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경식 청와대 민정수석.
박 대통령의 평소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이 같은 비서실 중폭 교체는 생각 밖이다. 여권 내에선 비서실장과 해당 수석들이 국정운영 구상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으로 평가한다.
정무수석은 이정현 홍보수석의 자리 이동으로 공석이었으니 인사 수요가 있었다. 최순홍 전 미래전략수석은 박근혜 정부의 화두인 창조경제의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성재 전 고용복지수석은 핵심 어젠다인 일자리 창출 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파악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허태열 전 실장과 곽상도 전 민정수석의 경질 이유다. 허 전 실장의 경우 9명의 1기 수석비서관 가운데 4명을 교체하는 마당에 비서실 수장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휘책임을 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허 전 실장을 중도 낙마시켜 비서실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일부 수석들을 그와 동반 사퇴시켰다는 말도 청와대 주변에서 나온다. 허 전 실장은 대통령비서실을 이끌면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허 전 실장과 곽 전 수석이 청와대 민정라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많다. 이로 인해 박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됐다는 것이다.
허태열·곽상도 경질 진짜 이유
민정수석실은 인사검증에 실패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미국 성추행 사건 때는 청와대 참모 감찰 권한이 있는 민정수석실의 어설픈 조사로 의혹을 증폭시켰다. 여기에다 곽상도 전 민정수석은 직속 부하인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과 인사검증 시스템 구축 문제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곽 전 수석은 청와대 인사 시 교체대상 1순위로 꼽혀오다가 이번에 허 전 실장과 함께 물러났다는 이야기다.
곽 전 수석의 경질 배경을 놓고 다른 해석도 나온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국회 국정조사가 실시되고 거리에서 촛불집회가 열려 ‘박근혜 하야’ 구호까지 나오는 상황을 만든 데엔 곽 전 수석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 사태는 6월 14일 검찰의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의혹 수사 결과 발표로 악화됐다.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라 심리전단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인터넷에서 정치·대선 관여 활동을 한 것으로 보고 공직선거법상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조항과 국정원법의 ‘정치관여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원 원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또한 검찰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 과정에서 축소·은폐를 지시했다며 김 전 청장을 공직선거법과 경찰공무원법 위반, 형법상 직권남용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당초 검찰은 이런 혐의로 원세훈 전 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했으나 황교안 법무장관의 반발에 밀려 불구속 기소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원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한 것은 박 대통령에게 당장 타격이 됐다.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야권은 국정원의 조직적 대선 개입이 확인됐다면서 국정조사를 요구했고 결국 장외투쟁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내심 채동욱 총장 체제의 검찰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다 검찰을 사실상 감독하고 통제할 책임이 있는 민정수석실로 불똥이 튀었다. 정부 사정라인에서 핵심 역할을 한 적이 있는 A씨는 “곽 전 수석은 ‘좌파 검사’가 수사팀에 들어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해 검찰의 수사가 정권에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만든 간접 책임이 있다. 그 점이 이번 문책성 교체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A씨가 지목한 ‘좌파 검사’는 국정원 사건 수사 주임검사인 진재선 검사다. 진 검사는 서울대 법대 92학번으로 PD(민중민주)계열 운동권 출신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단체인 ‘사회진보연대’의 후원금 모금에도 참여했다.
검사 출신으로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위원인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국정원 수사 결과 발표 직후 “검찰이 쓴 공소장을 보고 경악했다. 공소장을 쓴 주임검사는 운동권 출신인데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사태”라고 했다.
결국 허태열-곽상도 라인이 검찰 쪽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정권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단, 두 사람을 전격 경질하고 검찰총장 출신인 김기춘 전 의원과 홍경식 전 서울고검장을 후임에 앉혔다는 게 얼개다. 박 대통령은 김-홍 라인 구축 다음 날 ‘비정상의 정상화’와 ‘공직기강’을 거듭 강조했다.
안기부 ‘특보팀’ 前歷 논란 일 듯
김 실장과 홍 수석은 사법시험 기수가 채동욱 검찰총장보다 각각 22년, 6년 빠른 대선배다. 따라서 두 사람의 등장이 청와대의 검찰 견제, 나아가 장악력 강화 포석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전임 허태열 실장은 행정관료와 정치인 출신이다. 곽상도 수석은 검찰 출신이기는 하나 사시 25회로 채 총장보다 1회 후배인 데다 검사장에 오르지 못하고 부장검사에 그쳤다. 검찰 지휘부와의 소통, 조율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경식 민정수석은 당장 검찰을 장악하는 데 총대를 멜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부터 청와대가 채 총장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일부 검찰 간부를 대상으로 인사 조치를 단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검찰총장은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돼 있다.