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호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비잔틴 제국의 성상파괴운동

  • 박배형|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미학 baipark2000@hanmail.net

    입력2013-05-22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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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클루도프 시편’의 성상파괴운동을 묘사한 삽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쓸개즙을 적신 스펀지를 들이대는 것에 빗대 예수의 성상에 회반죽을 칠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850~875년경, 모스크바 국립역사미술관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 너희는 신상들을 만들어 내 곁에 두지 못한다. 은으로든 금으로든 신상들은 만들지도 못한다.”(출애굽기 20:4-5, 23)

    “그러므로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야훼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일체 어떤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모습이나 공중에서 날개 치는 어떤 새의 모습이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어떤 동물의 모습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도 안 된다.”(신명기 4:15-18)

    이미지를 사랑하는 대중

    오늘날은 이미지 시대다. 이미지만의 시대는 아니지만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글자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직접 감각하고 그로부터 느낌을 얻는다. 전자매체가 발전한 덕분에 이러한 경향은 증폭되고 있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미지 개선에 애쓴다.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미지 메이킹’이 처세 기법으로 간주된다.

    이미지란 넓게 얘기하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감각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온갖 종류의 형상을 말한다. 대개 2차원 형상을 뜻하지만 3차원일 수도 있다. 이미지는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머릿속에 바로 그려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문자를 통해 표현된 생각이나 사상은 추상적이지만, 이미지는 시·공간적이고 감각적인 특성으로 인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것이 된다.



    이미지는 ‘어떤 것’의 이미지이기에,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것’ 그 자체는 아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미지는 갖고 있는 매력과 마력으로 인해 애호되기도 했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는 이미지의 영향력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인정해왔음을 뜻한다. 모든 이미지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이 이미지라는 것을 문제 삼았다면,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왔음을 인간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회화나 조각처럼 조형예술로 일컫는 것들이 이미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플라톤이 ‘국가’ 편에서 보여준 화가와 시인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이미지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물이나 사태의 참된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할 위험이 있고, 우리의 감성에 과도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도 막지 못한 이미지 범람

    플라톤은 어떤 사태나 사물의 본질을 이데아에서 찾았다. 이데아란 정신의 눈으로만, 즉 이성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은 이데아가 불완전하게 반영된 것으로 봤다. 이미지는 불완전하고도 덧없는 현실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덧없는, 진리와 진실로부터 동떨어진 감각의 대상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미지를 진짜라고 믿는 것은 가짜를 진짜로 믿는 오류에 빠지는 것을 뜻했다.

    플라톤은,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이 진짜라고 믿게 하는 일을 하는 이들을 화가나 시인과 같은 예술가로 봤다. 그래서 예술가를 위험한 인간으로 봤다. 플라톤은 ‘국가’ 대화편에서 이미지와 예술가를 가혹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이미지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예술가에 대한 민중이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예술가들의 지위가 어떠했든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도 이미지는 계속 생산됐고 많은 예술가가 칭송을 받았다. 대중의 이해를 잘 얻어내지 못한 것은 오히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쪽이었다.

    오늘날에도 범람하는 이미지에 대해 비판적 언사를 늘어놓는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이미지의 범람을 막는 데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존재한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이미지의 양적 팽창을 가능케 해 확고한 이미지 시대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플라톤이 주장했듯 이미지는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 주장은 이미지를 향한 대중의 욕망을 잠재울 이유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미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만족감 깨달음이 너무 커서, 그것이 줄 수도 있을 나쁜 영향은 무시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이미지가 언제나 애호의 대상 또는 무해한 것으로 여겨져온 건 아니다. 플라톤 이후에도 이미지의 의미와 가치를 두고 벌어진 논란과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성상(聖像)파괴운동이다. 이 운동은 비잔틴 제국 시대에 벌어진 것으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갖는 이미지다.

    성상파괴운동은 예술적, 종교적, 정치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히며 장기간 지속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비잔틴 제국과 비잔틴 미술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축복하는 예수 그리스도’, 6세기, 나무판에 납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산(왼쪽) ‘성 테오도루스와 성 게오르기우스를 옆에 두고 옥좌에 앉은 성모’, 6세기, 나무판에 납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시나이 산(오른쪽)

    4세기에 본격화한 성상 제작

    비잔틴 제국(AD 330~1453)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거의 1000년간 존속한 동로마 제국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비잔틴 미술은 말 그대로 비잔틴 제국의 미술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예술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미술의 내용과 표현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라는 문화적 틀 내에서 산출된 것임을 뜻한다. 비잔틴 미술의 가장 큰 관심사는 기독교의 사상과 교리를 얼마나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표현하는지에 있었다.

