했던 후덕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 대표적인 듯 합니다만.

    “그 아나운서의 이름이 리춘희입니다. 조선중앙TV가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한 1974년에 데뷔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환갑을 한참 넘긴 나이지요. 남편 역시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 기관지인 ‘민주조선’에서 기자로 일했고요. 원래는 인민협주단 화술조에 소속된 배우였는데, 이 사람이 다리가 좀 짧고 단신입니다. 얼굴은 워낙 고왔지만 키가 작다 보니 무대에서 빛나는 체질은 아니었으니 일찌감치 조선중앙TV로 넘어와 아나운서가 됐는데, 1980년대 중반에 김정일 당시 당 비서의 눈에 들어 ‘방송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후 승승장구한 거지요. 전형규와 함께 이 시기 북한을 대표하는 아나운서가 된 거지요.



    북한에서는 아나운서를 방송원이라고 부르는데, 그중에 인정을 받으면 공훈방송원이 되고 더욱 큰 공을 세우면 인민방송원 칭호를 받습니다. 지금은 아마 리춘희씨가 현역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인민방송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는 남자 60세, 여자 55세로 정년이 있지만 엘리트 방송원들은 체력이 허락하는 한 정년에 구애하지 않고 방송활동을 계속합니다.”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리춘희의 뒤를 잇는 ‘떠오르는 스타’라 할 수 있는 류정옥 방송원.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는 배우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5월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발표할 당시의 모습이다.



    뒷말 무성했던 이유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북한 방송을 모니터하고 있는 동북아방송연구회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리춘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정 등 가장 중요한 뉴스만을 처리하는 간판 아나운서다. 상시적으로 9시 보도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김 위원장 관련 주요소식이 있을 때만 부정기적으로 출연한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에게도 낯익은 인물인 또 한 명의 인민방송원 전형규는 2006년 9월 세상을 떠났다고 북한 매체가 보도한 바 있다. 1956년 라디오 아나운서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그는 1963년 TV중계 시작과 함께 초대 아나운서로 발탁돼 활동했고, 보도뿐 아니라 ‘노래경연’이나 ‘명배우무대’ 같은 일종의 쇼 프로그램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바 있다.

    “최근에는 류정옥이나 차수일 같은 상대적으로 젊은 아나운서들도 주요 뉴스를 다루는 것 같더군요. 차수일은 평양연극영화대학 방송학부를 졸업하고 원래 조선교육문화텔레비전에서 방송을 하다가 역시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조선중앙TV에 발탁된 사람입니다. 이전의 남자 아나운서들에 비해 워낙 방송을 잘 해요. 외모도 뛰어난데다 출신성분도 좋았고요. 그 외에 북한 방송의 전설적인 인물인 리상벽씨의 딸 리금희씨도 방송에 자주 나옵디다.”

    ▼ 그렇게 몇몇 방송원이 뉴스를 십수 년간 진행하면 젊은 아나운서들은 아예 기회가 없는 것 아닌가요.

    “조선중앙방송에 TV 아나운서가 20여 명, 라디오 아나운서가 100여 명 가까이 됩니다. 사실 방송시간이나 프로그램 숫자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죠. 그중에 가장 연차가 높고 공훈이 센 몇 사람만 고정돼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타 부서로 계속 순환근무를 하게 됩니다. 김 위원장 눈에 들어 한마디라도 칭찬을 들으면 순식간에 잘나가는 것이고, 그런 기회를 잡지 못하면 기자나 다른 행정직, 지방방송으로 옮겨가는 거죠. 시청률도 여론조사도 없다 보니 기준은 오로지 김 위원장의 칭찬밖에 없어요.”

    리춘희의 뒤를 이을 만한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것으로 추정되는 류정옥 역시 평양음악대학을 거쳐 조선예술영화소에서 일하며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는 배우 출신이라는 게 동북아방송연구회의 조사결과다. 한편 북한에서 관료를 지냈던 몇몇 인사는 류씨의 발탁에 대해서도 뒷말이 많았다는 당시의 소문을 전한다.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98년 당 선전선동부장 겸 선전비서로 출세가도를 달렸던 정하철이 류정옥을 발탁한 당사자라는 것. 간판뉴스를 진행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던 류정옥의 벼락승진을 두고 정하철 비서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수근거림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상상할 수 없는 대우

    ▼ 몇 해 전 중앙TV 방송원을 모집하는 공고가 남한 언론에 포착돼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응시자격을 보니 현직 지방 아나운서뿐 아니라 군이나 각 기업소 등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괄하고 있더군요. 남자 25~40세, 여자 18~35세의 연령제한도 까다롭지 않은 편이고요.

