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과로, 스트레스 시달린 ‘강골’ 효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3-03-20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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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은 대부분 즉위하면서부터 상사(喪事)로 인해 건강에 타격을 입는다.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들을 제외하면 조선의 모든 왕은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왕정을 시작했다. 충효(忠孝)가 국가운영의 근본 가치였던 만큼 임금은 상사에 있어 백성의 모범이 돼야 했다.

    문제는 선대왕의 장례 절차가 몸을 해칠 만큼 복잡하고 힘들었다는 점. 국왕 복식(服飾)을 하고 겨우 몇 시간 사극에 출연하는 연기자들도 몸살이 날 지경인데, 3년상을 치른 조선의 허약한 왕들은 오죽했겠는가. 체력 소모가 엄청났음은 불문가지. 오랜 상을 치르면서 임금의 몸은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해 무리하게 살을 뺀 복서들처럼 흐느적거린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북벌론(北伐論)으로 잘 알려진 효종(李淏·1619~1659)도 상사로 인한 과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최초의 질병 기록은 아버지 인조의 장례식 후에 나타난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 10월 16일 실록은 “상(上)이 집제(執制·장례)를 너무 지나치게 해 날로 매우 수척해지고 오랫동안 평안치 못하여 여러 아랫사람들이 근심하였다”고 적고 있다. 11월 19일에도 “약방에서 주상이 몸이 불편하니 친히 삭제(朔祭·왕실에서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던 제사)를 행하지 말기를 청하였다”고 기록했다.

    효종의 즉위엔 개운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친형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데다 대신들이 그의 아들인 원손(元孫)의 왕위 계승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인조의 상사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일까. 북벌론으로 강골 이미지가 뚜렷한 효종은 의외로 즉위 10년 만에 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이었다.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감기, 당뇨 후유증이 죽음 불러



    실제로 효종은 청나라를 치겠다는 일념에 스스로 철퇴나 청룡도를 익히는 등 무예 연마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무예를 연마한다고 오랜 산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매년 감기를 앓았으며 그로 인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효종의 건강을 인생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재위 초반에는 감기로 고생을 했으며 중후반에는 소갈증상과 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종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는 종기 치료 중 출혈사고로 숨을 거뒀다.

    효종의 감기 치료와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한의학사에서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일종의 면역질환인 감기는 오늘날의 서양의학도 적확한 치료제를 찾지 못해 대증(對症)치료만 하는 형편이다. 승정원일기는 효종의 감기 증상에 따른 처방의 변화와 효과 유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은 물론, 감기에 관한 한 조선 최고의 치료술을 보여준다. 효종의 내밀한 체질적 특징까지 알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감기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콧구멍이나 기도를 타고 들어오면서 생기는 질환이다. 적이 침입하면 인체의 국방부 격인 면역세포들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다.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나오고 재채기를 하는 것도 면연력이 벌이는 전쟁의 산물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물 폭탄이 콧물이라면 재채기는 바람 폭탄이다. 재채기 때 나오는 바람의 세기는 시속 180km에 달한다. 오한으로 몸이 덜덜 떨리고 열이 오르는 것도 세균과 바이러스를 열로 몰아내려는 면역반응이다.

    현대 의학은 아직 감기를 잡아내지 못했다. 우리가 감기 치료제라고 먹는 약은 열을 내리고 콧물과 기침, 염증을 멈추게 하는 각각의 증상 개선제일 뿐이다. ‘감기 치료제를 만들면 노벨상감’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세균과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몸의 면역계다. 한의학은 우리 몸의 발열 작용을 면역반응을 활발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인식한다. 해열제를 써 무리하게 열을 내리면 면역계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몰아내기 위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므로 그만큼 더 힘들어진다.

    ‘감기에 걸리다’를 영어로는 ‘캐치 어 콜드(catch a cold)’, 한자로는 ‘상한(傷寒)’이라고 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감기를 체온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질환으로 인식한 것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면역성이 약해지고 그로 인해 질환이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인 질환이 감기다. 일부 면역학자들은 체온이 0.5도 떨어지면 면역력이 35% 저하하고 1도 오르면 6배 정도 활성화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아베 히로유키 박사와 같은 학자들이 그들로, 체온이 오르면 혈액의 흐름이 빨라지고 그에 따라 면역세포인 백혈구가 세포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허장성세 약골 임금님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효종의 ‘식탐’을 꾸짖은 우암 송시열과 효종이 앓았다는 종기.

