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보수세력이 전두환을 공격할까?
- 전두환이 밝힌 박정희·차지철·김재규 스토리
- 박근혜는 왜 연희동을 방문하지 않았나
- 전 재산 29만 원, 육사 발전기금 1000만 원
- 이순자는 복부인? 그가 들려준 연희동 집 마련 과정
- 오산, 성남, 서초동 땅 명의 이전 시점이 핵심
2011년 12월 14일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 빈소를 찾은 전두환·이순자 부부. 이들은 경조사를 챙겨야 할 곳은 꼭 찾는 성의를 보인다.
검찰의 공세는 6월 27일 기권자 4명을 제외한 국회의원 전원이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일명 ‘전두환법’을 통과시킨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1996년 내란과 반란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1997년 특별사면)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이후 533억여 원만 납부해 미납금이 1672억 원이다. 그는 재산이 없다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았는데, 그의 장남인 전재국 시공사 대표는 조세 도피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두고 있다. 다른 자녀들도 상당한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새누리당도 적극 참여해 만장일치로 전두환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별명이 ‘전두환법’일지라도 법은 공정하게 적용돼야 한다. 전두환만을 노리는 표적수사용 법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추징금을 미납한 옛 실력자가 많다. 6공 대통령 노태우는 230억 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전두환보다 10배 이상 많은 17조8366억 원을 미납한 상태이지만, 칼날은 오로지 전두환만을 향한다. “29만 원밖에 없다”고 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배짱이 얄미운 걸까. 잘사는 그의 자녀들이 못마땅한 걸까.
그러나 전두환을 ‘사나이답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부는 그의 업적에 주목한다. 박정희 정권의 과도한 투자와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한국을 기사회생시킨 인물로 보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해 한국의 위상을 한순간에 높여놓았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단군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만들었다’ ‘단임을 실천해 이후로는 누구도 장기 집권을 못하게 했다’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하게 해 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는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이들은 전두환을 기막힌 ‘핀치히터’로 평가한다.
기자는 2011년 3월 초 그를 만날 기회를 잡았다. 과학자 몇 사람이 인사차 그의 자택을 방문하면서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를 데려간 것이다. 전두환은 명함을 건네며 자기소개를 하는 ‘불청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도 5시간을 머물며 대화를 하고 저녁까지 얻어먹고 나왔다.
기자는 과학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 씨와 나눈 대화를 일절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 씨 미납 추징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의 비서관을 지낸 민정기 씨가 검찰 조사를 반박하는 글을 배포해 파문이 커지고 있는 마당이라, 전두환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는 차원에서 그날의 대화를 다른 취재 결과와 함께 공개하기로 한다.
눈 밝은 이들은 오래전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돼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전두환 자택을 방문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김대중·노무현 묘소를 참배하고 김영삼·이희호 자택은 방문했으나 연희동으로는 향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두환이 청와대를 나오게 된 박근혜 남매를 섭섭하게 했기에 인사를 가지 않은 것”이라는 추측이 쏟아졌다. “박근혜는 전두환을 반드시 혼낼 것”이라고 예측도 나왔다.
5공 시절 김종필(JP)을 비롯한 과거 실력자들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뺏기고 정치활동을 못하는 연금을 당했다. 그때 재산을 뺏긴 O씨는 최근까지도 전두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박근혜 대통령도 과거 “5공 시절 대단히 가슴 아프게 살아왔다”고 한 적이 있으니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금 많은 사람이 박근혜와 전두환의 불화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기자가 연희동을 찾아간 2011년은 ‘박근혜 대통령’ 가능성이 별로 거론되지 않았으니, 그는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1931년생이다. 서먹서먹한 가운데 인사를 마치자 전두환은 “내가 1월생이야(음력으로 1월 18일생). 설을 지냈으니 확실히 만 팔십이지. 팔십이 넘었으니 자네들한테 말을 놔도 되지? 자, 그래. 이제 앉아서 이야기 좀 해봐”라는 말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만 80세치고는 기력이 왕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마’와 박정희, 그리고 5·16
과학자들은 그들이 젊은 시절에 본 5공의 과학정책을 정리하고 그 정책으로 과학계가 발전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사 삼아 칭송한 것인데 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건강하다고는 하지만 ‘상노인’인지라 집중력이 강해 보이지 않았다.