    “대외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방송원이 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지요. 북한에서 아나운서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평양연극영화대학 방송과를 졸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년 열리는 전국화술경연대회에서 선발되는 겁니다. 연극영화대학 방송과에서는 한 해 11~12명이 졸업하는데 이 가운데서 중앙방송 방송원 양성반에 들어가는 사람은 4~5명뿐이고 다른 이들은 지방방송 등으로 발령이 나지요. 배경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실력이 좋은 학생이 꼭 중앙방송에 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방송물 좀 먹었다’ 하는 이들은 모두 모여든다고 봐도 좋을 화술경연대회에는 매년 150명가량이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로 군에서 방송을 하던 이들이 지요. 인민군에는 군단마다 방송인력이 있고 대남방송을 담당하는 부대도 있거든요. 아무래도 실무경력이 있으니까 방송을 잘하고, 또 선전부대에는 미모가 뛰어난 여성요원도 많습니다. 북한 방송원들의 말투에 군대식 절도가 배어 있는 것에는 그 영향도 있을 겁니다. 지방방송에서 근무하는 방송원도 많이 참가하더군요. 이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는 사람이 매년 10명이 조금 넘습니다.

    이렇게 뽑혔다고 바로 방송원이 되는 건 아니죠. 이들을 대상으로 15명 내외의 양성반이 조직되면 조선중앙방송의 화술 전문가들이 1~2년에 걸쳐 교육을 하지요. 그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한두 명만이 살아남아 방송원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또 방송원이 된다 해도 ‘9시 보도’ 같은 곳에 얼굴을 비추려면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한 언급이나 힘 있는 실력자들의 연줄이 필요할 테니까, 남한의 방송에 비해서도 훨씬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앞서도 말했지만 경쟁에서 밀려나면 다른 직장이나 보직으로 옮겨가야 하는데, 대우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자로 전직하는 경우만 해도 화술만 하던 사람이 기사를 쓰려면 쉽지가 않죠. 다른 기자들이 잘 인정해주지도 않고. 방송원에 대한 대우가 워낙 좋으니까 어깨에 힘은 잔뜩 들어갔는데, 막상 전직하면 결과물이 좋질 않으니 기자들 사이에서는 ‘얼굴만 번드르르해서는 영 깡통이더라’하는 식으로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죠.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방송원으로 성공하는 일이 훨씬 중요해지는 거고요.”

    장씨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의 아나운서들은 일반 노동자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방송원은 전쟁이 나면 전범(戰犯)이 되므로 최고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언급이 있었다는 것. 특히 인민·공훈방송원들은 주택이나 급식 등에서 방송국 간부를 능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국장급이라고 해도 조선중앙TV 인근의 평양 광복거리에 아파트를 배정받는 반면에, 이들은 생활여건이 가장 좋은 창광거리에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다른 동네에서는 한겨울에도 간혹 난방이나 온수가 끊기는 일이 많아 고생이 심하지만 이 지역은 전혀 그런 일이 없거든요. 서울로 치면 30~40평형 고급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월급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화폐가치가 많이 바뀌었지만,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받은 월급이 140원 정도로 일반 노동자의 2배쯤 됐습니다. 여기에 작품을 집필하면 원고료를 따로 받았고요. 일반 아나운서는 150원, 공훈방송원은 170원, 인민방송원은 190원쯤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월급은 사실 의미가 적고, 정말 중요한 것은 배급이나 선물이지요. 대표적인 방송원들에게는 일반인이 접하기도 어려운 부식이나 공산품들이 당에서 직접 제공되곤 합니다. 매주 한 번씩 식료품을 실어다주니 다른 이들처럼 장마당에 나가서 비싼 돈 주고 사다 먹을 이유가 없지요.

    여기에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 당 창건일과 공화국 창건일까지 1년에 네 차례 이들에게는 상자 두 개 분량의 선물이 옵니다. 꿩이나 노루고기 같은 고가의 식료품과 함께 양복용 옷감 같은 물건이 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꽤 일 잘하는 작가였던 나는 딱 한 번, 그것도 귤 한 상자를 선물 받은 게 전부였거든요. 이런 선물을 장마당에 나가서 팔면 월급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돈을 벌 수 있지요. 그것만 해도 상당한 특혜거든요. 하늘과 땅 차이랄까요.”

