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홍경식 민정수석, 1987년 대선 개입한 안기부 특보팀 근무

박근혜 정권 민정라인 大해부

  • 송국건|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13-08-22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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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깐깐해서 ‘홍 주사’, 군기 잘 잡아 ‘홍 반장’
    • 朴 정권 직급 무색…수석과 비서관 티격태격
    • 검증 게을리해 한만수 낙마 사태 초래
    홍경식 민정수석, 1987년 대선 개입한 안기부 특보팀 근무

    홍경식 청와대 민정수석.

    박근혜 대통령은 여름휴가에서 복귀한 첫날인 8월 5일 청와대 비서실 인사를 단행했다. 김기춘 비서실장과 홍경식 민정수석, 박준우 정무수석, 윤창번 미래전략수석, 최원영 고용복지수석이 합류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 등은 5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박 대통령의 평소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이 같은 비서실 중폭 교체는 생각 밖이다. 여권 내에선 비서실장과 해당 수석들이 국정운영 구상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으로 평가한다.

    정무수석은 이정현 홍보수석의 자리 이동으로 공석이었으니 인사 수요가 있었다. 최순홍 전 미래전략수석은 박근혜 정부의 화두인 창조경제의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성재 전 고용복지수석은 핵심 어젠다인 일자리 창출 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파악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허태열 전 실장과 곽상도 전 민정수석의 경질 이유다. 허 전 실장의 경우 9명의 1기 수석비서관 가운데 4명을 교체하는 마당에 비서실 수장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휘책임을 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허 전 실장을 중도 낙마시켜 비서실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일부 수석들을 그와 동반 사퇴시켰다는 말도 청와대 주변에서 나온다. 허 전 실장은 대통령비서실을 이끌면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허 전 실장과 곽 전 수석이 청와대 민정라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많다. 이로 인해 박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됐다는 것이다.



    허태열·곽상도 경질 진짜 이유

    민정수석실은 인사검증에 실패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미국 성추행 사건 때는 청와대 참모 감찰 권한이 있는 민정수석실의 어설픈 조사로 의혹을 증폭시켰다. 여기에다 곽상도 전 민정수석은 직속 부하인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과 인사검증 시스템 구축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곽 전 수석은 청와대 인사 시 교체대상 1순위로 꼽혀오다가 이번에 허 전 실장과 함께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곽 전 수석의 경질 배경을 놓고 다른 해석도 나온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국회 국정조사가 실시되고 거리에서 촛불집회가 열려 ‘박근혜 하야’ 구호까지 나오는 상황을 만든 데엔 곽 전 수석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 사태는 6월 14일 검찰의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수사 결과 발표로 악화됐다.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라 심리전단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인터넷에서 정치·대선 관여 활동을 한 것으로 보고 공직선거법상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조항과 국정원법의 ‘정치관여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원 원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또한 검찰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과정에서 축소·은폐를 지시했다며 김 전 청장을 공직선거법과 경찰공무원법 위반, 형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당초 검찰은 이런 혐의로 원세훈 전 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했으나 황교안 법무장관의 반발에 밀려 불구속 기소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원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한 것은 박 대통령에게 당장 타격이 됐다.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야권은 국정원의 조직적 대선 개입이 확인됐다면서 국정조사를 요구했고 결국 장외투쟁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내심 채동욱 총장 체제의 검찰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다 검찰을 사실상 감독하고 통제할 책임이 있는 민정수석실로 불똥이 튀었다. 정부 사정라인에서 핵심 역할을 한 적이 있는 A씨는 “곽 전 수석은 ‘좌파 검사’가 수사팀에 들어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해 검찰의 수사가 정권에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만든 간접 책임이 있다. 그 점이 이번 문책성 교체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A씨가 지목한 ‘좌파 검사’는 국정원 사건 수사 주임검사인 진재선 검사다. 진 검사는 서울대 법대 92학번으로 PD(민중민주)계열 운동권 출신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단체인 ‘사회진보연대’의 후원금 모금에도 참여했다.

