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간첩 L씨가 쓴 편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근무하면서 해외반탐정국 대위로 시작해 소좌, 중좌로 진급했으며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국가관, 충성심을 발휘하며 북한 체제를 위해 일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대한민국을 위하고, 대한민국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북한 체제에서 배우고 익힌 주체사상, 김일성·김정일 수령관에 대해 다 잊고 작은 보탬으로나마 한국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돼 살고 싶습니다.”
L씨는 2007년 10월 보위부를 이탈해 중국 톈진에 거주하다 2011년 11월 라오스, 태국을 거쳐 그해 12월 한국에 입국했다.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에서 간첩 혐의가 드러났다. L씨는 2000년대 초 보위부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은 후 중국으로 파견돼 위조한 달러화를 위안화로 교환하는 공작을 펼쳤다. 북한 출신으로 월남한 재미동포 P씨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관련됐다는 첩보를 입수한 후 P씨를 중국으로 유인한 혐의도 받았다.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부장판사 윤성원)는 8월 2일 L씨에게 원심과 같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술의 임의성과 신빙성이 인정돼 유죄 판단은 정당하다. ○○○의 범행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로 위험성도 높다. 2007년 이후 공작행위를 중단하고 이탈한 점을 고려하면 원심의 형량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L씨 측은 수사기관의 강압에 못 이겨 간첩 혐의를 허위로 자백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탈북자로 입국한 여간첩이 검거된 것은 2008년 W씨, 2010년 K씨에 이어 L씨가 세 번째다.
“변호사가 거짓 진술 유도”
공안당국 관계자는 “L씨를 비롯한 간첩 사건과 관련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일부 변호사가 국가보안법 관련 수사를 방해하거나 북한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의견을 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7월 28일 L씨가 서울구치소에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분이 나를 변호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국정원장 앞으로 보내는 촌극이 벌어졌다. 내용은 이랬다.
“7월 17일 오전 11시 변호사 ○○○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북한 주민에게 진실과 외부 소식을 알리고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며 북한을 민주화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지 통일이 시급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할 변호사님께서 국가보안법 폐지요, 철폐요 하시는 말씀을 듣는 순간, 북한의 세습 체제를 미화하는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분이 나를 변호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7월 27일 한 번 더 변호사님을 만나서 확고한 저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난날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2007년부터 북한을 배신한 죄가 있다. 그러니 그 후부터 나의 변호를 잘 해주실 수 있으면 해주십사 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위조화폐 문제가 세계 통화법에 걸리니 5년형 정도를 검사님이 내릴 수 있으니 보위부 문제 모두가 거짓이라고 해야 한다는 둥…. 지금 매우 혼돈스럽고 변호사님 보고 저의 변호를 해주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변호사님을 만나고 너무 이해가 안 되어 고민하다가 구치소 계장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민변 소속 A 변호사가 국가보안법 철폐를 언급하고 거짓 진술을 유도했다는 내용이 담긴 이 편지는 L씨의 판결문에 수록돼 있다. 거짓 진술을 유도한 게 L씨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비난받아야 할 사안이다. A 변호사는 그간 다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변호해왔다.
2011년 8월, 검찰은 K씨(48) 등 5명이 북한 대남공작기구인 225국과 연계된 ‘왕재산’을 조직해 간첩활동을 벌였다면서 이들을 구속기소했다. 주범 K씨는 1993년 8월 김일성을 직접 면담해 “남조선혁명을 위한 지역지도부를 구축하라”는 ‘접견교시’를 받고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