    한의학적 감기 치료는 현대의학과 달리 인체의 면역반응을 돕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감기에 걸렸을 때 고기를 멀리하고 콩나물이나 뭇국, 생강이나 파뿌리 달인 물을 먹으면서 이불을 덮고 땀을 내도록 하는 게 그것이다. 생강이나 파뿌리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콩나물이나 무는 배설을 촉진해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체외로 빨리 쫓아내게 한다. 한의학은 감기에 걸렸을 때 고기를 먹으면 소화기에 필요 이상의 부담을 줘 면역능력을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본다.

    소갈증(消渴症)이라 불리는 당뇨병도 체온이 떨어져 발생하는 질환이다. 체온이 36.5도 이하로 떨어지면 체내 대사활동이 느려지고 중간 대사물질이 분해(연소)되지 않은 채 남게 되는데, 이것이 혈액 안에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한다. 체내의 당분이 대사 작용을 통해 연소되지 않고 혈액 속에 노폐물로 남으면 당뇨병이 생긴다. 단것을 별로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당수치가 높아지거나 당뇨병에 걸린 사람들이 이런 경우다. 모두 체온이 떨어져 발생한다는 점에서 효종이 감기와 당뇨병을 동시에 앓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한의학은 감기를 외감과 내상 2가지로 분류한다. 외감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외부로부터 직접 공격해 일어나는 경우이고, 내상은 주로 음식이나 스트레스, 과로로 야기되는 체온과 신진대사의 저하가 원인이다. 증상에도 차이가 있다. 외감은 발열이 지속적이고 근육 뼈마디가 심하게 아프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지만 맛은 느껴지는 반면, 내상은 발열이 그쳤다 다시 시작되고 뼈마디에 힘이 없고 늘어지며 음식 맛도 잘 모른다. 또한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특징도 있다.

    효종은 강한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재위 10년 동안 내상이 원인인 감기를 늘 앓았다. 즉위 초기의 무리한 상사에 따른 과로와 반청(反淸)주의에 따른 스트레스로 체력이 약화된 탓이다. 이 때문에 효종의 감기 치료도 내상성 감기에 자주 쓰는 곽향정기산이 처방됐다. 이 처방은 조선 후기 유재건이 쓴 ‘이향견문록’이라는 책에 ‘만병통치약’으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처방의 구성은 ‘위대는 평범이외다’라는 춘원 이광수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별다를 게 없다. 곽향 소엽 백지 대복피 백복령 후박 백출 진피 반하 길경 등 모두가 습기를 말리고 온기를 불어넣는 평범한 약재다.

    처방을 해석하면 이렇다. 위장은 물과 음식(水穀)의 바다로, 이를 삭히고 쪄서 잘게 분해한다(腐熟水穀). 그래서 술처럼 맑아진 영양분은 간으로 보내고 탁한 찌꺼기는 땅으로 돌려보낸다. 과로나 스트레스로 열기가 줄어들면 위장은 덜 말린 옷처럼 차고 축축한 상태가 돼 영양분을 간에 보내지 못한다. 이를 한의학에선 ‘차고 습하다(寒濕)’고 정의한다. 이에 대한 처방은 차고 축축해진 위장을 따뜻하게 만드는 약재들로, 차고 축축한 옷을 햇빛과 바람으로 말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곽향정기산은 수분을 배출하고 온기를 북돋워 내부의 한습으로 인해 일어난 감기증상을 치료하는 평범한 처방이다.

    효종의 오한두통 증상에 주로 쓰인 청서익기탕 처방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기력이 떨어질 때 쓰는 보편적 매뉴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효종은 위장이 약하고 체력적으로 약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침 증상에 삼소음, 행소탕, 청폐탕 등 약한 위장 기능을 감안한 처방을 쓴 것도 그 증거다. 소화불량과 설사, 불면 증상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곽향정기산 보중익기탕 죽여온담탕 등을 처방하는데, 이들은 모두 병에 저항할 힘이 없어질 정도로 체력과 기력이 떨어질 때 쓰는 처방이다.

    당뇨 유발한 ‘성질’과 식탐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효종의 감기 처방에 많이 쓰인 연(蓮).