    검사 출신으로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위원인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국정원 수사 결과 발표 직후 “검찰이 쓴 공소장을 보고 경악했다. 공소장을 쓴 주임검사는 운동권 출신인데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사태”라고 했다.

    결국 허태열-곽상도 라인이 검찰 쪽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정권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 두 사람을 전격 경질하고 검찰총장 출신인 김기춘 전 의원과 홍경식 전 서울고검장을 후임에 앉혔다는 게 얼개다. 박 대통령은 김-홍 라인 구축 다음 날 ‘비정상의 정상화’와 ‘공직기강’을 거듭 강조했다.

    안기부 ‘특보팀’ 前歷 논란 일 듯

    김 실장과 홍 수석은 사법시험 기수가 채동욱 검찰총장보다 각각 22년, 6년 빠른 대선배다. 따라서 두 사람의 등장이 청와대의 검찰 견제, 나아가 장악력 강화 포석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전임 허태열 실장은 행정관료와 정치인 출신이다. 곽상도 수석은 검찰 출신이기는 하나 사시 25회로 채 총장보다 1회 후배인 데다 검사장에 오르지 못하고 부장검사에 그쳤다. 검찰 지휘부와의 소통, 조율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경식 민정수석은 당장 검찰을 장악하는 데 총대를 멜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부터 청와대가 채 총장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일부 검찰 간부를 대상으로 인사 조치를 단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검찰총장은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돼 있다.

    홍경식 민정수석, 1987년 대선 개입한 안기부 특보팀 근무

    박철언 전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공안검사 출신인 홍 수석은 검찰 내에서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과 노태우 대통령의 6공을 잇는 시기(1987~88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는 이른바 ‘특보팀’이 있었다. 장세동·안무혁 안기부장을 보좌했던 팀이다. 이 팀은 당대 실세인 박철언 안기부 특보가 이끌었다고 해서 ‘박철언 팀’으로도 불렸다. 박철언 팀은 안기부 내 북한 파트, 국제 파트, 공산권 파트의 최고 엘리트는 물론이고 외무부·통일원·법무부·법제처·내무부·법원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를 차출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총 인원이 63명이나 됐다. 홍경식 수석의 언론 프로필에는 1987년 서울지검에 근무한 것으로 돼 있는데, 실제로는 강재섭 검사(전 한나라당 대표)가 참모장 노릇을 하던 안기부 특보팀에 차출됐다고 한다.

    당시 홍 검사는 검찰 경력이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팀 내 쟁쟁한 멤버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다고 한다. 이 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전직 국정원 간부 B씨는 “홍경식 검사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말이 적고 무게감이 있었다. 한번 뱉은 말은 절대 주워 담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팀을 이끌던 박철언 전 의원도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서울대 법대 후배이기도 한 홍경식 검사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절대 못 꺾더라”고 귀띔했다. 홍 수석은 검찰 내부에서도 ‘홍 주사’ ‘홍 반장’으로 통했다. ‘홍 주사’는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깐깐하다고 해서, ‘홍 반장’은 조직의 군기를 잘 잡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박철언 전 의원은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박철언 팀은) 제5공화국에서는 남북 비밀회담을 실무적으로 보좌했고, 6·29선언을 기초했으며, 1987년 12월의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도 적극 기여했다”고 술회했다. 이 책은 안기부 박철언 팀 멤버 63명의 실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홍경식 수석의 이름도 들어 있다. 확인 결과, 동명이인은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홍 수석은 초년 검사 시절에 남북 간의 물밑 접촉을 체험했고, 정치의 이면을 들여다봤으며, 대선까지 간접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안기부 특보팀이 대선 승리에 적극 기여했다는 점은, 요즘의 정치 윤리 기준으로는 ‘대선 개입’ 내지 ‘대선 공작’으로 비칠 수 있다. 현재 정국 최대 이슈인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근혜는 국정원 사태 피해자”

    역대 정권에서 국정원 요직을 두루 거친 C씨는 “대선 때마다 국정원이 다양한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지난해 대선에선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원세훈 전 원장은 워낙 간이 작아 주도적으로 선거공작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못 된다”고 말했다.

