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호

車로 흥하고 車로 망한 자동차산업 메카

20조 부채 안고 파산한 美 디트로이트

  • 오미정 | CJ E&M e뉴스 기자

    입력2013-08-22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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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창 깨진 건물, 문 닫은 상점, 불 꺼진 사무실…
    • 치안 공백으로 범죄율 수위 달리는 우범도시 전락
    •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 車 내수 침체 직격탄
    • 모터쇼 개최, 영화 촬영장 유치로 재기 모색
    車로 흥하고 車로 망한 자동차산업 메카

    텅 빈 디트로이트 시내 건물들.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는 7월 18일 파산 신청을 했다. 시는 180억 달러(한화 약 20조2600억 원)의 천문학적 부채를 갚지 못해 파산했다. 주는 케빈 오어 변호사를 초법적인 비상관리인으로 내세우는 등 자구(自救) 노력을 기울였지만 파산을 막지 못했다.

    파산 신청 20여 일이 지난 8월 7일 디트로이트를 찾았다. 파산한 도시의 첫인상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자동차 산업으로 영화를 누리던 전성기 때 모습은 온데 간데없었다. 활력을 잃은 도시를 거니는 사람들에게서도 좀처럼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산한 공항, 썰렁한 도로

    8월 7일 인천발 디트로이트행 대한항공-델타항공 공동 운항기는 만석(滿席)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최종 목적지가 디트로이트인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기내에서 만난 한 승객은 “보스턴으로 가는 길인데, 디트로이트에서 환승하는 티켓이 싸서 이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하자 많은 승객이 썰물 빠져나가듯 환승 게이트로 향했다.

    미국은 테러 위험 때문에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 비즈니스 때문에 미국에 온 사람도 입국심사대 직원의 ‘취조’를 피하려고 입국 카드에 방문 목적을 ‘관광’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전 세계 관광객의 10%를 끌어들이는 주요 관광국이라 ‘관광차 미국에 왔다’는 말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디트로이트는 달랐다. 일행 중 한 명이 “관광차 디트로이트에 왔다”고 하자 입국심사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업무 때문에 디트로이트에 왔다”고 고쳐 말하자 그때부터 ‘무슨 일’로 왔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파산한 도시 디트로이트에는 해외 비즈니스맨을 끌어들일 산업도 변변치 않다. “이곳에서 찍는 영화 촬영장을 방문하려 한다”고 설명한 뒤에야 간신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 웨인카운티 공항은 명색이 국제공항이지만, 해외에서 도착하는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도 한산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거대한 타이어 조형물만이 이 도시가 한때 자동차 산업으로 호황을 누렸음을 짐작게 했다.

    시 외곽에는 반듯한 주택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시내로 들어오자 다시 황량함이 밀려왔다. 오후 7시, 중심가인 미시간 애비뉴.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중 대다수가 흑인이었다. 시가 활력을 잃으면서 백인과 아시아인이 대거 빠져나간 탓이다. 현재 디트로이트 주민 중 흑인 비율은 85%에 달한다.

    가게들은 이른 시간인데도 문을 닫았다. 건물은 즐비했지만 1층 상가를 제외한 위층은 대부분 비어 있는 듯했다. 불 켜진 사무실은 간간이 눈에 띌 정도. 호텔은 직원이 태부족했다. 체크인, 체크아웃 카운터는 하나만 열려 있었다. 시를 찾는 비즈니스맨이 적은 탓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호텔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시 외곽으로 나가자 파산한 도시의 현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중심가는 그나마 도시의 형태를 갖췄지만, 외곽은 주택을 제외한 건물들이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한때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회사들이 입주했을 거대한 건물들이 유리창이 깨진 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다.

    인구, 행정, 치안 공백

    무너진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디트로이트 시는 인구 감소로 세수(稅收)가 줄어든 지 오래다. 이 때문에 행정 공백의 역사도 길다. 디트로이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은 도시 1~3위를 오르내렸다. 파산 이후 더 나빠질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시카고에서 온 에밀리 비렌 씨는 “지난해 디트로이트에서 총기 사고가 접수되지 않은 날이 단 이틀이라고 들었다”며 “비즈니스 때문에 왔는데 일을 마친 후 시에서 바로 빠져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캐나다 도시 윈저 출신의 알렉스 엔구엔 씨는 “디트로이트가 가깝지만 거의 오지 않는다. 과거에도 위험했지만 지금은 더 위험해졌을 것 같다”고 했다.