    효종은 즉위년부터 소갈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원년 2월 24일 황금탕, 즉위 2년 3월 12일 청심연자음, 즉위 3년 6월 4일 양혈청화탕을 각각 투여했는데 이들은 모두 동의보감 소갈문에 쓰인 치료 처방이다. ‘消’는 몸 안의 진액이 말라 들어가 윤기가 없어진다는 뜻이며 ‘渴’은 목마름 증상을 의미한다. 몸 안의 진액인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긴다는 점과 일단 병에 걸리면 물을 자주 마신다는 점에서 현대의 당뇨병 해석과 똑같다.

    특히 효종은 성격과 식습관에서 당뇨를 유발할 여러 요인을 지니고 있었다. ‘욱’하는 성격에 참을성이 없었던 점은 대신들로부터 여러 차례 지적을 당한 바 있다. 효종 3년 참찬관 이척연은 “지난번 경연 자리에서 ‘죽인다’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라며 왕의 과격한 언사를 나무랐다. 효종 5년에도 기록이 보인다. “조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꾸짖고 심지어는 발끈 진노하시니 말소리와 얼굴빛이 너무 엄해 보는 사람이 어리둥절해합니다.”

    효종 9년에는 왕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반성한 기록도 있다. “나에게 기질상의 병통이 있다. 한창 성이 날 때에는 일의 시비를 따지지 않은 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행하여 꼭 끝을 보고서야 그만 두었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았다.”

    당뇨병의 적인 식탐도 도마에 올랐다. 효종 8년 8월 16일 우암 송시열이 작심하고 나무란다. “신이 듣건대, 금년 봄에 영남의 한 장수가 울산의 백성들을 상대로 전복을 따 진상할 것을 매우 급하게 독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수가 말하기를 상께서 훈척대신을 시켜 그렇게 요구하셨다고 했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음식 탐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식탐에 대한 지적은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는데, 신하들은 중국 남송대의 대학자이자 주자(朱子)의 친구였던 여조겸(呂祖謙·1137~1181)의 일화를 두 번이나 거론하며 효종에게 식탐을 경계하라고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여조겸은 젊은 시절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상을 때려 부숴버릴 정도로 성질이 거칠었는데 후일 오랫동안 병을 앓으며 논어의 한 구절을 읽은 후 포악한 성정을 고치고 대학자로 거듭났다. 여조겸에게 깨달음을 준 논어의 구절은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남의 허물은 크게 탓하지 말라’는 대목이었다.

    갈증과 열 식히는 蓮

    효종 7년 4월 20일의 승정원일기에는 효종의 증상을 확실하게 소갈로 보고 맥문동음(麥門冬飮)이라는 처방을 낸 기록도 있다. 동의보감은 소갈에 대해 ‘심장이 약해(心虛)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며, 가슴속이 달아오르면서 답답하고 편치 않아 손발을 버둥거리는 증세(煩躁)가 나타나고, 목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고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규정하는데, 이는 효종이 기질상 보여주는 화병과 번열(煩熱), 구갈(口渴) 등의 증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동의보감에서 이런 소갈 증상에 주로 권유하는 약물은 연뿌리 즙 오미자 맥문동 천화분 인삼 등인데, 실제 효종에겐 연자죽과 연자육(蓮子肉)이 든 청심연자음, 양혈청화탕이 자주 처방됐다.

    진흙탕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불교에선 청정한 불심(佛心)의 상징이다. 한의학의 눈으로 보면 그 의미는 더 깊다. 연(蓮)은 욕망의 불을 물로서 진정하는 작용을 한다.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은 모두 뿌리가 끌어당긴 수분과 영양에 의존해 자란다. 물에 잠기면 뿌리, 줄기(연대), 잎이 모두 죽는다. 반대로 물이 마르면 가지와 잎은 시들지만 뿌리는 죽지 않는다. 연뿌리는 물을 끌어올려 무더운 여름의 열을 식히고 푸르름을 유지한다. 상부의 열을 식히면서 촉촉하게 하는 작용이 당뇨의 갈증과 번열 증상을 식혀주는 효능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 뿌리를 캘 때 여성들이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풍습은 그 모양이 건강한 남자의 성기를 닮았다는 데서 비롯된 구태(舊態)다. 연잎과 연대의 연결부분에 구멍을 뚫어 술이 흘러내리게 한 것을 ‘벽통주’라 하는데 연향이 술 속에 녹아들어 술맛이 독특하다. 술의 열을 식히는 효과도 있다.

