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기(動機)라는 말은 인과(因果)의 사촌쯤으로 보인다. 어쩌면 인과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8월호에 실은 ‘인과의 오류’에서 다루지 않은 것은 ‘동기’에 내재한 특수한 의미 때문이다. 바로 인간학적 측면이다. 이 측면 때문에 인과론이 여러 오류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설명’ 기능을 하는 데 비해, ‘동기론’은 종종 ‘비역사적 설명’으로 일탈한다.
친숙한 전래동요로 엮은 놀이음악극 ‘콩쥐팥쥐’. 전북 전주시, 김제군, 완주군은 콩쥐팥쥐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네를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콩쥐팥쥐는 권선징악의 통쾌함 때문에 읽히고 또 읽힌다. 그런데 소설로 끝나야지 역사로 나오면 낭패를 본다.
그런데 인과론의 맥락을 떠나 동기를 정형화한 행위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그런 게 있나, 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의외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조금 비꼬아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오류를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통상의 의미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인간학적 영역으로 넘어오면 생기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이때의 인간학이란 역사적 맥락이 거세된 논의를 말한다.
‘콩쥐-팥쥐론’과 거짓 기억
나는 이를 콩쥐-팥쥐론이라는 학술 용어로 설명한다. 일례로 역사를 공부할 때 자주 나오는 명분과 실리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명분은 헛된 것, 실리는 바람직한 것이라는 콩쥐-팥쥐 논법을 적용한다. 콩쥐-팥쥐 논법이란, 동시에 있을 수 있는 정책이나 견해를 선/악 모드로 환원하는 ‘근대 한국 역사학의 포폄(褒貶)론’을 말한다. 이 신종 근대 포폄론은 당색과 근대주의를 배경으로 국사, 특히 조선시대사를 이해할 때 대중의 편견을 강화하며 교묘하게 기생하고 있다.
위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콩쥐-팥쥐론은 어떤 인물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 전반에 걸친 이분법, 환원론에 대한 반성이다. 다만 우리가 논의하려는 동기론의 익숙한 사례이므로 소개해두는 것이다.
동기론의 오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역사학도의 눈을 끄는 기사 하나를 보고 가려 한다. 7월 25일(현지시간) CNN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도네가와 스스무 교수팀이 26일자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거짓 기억 재현 실험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고 보도했다. 정보를 부호화해 쥐의 뇌세포를 조작함으로써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거짓 기억의 존재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낯익은 주제 중 하나다. 그러므로 새삼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짓 기억의 메커니즘을 뇌에서 확인했다는 의미는 매우 크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힌 뇌과학이 거짓 기억의 메커니즘까지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네가와 교수는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거짓 기억이 실제 기억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네가와의 말은 정당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거짓 기억을 가진 사람이 그 기억을 실제 일어났다고 굳게 믿는 것이 어찌 바람직한 상황이겠는가.
그렇지만 역사학은 이런 사태에 대비해 수천 년 동안 대책을 강구해왔다. 우리가 10여 차례에 걸쳐 살펴본 ‘역사기록의 오류와 진실’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지금 ‘기억은 믿을 수 없다고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기억을 전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인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바꾸는 ‘토탈 리콜’은 가능할까. 도네가와 교수진은 실험용 상자에 쥐를 넣고 발에 전기 충격을 줬다. 그리고 유전학적으로 상자에서 충격받은 기억에 반응하도록 쥐의 뇌세포를 바꿔 거짓 기억을 심었다. 2012년 개봉 영화 ‘토탈 리콜’.
역사학자로서 호모 사피엔스 대신 ‘노는 인간’에 주목한 호이징하(J. Huizinga)는 놀이 역시 하나의 의미 기능이며 문화의 기초라고 보았다. 지난 설날 먼 데 사는 동생들이 모처럼 휴가를 내서 왔고 우리는 연 이틀 동안 윷놀이에 정신을 잃었다. 간간이 사촌동생, 처남, 장모님이 들락날락하며 패가 나뉘었고, 쉴 새 없이 먹으며 소리를 지르고 탄식했고 발을 굴렀다(윷놀이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마 단독주택이 아니었으면 벌써 아래층에서 뛰어올라왔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집으로 돌아간 제수씨는 몸살이 났을까! 이걸 어떻게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왜 노름꾼이 자신을 잊도록 도취하는가? 왜 축구 시합에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가? 이렇게 놀이에 열광하고 몰두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분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몰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동물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호이징하,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까치, 1993, 9~13쪽
왕권 강화라는 해석
인간이나 동물이나 논다. 재미있게.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 식구들이 노는 것도 비슷하다. 서로 물어버릴 듯하지만 심하게 물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킨다.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든지 어물쩍 넘어가는 사안 중의 하나가 광해군대 내내 계속된 궁궐 공사이다. 많은 분이 왜 그렇게 궁궐공사를 했느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을 ‘왕권 강화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시행정(展示行政)’이란 말이 있다. ‘보여주기 위한 행정’이란 뜻이다. 그걸 국왕이 한 게 궁궐공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뭔가 존재감을 보여주고 과시를 해야겠는데, 마땅한 정책도 아이디어도 없으니까 보도블록 새로 깔고, 청사(廳舍)나 짓고, 무슨 ‘축제’니 하는 이벤트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독재정권일수록 동상이나 탑 등 대형 건조물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배경과 발상은 같다.