    여기서 잠시 2008년 4월 중국 ‘세계신문보(世界新聞報)’가 전한 관련기사를 살펴보자. TV에 출연하는 아나운서들은 모두 평양 최고의 이미용실에서 무료로 머리를 손질하고 사우나를 하며 최고의 식사를 즐긴다는 내용이다. 간판급 여성 아나운서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방송 즉시 유행이 되곤 하는데, 이들은 모두 평양 복장연구소에서 만드는 최신 의류를 무료나 염가로 제공받는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양주 등 수입품 선물은 물론 일제 신형 자동차를 기사와 함께 제공받는 아나운서도 있다는 것이다.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평양 창광거리의 간이음식 판매점 앞에서 주민들이 음식을 포장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2007년 3월 촬영된 것이다.



    “말에는 기백이 넘쳐야”

    장해성 전 조선중앙TV 작가가 말하는  북한 아나운서들

    북한 방송의 전설로 불리는 리상벽 인민방송원이 스포츠를 중계하는 모습. 아나운서용 교재를 저술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지만 남한의 방송말투를 배우자고 주장하다 혁명화 과정을 거친 적도 있다고 한다. 1997년 사망했다.

    ▼ 북한 뉴스를 보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아나운서들의 독특한 말투입니다. 한 단어 한 단어 힘줘가며 절규하듯 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방식인데요, 방송이라기보다는 구호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고요. 특별한 원칙이 있습니까?

    “방송원들을 교육하는 ‘화술론’이라는 교재가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500여 쪽 분량의 두꺼운 교본인데, 어떠한 경우에도 방송원들은 말에서 기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지요. 공식적으로는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를 옮긴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리상벽씨가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론 등 북한의 다른 예술분야 교재가 다 그렇듯 해당 전문가가 작성해 보고하면 서기실(비서실)에서 이를 비준해 김 위원장 이름으로 내는 거지요.”

    2003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입수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화술론’ 교본은 방송에 대해 “위대한 김일성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예리한 사상적 무기이며 대중을 혁명과 건설투쟁으로 일깨우는 돌격 나팔”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나운서의 말에 기백이 없으면 “인민의 투쟁의식을 고취할 수 없다”는 강조다. 교재에는 또한 “방송을 통해 우리 인민을 긴장시킬 뿐만 아니라 적들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우리의 위력을 보여줘 위압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김 위원장의 말도 실려 있다. 물론 이러한 말투는 보도 주제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미국이나 한국에 대한 보도에서는 격앙되고 감정적인 어조를 구사하지만,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에 관해 언급할 때는 미소를 한껏 머금고 존경심이 가득한 장엄한 어조를 사용하는 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리상벽씨가 런던월드컵 직후에 북한 아나운서들의 군대식 방송자세를 바꾸자고 주장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고운 말씨를 배워야 한다’며 방송원들에게 남측 방송을 듣게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 무렵 김일성 당시 수상이 5·25 교시를 통해 주체노선을 명확히 하면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3년 가까이 농촌에 내려가 ‘혁명화 과정’을 거쳤고요. 그래도 조선중앙방송의 전설적 인물이니까 결국은 복귀했고, 1997년 말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북한 방송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전문가들은 2005년 이후 아나운서들의 방송 스타일이나 옷차림 등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전까지 한복 일색이었던 여자 아나운서들이 양장을 입기 시작했고 머리 모양도 다양해졌다는 것. 남한의 시청자에게는 여전히 절규하는 듯한 말투지만 이전에 비하면 다소 부드러워진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방송원뿐 아니라 뉴스 화면에서도 칙칙하고 단조로웠던 이전의 배경화면 대신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평양시내를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도 눈에 띈다. 나름 세련되게 변하고 있는 셈이다.