    한약으로 주로 쓰이는 부분은 연꽃의 열매인 연자육이다. 흔히 연밥으로 불리며 꽃이 지고 씨방 속에서 생겨난다. 연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꽃으로 피워내듯, 연자육은 마음에 맺힌 열을 풀어내 콩팥으로 배설한다. 청심연자음이란 처방의 군약(君藥·처방에서 가장 주가 되는 약)으로 쓰이는데 흔들렸던 평상심을 안정시킨다. 특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목마름, 다리가 약해지는 상열하한(上熱下寒) 증상을 치료한다. 화병이나 만성질환, 특히 당뇨병 고혈압 성기능 쇠약(조루증상)에 효능이 크다.

    교수형당한 어의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동의보감은 “당뇨병이 생긴 지 100일이 지나면 침과 뜸을 놓지 말라”고 경고한다.

    효종의 잦은 감기와 소갈증은 결국 화를 불렀다. 소갈증이 부른 종기가 화근이었다. 동의보감 소갈편에는 ‘소갈병의 끝에 종기가 생긴다’고 경고한다. ‘소갈병이 마지막으로 변할 때 잘 먹으면 뇌저(腦疽)나 등창이 생기고, 잘 먹지 못하면 반드시 중만(中滿·배가 그득하게 느껴지는 증상)이나 고창(·#53703;脹·배가 땡땡하게 붓는 병)이 생기는데 이것은 다 치료하기 어려운 증상이다.”

    효종은 결국 즉위 10년 만인 1659년 5월 4일 종기 때문에 숨을 거뒀다. 직접적인 사인은 머리 위(뇌저)에서 시작해 얼굴로 번진 종기였다. 일부에선 효종이 사망 두 달 전 송시열과의 기해독대에서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는 점을 들어 ‘효종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한의학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이는 임금의 건강을 책임진 어의 등 의관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진료 상황을 꼼꼼히 묘사한 실록과 동의보감의 기록을 대조해보자.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어의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종기의 독이 흘러내리며 농증이 생기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반면 어의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상이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해 침을 맞았는데 침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라고 했다. 그런데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아 나왔다. 침이 혈과 경락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서 상이 승하하였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소갈의 금기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병이 생긴 지 백일이 지났으면 침이나 뜸을 놓지 못한다. 침이나 뜸을 놓으면 침이나 뜸을 놓은 자리에서 헌 데가 생기고 그곳에서 고름이 나오는데 그것이 멎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

    소갈병의 금기는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현대의 당뇨병 환자들에게도 한의학적 지침이 될 만하다. 첫째는 금주, 둘째는 금욕(성생활을 금하는 것), 셋째는 짠 음식과 국수다.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풀, 광물성 약재를 쓰는 것도 금기 대상이다.

    어쨌든 어의 신가귀는 ‘소갈병 환자에게 침을 놓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이 한의학의 교과서인 동의보감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고 말았다. 신가귀는 시침을 말린 동료 유후성과 함께 효종을 돌보던 6명의 어의 중 한 명으로, 무인 출신이지만 침을 잘 놓아 인조가 특별히 의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진료기록을 자세히 보면 신가귀가 동의보감의 금기를 어긴 것이 이때가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효종 9년 7월 3일 신가귀는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는다. 실록에는 ‘족부에 생긴 종기에 침을 놓은 자리에서 진액이 흘러나오면서 멎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신가귀는 이때도 효종의 종기를 소갈병의 연장선에서 보지 못했다. 무인 출신으로 침에는 밝았을지 몰라도 병증의 연관관계는 잘 몰라 실수를 범한 듯하다.

    하지만 신가귀의 족부 사혈요법은 효종의 피가 멈추면서 일부 효과를 봤다. 신가귀는 이를 바탕 삼아 이듬해 5월에도 똑같은 시술을 하다 효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족부 종기를 치료받은 효종은 어의 유후성의 만류에도 불구, 지병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신가귀를 억지로 불러내 얼굴의 종기를 찔러 피를 내게 함으로써 죽음을 자초한 셈이 됐다. 이 일로 신가귀는 효종 사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동료 어의들도 유배를 가거나 곤장을 맞았다. 당초 신가귀는 허리를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맏아들인 현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종기는 찌르는 게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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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내경은 종기가 곪을 때 봉침을 쓰라고 했고, 동의보감은 거머리를 이용해 고름피를 짜내도록 했다.