    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성상(Icon)이다. 성상은 성스러운 형상 또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뜻한다. 구체적으로 성상은 주로 그리스도와 성모 또는 기독교의 여러 성인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재현한 회화나 조각이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후자보다는 전자, 즉 회화가 대표적인 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성상은 종교적 성격을 갖는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떤 미술이 감상의 대상을 넘어 숭배의 대상에까지 이르렀다면, 그 이상의 지위에 도달한 미술적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잔틴 사람들은 성상을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매개물로 생각했고, 실제로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4세기 이후 많은 성상이 제작돼 지금도 볼 수 있는 종교적 형상물과 예술품이 됐다.

    4세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가 공인된 해가 313년이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기까지 기독교는 많은 사도, 교부, 신자의 노력으로 기반을 다져갔지만,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것이기에 온갖 박해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발표한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다. 그는 그리스의 오래된 도시 비잔티온(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선포했다. 그는 이 도시를 새로운 로마로 건설한 주인공이자, 이후 1000년 넘게 지속된 비잔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기독교 공인과 비잔티움 천도는 비잔틴 제국의 미술이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본 조건을 만들었다.

    성상들은 물론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됐다. 성스러운 형상 앞에 향을 사르고 불을 밝히며 소원을 빌거나 신비한 체험을 기대하는 것은 고대부터의 관습이었다. 성상 앞에 기도하며 신적인 위력을 소망하는 것은 희랍이나 로마, 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다신교 전통에서부터 성행한 것이었다. 일반 가정에도 수호신을 모시는 전통이 있었다. 가정에서 성상을 모시고 경배하는 것은 기독교와 무관한 뿌리 깊은 전통이었다.

    기독교의 전파와 공인, 그리고 기독교의 국교화와 더불어 일반 가정에서는 이교도 신의 형상들을 대신해 그리스도와 성모 또는 성인의 상(像)들이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게 됐다. 기독교적 성상을 제작하고 이를 경배하는 것은 이전부터 존재해온 전통과 기독교가 결합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이란 성상이 신비한 힘을 지녔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상은 피상적 이미지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신적인 존재의 본질적 측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성상을 통해 바로 신적 존재와 의사소통을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성상은 사람들과 그것이 표현하는 대상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매개자였다.

    황제를 닮은 성상

    그렇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제작된 성상에는 이러한 본질적 모습을 포착하려는 노력이 투영됐다. 우리가 신적인 존재에게 기대하는 것, 즉 권능 빛 위엄 고귀 등의 성질이 성상에 구현됐다. 성상에 빛을 상기시키는 금박과 다양한 귀금속을 많이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성상은 전지전능하며 만물의 지배자인 신에게 귀속될 수 있는 성질이 잘 드러나도록 표현됐다.

    비잔틴 미술의 성상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가톨릭 교회의 종교미술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미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물의 지배자 예수 그리스도’, 12세기경, 모자이크, 팜마 카리스토스 수도원, 이스탄불(위) ‘성모’, 9세기, 모자이크,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예로 들어보자. 가톨릭 교회의 종교미술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는 인간적인 모습의 살과 피를 지닌 예수가 자주 등장한다. 반면 비잔틴 제국의 성상에서는 보다 신적이어서, 죽음을 극복한 승리자 예수의 모습이 강조된다. 인간적인 감정에 휩싸인 육화(肉化)한 모습보다는 평온하고 위엄 있는 형태로 그려진다. 이러한 표현 차이는 서방 교회(가톨릭)와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정교회의 성격 차이와 관계가 있다.

    신약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오 22:21)라는 말씀이 있듯이 지상의 것과 하늘의 것, 국가와 교회, 왕권과 교권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은 명백히 분리될 수 없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에 다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현실정치와 종교, 교권과 왕권이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모든 권력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지만,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교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세속 권력과 교회권력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적 방향을 결정지은 두 차례의 니케아 공의회가 교회 지도자가 아니라 황제 내지는 황후에 의해 소집된(325년과 787년)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제국을 모두 다스리는 권능을 지닌 존재인데, 지상의 지배는 황제의 지배를 통해 가시화한다.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은 그러한 권능에 걸맞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잔틴 미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황제, 성모 마리아는 여제(女帝)와 같이 묘사된 것이다.