지루했는지 그가 말을 자르고 나왔다. 과학자들이 박정희의 과학정책을 이야기할 때였다. ‘박정희’라는 단어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을 갑자기 떠올리게 한 것 같았다.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등과 얽힌, 기자로서는 꼭 듣고 싶은 10·26과 12·12 어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는 박정희의 경호실장인 차지철에게 유감이 많은 듯 그를 ‘금마(그놈아)’로 지칭했다.
7월 16일 검찰은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연희동의 전 씨 집을 압수수색했다.
칠흑같이 어두워 별을 빼고는 보이는 것이 없고, 물결 소리와 헉헉거리는 숨소리 말고는 들리는 것도 없어. 물은 목까지 차올라 찰랑거리고, 악어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니 뒤에 있는 팀원을 돌아볼 수도 없었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넓고 넓은 스왐프 속을 뱅뱅 돌게 되니까, 건너편을 찾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야. 서로를 엮어놓은 줄이 팽팽해지지 않으니 동료들은 잘 따라오고 있다고 믿고 가는 것이지. 참 힘들더구먼.
안개가 깔린 새벽녘에 스왐프를 건너와 지친 몸을 누이게 됐는데, 갑자기 ‘빡!’ 하는 소리가 나면서 우리말 욕설이 터져나오는 거야. 무슨 일인가 달려갔더니 금마가 개머리판으로 미군 버디의 얼굴을 갈겨놓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어. 미군은 피범벅이 돼 쓰러져 있고. 금마를 붙잡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저놈이, 지휘관이 M-60은 한국군만 메야 한다고 했다면서 나만 M-60을 메게 했다’는 거야.
스왐프를 건너면서 보니까 앞의 짝들은 교대로 바꿔 메는데, 금마 짝은 M-60을 받을 생각을 안 하더라는 거야. 금마는 키가 작아서 종종 물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숨을 쉬려고 무거운 M-60을 멘 채 팔짝팔짝 뛰면서 스왐프를 건너왔다는 거야. 그래서 뭍으로 올라오자마자 태평하게 등을 붙이려는 미군 버디를 ‘너 같은 놈은 군인도 아니다’고 갈겼다는 거야.
동료 구타는 큰 죄니까, 금방 미군 중령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조사를 하더군. 유죄판결을 받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훈련 도중 귀국한 군인은 바로 전역조치돼. 나는 팀장이라 금마를 변호하게 됐지. 잘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봐라, 우리 대원은 이렇게 키가 작은데 혼자 M-60을 메고 악어가 있다는 스왐프를 밤새 뛰면서 건너왔다. 우리 대원을 골탕 먹인 미군 버디가 더 나쁘다’라고 했어. 조사를 한 그들도 우리 얘기가 맞으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더만. 금마는 귀국 조치를 당하지 않게 된 거지. 그런 금마를 박 대통령이 너무 믿었어. 각하도 말년에는 총기가 많이 흐려지셨어.”
5·16 직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선 박종규 소령, 박정희 소장, 차지철 대위(왼쪽부터). 차지철은 제1한강교 저지선 돌파에 공을 세워 박정희 측근이 됐다.
차지철은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전역해 공화당 국회의원을 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를 절명케 한 문세광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자 그의 뒤를 이어 새 경호실장이 됐다. 그리고 1976년 전두환 준장이 경호실장보다 두 단계 낮은 경호실 차장보에 임명됐다. 우습게 봤던 ‘금마’의 ‘밑에 밑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떠올린 기자가 “그때 차 실장의 위세가 대단했지요. 그런 차지철 밑에서 차장보를 했으니 무척 불편했겠네요”라고 물었다.
“금마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 나와는 1대 1로 대면하지 않고 회의 때만 봤지. 그런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깎아내리려고 했어. 김재규는 인성은 좋지만 똑똑하지는 못했어.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금방 대응책을 내놓지 못해. 하지만 각하와는 같은 고향(경북 선산)에 육사 2기 동기 아닌가. 그런 김재규가 청와대에 오면 차지철은 ‘어이, 김 부장~’하고 부르는 거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부장을 지휘봉을 흔들며 ‘어이~’ 하고 불러.