-오항녕,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2010, 208쪽
언뜻 보면 그럴듯한 설명이다. 통상 궁궐공사를 왕권 강화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나 역시 그런 편의적인 통설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다시 이렇게 덧붙이긴 했다.
그러나 왕권은 강화하지 않아도 원래 강한 것이다. 그게 관료제든 왕조체계든 ‘위계’로 볼 때 가장 강한 권력이 제도적으로 국왕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러면 그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인재를 널리 등용해서 정치세력을 확대하여 그로부터 군주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방법도 있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어 비상시에 곧 군사력이 되는 그들의 지지를 확보해두는 것도 유력한 왕권 강화의 한 방법이다. 국왕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그 많은 방법과 장치를 놓아두고 겨우 선택한 것이 궁궐 공사라니…. 왕권 강화의 방법을 ‘궁궐 공사’에서 찾는 것 자체가 이미 통치력 부재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어리석은 왕권 강화책이 바로 궁궐 공사였음은 패망을 재촉한 숱한 군주들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바이다. 안타깝게도 광해군도 그중 하나의 사례를 더하고 말았다.
-앞의 책, 231쪽
실은 미쳤다?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도 왕권 강화라는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런 대규모 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왕권의 행사이자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광해군은 새로 지은 창덕궁에선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늘 하소연했다. 그는 기존 궁궐에서 매우 불안해했고 그 결과 풍수설에 깊이 빠져들었다.
광해군이 신뢰한 인물이 있는데, 이의신(李懿信), 성지(性智), 그리고 시문룡(施文龍)이다. 이의신은 교하(交河) 천도를 주장했으나 좌절됐다. 성지는 풍수를 하는 환속승이고, 시문룡은 풍수를 안다고 정인홍(鄭仁弘)이 천거한 중국인이다. 정인홍은 광해군이 믿은 멘토였다. 인왕산 기슭에 있는 궁궐이 바로 인경궁(仁慶宮)인데, 광해군대 핵심권력자였던 이이첨(李爾瞻)이 건설을 건의했고, 그 배후엔 성지와 시문룡이 있었다. 아예 수도를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 반대에 부딪히자, 광해군은 대신 인경궁을 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 셈이다.
이런 광해군의 정신상태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를 ‘혼군(昏君)’이라고 불렀다. ‘정신 나간 임금’이라는 뜻이다. 나도 쭉 그렇게 불러왔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광해군(광해가 됐던 ‘하선’이 아니라!)이 실제 광해군과 유사하다. 소심하고 불안해하며 화를 잘 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즉위년에 이미 창덕궁이 완공됐는데도 무슨 소리가 들린다며 머무르지 않았고, 계축옥사 뒤인 광해군 7년엔 “대조전(大造殿)은 어둡고 불편하여 오래 머물 형편이 못 되므로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기고 싶은데, 선수(繕修)하라는 명이 내린 뒤로 대신과 유사 제조(有司提調)가 서로 이어 인피하고 들어가니, 지극히 한심스럽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이런 광해군을 두고 의학적으로 ‘미쳤다’고 진단하는 의사도 있다(이상곤, ‘낮은 한의학’ 광해군의 건강학②, 프레시안).
콜링우드의 오류
나는 이상곤 박사의 광해군대 역사에 대한 이해, 나아가 광해군대와 연관된 전후 시기의 이해에 동의하지 못하는 바가 꽤 있다. 그런 이유와 별도로 역사학자들은 좀체로 ‘미쳤다’는 판단을 꺼린다. 자꾸 뭔가 ‘합리적 이유’ 속에서 사건을 설명하려고 든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이는 인간성의 측면에서 보나 합리성의 측면에서 보나 타당한 태도가 아니다. 제 정신이 아닌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신관념주의(Neo-idealism)’로 분류되는 콜링우드는 ‘관념적 오류’의 일반적 사례다. 저서 ‘역사의 관념(The idea of history)’으로 유명한 그는 다음과 같은 전제 아래 역사를 이해했다.
1) 모든 역사는 사상(생각)의 역사다.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반성적 사상의 역사다. 역사는 의식(consciousness)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며,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
2) 그러므로 사상사(the history of thought)는 모든 역사다. 역사는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지나간 사상을 다시 입법(立法)하는 것이다.
3) 그 결론을 증명하기 위해 호소할 데는 역사적 사상 그 자체 외엔 없다.