    방송사고가 없는 이유

    ▼ 한국에서는 아나운서들이 직접 방송용 멘트를 작성하거나 수정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북한의 방송원들도 그런 재량권이 있을까요?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아무리 인민방송원이라고 해도 글자 하나 마음대로 고치지 못합니다. 외무성 대변인 담화나 인민군 총사령부 발표문처럼 해당기관에서 쓰는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중앙TV에서 자체적으로 방송하는 보도도 마찬가지입니다. TV를 통해 방송되는 모든 원고는 3단계 결재를 거칩니다. 기자가 쓰면 부장, 부국장, 부위원장이 검토하는 거죠. 그 뒤에는 당 비서가 관할하는 내부검열과 출판검열국이 담당하는 국가검열을 받습니다. 그 과정이 다 끝나야 화술현상국으로 넘어가서 방송원이 읽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녹음하게 됩니다. 완성된 편집본에 대해서도 같은 결재과정을 다시 거치고요. 보도내용뿐 아니라 방송원들의 소갯말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절차가 복잡하다 보니 방송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려요. 윗사람들은 단계별로 어떻게든 수정을 해야 자신의 존재가치가 생기는 거니까 이렇게 저렇게 자꾸 바꾸려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들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노릇이지요. 작가였던 나만 해도 한 달에 프로그램 두 편을 쓰면 작업계획을 300% 초과달성한 셈이었거든요. 서울의 방송사에서 그런 식으로 일한다면 당장 잘리겠죠. (웃음)

    당 창건 열병식처럼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그날 바로 방송을 할 때는 결재자, 검열 담당자들이 죽 한 줄로 앉아 있다가 기자가 원고를 쓰는 족족 바로 넘겨가며 검토를 합니다. 가장 빨리 처리하면 2시간 정도 걸리더군요. 이렇다 보니 북한의 뉴스에는 생방송이라는 게 없어요. 운동경기 중계 방송도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한 시간 정도 시차를 두는 게 보통이죠.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동정을 보도할 때에는 김 위원장이 해당지역을 벗어난 뒤에야 방문소식을 보도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장씨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이 이른바 ‘유일지도체계’를 천명한 1974년 이후 방송내용에 관한 모든 문제는 사전에 김 위원장에게 제의서를 올려 비준을 받아야만 실행할 수 있게 됐다. 노동당 선전선동부 방송과에서 변화하는 정세에 따라 구체적인 지침을 방송국에 하달하면, 이를 바탕으로 편집계획을 세워 다시 보고를 올려서 비준을 받는 식이다. 제작과정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임의로 수정하면 엄격한 추궁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전검열은 물론 방송이 나간 뒤에도 원고와 녹화 테이프를 수거해 정밀 분석한 뒤 문제가 발견되면 ‘검열주보’라는 보고서에 올려 책임자들을 처벌한다고 장씨는 회고했다.

    말이 좋아 혁명화지…

    “전부 녹화방송이니까 남한에서 말하는 방송사고 같은 건 전혀 없지만, 사전검열에서 걸려도 처벌을 받곤 합니다. 나만 해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서 ‘성’자를 빠뜨리는 바람에 3개월 동안 혁명화를 나간 적이 있어요. 단순한 오기여도 큰일인데 부주석까지 지낸 ‘김일’이라는 인물이 따로 있었으니 문제가 훨씬 커졌지요. 평양 역포구역에 있는 조선중앙방송 부업목장에 나가서 근로작업을 했어요. 매주 금요일에 방송국 직원들이 모두 나가 금요노동을 하는 곳이었는데, 여기에는 방송원들도 열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혁명화가 말이 좋아 혁명화지, 가면 술이랑 고기랑 잘 얻어먹고 잘 놀다가 옵니다.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없고요. (웃음) 목장 직원들도 우리가 왔다가 곧 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 극악하게 놀지 않아요. 방송국 안에서 숨도 못 쉬고 살다가 그렇게 바람 쐬고 오니 나쁠 것도 없다 싶더군요.”

    장씨는 자신이 탈북한 직후인 199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조선중앙방송 직원들도 큰 고초를 겪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간판급 아나운서들은 이때도 충분한 식량을 제공받았지만, 일반 방송원이나 기자, 작가들은 직접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캐먹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그는 끝으로 자신이 마지막으로 모셨던 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목소리가 사뭇 무거워졌다.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자원 입대했고,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종합대를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한 양반이었는데 부국장까지 지내고 내가 내려온 직후에 은퇴했다지요. 몇 년 후에 탈북한 가까운 지인이 전하기를 이 양반이 평양 장마당에서 구두를 깁고 있는 모습을 봤다더군요.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잘된 것인가, 그 사람들에게 내가 내려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얘기하면 안 믿으려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인생이 무엇인가 싶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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