김 부장이 ‘예’ 하고 달려오면, 금마는 시국 상황을 물어보고, 김재규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다 듣지도 않고 ‘알았소. 잘 대처하시오’ 하고 보내는 거야. 그렇게 돌아서 나오는 김재규는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지. 그래서 김재규가 금마부터 쏜 것이야. 각하께서 왜 그런 자를 중용하셨는지 몰라.”
1976년 김재규는 50세, 전두환은 45세, 차지철은 42세였다. 차지철은 가장 젊었지만 박정희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큰 위세를 부렸다. 경복궁 뒤에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연병장에서 군 지휘관을 불러다 사열하는 등 최고사령관처럼 행세했다. ‘스왐프의 추억’이 있는 전두환에게 그런 그가 고와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런 차지철을 총애한 박정희를 비판할 법도 한데, 전두환은 박정희를 거론할 때마다 꼬박꼬박 ‘대통령’ ‘각하’ ‘어른’이라고 지칭했다.
9억5000만 원의 행방
5공은 박정희 정권을 심각하게 격하(格下)하고 박근혜를 홀대했을까. 민정기 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이 전 정권을 격하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노무현이 자살한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노 정권을 격하하기 위해 이명박 정권이 수사한 게 계기가 되지 않았나. 5공이 대통령 단임을 실천하겠다고 거듭 이야기한 것도 장기 집권한 박정희 격하로 보일 수 있었다. 격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봐야 한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사후 격하운동을 당했고, 전두환도 노태우 때 백담사로 유배 가지 않았나.”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민주당 의원들이 서울현충원에 가면 김대중 묘역만 참배하고, 보수파는 이승만·박정희 묘역만 참배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JP는 전두환이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전두환은 호국보훈의 달인 6월과 아웅산 사건이 일어난 10월 9일엔 반드시 서울현충원을 찾아가 현충탑과 이승만·박정희·김대중 묘역, 아웅산 순국자들을 모신 국가유공자묘역을 참배한다. 최근 들어서는 임정(臨政) 묘역도 참배한다. 육군 경리감을 지내고 예편한 그의 장인(이규동)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데, 전두환은 장인 기일에 대전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그곳에 있는 최규하 묘역도 참배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 10·26 직후 수사에 나선 보안사는 청와대 비서실장 금고에서 9억5000만 원의 수표와 현금뭉치를 발견해 3억5000만 원은 압수하고 나머지는 박근혜 측에 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이 돈 일부를 가져갔기에 박근혜와 불편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기자는 전두환에게 이 얘기를 물어보지 못했다. 민정기 씨는 “그 돈은 박근혜 대통령이 수사비로 쓰라고 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합수부가 10·26 공범 혐의자인 김계원 비서실장 방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금고를 발견하고, 이 금고를 관리해온 권숙정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하여금 열게 했다. 권 보좌관은 이 금고에서 나온 9억5000만 원은 정부 공금이 아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돈이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권 보좌관으로 하여금 전액을 샘소나이트 가방에 넣어 박근혜 씨에게 전달하게 했다.
얼마 후 박근혜 씨가 ‘10·26 진상을 철저히 밝혀달라’는 부탁과 함께 수사비에 보태 쓰라며 합수본부장(전두환)에게 3억5000만 원을 보내왔다. 그런데 1989년 5공 비리를 수사한 검찰은 박근혜 씨가 합수부로부터 깨끗하지 못한 돈을 받은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내용을 발표했다. 1996년 수사를 한 검찰은 합수본부장이 그 돈을 임의로 사용했다고 발표해 또 오해를 만들었다.”
‘공공의 적’ 전두환
2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전두환과 그를 투옥한 김영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매년 명절이면 (5공은) 그분(박근혜)께 직접 사람을 보내 인사하고 선물을 보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는데 밝히지는 않겠다. 전두환이 퇴임한 다음에는 내가 명절 선물을 보냈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가 있을 때도 보내다가 5·18 특별법으로 수감돼 재산을 압류당한 다음부터는 보내지 못했다.”