그의 생각에, 역사라는 개념은 “사상만이 사건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역사가는 그의 재(再)생각 과정을 통해 그 사건을 알 수 있다. 그는 “역사가는 사람이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니 그의 책 ‘역사의 관념’이 얼마나 재미없었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의 모든 관념은 반(反) 역사적, 반경험적인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동아시아 전통 역사학을 경사합일(經史合一)이라 하여 마치 역사학이 경학에 종속된 듯 설명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경사가 합일된 적은 없었다. 경은 경이고, 사는 사였다. 콜링우드에서 보면 오히려 서양 사학사에서 계속 철학과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어떤 역사가 사상사일 수는 있다. 내가 조선 사상사를 전공하듯이. 또 어떤 사상은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입법될 수 있다. 내가 역사의 목적론과 근대주의를 비판하면서 광해군 시대를 다시 구성했듯이. 그러나 역사가의 관심을 끄는 어떤 사상이 감정과 분리될 수는 없으며, 더구나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유의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떼어내어 더 일반적인 설명을 이끌어내는 데서 생기는 오류, 즉 동기의 일반화를 찾는 데서 생기는 오류의 한 켠엔 각각의 인간을 ‘인간 일반(man in general)’으로 이해하는 오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흔히 하는 말로 ‘인간은 원래 그래!’라는 단언이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야!” “남자는 원래 폭력적이야” 등등. 그러니까 인간의 ‘어떤 성격’을 강조하면서, 혹은 그 성격으로 인간 자체를 환원시키면서 다른 측면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자리에 ‘이기심’이나 ‘폭력성’이 들어갔을 뿐이지 동일한 논리 속에 있다는 점이다.
인간 일반
프랑스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레미제라블’. 프랑스혁명은 역사가 ‘해석의 역사’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계속 다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개인을 대중으로, 대중을 개인으로 혼동하지만 않아도 프랑스혁명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은 많이 줄어들고,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미국사가 중에는 흑인에 대해 왜곡된 기술을 남긴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필립(Ulrich B. Philips)은 “노예는 흑인(negroes)이다. 그들은 반항적이라기보다 순종적이며, 비관적인 대신 경쾌하고, 무뚝뚝하기보다는 상냥하고 공손하다”라면서 흑인이라는 종족(race)의 성격을 단순화했다. 이를 비판한 스탬프(K. Stampp)는 “노예도 평범한 인간이다. 결국 흑인은 검은 피부를 가진 백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오류다.
흑인 노예들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뚝 떨어져 미국에 내팽개쳐졌다. 전혀 선택할 수 없는 노예로서의 삶을 강제로 살았다. 이들의 문화적, 심리적 상태가 어떻게 백인과 같을 수 있는가. 이들이 언제 백인과 같은 교육과 경제적 혜택을 누렸는가. 스탬프식의 비판은 흑인 노예의 실제에 대한 또 다른 오류와 왜곡을 낳게 마련이다. 인종성, 민족성에 대한 논의는 또 할 기회가 있으니까, 오늘은 한 가지만 더 정리하고 마치기로 하겠다.
대중과 개인의 착각
‘인간 일반’을 전제로 하는 역사 탐구에는 대중을 하나의 인격으로 환원하거나, 어떤 개인을 마치 대중인 듯이 해석하는 오류도 수반한다. 대문자 역사(History), 즉 어떤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힘이나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서 이끌려간다고 상정하는 역사에서 이런 착각이 종종 일어난다. 헤겔이 독일 예나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을 보면서 ‘마상(馬上)의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경탄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실제로 헤겔은 이후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라는 말로 아예 대중을 대변하는 영웅마저 지배하는 또 다른 실체를 만들어냈다. 중세에 기독교의 신(神)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헤겔에겐 ‘절대정신=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했듯,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E. H. 카, 김택현,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1997, 79~80쪽)
확실히 역사에는 상당한 정도까지 숫자의 문제가 있다. 농민봉기도, 의병항쟁도 숫자가 있어야 역사에 남는다. 영웅사관으로 알려진 칼라일은 응당 ‘역사란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라고 하는 유감스러운 주장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카는 가장 감동적으로 그가 역사책 속에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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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만 명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굶주림과 헐벗음과 악몽 같은 억압! 바로 이것이, 철학자연하는 변호사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방귀족의 상처 입은 자만심이라든지 퇴짜 맞은 철학이 아닌 바로 프랑스혁명의 주요한 동인이었다. 어떤 나라에서든지 그와 비슷한 모든 혁명의 경우에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칼라일과 볼세비키혁명의 레닌이 보았던 ‘수백만’은 수백만의 ‘개인’이었다. 거기엔 ‘세계정신’ 같은 비인격적인 무엇은 전혀 없었다. 이런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는 가끔 익명성과 비인격성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한데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이기를, 또는 개인이 개인이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