    神을 형상화한 不敬

    비잔틴 미술에서 성상을 통해 드러나는 신성한 이미지의 구현은 단순히 예술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와 결합된다. 신성한 이미지의 예술적 표현은 이를 넘어서 현실 정치적인 특수한 문제와도 결부된다. 이렇듯 다양한 요소가 연결돼 발생한 사건이 바로 성상파괴운동인데, 이 사건을 고찰하기 전에 성상이 갖는 복합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신적 이미지를 구현한 성상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곤란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곤란함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서는 신의 이미지와 신적 형상의 사용 금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신의 형상을 표현한 모든 것은 신의 계율을 어긴 것이자 신을 모독한 행위가 된다.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인데 어떻게 형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구약에서 야훼는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지 어떤 이미지로 자신을 내보이는 법이 없다. 무한하고 영원하며 “하늘과 땅 어디를 가나 내가 없는 곳은 없다”(예레미야 23: 24)는 말처럼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것이 신이다. 신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한 신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 신의 이미지를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적 형상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됐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다신교 신앙에서도 수호신을 모시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기독교의 성상을 숭배하는 것으로 이행했다. 교회 쪽에서는 교리의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새긴 성상뿐 아니라 각종 이미지의 사용을 필수화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적 힘이냐, 우상이냐

    비잔틴 사람들은 성상이 기적을 낳는 마술적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성상은 전쟁과 군사적 목적으로도 활용됐다. 626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이 아바르족, 슬라브족, 페르시아 연합군들에 의해 포위됐을 때 비잔틴 사람들은 성모 성상을 수도의 성벽 문 위에 세웠다. 비잔틴 사람들은 이민족과 맞서 싸우면서 성상의 힘으로 도시가 지켜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도시는 지켜졌다.

    이렇듯 성상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공적 공간인 교회와 정치 모두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으니 성상에 대한 믿음은 우상 숭배의 혐의를 받을 여지가 있었다. 구약은 온갖 종류의 신적 형상에 대한 금지를 명하고 있었기에 성상의 제작과 숭배는 갈등을 낳을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커다란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 성상파괴운동이다.

    성상파괴운동은 예술과 종교, 정치적 문제가 한곳에서 만난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전통과 유대교, 기독교 전통이 만난 문명사적 대사건이기도 했다. 미술의 역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적 이미지로서의 종교미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격렬하고 심각하게,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논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져온 파장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730~787년, 815~843년 2차에 걸쳐 100여 년간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은 예술작품이 파괴되고 변형되고 소실됐다. 적지 않은 사람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성상파괴운동의 첫째 원인으로 기독교가 성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성상을 모시는 것은 이교도의 풍습이고, 구약에는 성상의 제작과 숭배에 대한 금지 조항이 있다. 성상 숭배가 잘못하면 우상 숭배나 미신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지적돼왔다. 성상파괴운동이라는 대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교회 내부라기보다는 외부의 정치적 압박이었다.

    성상파괴운동을 촉발한 장본인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다. 그가 즉위했을 때 제국은 내정이 몹시 어지러웠고 밖으로는 이슬람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자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은 신속하게 주변국들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638년 예루살렘이 아랍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지중해 연안의 많은 섬도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여세를 몰아 이슬람교도들은 674~678년, 717~718년 비잔틴 제국 수도인 비잔티움을 포위한 채 공격했다.

    레오 3세는 제위에 오르기 전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슬람교도들이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들이 모스크에 성상을 그리거나 성상을 오용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봤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이 전투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성상에 대한 지나치거나 잘못된 숭배에 있다고 믿게 됐다.

    당시 많은 이가 이슬람교도를 기독교의 이단으로 보았다. 이슬람교도들은 같은 신을 다른 방식으로 경배한다고 여긴 것이다.