전두환의 회고와 민 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전두환은 박정희에 대해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충성심을 현실화한 것이 12·12였다. 그런데 왜 전두환은 박근혜 당선인의 방문을 받지 못했을까. 민 씨는 “18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당선인 측에서 연희동으로 인사를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집을 수리할 일이 있어 두 분이 지방에 가 있었기에 방문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당선인과 전화로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전두환은 박 당선인의 방문을 받지 못했지만, 2월 25일 열린 18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눈여겨볼 것은 전두환이 보수세력인데도 보수세력이 집권했을 때 얻어맞았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 때는 5공 청문회 증인으로 섰고 백담사로 2년간 ‘유배’를 갔다. 김영삼 정권은 ‘5·18 특별법’으로 무기징역과 함께 지금껏 문제가 되고 있는 거액의 추징금을 부과했다. 박근혜 정부는 ‘전두환법’을 확정해 공격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제외한 후임 보수정권 모두 그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좌파’라고 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왜 그는 같은 보수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일까.
지금 정치권엔 좌우를 막론하고 386세대가 다수 포진해 있다. 정치적 성향은 달라도 이들은 젊은 날의 기억 때문에 전두환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권력을 잡은 보수세력은 종북세력 등 그들을 적대시하는 세력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자, 자신들도 좋아하지 않는 전두환을 대신 처벌해 ‘군기’를 잡으려는 게 아닐까. 대립하는 세력과의 긴장이 힘들어, 같은 배를 탔지만 ‘같이 가기 싫은’ 전두환을 공격해 긴장을 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전두환은 만만한 ‘공공의 적’이라는 뜻이다.
전두환의 돈은 대단한 관심거리다. 검찰이 금속탐지기를 들고 가서 자택을 수색한 것은 그가 집 안 어딘가에 금붙이나 현금 등이 든 금고를 숨겨놓은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 ‘쇼’를 했건만 수확은 없었다. 그러자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금속탐지기를 들고 간 것은 지나쳤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비판에 직면한 검찰은 그의 친인척이 그의 돈을 관리해온 것으로 보고, 친인척을 죄는 쪽으로 선회했다. 어떻게든 재산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표적수사’에 가까운 양상이다.
추징금 문제가 나올 때마다 가장 궁금한 점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왜 압류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연희동 사저는 대지 면적이 818.9㎡(247.7평)인 단층 본채와 대지 면적이 312.1㎡(94.4평)인 2층 별채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검찰과 법원은 본채는 두고 별채만 손을 댔다. 왜 그럴까. 추징금을 처음 부과한 1996년에는 그래도 사람이 살 곳은 보장해줘야 한다며 본채와 별채 모두 압류하지 않았다. 그 후 2003년 별채를 압류해 경매 처분했다.
그때 감정가가 7억6449만 원이 나왔는데, 부인 이순자의 남동생 이창석이 16억4800만 원을 제시해 낙찰받았다. 덕분에 검찰은 예정가보다 훨씬 많은 16억4800만 원을 추가로 추징할 수 있게 됐다. 이 씨는 별채를 전 씨 가족 중 한 사람의 명의로 해서 전 씨 측에 돌려줬다.
‘전두환 사람’의 충성은 이게 처음이 아니다. 2000년 5월 검찰은 추징금 징수시효를 연장하기 위해 전두환이 타고 다니던 1987년식 벤츠 승용차를 압류했다. 감정가 1500만 원으로 경매에 부치자 보안사령관 시절 그의 수행부관을 지낸 손삼수 씨가 6배 이상 많은 9900만 원에 낙찰받아 전두환에게 돌려줬다. 1996년 전두환 비자금 환수가 문제가 됐을 때 영원한 ‘전두환맨’ 장세동은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하사금 30억 원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썰렁한 거실
세상 사람들은 ‘전두환보다 이순자 여사가 세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정반대’라고 말한다. 젊었을 때의 이순자 씨는 마루와 방을 직접 걸레질하고 남편을 섬기며 산 여성이었다고 한다. 부인이 잘 챙겨주니 부부 금실은 아주 좋다고 한다.
