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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기자의 Face to Face 29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전철 타면 박정희 생각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다”

  • 조성식 기자│mairso2@donga.com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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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친일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희와 맞담배 피우는 기자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종신 기자.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한 후 박정희는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내 퇴진을 요구했다. 3·15 부정선거에 군이 개입한 데 대한 책임을 지라는 뜻이었다. 분노한 송요찬은 박정희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헌병 8개 중대를 내려 보내 박정희의 동향을 감시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박정희에게 빨갱이 꼬리표가 따라다닌 것은 여수·순천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할 뻔했던 전력 때문이다.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자실에서도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에 대해 김씨는 뒷날 청와대에서 박정희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청와대 비서관을 할 때였다. 다음은 박정희가 그에게 들려줬다는 얘기다.

“광복이 된 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잠시 광복군에 들어갔다. 거기서 중대장을 맡았는데 저녁마다 회의가 열렸다. 맨날 서로 비판하느라 시끄러웠다. 그중에 빨갱이들이 있었던 거다. 나는 그들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귀국 후 군에 들어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할 때였다. 좌익사상을 가졌던 형(박상희)의 친구가 찾아와 일요일에 향우회가 열리니 꼭 참석하라고 했다. 그래서 참석했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몇몇 유명한 빨갱이가 주동이 돼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조리 좌익 조직에 가입시켰던 거다. 나는 거기에 가입된 줄도 몰랐다. 그것밖에 없다.”

그는 박정희의 친일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했다.



“한번은 내가 물어봤지. 일본 군대 뭐 하러 들어갔냐고. 독립운동하러 간 거냐고. 박 대통령 말이, ‘독립운동은 무슨? 왜놈들 밑에서 하도 더러워서 긴 칼 차러 갔지’ 하더라. 나는 그게 솔직한 답변이라고 봐. 만주군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시기엔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독립군도 없었다는 거야.”

일본군에 들어간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실력이 없어 그렇지, 실력만 있다면 다들 일본 육사 가고 군수 하려 했다. 사범학교가 가장 우수했고 그 다음이 상업학교, 농림학교였지.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건 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야. 당시 광복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일본놈이 되는 줄 알았다고. 학생들의 꿈이 소년항공대 입대였어.”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김씨는 부인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다. 박 대통령은 일본사람을 꼭 ‘왜놈’이라고 불렀다.”

부산일보의 줄초상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대통령 별장이 있는 저도 해변에서 기자들과 술 마시는 박정희. 왼쪽 첫 번째가 김종신 기자.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갖고 있던 김지태씨는 전국적인 갑부로 손꼽혔다. 전국 여기저기에 생사(生絲)공장을 갖고 있었다. 5·16 직후 그는 하루아침에 신문과 방송을 군사정부에 넘겨야 했다. 쿠데타 세력에 거사 자금을 대지 않았던 게 1차적인 원인이었다.

박정희와의 악연도 있었다.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낼 때 부산일보가 주최하는 고교 야구대회가 있었다. 김지태 사장은 주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역 실세인 박 사령관에게 시구를 부탁했다. 박정희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당일 시구를 한 것은 박정희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김 사장이 시구자로 나선 것이다. 박정희는 모욕을 느꼈다. 김종신씨는 이에 대해 “국회 국방위원을 지낸 김 사장이 평소 군을 얕잡아본 결과”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기분 나빴겠나. 내가 다 얼굴이 달아오르더라.”

박정희의 친구인 황용주 주필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김지태 사장의 불운이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최세경 논설위원과의 불화였다. 뒷날 KBS 사장을 지낸 최 위원은 황 주필과 같은 일본 학병 출신이었다. 역시 학병 동기인 정우식 헌병대대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최세경씨를 공보고문으로 추천했다. 서울로 올라가게 된 최씨는 김 사장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전셋집이라도 구해줄 줄 알았는데 “(부산일보 서울지사) 합숙소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최씨를 비롯한 10명의 최고회의 고문이 김지태씨를 성토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 김종신씨는 부산일보 서울지사로 발령 났다. 최고회의 출입기자였다. 법률고문인 신직수(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역임)씨가 어느 날 김씨를 불러 김지태 사장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최고회의 행정관 이모씨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편지를 본 김지태 사장의 얼굴이 노래졌다. 그 직후 김 사장은 수사기관에 끌려갔다.

“모든 게 신직수 작품이었다. 박정희한테 결재받아 5·16장학회를 만든 것도 신직수였지. 김지태 사장의 죄목은 재취한 여자와 독일에 갔다 오면서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들여온 것이었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다 뺏겼지.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로 바뀌었고.”

기록에 남아 있는 김지태씨의 공식 죄목은 재산 해외도피. 흥미로운 것은 김씨에 앞서 박정희와 친한 주필 황용주씨도 5·16 직후 체포됐다는 사실이다. 부산일보에 줄초상이 난 것이다.

황씨가 체포된 이유는 사상이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가 평소 신문 사설에서 혁신계를 두둔하고 교원노조 고문에 추대된 사실을 문제 삼았다. 황씨가 도피하자 경찰은 그를 지명수배했다. 김종신씨는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이 부산에 들렀을 때 황씨 구명(救命)을 부탁하기로 맘먹었다. 박정희는 항만사령부에서 열리는 부산 지역 장성들의 연석간담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김씨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박정희는 반가워하면서 그를 간담회에 참석게 했다. 간담회에서 박정희는 정치권을 비난하는 한편 사이비 기자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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