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원활한 자금 관리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 상거래로 맺어진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돈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지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특히 상하 수직계열화한 건설업계에서는 공사대금 지급 여부가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을’의 생사여탈권을 갑이 쥐고 있는 셈이다.
영세업체가 많은 전문건설사의 특성상 은행 등 제도권 금융시장에서 충분한 자금을 융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청사로부터 지급받는 공사대금은 생명줄과도 같다.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는 “원활한 공사대금 수령은 하도급업체의 생존과 직결된다”며 “도산하거나 부도를 낸 하도급업체 중에는 원청사로부터 공사비를 제때 지급받지 못한 나머지 ‘돈맥경화’에 걸려 흑자도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부동산 경기침체로 미분양 아파트가 증가한 최근에는 원청사들이 하도급 대금을 미분양 아파트로 지급하는 대물변제 사례도 늘고 있다. D건설은 경기 북부 미분양 아파트를 대거 하도급사에 떠넘겼고, H산업은 하도급 공사 입찰 때 미분양 아파트 인수를 계약 조건으로 명시했다. 또 다른 H사는 계열사의 골프장 회원권 매입을 하도급공사 계약 조건으로 제시했다. C사처럼 해외 골프장 회원권을 공사비로 지급한 경우도 있다. 하도급 공사대금으로 받은 미분양 아파트는 거래가 끊기다시피 한 부동산 시장에서 현금화가 곤란할 뿐 아니라, 거래가 이뤄져도 헐값에 파는 경우가 많아 하도급사 공사자금 부족과 유동성 위기로 이어진다.
샌드위치 신세
전문건설사들의 자금 사정이 악화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공사를 하고도 대금을 받지 못하거나, 늦게 받거나, 기한 내에 받았더라도 현금이 아닌 어음이나 대물로 변제한 경우다.
원청사 부실로 하도급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하면 영세한 전문건설사들은 부도를 내거나 폐업 수순을 밟게 된다. 대형 건설공사의 경우 공사가 장기간 이뤄지기 때문에 대금도 일시불로 지급하지 않고 공사 진척 상황에 따라 매월 기성금 형태로 나눠 지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도급업체는 인건비와 자재구입비 등을 정기적으로 지출하며 공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기성금이 제때 지급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돈맥경화’ 상태가 된다.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나갈 돈은 나갔는데 들어올 돈이 안 들어오면 그 자체로 2배 가까운 손실이 난다”고 말했다.
“한 달동안 4000만 원을 자재구입비로 쓰고 1000만 원을 노임으로 지급했다고 치자. 5000만 원을 지출했으니 최소한 5000만 원 이상의 기성금을 받아야 그 돈으로 다음 달 공사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기성금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겠나. 여윳돈이 없으면 어디서든 공사비를 끌어와야 한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기성금이 밀리면 공사를 포기하고 부도를 내는 수밖에 없다.”
Y건설 P대표도 “하도급업체는 샌드위치 신세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공사는 맨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공사에 필요한 자재는 대부분 현금으로 사와야 하고, 노임도 그날그날 지급해야 한다. 목수처럼 기술을 가진 사람은 며칠만 노임을 늦게 줘도 다른 공사장으로 간다. 우리가 노임을 주고 그들을 고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을’ 신세다. 자재도 요즘은 외상 거래가 거의 없다. 여기저기서 돈 끌어다 공사를 겨우 진행하고 있는데, 원청사가 기성금을 제때 안 주면 공사 포기하고 회사 부도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간 공사하느라 빌린 돈을 못 갚으면 그날로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다.”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건설산업기본법과 하도급법은 원청사가 발주자로부터 받은 기성금 또는 준공금을 수령한 날로부터 15일 이내에 하도급업체에 지급하도록 기한을 명시해놓고 있다. 그러나 일선 현장에서 법정기일 내에 대금을 지급받는 경우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전문건설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하도급업체가 15일 안에 기성금을 수령한 경우는 48.6%에 불과했다. 기성금 평균 수령기간도 원청사보다 하도급사가 대금을 늦게 받고, 대규모 업체보다는 소규모 영세업체들이 더 늦게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속적 갑을관계가 공사대금 지급 현황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원청사가 공사대금을 지급기한 내에 주지 않으면 현행법은 지연에 따른 이자를 물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일선 공사 현장에서 지연이자를 받는 경우는 10건 중 2건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한전문건설협회가 지난해 11월 전문건설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하도급 대금 지급이 늦어졌을 때 ‘지연이자를 받은 적이 없다’는 응답이 73.3%, ‘법규 자체를 모른다’는 응답도 7.7%에 달했다. ‘가끔 지급받는다’는 응답은 9.8%, ‘대부분 지급받는다’는 응답은 9.2%에 그쳤다.
“지연이자? 몰라요”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지연이자는 바라지도 않는다”며 “받아야 할 하도급 대금만 제때 받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G사 임원은 “작은 공사의 경우 대금 지급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공사에 투입된 금액이 많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 버틸 수 있지만, 공사기간이 긴 대형 공사의 경우 선투입되는 비용이 막대해 대금 지급이 몇 달씩 늦어지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고 털어놨다.
최근 몇 년간 건설경기 침체 여파로 종합건설사들이 워크아웃과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이들 건설사가 벌인 공사에 하도급업체로 참여한 전문건설사들의 자금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J건설 J대표는 “원청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벌어진다”고 말했다. 법정관리 이전에 받지 못한 하도급 대금은 받기가 더 어려워지고, 법정관리 이후 진행되는 공사 대금은 꼬박꼬박 지급된다는 것. 법정관리가 원청사에는 악재지만, 하도급사에는 경우에 따라 가뭄 끝 단비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