    전직 국정원 간부 B씨도 “이번 국정원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당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수백만 표 차이로 넉넉하게 이길 것으로 파악했지만, 국정원 여직원 댓글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중도층이 이탈해 109만 표 차이로 신승(辛勝)했다는 말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국정원, 검찰 등 주요 사정기관과 현안을 조율한다. 역학관계로 보면 사실상 감독하고 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참여연대는 지난 6월 발간한 ‘이명박 정부 5년 검찰보고서’에서 이명박 정부 청와대가 민정수석실을 통해 한동안 검찰을 정치적으로 통제해왔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4명 중 3명은 고검장 이상의 고위직 출신으로 같은 시기에 재임한 검찰총장들보다 사법연수원 기수가 높았다.

    참여연대는 “실제 민간인 불법사찰 재수사나 내곡동 사저 불법매입 수사 등 정권 후반기에 터진 주요 사건 수사에서 검찰의 성과는 미미했는데, 검찰에 대한 청와대의 영향력이 계속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민정수석실은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고 청와대 직원을 포함한 공직사회의 기강을 감찰하기도 한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D씨는 “한번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민정수석실 팀장급 직원이 말다툼을 벌였다. 직급이 한참 낮은 민정 팀장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것을 보고 민정수석실 파워를 실감했다”고 전했다.

    민정수석실은 정부 요직 인사 때 인사검증을 맡기 때문에 권한과 책임도 큰 편이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에는 민정비서관실, 공직기강비서관실, 법무비서관실, 민원비서관실이 있다. 직원 수는 70여 명으로 9개 수석실 중 가장 많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청와대의 민정수석실에 비하면 규모가 줄었다. 당시엔 5개 비서관실(민정1·민정2·법무·치안·민원제도개선)과 감사팀이 있었고 인원도 100명이 넘었다.

    40명 안팎으로 구성된 박근혜 정부 민정비서관실은 여론수렴과 사정(司正) 업무를 맡고 있다. 사정 업무는 검찰과의 연결고리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민정1비서관실이 여론수렴과 친인척 관리를, 민정2비서관실이 사정 업무를 담당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통합됐다. 박근혜 정부 민정비서관실에는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감찰하는 특별감찰관 10명이 별도로 활동하고 있다.

    공직기강비서관실 파워

    막강한 권한을 갖는 민정수석실 안에서도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국정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부서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부 요직에 대한 인사검증을 담당하는 곳인 까닭이다. 인사가 실패하면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간다. 이 경우 후보자를 물색하거나 추천한 쪽이 문책을 당하기보다는 민정수석실이 책임을 떠안는 경우가 많다.

    홍경식 민정수석, 1987년 대선 개입한 안기부 특보팀 근무

    박근혜 대통령이 8월 8일 청와대에서 홍경식 신임 민정수석비서관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과거 정부에서도 민정수석이 인사 잡음으로 물러난 사례가 몇 번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가 없던 시절인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기준 교육부총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 부총리는 각종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흘 만에 자진사퇴했다. 그러자 김우식 비서실장과 정찬용 인사수석, 박정규 민정수석 등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 멤버들이 전원 사의를 표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정찬용 인사수석과 박정규 민정수석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9년 7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는 여러 의혹이 터져나오자 자진사퇴했다. 당시 정동기 민정수석은 “검찰총장의 선정 및 검증 절차의 불찰로 인해 대통령께 누를 끼쳐 참으로 송구스럽다”며 사표를 제출했고 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박근혜 정부의 곽상도 전 민정수석도 인사 철마다 부실검증 논란에 시달렸다.

