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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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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을사년의 11월은 을씨년스러웠다. 25년 전 을사조약 이야기를 당시의 국정책임자로부터 듣는 1929년의 세밑도 스산하다. 10월 말 뉴욕에서 불어온 세계대공황의 먹구름이 버림받은 조선 땅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11월 초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충돌사건은 날이 갈수록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적 패닉에 정치적 카오스가 뒤엉켜 고스란히 새해로 넘어가고 있다. 망국의 아침에 불쌍했던 사람들은 1930년의 전야에 불안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대답은 모던 경성의 겨울비 속에 잦아든다.
(제3장)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30년 조선일보 삽화.

거리는 찬비에 젖어있다. 한림은 장교정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섰다. 왼편으로 바라보면 청계천과 그 너머 북촌이고 오른편은 황금정과 그 너머 남촌이다. 올 때와는 반대로 길을 잡아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남산을 바라보는 걸음은 담배 한 대 태울 틈도 못되어 황금정 2정목 네거리에 닿는다.

한림은 담배에서 손을 뗀 지 3년이 넘었다. 1926년 4월 순종임금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뜨고 6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때까지 최고조에 달하던 그의 흡연은 그해 10월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서 신청사 낙성식을 치르던 무렵 끝을 보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야트막한 진흙 언덕 구리개는 1894년 갑오경장 때 동현(銅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병합이 되자 다시 개명해 황금정(黃金町)이 되었다. 비만 오면 질척대어 인적이 뜸해지던 황토 비탈길은 깎이고 포장되었다. 구리에서 황금으로 이름을 바꿔 단 거리는 새 서울, 경성의 중심가로 재탄생했다.

뗑뗑 소리를 울리며 전차가 황금정 3정목 쪽에서 들어온다. 전차는 속도를 줄이며 십자로를 횡단해 1정목을 향해 진입한다. 퇴근하는 직장인, 하교하는 학생, 짐을 이고 진 사람, 이런저런 행색들로 전차 안은 북새통이다. 전차는 황금정 입구라 쓰인 팻말의 지붕 없는 정거장에 바퀴를 멈추었다. 황금정 입구는 이와 교차하는 남대문통의 입구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신시가지 남촌의 일번지가 시작된다. 금융과 비즈니스, 그리고 소비와 환락의 중심으로 가는 입구다.



퇴물이 된 남녀칠세부동석

정거장에는 한 무리의 승객이 승차를 기다린다. 여기는 남대문 방향과 안국동 쪽 노선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환승장이다. 내리는 이보다 타는 이가 많다. 옥신각신 소란 끝에 절반만 겨우 태우고 다시 출발한 전차는 황금정 입구 네거리를 크게 좌회전해 남쪽으로 향한다. 문간에 붙어 선 승객들이 느슨한 회전력에 의해 바깥으로 되밀린다. 나무 출입문이 삐걱 소리를 낸다. 남녀와 노소가 한 몸으로 뒤엉킨다. 눅눅한 습기와 쿰쿰한 땀에 전 시큼한 내음이 한겨울의 바람 숭숭한 황혼 전차 속을 흐른다. 말로만 살아있는 노소동락(老少同樂)은 전차 안에서 현실이 된다. 그러지 않아도 퇴물이 되어가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전차의 등장과 함께 종막을 고하고 있다. 신세기와 시작을 함께한 전차 운행이 어언 30주년이다.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사라졌다. 휘황한 거리에서 사람들은 날로 낯모르는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친다.

26일 오후 1시20분경에 경성역전(京城驛前)을 출발하여 안국동(安國洞)을 향하던 176호 전차가 죽첨정(竹添町) 2정목 121번지 앞을 지나다가 돌연 탈선이 되어 차 안에 빽빽하게 붐비던 승객들은 넘어지고 자빠지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

의주통(義州通)을 따라 올라와 서대문 네거리를 오른쪽으로 돌던 목요일 점심나절의 만원 전차가 궤도를 벗어난 사고다. 3개월 전 9월에 있었던 죽첨정 전차탈선에 대한 기사를 한림은 떠올린다. 경성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교통사고 여러 건을 모은 사회면 머리기사의 일부였다. 그 서두는 이러했다.

그러지 않아도 교통사고가 빈발하던 경성 장안은 나날이 몰려드는 박람회 구경꾼들로 말미암아 요즘 교통사고는 더욱 빈발하여 배전(倍前)의 교통 순사로 교통을 정리해오는 중이나 워낙 시가지가 아직 채 정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차 자동차가 오가는 혼잡한 거리에 익숙지 못한 시골 구경꾼들은 좌우에서 울리는 요란한 경종(警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전차 자동차가 진행하는 앞을 갑자기 횡단하는 등 교통 순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숭례문 근처 일본인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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