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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논픽션 응모 최우수작

연-태초(太初)의 품으로 들어가다

  • 이희숙

연-태초(太初)의 품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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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츠린 시드니의 겨울을 떠나 다윈에서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봄을 뛰어넘어 활기찬 여름이 온 듯했다. 감겨있던 모든 끈에서 풀려나 설레는 마음으로 홀로 나서는데, 자석에라도 끌려오듯 서먹한 사이인 두 남자가 양쪽 구석에서 다가왔다. 산들바람 같은 내 계획이 괘씸한 두 남자에게 방해받는다는 불쾌감에 기분이 잠시 언짢아졌다. 그러나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순간은 상대방 이상으로 내 힘이 빠져나가면서 죽어가는 시간이다. 고요히 생각해보면 이미 미움이 아니야”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서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Hi” 하고 남자들을 반겨줬다. 그러나 나보다 목이 하나 더 있듯 키 큰 두 남자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시큰둥하게 나를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평생에 몇 번 없을 여행인데, 자라목같이 웅크린 이런 남자들과 함께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기왕이면 내 마음을 찰랑거리게 할, 그런 남자들과 동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우리 일행이 모인 곳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들어 상쾌한 그런 커피숍이었다. 머리카락이 살랑 흩날릴 정도의 산들바람과 향기로운 커피 한 잔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한가롭게 차려진 별식까지 덤으로 나와 마치 귀족이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아침을 먹는데 문득, 돈을 아끼려고 여행 때마다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다니던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아이들에게 더 풍요로운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허전해졌다.

잭은 커피만 주문했다. 건장한 체격과 미국식 억양의 맑은 음성에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였지만, 면도를 안 해 히끄무리한 턱밑 수염 때문인지 그의 인상은 침울하고 피곤해 보였다. 빌은 늘 바나나뮤즈나 뜨거운 초콜릿을 마시는데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며 내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몇 년을 함께 등산하다보면 회원들의 웬만한 습관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나는 그와 오랫동안 여러 번 등산을 해왔다. 길 건너편에 자전거대여점이 보여 일어나 가보려 하는데, 귀에 익은 높은 톤의 콧소리가 수선스럽게 들려왔다.

“Here you are!”(여기 있구나!)

고개를 돌리자 턱밑으로 쪼여 맨 찌그러진 회색 헝겊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쭈글거리는 허름한 흰색 면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다 해진 운동화를 신은 그랜이었다. 그 옆에는 그랜의 파트너인 로이도 있었다. 반짝이는 하얀 피부와 수선스러운 음성을 가진 그랜은 언제나 거침없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여자였다. 그랜과 로이는 해외로도 등산을 자주 다니는 사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늘 흥미로운 면을 보곤 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상의하는데 빌이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 늘 혼자인 그가 여행지에서 전화를 하는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와 그랜은 자전거를 빌려 관광 지도를 보면서 시내를 돌기로 약속했다.

다윈에서의 하루

다윈은 동서양의 희망봉이라 할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축복받은 도시로, 그동안 동서양을 잇는 등대 역할을 해 왔다. 다윈은, 1911년에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명칭이라고 한다. 찰스 다윈은 18세기 후반의 생물학자로 진화론과 유전이론의 창시자이며 동시대를 살다간 문학가 벤조 피터슨과 함께 호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세기 진화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호주로 들어왔고 호주 생태계를 진화이론에 응용했다. 한편 호주의 자원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주도하는 정치인들은 다윈의 우성이론을 통해 그들만의 우월주의로 백호주의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원주민들을 통제하고 중국인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그랜은 호주가 원주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연박물관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곳이었다. 그랜은 망설이지 않고 어린아이 손에서 빵 반쪽을 뺏다시피 얻어와 나에게도 나누어줬다. 그녀는 상대방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yes”란 응답을 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물위에서 빵 조각을 들고 있으니 잉어 종류의 물고기들이 튀어오르며 빵을 받아먹었다. 물고기들은 새들이 날아오는 낌새를 진동이나 그림자로 느끼면 물속으로 잽싸게 숨었고, 펠리컨은 주위를 돌다가 그런 물고기를 재빠르게 한 마리씩 채갔다. 자연박물관은 그 지역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주민이 자산을 기증해 지어졌다고 한다.

식물원에선 희귀한 난 종류와 여러 종류의 식충식물이 눈에 띄었다. 뚜껑을 벌려 곤충이 안으로 들어오면 서서히 닫아버리는 표주박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보일 듯 말듯 아주 작은 이끼꽃이 개미를 쌈 싸먹는 식충식물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런 쬐끄마한 게….

식물원 한 곳에선 결혼식이 있다며 출입을 금지한다. ‘내 아이들 결혼식도 이곳에서?’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다른 한쪽에는 창문 방향을 조정해 태풍중력을 조절하게 만들어진 견고한 조립식 사무실이 전시되어 있다. 1974년 성탄일 아침에 시속 217㎞로 불어대는 폭풍으로 다윈에서는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70% 가량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점심 때가 되어 햄버거를 사 먹겠다고 하자 그랜은 “저녁이 되면 잘 먹을 텐데, 왜 돈을 쓰냐”며 치즈와 햄을 넣어 만든 빵 반쪽을 나눠준다. 역시 잔돈을 세는 그녀답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용 선박들을 정착시키는 과정을 지켜본다. 먼저 바닷물을 빼내고 배를 들여놓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지루했으나 흥미롭게 지켜보는 그랜을 독촉할 수가 없었다. 바람막이가 없는 육지의 맨 꼭대기이므로 폭풍 대비를 든든히 한다. 일 년에 단지 몇 번 비행기를 타고 와서 휴가를 보내는 선박주를 대신해 관리인이 가끔 가동을 한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 상상 못하는 여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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