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CJ는 왜 시계로 로비를 했을까?

  • 이은경 │시계 컨설턴트 blog.naver.com/veditor

    입력2013-08-21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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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인의 로비 스캔들이든, 남녀 간의 러브 스캔들이든 시계가 등장하면 흥미가 배가된다. 시계는 럭셔리 상품 중 유일하게 여성보다 남성에게 인기가 더 많다.
    • 시계가 로비 수단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CJ는 왜 시계로 로비를 했을까?
    7월 29일 여름휴가를 떠나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소리가 분주하게 울려댔다. CJ그룹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시계 로비’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까르띠에, 프랭크뮬러 등 수천만 원대에 팔리는 시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던 기자들이 시계 컨설턴트인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2011년 가을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정권 실세에게 고급 시계를 건넨 로비 사건이 떠올랐다.

    왜 로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계가 등장하는 걸까. CJ 비자금 수사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그 대목이었다. 이번 사건에 등장한 시계는 무엇이고, 시계를 로비 수단으로 이용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시계가 실제로 재산 가치가 있는지, 과연 그런 시계들은 누가 사는지 등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까르띠에, 프랭크뮬러…

    검찰은 CJ그룹이 국세청 간부 대상 로비에 사용한 시계가 까르띠에와 프랭크뮬러라고 밝혔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평소 자주 이용하던 서울 남산 힐튼호텔에서 시계를 직접 구입했다. 이 회장이 세금 관련 로비를 위해 구입한 까르띠에와 프랭크뮬러는 전군표 전 국세청장, 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에게 전달됐다.

    까르띠에는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 이 브랜드의 시계도 보석 제품만큼 인기가 높다. 까르띠에의 시계 컬렉션 중 탱크나 산토스 라인은 1990년대부터 결혼 예물로 애용됐다. 안철수 의원도 2000년대 초반에 찍은 사진을 보면 까르띠에 탱크를 차고 있다. 탱크나 산토스는 보통 수백만 원대인데, CJ가 로비에 사용한 시계는 수천만 원대라고 한다. CJ가 로비를 한 시기는 2006년. 까르띠에가 여전히 수백만 원대 스틸 소재 쿼츠 시계를 주로 선보이던 때다. 따라서 수천만 원대 시계는 브랜드 내에서 상당히 고가에 해당하는 모델이었을 것이다.



    프랭크뮬러는 까르띠에보다 덜 알려진 브랜드다. 2003년 한국에 정식 론칭한 이 브랜드는 1991년 천재적인 시계 제작자 프랭크뮬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립한 브랜드다. 힐튼호텔을 시작으로 2005년 에비뉴엘 백화점에 단독 매장을 여는 등 한국에서 잘나가는 명품 시계 브랜드 중 하나다. 시계 값이 1000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초고가 브랜드다.

    프랭크뮬러는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후보 부인 김윤옥 여사가 착용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화제가 됐다. 김현미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 김 여사의 시계가 1500만 원에 팔리는 스위스제 프랭크뮬러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개성공단에서 제작한 통일시계로 가격은 10만 원 이하였다.

    CJ는 왜 시계로 로비를 했을까?

    롤렉스 데이트저스트.

    토너 셰이프(옆면을 둥글게 한 네모난 모양)의 독특한 스타일과 유니크한 다이얼 디자인으로 국내 론칭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고가의 스위스 시계 브랜드가 속속 등장하면서 프랭크뮬러의 인기는 과거만 못하다.

    최근 가수 싸이를 모델로 한 시계가 프랭크뮬러 직원의 실수로 이 브랜드의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유출되면서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소 프랭크뮬러를 즐겨 차던 싸이를 위해 말춤을 추는 싸이의 모습을 다이얼에 새긴 시계를 한정 수량으로 제작한 것. 싸이는 7월 2일 미국 공항에 이 시계를 차고 나타났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계 브랜드인 롤렉스의 인기 모델 서브마리너의 경우 백화점 소매가격이 1000만 원 안팎이다.

