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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광해군은 聖君, 중립외교의 화신?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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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 나간 임금’ 광해군이 마치 성군처럼 인식되고 있다.
  • 대규모 궁궐 공사로 백성의 삶을 파탄으로 몰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를 중립외교의 화신인 듯 얘기한다.
  •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나온다. 어느 경제학자는 조선의 19세기가 ‘체제의 위기’ ‘근대를 예비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또 다른 식민지 근대화론 발상이다.
  • 이 모두는 통계를 왜곡하거나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된 일반화의 오류다.
통계에 눈감은 일반화의 오류!

통계청 통계전시관. 현대사회의 통계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통계를 놓치면 잘못된 역사상을 가질 수 있고, 통계를 오해해도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나아가 통계를 왜곡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통계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분야가 없을 듯하다. 오죽했으면 이 하나의 행위를 놓고 통계청이라는 관청까지 생겼겠는가. 이는 계량화라는 근대적 생활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물론 통계는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또한 과거 사람들이 통계를 멀리했던 것도 아니다. 인구, 재정, 세금, 농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 통계가 필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규모의 계량화는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유력한 방법이다. 이번 호에선 통계를 소홀히 해서 밝히지 못했던 시대상 하나, 통계를 왜곡 또는 과신해서 벌어진 잘못된 논의 하나, 이렇게 두 가지를 다뤄 보겠다.

나라 말아먹기

광해군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라 말아먹기’라고 할 수 있다. ‘말아먹기’라는 다소 거친 말을 쓴 이유는, 이외에는 달리 그 느낌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야 광해군이 ‘정신 나간 임금’이라는 걸, 그 시대 나라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쑥대밭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식민지 강점 시대를 거치면서 광해군이 중립외교의 화신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마치 성군(聖君)인 듯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동안 광해군의 내치(內治)에 대해 별 언급이 없었는데, 한명기 교수 등이 광해군 시대 궁궐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올바른 평가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광해군의 궁궐 공사 규모나 파장에 대해서는 그리 인식이 깊지 못하다. 궁궐 공사를 위해 석재, 목재, 철 등의 공물을 대규모로 걷어들여 공납제 개혁인 대동법을 무력화했고, 양전(量田)도 안 된 상태에서 추가로 전세(田稅)를 부과해 직접세 징수의 공정성을 해쳤다. 궁궐터를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 주민을 내쫓고 강제로 집터와 골재를 기부 받은 것은 약과였다.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관매직은 물론, 은(銀)을 받고 죄인을 풀어줌으로써 형법제도를 문란하게 했다. 귀양 보낸 사람도 돈을 받고 풀어줬다.



궁궐 공사에 미쳐 대외관계는 ‘눈치 외교’가 됐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광해군은 훈련도 안 시키고 한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챙겨준 자신의 군대를 만주 땅으로 파견했다. 파견 군대의 대장은 강홍립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後金)과의 심하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사자 가족에게 주라고 보낸 위로금도 착복해 궁궐 공사에 탕진했다.

살기 위해 그랬겠지만, 나는 반정(反正)을 일으킨 사람들이 불쌍했다. 이런 나라를 맡아서 어쩌려고 반정을 했나 싶었다. 아무튼, 살자고 했겠지…. 농업기반 사회에서 파탄 난 민생과 재정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올 수도,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올 수도 없다. 고스란히 농업생산력이 회복되고 거기서 재원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인조 초, 광해군 시대의 사초 등을 편찬한 ‘광해군일기’는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았다. 조선시대에 왕대(王代)별로 편찬하던 실록 중 재정이 부족해서 실록 편찬을 중지한 유일한 경우였다. 광해군이 얼마나 알뜰하게 재정을 파탄 냈는지 실감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 와중에 정유재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정유재란 때 후금 군대의 앞잡이는 강홍립! 중립외교를 위해 광해군이 파견한 심복이자, 심하전투의 패장. 1만3000의 군사 중 9000여 명을 전투에서 죽게 하고, 혼자 살아남아 결국 조국 침략의 앞잡이가 됐다.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은 강홍립 덕분에 황해도 백성이 덜 죽었단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토 히로부미의 간신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아니라 이완용, 송병준이 나라를 팔아먹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들판에 뒹구는 시체들

궁궐 공사에 주목하고도 그 규모와 악영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엄연히 남아 있는 통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데 큰 이유가 있다. 실록에 남은 통계자료는 경험상 매우 신뢰도가 높다.

물론 궁궐 공사에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는지 산출하는 것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석재·목재·철 등은 어딘가에서 구입해 조달하기도 했겠지만 나무와 돌은 주로 공유지에서 채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도 나라에서 운영하는 철점(鐵店)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또한 지방·중앙에서 동원된 일꾼의 인건비에, 전문 기술자들의 공임까지 계산해야 온전한 공사 총액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조사가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공사비 규모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공사가 한창이던 광해군 9년 6월 상황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영건도감에서 3개월 동안에 쓴 것을 살펴보니, 들어간 쌀이 6830여 석이고 포목이 610여 동이었으며, 당주홍 600근의 값은 포목 60동이었고 정철(正鐵)이 10만 근에 이르렀으며, 각종의 다른 물품도 이와 비슷했다. 이를 모두 쌀과 포목으로 충당해 한 전각을 영조하는 데 들어가는 것이 적어도 1000여 동을 밑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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