    레오 3세는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유지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성상을 없애고 제국 내에서 종교미술 일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효과는 정치적, 군사적 성공을 통해 현실화할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몇몇 주교는 구약성경을 근거로 우상숭배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레오 3세가 파괴운동 주도

    레오 3세는 몇 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성상파괴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신학적 주장들과 함께 730년 칙령을 선포했다. 더불어 모든 성당의 종교미술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칙령에 반대하는 성상 옹호파 게르마누스 총대주교를 파면하고 성상 파괴파의 아나스타시우스를 총대주교에 임명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재위 715~731)와 그의 계승자인 그레고리우스 3세(재위 731~741)는 비잔티움의 조치에 반발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많은 성상이 파괴되거나 백색 도료로 칠해졌다. 성상 옹호자는 박해의 대상이 됐다. 7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가 지방 공의회를 개최해 성상파괴운동을 단죄함으로써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는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가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레오 3세의 치세 중에 제국은 안정을 되찾았고 이슬람 확산은 저지됐다.

    부활한 성상숭배

    레오 3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성상파괴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성상파괴에 대한 나름의 이론까지 개진했다. 그는 성체야말로 그리스도의 진정한 형상이고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강력한 상징이므로 기독교 신앙에 성상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성상 파괴와 관련해 여러 신학자와 주교들은 나름의 이론과 주장을 내세웠다. 745년 히에레이아 지방 공의회에서 채택된 한 조항을 예로 들어 성상 파괴파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리 기독교인들의 보편적 교회는 유대교와 이교의 중간에서 경신과 숭배의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한다. (…) 우리는 유대교의 (…) 피 흘리는 제물도 인정하지 않거니와, 우상의 제작과 숭배에 관한 일체의 행위 또한 혐오한다. 가증스러운 미술을 주도하고 창안한 것은 다름 아닌 이교도들이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뒤를 이어 레오 4세가 5년간 통치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손자가 제위에 올라 콘스탄티누스 6세가 됐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렸기에 어머니인 황후 이레네가 섭정을 했다.

    황후는 성상 옹호파였기에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성상파괴운동을 중단시켰다. 787년 이 공의회는 성상파괴를 기독교 전통에 위배되는 잘못된 혁신으로 단죄했다. 그에 따라 성상숭배가 부활하고, 성물과 성인들의 성상이 없는 교회는 세울 수 없게 한 교회법 21개조가 공표됐다. 이 공의회 결의 사항에 담긴 성상 옹호파의 주장은 이러했다.

    성상 제작은 화가의 창안이 아니라 교회의 제도와 전통이다. (…) 교부들은 성스러운 교회에서 성상을 봤을 때 기쁨에 겨웠고, 그들 자신이 성스러운 교회들을 세웠을 때 그 안에 이미지들도 역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그러므로 이미지의 거룩한 사용에 대한 생각과 전통은 교부들로부터 유래한 것이지 화가들의 것이 아니다. 화가의 영역은 기예에 한정되고, 그림을 배치하는 일도 분명히 교회를 지은 성스러운 교부들의 과업에 속하는 것이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로 제1차 성상파괴운동은 종식됐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끝이 아니었다. 30여 년이 지난 815년 레오 5세가 정치적, 군사적인 목적으로 또다시 성상 파괴를 지시했다. 제2차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그때도 성상 파괴를 정당화하는 이론들이 제시됐다. 특히 테오필루스 황제(재위 829~842) 때는 1차 때보다 더욱 극심한 파괴와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나 테오필루스가 죽자 황후인 테오도라가 어린 아들 미카엘 3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면서 성상파괴운동을 종식시킬 것을 도모해 843년 3월 성상숭배를 부활시키게 됐다. 두 차례로 나뉘어 100여 년간 지속된 성상파괴운동은 막을 내렸다. 마침내 성상 옹호파가 승리한 것이다.

    성상 옹호파의 승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구약은 분명히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으니 성상 파괴파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성상 옹호파가 승리한 것일까. 정치 세력 싸움의 결과로 볼 수도 있고,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 홍수에 노출돼 있고, 더 많은 이미지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성상 옹호파의 승리는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옹호파 승리의 의미

    인간은 종교적 진리와 같은 심오하고 추상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신의 모습조차 이미지로 만들어 생생하게 경험하려는 욕구를 가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 욕구를 해소해야 하는 존재일 수 있다. 인간은 가까이서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자기의 신앙도 지켜나갈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지에 의존하고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인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미지가 사실과 다를 수 있고, 진실과 동떨어진 것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점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이미지에 집착한다. 성상 옹호파가 승리한 것은 오늘날 보편화한 이미지의 위력으로 입증되고 있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이미지는 승리를 구가할 수 있을까.

    이미지의 승리가 계속되는 한 우리는 결코 ‘이미지 정치’와 ‘이미지 메이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지는 마법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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