    시계는 가로, 세로 각 20cm 정도의 작은 상자에 들어간다. CJ그룹이 국세청 간부들에게 전달한 두 개의 시계 가격을 합하면 5000만 원이다. 작은 시계 상자 2개에 5000만 원이 들어간 셈이다. 같은 액수의 뇌물을 현금으로 전달한다면 부피가 훨씬 커졌을 것이다. 액수가 올라갈수록 돈이 담긴 가방이나 상자의 크기는 커지게 마련 아닌가. 시계는 그렇지 않다. 1000만 원짜리든 1억 원짜리든 상자 크기는 엇비슷하다. 그렇기에 은밀한 거래인 로비의 수단으로 시계가 각광받는 것이다.

    CJ는 왜 시계로 로비를 했을까?

    까르띠에 발롱블루, 파텍필립 월드타임, 프랭크뮬러 롱아일랜드(왼쪽부터).

    시계를 뇌물로 건네는 까닭

    세상의 수많은 값비싼 물건 중 유독 시계가 로비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로비의 대상이 대부분 성공한 남자이며, 그들이 고가의 시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개당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명품 시계 매출은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급성장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명품 시계의 매출은 해마다 급속도로 늘었다. 그만큼 고가 시계의 인기가 높다. 시계는 남자가 착용하는 가장 비싼 액세서리다. 과거에는 수백만 원대 시계를 접하는, 처음이자 유일한 기회가 결혼식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사정이 변했다. 성공한 남자들이 명품 시계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

    직접 구입하기엔 값이 부담스러운 명품 시계를 선물로 받는다면 어떨까. 여자들이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았을 때의 기쁨보다 더 클 것 같다.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값비싼 명품 시계를 선물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명품 시계를 선물로 받았을 때의 기쁨은 상당할 것이다. 선물로 위장하고 로비 수단으로 명품 시계를 건네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시계가 로비에 자주 이용되는 또 다른 이유는 누가 샀는지, 누구에게 건네졌는지 등 종적을 추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액의 현금이나 유가증권, 자동차 등은 추적이 가능하지만 시계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명품 시계 제조사 대부분은 브랜드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의 고객 리스트를 보관하면서 업데이트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터라 외부에 절대로 유출되지 않는다. 단 몇 개만 생산하는 수억 원짜리 시계도 구입자가 누구인지는 절대로 알리지 않는 것이 시계 업계의 룰이다. 그러니 시계를 뇌물로 받은 사람은 행여나 적발될까 하는 걱정이 덜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시계

    CJ는 왜 시계로 로비를 했을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 같은 스위스제 피아제 보석시계 세트.

    시계 로비가 화제가 되는 것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때마다 베이징의 명품 업계가 특수를 누릴 정도로 공산당 관리들에게 고가의 사치품을 뇌물로 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 2월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새 지도부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뇌물이 오고 갔는지를 증명하듯 부정·부패와의 전쟁 선포 후 중국 내 고가 시계 매출이 현격하게 줄었다. 2013년 1~3월 스위스의 시계 수출 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2.4% 늘었지만 대(對)중국 수출은 26%나 줄었다.

    시계가 은밀한 선물로 사용되는 데는 자산 가치가 높다는 점도 한몫했다.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5년 전에 사서 차고 다니다 되판다고 가정해보자. 중고 시계를 5년 전의 새 시계 가격과 비슷한 수준에 팔 수 있다. 2003년 서브마리너의 가격은 500만 원대였지만, 지금은 1000만 원이 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계의 가치가 매년 오르고 있기 때문에 중고 시계의 가격도 높게 형성돼 있다. 샤넬 가방의 가격이 매년 급상승하는 데다 한국 내 가격이 다른 나라보다 비싸기 때문에 수년 전에 사둔 가방을 되팔거나 외국에서 싸게 구입해 국내에 판매하는 것을 ‘샤테크’라고 하는 것처럼 시계에도 ‘시테크’라는 말이 생겨났다.

    2000년대 들어 골드 소재로 만든 시계가 인기를 끌었다. 금값이 오르면서 시계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최근 금값은 소폭 하락했지만 금값 때문에 오른 시계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브랜드는 디자인이나 구성을 조금씩 변경한 모델을 선보이며 그때마다 일정액씩 시계 가격을 올린다. 시계 가격이 점점 올라가는 것은 고가의 시계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늘어나서다.