전두환과의 대화가 길어져 저녁이 됐을 때 이순자 씨가 조용히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본 ‘그 집 사람’이었다(경찰 경호원들은 대문만 열어주고 본채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여사는 남편을 ‘각하’라고 불렀다. “각하.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시면 젊은 사람들은 시장해요. 나와서 저녁식사를 하세요.” 그러자 전두환은 대뜸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가!”라는 말에는 전혀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부부는 그런 식으로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 여사가 “빨리 나오세요, 음식 식어요” 라고 재촉하자 전두환은 밝게 웃으며 “그럼 식사하러 갈까” 하며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거실 겸 식당으로 연결되고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에 한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응접실에서도 그랬지만 거실의 가구도 오래된 것 일색이었다. 청와대에서 나올 때는 가장 좋은 것이었는지 몰라도 20여 년이 지났으니 낡을 대로 낡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가. 왜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청와대 나올 때 장만하신 건가요? 가구들이 오래됐네요”라고 하자, 이 여사가 “우리는 익숙해서 그런지 불편한 건 몰라요. 우리는 (추징 때문에) 가구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어요”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식탁의 의자는 삐걱거렸다. 삐걱대는 의자보다 더 불편했던 것은 추위였다. 응접실에 있을 때도 서늘해서 웃옷을 입고 있었는데, 거실은 넓어서 더 추웠다(3월 초였다). “안 춥습니까?” 물으니 이 여사는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서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기자는 집에서는 항상 가볍게 입는다. 그러나 전두환 부부는 옷을 다 챙겨 입고 있었다. 이 여사는 “이제는 다 컸지만, 전에는 손자들도 춥다고 오지 않으려고 했어요”라고 했다.
식사는 주방 아주머니 한 분이 챙겨줬다. 이 아주머니를 제외하곤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본 탓인지 이 여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이 집은 내가 지은 거예요. 각하가 연대장으로 월남에 가게 됐는데, 아이들은 커가고 마땅히 살 만한 집이 없었어요. 각하는 살림에 대해서는 전혀 참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한 후 파는 것을 세 번 했더니 돈이 모여서 그 돈으로 이 집터를 사서 지었어요. 지금 연희동은 그럴듯하지만 그때는 논밭이 있는 변두리였어요”라고 했다.
이순자는 복부인?
묻지도 않았는데 집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한때 그가 복부인이었다는 풍문이 떠올랐다. 전두환의 측근들은 한결같이 ‘전두환은 전혀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이 여사가 전적으로 맡아 했다’고 말한다. 그 시기 사관학교 출신들은 대개 그렇게 살았으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민정기 씨는 “그분은 결혼 후 8년간 처가살이를 했다. 그래서인지 부부의 재산 관리와 증식은 이 여사의 아버지인 이규동 씨가 주로 해줬다. 이 여사도 편물을 배워 재산을 보탰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1970년 주월 백마(9사단) 29연대장을 지냈는데 그 무렵 땅을 사 본채를 지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한국에 없었으니 명의는 이순자로 했다. 이 여사 명의인 데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장만한 것이 분명하니, 이 집은 비자금 추징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별채는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전두환 명의로 옆집을 사서 마련한 것이기에 추징됐다. 민정기 씨는 전두환의 재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규동 선생의 도움으로 내외는 전두환이 영관 장교를 할 때 경기도 오산(29만 평, 약 95만㎡)과 성남, 장남 재국 씨가 운영하는 시공사가 있는 서울 서초동(당시는 경기도 광주군)의 땅을 매입했다. 오산은 1968년, 성남은 1960년대, 서초동 땅은 1970년쯤, 연희동 집은 1969년 매입한 것으로 안다. 1983년 공직자 재산등록 때 부부가 각각 20억 원, 40억 원을 신고한 것도 이 땅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부부는 1980~90년 이 땅에 대해 증여·상속 절차를 밟았다. 지금 자녀들이 운용하는 재산은 이것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분 명의의 재산은 1996년 다 추징됐다. 전직 대통령 연금도 중단됐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 여사 명의의 재산으로 생활해왔다. 이 여사 재산이 이번에 검찰이 압류한 30억 원짜리 개인연금이다. 30억 원을 넣어놓고 첫달부터 매월 1200만 원을 받는다. 이 돈으로 주방 아주머니 봉급도 준다. 이 돈은 친정아버지(이규동)가 남겨준 유산이다. 이규동 선생의 임종(2001)은 이창석 씨만 했는데, 선생은 어려움에 처한 이 여사를 위해 네 자녀에게 고루 상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창석 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누나에게 30억 원을 전달했는데, 검찰은 그 돈도 비자금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압류했다. 그에 앞서 이 여사는 2003년 추징 때 남편을 위해 130억 원을 대납한 바 있다. 그때 이 여사는 ‘친정살이를 하면서 모아온 알토란 같은 내 돈’이라며 반대했지만, 전 대통령이 ‘나라가 우선이다’라고 해서 내놓게 된 것으로 안다.”