    효종은 세 차례에 걸쳐 종기 증상을 앓았는데, 효종 9년 1월 21일에 시작된 팔 부위의 종기와 같은 해 6월 8일 낙상으로 시작된 족부 어혈증상으로 인한 부기, 효종 10년 4월 27일에 시작된 머리 부위의 종기다. 효종 10년 윤 3월 9일 예조판서 홍명하의 말을 담은 실록의 기록은 효종의 종기 증상이 소갈병, 즉 당뇨병에 의해 생긴 합병증임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지난해 성상께서 마루에 떨어졌던 우환은 전고(前古)의 제왕들에게는 없던 환액(宦厄)이었습니다.”

    다리를 다쳤으면 삐거나 부러지거나 멍이 들었어야 하는데 효종의 증상은 달랐다. 발이 붓고 힘이 없으면서 말라 들어가 통증이 너무 심했다. 이는 바로 당뇨의 후유증으로 생긴 증상이다. 현대의학에서도 당뇨병 환자의 3분의 1 정도에서 말초신경병증과 혈관질환으로 족부증상이 일어난다고 밝히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효종의 족부증상은 소갈증에 의한 합병증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효종의 죽음을 두고 침을 놓은 어의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신가귀가 침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침 자리는 효종의 종기 치료나 죽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엽적 문제일 뿐이다. 비록 신가귀는 이때의 실수로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것은 소갈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지 수전증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신가귀가 종기를 사혈 침으로 치료한 것은 소갈병의 합병증만 아니었다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었다. 신가귀를 말린 동료 어의 유후성도 산침(散鍼)으로 효종의 눈 주위 종기를 치료한 바 있다. 산침은 중국 명나라 때 의서인 의학입문에도 나오는 것으로 경락상의 혈자리에 침을 놓지 않고 병소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아픈 곳을 따라 찌르면서 침을 놓아 피를 빼는 방식이다.

    이처럼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은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고려가 만든 것이란 주장도 있다)이자 동의보감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내경’ 소문에는 ‘중국의 동쪽지역은 물고기를 먹고 짠 음식을 좋아해서 옹양(癰瘍), 즉 종기의 질병이 많은 곳으로 폄석(?石·돌로 만든 침)으로 치료한다”는 조문이 있다. 우리나라가 예부터 식습관으로 인한 종기가 많은 나라로 지목된 것. 침구법을 집대성한 황제내경 영추의 옥판(玉板)편은‘고름피가 잡힌 경우에는 오직 폄석이나 피침(?鍼·곪은 곳을 찢는 침) 봉침(蜂針·벌의 침)으로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을 정석으로 권하고 있다.

    동의보감도 마찬가지로 ‘종기가 곪을 때는 열십자로 찢고 고름을 배출하는 것이 좋다’며 ‘절개해서 고름을 빼내라’고 충고한다. 두텁게 살 깊숙이 생긴 종기를 침으로 깊이 뚫어 여는 낙침법(烙鍼法)도 소개했는데,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침을 달궈서 쓰도록 하고 있다. 침을 찔렀는데도 고름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털 심지나 종이 심지를 꽂아 넣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는 뒤처리 방법까지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드라마 마의는 史實?

    거머리를 이용한 종기 치료법도 나온다. 종기에 물로 적신 종이를 얹으면 빨리 마르는 지점이 꼭대기인데 그곳에 거머리를 올려두면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는 얘기다.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는데 물에 넣으면 살아난다고 치료 경험담까지 기록해놨다.

    요즘 한방 외과술을 주제로 한 ‘마의’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관념에 얽매여 한의학에는 외과학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반인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파격적 내용이 많아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제 많은 이가 한의학에는 신체에 칼을 대는 외과학이 아예 없었을 거라고 여기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밝힌 모든 종기 치료법들은 외과학 그 자체다. 다만 서양 외과학이 메스, 즉 칼을 주로 쓰는 반면 한의학에선 여러 종류의 침을 쓸 따름이다.

    당뇨 후유증 종기에 웬 사혈? 과다출혈로 마흔에 절명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진행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과연 우리 한의학은 드라마 마의의 주인공 백광현(1625~1697·숙종 때 어의)처럼 머리에 구멍을 뚫어 뇌종양을 치료하고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할 만큼의 대담무쌍한 외과학의 전통을 가졌을까. 과연 한의학적 외과술이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마의의 치료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기 때문에 한평생 고생하다 죽은 현종 편에서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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