    민정수석의 지휘를 받는 1급 공직기강비서관 산하에는 20명 안팎의 2~3급 행정관과 4급 이하 행정요원이 검증팀과 감찰팀으로 나뉘어 활동한다. 이들은 국무총리실과 안전행정부, 국방부, 감사원, 경찰청, 국세청에서 청와대로 파견된 형태로 근무한다. 별정직으로 검사 출신 참모와 정당 출신 참모도 있다. 이렇게 여러 부처와 기관에서 인력을 수급받는 것은 입체적으로 인사검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안을 위해 일부 요원을 제외하고는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인사자료를 검증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선임 행정관으로 3년간 근무했던 박재홍 씨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주로 하는 일은 2급 이상 고위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원 등에 대한 인사검증과 감찰 업무다. 나는 그곳에서 3년 동안 1000명가량의 인사자료를 직접 검증했다”고 밝혔다.

    민정수석실 인사검증 시스템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변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작동 형태는 비슷하다. 인사수요 발생→후보자 발굴→인사팀(인사비서관실)의 후보자 압축→공직기강비서관실의 검증→민정수석실의 하자 여부 검토→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의 판단→대통령의 재가 단계를 차례로 밟는다.

    4명에 불과한 인사팀

    이 중 후보자 발굴은 세 갈래로 진행된다. 안전행정부의 인물DB를 활용하거나, 인사팀(인사비서관실)에서 자체적으로 물색하거나, 추천을 받는 경우다. 이어 후보자 압축 단계에서는 3~5배수로 추려진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이 명단을 받아 자체 기준에 따라 검증한다.

    이 단계에서 공직 후보자가 이명박 정부 시절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만든 200여 문항의 사전 질문에 응답하게 한다. 이어 이 답변서와 후보자의 신상 자료를 일일이 검증한다. 이때 안전행정부, 경찰청, 검찰청, 국세청 등 15개 기관에서 28가지 기본 신상 자료를 제공받는다. 의문점을 발견하면 후보자의 소명을 받아 다시 검증한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작성한 200여 개 체크리스트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낙마했다. 그 후론 공직 후보자에게 질문서를 보내 회신을 받고 있다. 이 질문서는 가족관계, 병역의무 이행, 전과 및 징계, 재산 형성, 납세 등 각종 금전납부의무, 학력 및 경력, 연구윤리, 직무윤리, 개인 사생활 등 9개 분야로 나눠 ‘예’ ‘아니오’로 답하게 돼 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대통령실장실(현재의 대통령비서실) 직속 인사비서관실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선 김동극 팀장이 이끄는 4명의 인사팀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래서 ‘이런 소수 인력으론 인사 수요를 예측하는 일조차 버겁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명박 정부 시절 10여 명이 부처를 나눠 맡아서 인사 수요를 예측하고 후보자를 발굴하는 데도 부하가 많이 걸렸다는 것이다.

    민원비서관실은 국민신문고와 서신 등을 통해 들어오는 민원을 취합해 처리하는 부서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각종 행사에서 제기되는 민원들도 챙긴다. 박 대통령의 미국과 중국 방문 때는 민원비서관이 수행해 현지 민원을 접수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에 따른 기대감으로 민원이 크게 늘어 민원비서관실의 업무량도 대폭 늘었다. 민원비서관실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말기 월평균 1223건이던 대통령 서신 민원은 박근혜 정부 들어 월평균 2989건으로 144.4%나 증가했다.

    민정비서관실, 공직기강비서관실, 법무비서관실, 민원비서관실을 총괄 지휘하는 민정수석은 누가 맡느냐에 따라 역할과 힘이 달라진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 앉으면 다른 수석과 사정기관을 압도한다. 이 경우 민정수석은 검찰, 국세청, 경찰 등 사정기관을 총괄할 수 있다. 민정수석실에 파견된 검사 등을 통해 검찰 수사나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개인적 친분이 깊은 권재진 민정수석을 정권 마지막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문재인 의원은 정치적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민정수석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전해철 변호사(현 국회의원), 이호철 씨 등 젊은 핵심 측근도 민정수석에 앉혔다.