29만 원과 육사발전기금
‘29만 원’에 대한 설명도 요구했다.
“1996년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 받은 그분은, 그분 명의로 된 312억 원의 금융자산을 추징당했다. 모든 금융자산을 검찰이 가져간 것이다. 그런데 미납 추징금 문제로 2003년 법원에 가자 재판부는 그분에게 모든 재산목록 명세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그분 재산은 검찰이 모두 가져갔으니 명세서는 검찰이 작성해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찰이 갖고 간 계좌에서 자투리 돈을 남겨놓았던 모양이다. 그 끝전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총 29만 원이 남아 있었다. 그 돈은 그분이 손도 댈 수 없는 것이었다. 검찰이 언제든지 꺼내갈 수 있는 돈인데 가져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의자는 그분이기에 ‘내 재산인 것이 맞다’고 인정했는데, 그것이 ‘전두환 재산은 29만 원뿐’으로 왜곡돼 알려졌다. 검찰이 제대로 했으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오래전 전직 대통령 연금에서 1000만 원을 내놓아 육사 발전기금 200억 달성 행사에 초대된 전두환 부부.
“육사 출신 중에는 이렇다 할 사업가가 없어 학교발전기금을 모으는 데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나는 그분이 전직 대통령 연금을 받던 1996년 이전, 다달이 나오는 연금에서 매달 100만 원을 10차례 육사 발전기금으로 보내게 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2012년에야 200억 원이 모였다며 육사에서 행사를 한다기에 갔던 것이다”
민정기 씨에게 그의 돈 얘기를 더 따져 보기로 했다.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해본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사람도 체면 때문에 대소사에는 부조를 해야 한다. 전두환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전두환은 결혼식에 얼마를 부조하느냐”고 물어봤다. 민 씨는 ‘무슨 그런 질문을 다 하느냐’는 눈빛으로 기자를 한참 바라보더니 답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을 거느렸으니 대소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동료들의 대소사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연희동에 갇혀 있다시피 지내기에 그런 행사가 있으면 모처럼 외출을 한다며 내외가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결혼은 날을 받아놓고 하는 것이니 청첩이 오지 않나. 그래서 미리 준비를 한다. 부조를 얼마 하느냐고? 5만 원을 하면 ‘대통령을 한 사람이 쩨쩨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100만 원을 하면 ‘숨겨놓은 재산이 아직도 많나보지’ 하며 힐난하지 않겠나.
그분은 부조금을 내지 않는다. 대신 정성껏 ‘축혼문(祝婚文)’을 써주신다. A3용지 크기의 한지에 붓으로 ‘축혼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혼주와 신랑 신부 이름을 쓰고 결혼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이렇게 살아라’ 하는 당부를 적어주는 것이다.
이승만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달필이었고, YS는 큰 붓으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를 썼지만, 그분은 작은 글씨로 긴 내용을 세로로 줄을 맞춰 또박또박 쓴다. 줄이 삐뚤어지지 않게, 자를 대고 한자 한자 아주 정성스럽게 쓴다. 그러다 한 글자라도 틀리게 쓰면 버리고 새로 쓰신다. 아주 정성을 들인다. 그 분을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전두환이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운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경조사 챙기기
A씨는 늦게 얻은 자식 결혼식에 전두환을 초청했다가 이 축혼문을 받았다. 그는 또박또박 붓글씨를 써준 전두환의 정성에 감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사동의 잘한다는 표구점을 찾아가 액자로 만들어 아들 부부에게 줬다. A씨는 “나는 어떠한 부조보다도 그것이 고마운데, 아들은 집이 좁아서인지 그 액자를 걸어놓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내친김에 더 불편한 질문을 해보았다. “부음은 갑자기 날아오지 않나. 다른 일이 있거나 타지에 가 있으면 가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통해 부조금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민 씨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받고 있어야 하는가…. 그분은 여든이 넘었다. 옛날에도 예순이 넘은 노인은 상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부음을 받으면 갈 수 있는 곳은 반드시 가신다. 그러나 당신이 궁금해하는 부조는 못 하신다.
