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지면 검푸르다
단풍도 진할수록 검붉다
깊을수록 바닷물도 검푸르고
장미도 흑장미가 가장 오묘하다
검어진다는 것은 넘어선다는 것
높이를 거꾸로 가늠하게 된다는 것
창세전의 카오스로 천현(天玄)으로
흡수되어 용해되어버린다는 것
어떤 때얼룩도 때얼룩일 수가 없어져버린다는 것
오묘 기묘 절묘해진다는 것인데
벌건 대낮이다
흐린 자국까지 낱낱이 까발려서 어쩌자는 거냐
버림받은 찌꺼기들 품어 안은 칠흑 슬픔
바닥 모를 용서의 깊이로 가라앉아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의
검은 혁명을 음미해보자
암흑보다 깊은 한밤중이 되어서.
제목과 동일한 위의 시는 신작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시집은 핵심주제를 검은색으로 했다. 잘못 실수 실패 때 얼룩 모자람 바보 숙맥 짓 같은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수치 등을, 그늘 뒷전 어둠 밤 검정 등으로 예찬했다.
나이 타령은 하고 싶지 않아, 나이를 물을 때마다 얼른 마흔한 살이라고 대답한다. 태어나보니 마흔한 살이더라고 하면, 출생연도가 곧 나이임을 알아차리고 기발하다고도 한다. 시인의 나이가 어떻게 세상 나이대로인가? 내 나이는 내가 정한다. 그러나 그럴듯한 근거를 출생연도로 하여 억지를 부리고 싶어서다. 돌이켜보니 마흔 살부터 살 만해졌다. 퇴직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옮겼고, 불완전했지만 집도 장만했고, 늦었지만 아이들도 기저귀를 떼어,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저래 마흔한 살을 시점이자 종점으로 평생 나이로 정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빛나는 성공보다는 실패 실수 잘못 억울함 등이 내 평생을 마흔한 살로 정하게 해준 듯하다. 너무 쉽게 상처 받고 수모와 굴욕에 시달려왔다. 누군들 나와 같지 않았으랴마는, 또 내가 타인들에게 그 이상의 상처를 왜 아니 주었으랴만, 그렇게 주고받은 상처로 이만치라도 편견이 줄어들었고, 때 묻지 않은 순결, 순전의 배타적 고발적 백색보다는, 어떤 때 얼룩도 받아 감춰주고 용서해주는, 치유도 받고, 다시 천연색으로 태어날 용기와 사기(morale)를 주는 검정이 더 좋아졌다. 때 묻히고 잘못을 밥 먹듯이 하며 살아와, 얼마나 가증스러워졌는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이 적 밖에서 당하고 눈물을 감추며 시무룩해서 돌아오면, 캐묻지도 야단치지도 않고, 품어주어 얼굴 파묻을 수 있던 엄니의 검정치마폭이 떠올랐다. 흰색 등 옅은 색 옷이 더 어울린다고들 하지만, 그런 옷의 통제와 지배를 당하느니, 커피를 흘려도 음식이 묻어도 개의치 않을 편안함을 주는 검은색 짙은 색이 더 좋았다. 산다는 것은 용서받을 짓을 자꾸만 보태는 것 아닌가.
검은 눈동자나 태양 속 흑점 등은 물론 사제와 수도자의 검은 옷, 스님의 먹물 들인 회색 옷, 핏발 선 눈동자를 식혀주는 밤하늘과 밤의 어둠…이, 대낮의 눈부심보다 내겐 더 유익했다. 대낮조차 어둠에서 태어나고, 검정의 깊고 멀고 높음이 곧 천현(天玄) 아닐까? 아이 적 배운 천자문의 첫 구절 천지현황에서 천현(天玄)이란 천흑(天黑)이 아니라고, 검정에서 우러나는 멀고 높고 깊음이고 모든 천연색을 넘어선 아득함이라던 할아버지 말씀이 왜 이리도 늦게야 생각나던지.
서울 서초동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고사 직전의 향나무를 본다. 본래는 서초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던 당산나무(老姑堂神木)였으리라. 마을마다 있는 신목은 마을의 안녕과 다산 풍요를 관장하는 노고신(老姑神)의 신체 즉 신목(神木)이라고 동제(洞祭)도 지내곤 했다. 따라서 삼신할미처럼 할머니의 무한 자애와 용서, 그리고 주민과 농사 과일 가축의 다산풍요를 담당하게 했다. 더구나 나무 그늘은 주민들의 쉼터였으니. 그 그늘에서 땀 씻고 퍼질러 앉아 휴식하며, 삶의 모든 수고로움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당산나무 그늘은 안식년 안식일처럼, 때 없이 찾아와 안식(安息)과 회복의 시간과 기회를 누리게 해주었다. 그늘의 어두움이 주는 휴식은 밝음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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