    매년 적게는 수천 개에서 많게는 100만 개 넘는 시계를 생산하는 각 브랜드의 인기 모델은 최소 몇 달에서 1년 이상을 기다려야 손에 넣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파텍필립 월드타임 모델이다. 1년에 5만 개가량의 시계만 생산하는 파텍필립은 기계식 시계 애호가들이 꼽는 최고의 브랜드다. 그중에서도 월드타임 모델은 ‘갑 중의 갑’. 돈을 주고 사려 해도 살 수 없는 시계다. 다이얼에 에나멜로 지구 모양을 그려 넣은 플래티넘 소재의 월드타임 모델 신제품 가격은 현재 8000만 원대다.

    그런데 이 모델의 중고 제품 가격은 대부분 그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1년에 생산하는 시계의 양이 극히 적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판매하는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이 시계를 구입한다. 1946년 제작한 월드타임 플래티넘 모델이 2002년 경매에서 400만 달러에 낙찰된 적도 있다. 경매 사상 손목시계 중 최고가를 기록한 것.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경우 시계 경매시장이 활성화돼 있지 않지만, 홍콩 뉴욕 제네바 등지에서 시계 경매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희소성 높은 모델은 높은 가격에 낙찰되기 때문에 시계를 잘 관리하고 보관한다면 언젠가는 높은 가치로 되팔 수 있다. 기계식 시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환금성도 덩달아 높아질 것이다.

    누가 명품 시계를 살까?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그런 비싼 시계는 누가 사느냐’ ‘과연 그런 시계가 팔리느냐’다. 대다수 사람에게 시계는 필수품이 아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면 되는데 왜 귀찮고 번거롭게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CJ그룹 로비 사건에 등장한 수천만 원대 고급 시계를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로만 보면 안 된다. 명품 시계를 구입하는 사람들 역시 단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시계를 차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나를 과시하기 위해서 찬다.

    수백만 원 하는 명품 가방이나 의류는 약간 무리를 한다거나, 두 눈 질끈 감고 카드 할부로 살 수도 있다지만 수천만 원대 고급 시계는 아무나 구입할 수 없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럭셔리를 추구하는 30~50대 고액 연봉자나 전문직 종사자, 재벌 등이 명품 시계를 구입하는 주고객층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고급시계에 더 열광한다. 누구는 평생 한 개 가질까 말까 하는 고가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구입하는 이들 덕분에 한국의 고급 시계 시장은 매년 급성장해왔다.

    지난 4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바젤월드 프레스 콘퍼런스 때 공개된 지난해 스위스 시계 판매액은 28조 원에 달한다. 2011년 대비 10.9 % 성장했다. 한국은 스위스 시계를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이 구입한 나라다.

    수입 화장품이나 패션 업계가 매출 하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과 달리 백화점 내 명품 시계 매출 증가세는 꺾일 줄을 모른다. 2009년부터 4년간 국내 고가 시계 매출은 매년 20~40%씩 증가했다. 지난해 백화점들의 고급 시계 매출 신장률은 불황 속에서도 롯데 20.6%, 현대 26.3%, 신세계 18%, 갤러리아 38%에 달했다. 올해는 7월까지 매출이 평균 18.5% 늘었다.

    공무원과 기업인 간의 로비 사건은 아니지만 최근 한국을 술렁이게 한 차영 전 민주당 대변인과 조용기 목사의 장남 조희준 국민일보 전 회장의 스캔들에도 시계가 등장한다. 그 시계는 피아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회갑 선물로 받았다는 1억 원짜리 피아제 시계 2개가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정치인의 로비 스캔들이든, 남녀 간의 러브 스캔들이든 시계 이야기만 나오면 흥미가 배가되는 것은 비단 시계 컨설던트인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시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어쨌거나 ‘줄 때 잔머리를 굴리며 주면 뇌물이고, 받았을 때 다리를 뻗고 자면 선물’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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