결혼식은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니, 가면 옛 동료를 만날 수 있다. 그분은 피로연장에서 식사를 하며 동료들과 환담하시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부음은 갑자기 날아오니 옛 동료들과 연락해 빈소에서 만나는 형태로 간다. 장례식장은 이목이 번다하기에 참배를 마치면 빠져나와 가까운 식당으로 가신다. 서울의 중요 장례식장은 서울대병원, 삼성병원, 아산병원에 있으니 가는 식당도 정해져 있다. 대개 칼국수집으로 가신다.
○○정, ○○칼국수 등인데(기자도 가끔 가는 곳으로 그리 비싸지 않다), 요리 몇 개에 칼국수를 잡숫고 헤어진다. 비용은 누가 내냐고? 대통령을 제외한 옛 동료들은 대부분 연금을 받고 있다. 일부는 사업을 하고 있으니 그 정도 음식값은 누가 내도 낸다. 그분이 음식값을 내게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전두환의 차는 누가 운전할까.
“경호실에서 퇴직한 분이 해주신다. 그분도 연금을 받는 분이라 자원봉사를 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분 주변에 이따금 모이는 사람은 대개 그런 이들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대통령비서관을 했고 지금은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니 그분이 어려워지면 달려가 도와드리는 것이다.”
전두환은 자기 명의로 된 재산이 진짜로 없을지 모른다. 그렇건만 그는 인사할 곳은 다 인사하는 유유자적함을 보여왔다. ‘남자답다’고 할 수 있는 그런 태도가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그를 거듭해서 공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검찰도 연희동은 털어도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 친인척 조사로 방향을 돌렸다. 이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될 것 같다. 첫째는 자녀들이 상속받은 재산 부분이다. 전두환 부부는 젊은 시절 장만한 부동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했다는데 여기에 이창석 씨가 등장한다.
명의 이전 시점이 핵심
2004년 8월 9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방문을 받은 전두환. 그러나 18대 대선 전후 박 대통령은 그의 집을 찾지 않았다.
이번 수사와 앞으로의 재판에서 가장 시달릴 사람은 이창석 씨다. 전두환 측 주장대로 이 씨가 전두환 부동산을 한때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를 전두환의 재산관리인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씨는 과거에도 자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번 소환은 14번째라고 한다. 검찰은 이 씨를 굴복시켜 재산관리인이라는 자백을 받기 위해 주변 수사를 강화할 것이다. 다른 허점을 잡아 본건을 시인케 하는 전형적인 특별수사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씨가 재산관리인임을 인정한다면 검찰은 전두환 자녀들이 받은 부동산을 압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갈래는 다른 친인척과 지인이 관리하는 전두환 비자금 추적이다. 이는 대상자 모두의 재산과 금융거래를 뒤져야 하는 큰 수사다. 검찰은 전두환의 생질(누나의 아들)이 운영하는 조경회사에 그의 돈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다 걸려드는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 거래에 대한 책임도 묻겠다고 했다. 상당한 압박이 아닐 수 없다.
수사는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재판이 수사한 대로 결론 날지는 의문이다. 흔히 ‘돈에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고 한다. 돈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것이고 ‘돌고 도는 것’이라, 서너 단계 전달되고 나면 누구의 돈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워진다. 돈은 최종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주인인 경우가 많다. 전두환의 재산으로 밝혀지면 압류되고 이를 관리해온 사람도 처벌된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자기 돈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방계 인물에 대한 검찰 수사는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된다.
5공 세력들은 이러한 수사를 곱게 보지 않는다. 예비역 육군 대장인 고명승 성우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미납금 1652억 원이 어디로 갔느냐고 야단들인데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은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이 있고 정치자금도 모을 수 있지만, 과거엔 대통령이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다 모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일을 2인자들에게 맡겼기에, 이후락이 ‘떡고물을 주워먹었다’고 한 것이고. 그래서 전 대통령은 잡음을 없애려고 당신이 직접 걷었지. 돈을 내는 기업가들에게는 세금 혜택을 받도록 증서를 써주면서.