    민정수석실 진입 파워게임

    민정수석실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박 대통령은 초기 민정수석실 인사 때 처음엔 곽상도 수석,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 변환철 법무비서관을 내정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변 내정자는 출근 며칠 만에 자신사퇴 형식으로 청와대를 떠났다. 이 과정에서 곽 수석 내정자와 변 비서관 내정자 사이에 민정수석실 내부 인선을 두고 파워게임이 벌어졌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때부터 이미 곽 수석과 조응천 비서관 알력설도 나돌았다. 곽 수석은 당시 정홍원 총리, 허태열 비서실장, 황교안 법무장관 등 박근혜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과 함께 성균관대 법대 출신이고, 조 비서관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 서로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충돌했다는 풍문이다.

    이중희 민정비서관 내정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대표적이다. 곽 수석은 조 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 비서관을 추천했지만 조 비서관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비서관은 내정이 취소됐다가 다시 내정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민정수석실이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 내에서도 핵심 부서로 떠오르자 청와대 권한 내려놓기 차원에서 아예 민정수석실을 없애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친인척 및 측근 비리, 인사 검증은 경찰, 검찰, 인사비서관실에서 맡으면 오히려 더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민심 동향은 총리실 민정실 같은 정부의 공식 채널에서 청취하면 된다는 것. 미국 등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주요 국가엔 우리의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같은 부서가 없다.

    박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는 ‘작은 청와대’를 지향하면서 실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특별감찰관 제도를 신설키로 한 만큼 업무가 중복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검찰 개혁을 위한 특별감찰관제 도입법안은 국회 법사위에 상정돼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특별감찰관제를 만들어 강제 조사권을 부여하고 친인척 및 주요 공직자의 권력형 비리를 감시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법무부와 감사원이 특별감찰관제를 적극 반대하고 있어 박 대통령 임기 중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폐지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 기능을 담당하는 또 다른 축은 국무총리비서실 산하 민정실이다. 이명박 정부 때 국(局) 단위 조직이던 민정민원비서관실이 확대 개편돼 5월 출범한 기구다. 박근혜 정부가 없앤 특임장관실의 시민사회 동향 점검 업무도 넘겨받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민정’은 한자로 ‘民政’이지만 총리실 민정실은 ‘民情’이다. ‘民情’의 사전적 의미는 ‘백성의 사정(事情)과 형편’이다. 즉, 총리실 민정실의 주요 업무는 여론동향 파악 및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연결고리 역할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민정실장 아래 민정민원비서관과 시민사회비서관이 있다.

    창성동 ‘현장팀’ 30명에 눈길

    총리실 민정 업무를 총괄하는 이태용(42) 민정실장은 정치권에서 온 인물이다. 경남 하동 출신으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사무처에 공채로 들어가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공화당 후신인 자민련과 민자당, 한나라당에서 조직국장·정책국장·지방자치국장·부대변인 등을 거쳤다. 2002∼2004년엔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의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선거 때 여론 분석과 판세 예측, 대안 제시에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민정민원비서관실은 전재호 비서관 등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국내외 주요 정보 및 여론 동향 파악, 치안·안보·재난 관련 사건사고정보 수집, 국무총리실 상황실 운영, 민원업무 처리, 유관기관과의 업무협조를 주로 담당한다.

    시민사회비서관실은 최근 내정된 비서관이 아직 발령을 받지 못한 상태다. 6명의 직원이 시민사회단체와의 협조·지원, 시민사회 관련 정책·제도 개선, 시민사회 의견 수렴, 시민사회단체 국내외 연수, 직능·종교 단체와의 협조 업무를 보고 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소통을 위해 6월 20일 국무총리 자문기구로 출범한 ‘시민사회발전위원회’ 관련 업무를 맡는다. 이 위원회에는 소위 시민단체 빅3인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경실련도 참여하고 있다.

    세종시에 있는 인력과 함께 총리실 민정실을 움직이는 또 다른 인력은 청와대 인근 정부중앙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현장팀’이다. 현장팀엔 검찰, 경찰, 국세청,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직원들이 파견돼 ‘현장 여론’을 수렴한다.

    그런데 이들이 수집하는 현장 여론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이명박 정부 시절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악몽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총리실 민정실 관계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과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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