    디트로이트 인근 앤하버 주민 김정훈 씨는 “디트로이트는 오래전부터 재정 형편이 어려웠다. 인구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파산 선언은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한다. 인근에 살지만 최근 5년 동안 디트로이트에 딱 세 번 왔다. 두 번은 모터쇼를 보러 왔는데, 디트로이트에는 그것 말고는 와볼 일이 없다”고 말했다. 한때는 한국 이민자도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빠져나갔다고 한다.

    자동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부상한 20세기에 전 세계는 디트로이트를 주목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1903년 포드 창립자인 헨리 포드가 디트로이트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이후 GM과 크라이슬러 등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업체가 앞다퉈 이곳에 공장을 세웠다. 디트로이트는 일약 북미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車로 흥하고 車로 망한 자동차산업 메카

    올해 1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모터쇼.

    도시는 미국 자동차 산업이 성장가도를 달린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5대호 중심부에 자리를 잡아 수륙 교통이 발달했고, 전통적 공업도시라 기계·조선·정유 등 연관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도 컸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이 쇠락하면서 도시는 함께 병들어갔다. 자동차 산업으로 영광을 누린 도시가 자동차 산업의 쇠퇴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차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잃었다. 미국 대륙에 어울리는 자동차 스타일과 턱없이 낮은 연비는 미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외면받았다. 해외 판로가 막히면서 주로 자국에서만 팔렸다.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세계 최대 시장인 자국 내수시장의 달콤함에 빠져 혁신을 게을리하는 동안 일본 차는 기술력과 디테일을 앞세워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미국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미국의 베스트셀링카 10대 중 4대가 일본 차였을 만큼 일본 브랜드들이 약진했다. 독일 등 유럽 차들도 기술력을 향상시켜 고급차 시장을 잠식했다. 미국 정부가 자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려고 온갖 조치를 내놨지만, 이는 오히려 미국 차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

    두 집 건너 한 집꼴 빈곤층

    급기야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버팀목 노릇을 하던 내수시장도 무너졌다. GM과 크라이슬러는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포드는 파산보호 신청은 면했지만 9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경쟁력 상실로 인해 서서히 기력을 잃어온 디트로이트는 이들의 파산 직격탄을 맞고 더는 버티지 못했다.

    1950년대에 200만 명에 달하던 디트로이트 인구는 현재 70만 명. 디트로이트 가정의 평균 수입은 미국 평균(4만9000달러)의 절반을 겨우 넘는 2만8000달러에 불과하다. 2011년 기준 빈곤층 비율은 36%에 달한다. 두 집 건너 한 집꼴로 빈곤층인 셈이다.

    시 재정도 구멍 나 2006년에 공무원 수를 1만8000명에서 1만2000명으로 줄였다. 가장 먼저 줄인 것은 경찰 인력. 디트로이트 경찰의 30%를 줄인 결과 범죄율이 더욱 높아지면서 치안 부재 상황을 초래했다. 공무원들은 시의 파산으로 연금을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디트로이트 세수의 38%는 은퇴자의 연금으로 지급되고 있다.

    최근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정부의 지원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현대차 등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도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디트로이트를 빠져나간 자동차 산업 인력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해외 브랜드들은 디트로이트가 위치한 미시간 주가 아니라 다른 주에 공장 자리를 잡고 있다.

    “아직 희망은 있다”

    현대는 앨라배마 주, 기아는 조지아 주에 공장을 지었다. BMW는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앨라배마에 공장을 뒀다. 혼다는 앨라배마·인디애나·오하이오에 공장을 갖고 있고, 닛산은 미시시피와 테네시에 공장을 설립했다. 도요타 공장은 인디애나, 켄터키, 미시시피, 텍사스에 있다. 이들 주 정부가 적극적으로 유치전을 편 결과다. 미국 차 회사들이 디트로이트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포드는 한때 디트로이트 인근 근무 인구가 10만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디트로이트는 끝없이 추락할 것인가.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시내 중심가의 웨스틴 북 캐딜락 호텔 직원은 “디트로이트의 위험이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범죄는 시 외곽의 버려진 집과 건물 주변에서 주로 일어나는데도 마치 시 전체가 우범지대인 것처럼 알려졌다”고 항변했다.