그렇게 마련한 돈을 민정당 창당자금과 운영자금 등으로 내려보내지 않았나. 총선 자금도 보내줬고, 노태우가 출마할 때도 상당한 돈을 제공한 것으로 안다. 그는 부지런히 전방과 일선을 돌아다녔으니 금일봉이나 격려금으로도 많이 나갔겠지. 그렇게 돈을 줄 때 영수증을 받았겠는가. 나는 한평생 그를 지켜봤지만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아니야. 지금 그는 그 얘기를 할 수도 없으니 묵묵히 당하고 있는 것이야.
지금의 문제는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것이야. 5·18특별법이 소급입법 아닌가. ‘전두환법’도 마찬가지고. 전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고 단임을 실천한 공로가 있어.”
DJ 비자금은 왜?
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622억 원으로 감정을 받은 천안연수원 매각 대금을 국가에 헌납했다고 밝힌 바 있다. 16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기업으로부터 차에 실은 자금을 불법으로 받은 것이 밝혀져 ‘차떼기 당’이라는 비난을 받고 거액의 추징금을 부과받았다. 이러한 비난에서 벗어나고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연수원을 매각한 대금을 헌납한 것이다. 천안연수원은 1991년 서울 가락동에 지은 연수원을 매각한 돈으로 1996년 새로 지은 것이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 정당이 수백억 원의 부동산을 보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두환 시절부터 운영자금이 축적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하다.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으로 거액을 추징당하게 됐을 때 이 부동산을 팔아 납부했다. 그러나 이 연수원을 지을 때 전두환 자금이 들어갔다면 그 금액만큼은 전두환 추징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전두환 비자금 사건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문에 터져나온 측면이 있다. 노태우 비자금은 YS가 금융실명제를 전격 시행하면서 불거졌다. 노태우도 비자금을 다양한 곳에 사용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가 한창일 때 뜻밖의 일이 터졌다. 1995년 10월 17일 DJ가 베이징에서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시인한 것.
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여당 후보인 YS가 DJ를 이기고 당선됐는데, 노태우가 DJ에 20억을 줬다고 하니 YS에게는 얼마나 갔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YS가 대통령이었기에 이 부분은 수사를 비켜갔다. 그리고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가 당선되자 김태정 검찰총장은 DJ 비자금 수사 유보를 선언했다.그러나 DJ 비자금 수사는 유보된 게 아니라 영원히 이뤄지지 않았다.
YS가 금융실명제를 하기 전까진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 여야를 막론하고 지원하는 게 관례였다. 전두환 비자금은 노태우 비자금보다 먼저 조성된 것이다. 전두환 비자금 수사는 어디까지 갈 것이며 어떤 결과를 맞을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 수사는 과거에 이미 다 했던 것이다. 돈은 꼬리표가 없으니 이번 수사가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처럼 끝난다면 검찰은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전두환을 또 봐줬다’ ‘대통령한테 잘 보이려고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비난이 따를 수 있다.
이순자의 하소연
정말로 돈이 없다면 그동안 전두환 부부는 자녀들이 준 돈으로 생활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자녀들까지 모두 조사 대상이 됐다. 검찰은 모든 가족을 다 조사하지는 않는데, 그런 관례를 깬 것이다.
노무현은 검찰 수사를 받자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한 5공 인사는 “전두환은 세상과 싸울 생각도 힘도 없다. 그래서 가택수색과 압류 집행에도 순순히 응했다. 이제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능멸은 그에게는 일상이 됐다. 그들은 가족 중의 누군가가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서로 기색을 살핀다. 그러나 스스로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 이순자 씨는 “각하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우리나라의 총 GNP(국민총생산)가 180억 달러였는데 청와대를 나올 때는 세 배가 넘는 600억 달러였다. 언론은 이러한 것은 외면하고 자꾸 나쁜 것만 쓴다. 우리는 세상과 싸울 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의 집을 나와 차를 타고 돌아올 때 머릿속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