    호텔 직원의 말을 듣고 시내 곳곳을 유심히 살펴보자 첫눈에 못 본 활기가 느껴졌다. GM이 위치한 르네상스 센터는 여전히 잘 정리돼 시민들을 반기고 있었고, 나란히 선 메리어트 호텔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볐다. 캐나다가 지척에 보이는 강변에선 디트로이트 시민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강가에선 흑인 예비 부부의 웨딩 촬영이 한창이었다.

    디트로이트는 흑인 음악의 산실과도 같은 모타운 레코드가 자리 잡은 도시다. 모타운은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보이즈투멘, 라이오넬 리치, 마빈 게이, 다이애나 로스 등 뛰어난 흑인 뮤지션들을 배출한 레코드 레이블. 그래서인지 디트로이트의 흑인들은 ‘모타운 시민’답게 어디서나 노래와 춤을 즐겼다. 늦은 시간에 들른 시내의 바는 마감 시간인 11시가 넘도록 흥청거렸다. ‘디트로이트에서 밤에 술집을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은 적어도 이곳엔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시의 파산 소식과 상관없이 젊은이들은 저마다 나이트 라이프를 즐겼다.

    디트로이트에 연고를 둔 메이저리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홈구장 코메리카 파크 인근도 활기가 넘쳤다. 이 팀은 승승장구하며 불경기에 지친 시민을 위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월드시리즈에 진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우승을 놓고 격돌한 끝에 아깝게 져 2위를 차지했다. 코메리카 파크 인근 상점들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혔다. 근처의 폭스 시어터도 간판에 불빛을 반짝이며 관객을 맞았다.

    디트로이트 시는 최근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4’ 촬영장을 유치했다. ‘트랜스포머4’는 영화의 특성상 ‘때려 부수는’ 장면이 많아 시내에 빈 건물과 공터가 많은 디트로이트가 적격이었다. 세트장은 중심부인 그랜드 서커스파크 옆 6~7개 블록에 이르는 지역에 만들어졌다. 한 스태프는 “파산한 시 경제에 도움을 주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세계 5대 모터쇼

    이 영화에는 인근 지역의 아시아계 교민들이 단역배우 등으로 출연하고 있다. 많은 수의 제작진이 디트로이트에서 먹고 자고 물자를 소비한다. 여러 나라 취재진도 불러들여 디트로이트 세트장을 알렸다. 필자도 세트장 취재를 위해 왔다가 밖에서 얘기하는 암울한 디트로이트의 모습과 달리 활기 넘치는 디트로이트의 이면을 보게 됐다. 한 교민은 “미시간 주에는 미시간대, 미시간주립대 등 세계적인 대학이 많아 교육 때문에 미시간에 유입되는 인구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모터쇼 또한 지역경제에 숨통을 터주는 중요한 이벤트다. 자동차 산업이 쇠락한 이후에도 모터쇼는 디트로이트에서 계속 열려 자동차 산업 본고장의 상징성을 유지하고 있다. 1907년 시작된 디트로이트 북미국제모터쇼는 파리, 도쿄,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모터쇼와 함께 세계 5대 모터쇼로 통한다. 특히 디트로이트 모터쇼는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신차를 선보이는 1월에 열리기 때문에 그해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를 가늠해볼 수 있다. 모터쇼는 전 세계 취재진은 물론 북미 자동차 마니아들을 끌어 모으는 디트로이트의 달러 박스나 마찬가지다.

    디트로이트 시의 재정난에도 올해 모터쇼는 성대하게 열렸다. 30여 개 메이커가 50여 종의 신차를 공개했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BMW, 벤츠, 도요타 등이 부활 조짐을 보이는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 프리미엄 차량을 대거 발표했다. 시 정부는 파산 신청에도 불구하고 매년 모터쇼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터쇼를 주관하는 디트로이트 자동차딜러협회 로드 알버츠 이사는 자동차 전문지 인터뷰에서 “모터쇼는 디트로이트 시가 스스로 부채 부담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최근 다른 주 거주자와 중국인들이 디트로이트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고 있는데, 이는 디트로이트의 재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다. 디트로이트에 숙련된 인력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는 사업가도 있다. 디트로이트의 파산 선언이 곧 도시의 종말을 뜻하는 건 아니다. 디트로이트는 새로운 비상을 위해 조금씩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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